파도 - 기획 29주년 기념 특별 한정판 버지니아 울프 전집 2
버지니아 울프 지음, 박희진 옮김 / 솔출판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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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에서 "등장인물은 여섯 사람이면서 한 사람"이라고 울프는 말했다. 여섯 사람이자 한 사람인 등장인물은 울프의 친구들이기도 하지만, 울프 자신들이기도 하다. 울프가 일기에 썼던 말을 하기도 하고, 간간히 울프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한다. 수전은 몽크스 하우스 정원의 울프를 닮았다. 고전문헌학 교수 네빌은 울프가 마다한 기득권층의 인생을 사는 인물이지만, 네빌이 주머니 속의 '이력서'를 만지작거리면서 자기의 가치를 불안한 듯 가늠하는 모습은 울프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우리는 저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는 이 의미심장한 생각은 클러리사 댈러웨이의 생각이기도 했다.


"이 사람은 지금 이러니까 이런 사람이고 저 사람은 지금 저러니까 저런 사람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댈러웨이 부인> 중에서


울프가 자신의 작가 인생의 상당 부분을 바친 작업은 그런 라벨들을 해체하는 작업, 곧 누군가를 '이런 사람' 또는 '저런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데 수반되는 허위를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파도>의 등장인물들이 어느 차원에서 "모두 하나"라면, 화자가 바뀌는 순간을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모두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진다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말하는 내용은 달라도 말하는 리듬은 똑같다.


"내가 쓰고 있는 글은 플롯을 따르는 글이 아니라 리듬을 타는 글이다."

-1930년 8월 28일 에설 스미스에게 쓴 편지.


p153~154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 알렉산드라 해리스,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버나드, 수잔, 로우다, 네빌, 지니, 루이스, 여섯 인물의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 <파도>는 독자들에게 버지니아 울프의 높은 장벽을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 전통적 소설 요소인 플롯, 시간, 배경, 사건 없이, 오롯이 여섯 인물의 내적 독백으로 이루어진 소설은 무대 위에서 여섯 명의 배우가 관객을 향해서만 대사(방백)를 던지는 묘한 연극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영혼의 자서전'이라고 불리는 이 소설은 소설보다는 희곡을 연상시키고, 그러면서도 대사의 뉘앙스와 함축적인 의미에서 시를 떠올리게 한다.






또렷하게 그려지는 서사없이 인물들이 던지는 방백을 쫓아가는 일은 힘겹다. 하지만 울프의 작품에서 종종 느끼듯 소설의 후반부에 다다르면 인생의 시작에서부터 끝, 유년에서 죽음에 이르는, 지난하면서도 거대한 생의 발자취를 더듬더듬 짚어낸 듯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하나의 인생을 살아내고 그 의미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죽음에 다다른 인물의 심정이 되어. 해가 떠올라 중천에 이르고, 서서히 기울어 어둠에 잠겨버리듯, 월요일 다음에 화요일, 화요일 다음에 수요일이 오듯, 해변으로 달려온 파도가 부서지는 순간 뒤이어 또 다른 파도가 달려오듯,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삶이고,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그 끝에 있음을 소설은 색다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월요일 다음에는 화요일이 오고 그다음에는 수요일이 온다.

그런 식이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차이가 생긴다. 뭔가 방의 모습이, 뭔가 의자의 배열 방식이 어느 날 밤 그것을 넌지시 알려올 것이다."

p.286



"‘늙었군’이라고. 그러나 그녀는 잘못 알았다. 나이 때문이 아닌 것이다. 물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떨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시간이 사물의 배열을 한 번 더 흔들어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까치밥나무 잎의 아치에서 좀 더 넓은 세계로 기어나온다. 사물의 진정한 질서가-이것은 우리의 영원한 환상인데-이제 와서는 분명해진다. 이리하여 일순간에 거실에서 우리의 삶은 하늘을 가로지르는 태양의 당당한 행진에 순응하는 것이다."

p.286~287



"화요일이 월요일에, 수요일이 화요일에 이어진다. 어느 것이나 꼭 같은 잔물결을 퍼뜨린다. 생존은 한 그루의 나무같이 연륜을 더한다. 나무같이 잎을 떨어뜨린다."

