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진실 -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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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세이로 현대 경제이론의 허구성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다. 

  경제 분야이지만, 분석적이지 않고 가벼운 수필류에 가깝다. 저자의 지적에 공감한다.

노령의 저자가 이제까지의 자신의 경제관에 비추어 크게 분석적이지 않게 쉽게 그냥 써 내려간 것 같다.  참으로 심각한 내용이지만  부담없이 읽을 수 있다.

 불만인 것은 작은 판형에 큰 활자로 100쪽 밖에 안 되는 책 값을 1만원으로 책정했다는 것, 역시 (출판사의) 사기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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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행법과 나의 체험 - 불교신행총서 13 불교신행총서 13
우룡 큰스님 지음 / 효림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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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본문 몇 군데 읽다가 바로 구입했는데, 글쎄...아니다. 서점에서 서서 볼 때, 몇 군데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발췌독의 허점이다. 그 몇 군데 마음에 드는 구절도 앞 뒤 맥락에 따라 읽어보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공부할 때 한 가지로 끝까지 밀고 나가라며 화두와 마음 공부하는 부분이 와 닿았는데, 읽어보니 주문을 열심히 외우면 그 자체 효력이 있다거나, 선배 스님들의 신통력이 대단했다거나, 자신의 개인 체험을 주로 말하고 있다. 일독의 가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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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으로 읽는 법 이야기 - 법정에서 소크라테스와 공자를 만나다
김욱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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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신문의 책 소개를 통해 주저없이 선택했다. 이전에 읽은 저자의 『마키아벨리즘으로 읽는 한국 헌정사』(책세상 刊)에서 통속적으로 오해하는 마키이벨리의 정치론을 비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이 책을 선택한 것도, 법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생각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인데, 저자는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상식적’인 법 이해를 교정해 주고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책머리에 밝혔듯 “천부인권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인간들의 권리를 향한 역사적 투쟁을 이해한다는 말이기도 하다”로 요약할 수 있다. ‘역사 속에서 계급적 이해관계로 싸웠고, 그 승리자가 정의의 이름으로 세상을 지배해왔으며, 공짜로 얻어진 법적 정의는 없다’는 것이다. 


1장에서 남의 물건을 훔치는 절도를 금하는 법은 결국 가난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법은 이미 그 자체로 강자의 법일 수 밖에 없음을 여러 가지로 보여 주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법치의 엄밀한 적용인 기계적 법치주의가 정의로운 것 같지만 법 자체에 내재된 불평등을 개선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고, 그렇다고 인치주의적 재량을 허용하면 권력자의 법으로작동할 위험이 있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적 법치주의’라는 형용모순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공자의 예치(禮治)가 “예는 서민에게 미치지 못하고 형은 대부에 이르지 않는다(예기)”에서 알 수 있듯 노예제 지배계급의 특권옹호와 닿아있고, 한비자는 신흥 봉건 세력을 대변하는 법치를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구약 성서와 영화의 예를 등을 들어 법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금지하는 행위를 처벌의 수단으로 삼는 동태복수의 문제점을 제시한다.

 2장에서는 법이 어떻게 지배계급에 봉사하는지를 인혁당 재판부의 판사와 전관예우의 예 등으로 설명한다. 특히 링컨 부분. 남북 전쟁은 미 연방의 해체를 막아 미 제국주의의 기초를 닦은 전쟁이기에, 링컨의 업적은 이 부분이지 노예 해방이 아니라는 것. 노예 해방 위인으로서의 링컨은 허구적이고 조작되었음을 지적한다. 남북 전쟁은 남과 북의 관세 문제로 인한 경제적 충돌이며, 오히려 흑인 노예에 대한 링컨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지적하고 있다.

 3장은 현대의 법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를 설명한다. ① 고대 지배계급은 ‘신의 뜻’으로 노예 사회를 정당화했고 ② 중세 지배계급은 ‘기독교’로 봉건 사회를 정당화했다면 ③ 부르주아들은 ‘이성’으로 자본주의 질서의 정당화를 추구했는데 이것이 근대적 법치주의 탄생 배경이라는 것이다.

 로크의 자연법론과 사회계약론이 그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확립에 절대적이었으며, 역설적이게도 그 자연법론이 자본주의 지배계급을 압박할 수 있는 ‘양날의 칼’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몽테스키외가 주창한 삼권 분립 정신도 사실은 군주정에서 귀족의 권력을 연장시키기 위한 술수였다는 것. 그는 대의제을 말하지만 이는 엄밀한 의미에서 민중의 권력 소외와 다르지 않다는 것. 역사상 직접 민주정을 주장하던 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대의제로 돌아서는 권력자의 기만을 여러 예로서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현대 정체(政體)에서 직접 민주주의가 불가능하니 대의제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사실 지배계급의 기만이며, 국민소환, 국민투표, 국민발안 등의 직접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여 대의제를 보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4장에서는 역사속에서 민중의 법이 입법, 행정, 사법에서 어떻게 진보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① 입법 -19세기 초 1일 18시간 노동을 위한 입법운동에서부터 끊임없이 자본과 싸워 온 노동 입법의 예를 보여준다. ② 행정 -입법을 거쳐 법이 문장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현실 규범이 되지 않고 또 끊임없는 투쟁이 있어 왔음을 보여준다. 1870년에 주어진 미합중국 ‘시민’의 참정권을 ‘여성’에게는 1920년에야 서서히 실행되기 시작했고, ‘흑인’은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 1964년에야 집행이 시작되었음을 설명한다. ③ 사법 - 법적 정의가 절대 진리라면 왜 대법원의 판례 변경이 일어나는지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르크스에 의하면 ‘동등한 권리사이에는 힘이 사태를 결정 짓’기에 노동시간은 밀고 당기는 힘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으로, 법은 계급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공산주의 윤리론과 성경의 유사점을 지적하며 저자가 말하는 명언 하나! “마르크스의 이런 꿈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간단히 물리쳐버릴 수 있다면, 예수의 꿈도 간단히 물리쳐야만 할 것이다. 간통한 여인의 에피소드를 통해 강제규범이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도덕 규범이 지배하는 이상사회를 설파하려 했던 ‘예수의 꿈’을 말이다.”(222쪽)

5장에서는 우선, 무죄추정의 원칙이 지켜져야 하며 이는 나쁜 강자