p.298





길게 이어지는 독백은 자주 누구의 것인지 잊어버리게 한다. 때로는 다른 인물의 것으로 착각한 채 읽혀지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이름으로>에 실린 해석처럼, 누가 한 말인지 헤아리는 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여섯 인물의 목소리는 버나드의 목소리로 통합되니까. "인생은 하나가 아니니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버나드인지 네빌인지 루이스인지 수잔인지 지니 혹은 로우다인지 늘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버나드의 말처럼, 한 사람의 내면에는 여러 개의 페르소나와 정체성이 뒤엉켜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고 관계를 맺으면서 지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의 인간은, 그 자신 한 명, 단 하나의 정체성으로 이루진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주요 인물들과의 불협화음, 협화음 속에 형성되기 마련이다. 우리의 정체성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그 영향 속에서 변형, 통합하며 축소와 확장을 거치는 유동체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풍성하고 창의적인 삶이란, 하나의 정체성으로 확정짓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정체성을 오가며 향유할 수 있는 데서 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도대체 뭔가? 라고 묻는다. 이것인가? 아니야, 나는 저것이야. 특히 지금 방에서 나오고, 사람들은 계속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자갈길을 혼자서 발소리를 들으며 걸어 나아갈 때 오래된 예배당 꼭대기에 숭고하고 초연하게 달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나는 단순한 하나가 아니고 복잡다단한 여럿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져. (…) 내가 몇 개의 전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모르지. 버나드의 역할을 번갈아 대신할 몇 사람 사이를 들락날락해야 하는 것을."

p.82



"(수잔)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이 문에 기대어 세터 종의 개가 원을 그리면서 냄새를 맡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는? 때때로 생각하지(나는 아직 스무 살도 안 되었어). 나는 여자가 아니라 이 문 위에, 이 지면 위에, 내리쪼이는 빛이 아닌가 하고. 나는 다양한 계절이라고 생각해, 일월, 오월, 아니면 십일월이라고, 진흙, 안개, 여명이라고. 나는 여기저기 던져지고, 부드럽게 표류하거나 사람들과 잘 섞이질 못해."

p.104



"나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똑똑히 써놓자) 타인의 눈이 비춰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나 자신이 무언지 도통 알지 못하겠는 거다.(...)

그들과 함께 나는 다면체가 되는 거야."

p.124~125



"인생은 하나가 아니니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버나드인지 네빌인지 루이스인지 수잔인지 지니 혹은 로우다인지 늘 확실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 상호 간의 접촉은 이렇듯 불가사의한 것이야."

p.296



"이제 묻노라,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버나드, 네빌, 지니, 수잔, 로우다, 그리고 루이스에 관한 이야기를 해왔지만 나는 그들 모두인가? 별개의 존재인가? 모르겠다. 우리는 다 같이 여기에 앉아 있었지만 퍼서벌은 죽었고, 로우다도 죽었다, 우리는 흩어져서 지금 여기에 없다. 하지만 우리를 갈라놓는 어떤 장애물도 찾아볼 수 없어. 나와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도 없어.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너다’라고 느꼈다. 우리가 그토록 대단하게 생각하는 차이도, 그렇게나 열정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개성도 정복되었다."

p.303~304





소설의 전체적인 윤곽은 여섯 인물의 유년기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삶을 다룬다. 버지니아 울프가 전작들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천착했던 주제들- 순간에의 몰입(어떤 순간을 고정시키려는 노력),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깊고 너른 사유가 인물의 독백, 특히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버나드를 통해 흘러나온다. 그러한 사유를 태양이 뜨고 지는 하루라는 자연의 흐름에 빗대어, 유년기에서 이십대, 삼십대, 중년에서 초로로 이어지는 삶의 주요 장면을 이미지로 쌓으며 풀어낸다. 한 장, 한 장에 그려져 한 권의 책 속에 쌓인 이미지의 산은 삶이라는 총체를 담고 있다.



하지만 태양은 지고 어둠에 잠기고 마는 하루의 흐름처럼, 서서히 떠올라(유년기) 찬연하게 빛나다(청장년) 빛이 길게 드리우는 오후를 거쳐(중년), 이그러져(노년) 지고 마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태양의 흐름에 순응하듯 누구나 죽음이라는 마지막에 닿는다. 하지만 버나드의 죽음 이후에도 "일식 이후의 햇빛이 세계에 돌아"온다. 또 다시 내일의 태양이 솟아오르고, 파도의 흐름은 지속된다. 하나의 존재가 죽음을 맞더라도 인류 전체의 삶은 지속된다. 거기에 삶의 영속성과 재생성이 있다고, 부단한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것이 인류 전체의 거대한 삶이라고 저자는 말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그 통합적인 삶이 '파도'의 이미지로 멈추지 않고 달려온다.





"파도는 해변에 부서졌다."



소설의 마지막에 남겨진 한 문장에 대한 해석은 두 갈래로 나뉘어진다. 죽음에 "정복당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몸을 던지겠다는 버나드의 다짐처럼 부서져도 다시 살아나는 파도에서 죽음을 넘어선 무언가, 영속적인 무언가를 떠올려볼 수 있다. 그런데도, 하나 하나의 파도는 결국 부서지고야 만다는게 기정사실이다. 거기에는 인간 개개인의 운명은 하나의 파도처럼 해변에 다다라 부서질 수 밖에 없다는 쓸쓸함이 드리운다. 개인의 삶이란 부서지는 파도처럼 유한하고 허무하지만, 과거와 미래, 관계 속으로 이어지며 영속되는 것이라고 울프는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버나드의 것으로 응집된 목소리는, 죽음을 지나 버나드 영혼의 읆조림으로 나아간다. 그렇다, 이 소설은 '영혼'의 목소리가 풀어내는 이야기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 목소리의 회상이었을지 모르겠다. 모든 독백이 실은 영혼의 목소리였을지도. 죽음 이후 남게 될 '영혼'이,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내려다보면 이렇게 하나의 책으로 집약될 수 있을까. 소설에서처럼 영혼이 죽음 이후 즉시 소멸하는게 아니라, 잠시 머물며 삶을 더듬는 '영혼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나만의 책에는 어떤 독백이 들어설 수 있을까.



"숲은 사라져버렸다, 대지는 그림자의 광야였다. 겨울 풍경의 조용함을 깨뜨리는 소리는 단 하나도 없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일식 이후의 햇빛이 세계에 돌아오는 걸까? 기적적으로. 약하게. 얇은 줄이 되어. 그것은 유리 새장같이 매달려 있다.

(…)

이렇듯 풍경은 내게 돌아왔다, 그리하여 색이 있는 파도 같은 들판이 눈 아래에서 흔들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차이가 있다, 즉, 나는 보지만 내 모습이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고 걸었다, 예고도 없이 왔다. 옛날의 외투, 옛날의 반응은 모두 떨어뜨려 버렸다. 소리를 되돌려 보낼 힘도 없는 손을 떨어뜨려 버렸다. 망령같이 야위고, 걸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그저 느끼기만 하면서 나는 아무도 발아보지 않는 세계를 혼자 걸었다, 새로 피어난 꽃들을 스치고 지나가며, 어린애처럼 한 음절밖에 말하지 못하면서, 문장을 만들어 숨을 장소도 없이-그렇게나 많은 문장을 만들어온 내가, 항상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의 교제를 꾀했던 내가, 덩그러니 혼자서, 언제나 텅 빈 난로나, 금색 손잡이가 흔들리고 있는 찬장을 누군가와 함께 해온 내가."

p.300~302



"이 식탁에 앉아 나의 인생 이야기를 양손 사이에서 만들어내어 하나의 완전한 물건으로 당신 앞에 내어놓으려고 할 때 아득하게 멀리 지나가 버리고, 깊이 묻혀버린 여러 가지 일들을, 이 인생 저 인생 속으로 파고 들어가 그 일부가 된 일들을 회상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꿈,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 동거인들, 밤낮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늙고, 생기없는 망령들도, 자면서 몸을 뒤척이고, 혼란스러운 절규를 내뱉고, 환영의 손가락을 내밀고 도망치려 하는 나를 부여잡는 망령들-자신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림자들, 태어나지 않은 여러 개의 나 자신들도."

p.304





끝없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여섯 인물이 읊조리는 방백이 밀려온다. 파도의 리듬에 잘 섞여들지 못하면 파도의 타격에 정신을 잃기 쉽다. 하지만 순간, 순간, 운 좋게 파도의 리듬에 올라탄다면 대사가 풀어내는 풍성한 이미지와 사유 속에 빠져들어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힘을 빼고, 때로는 소리내어 읊조리며, 천천히 파도에 올라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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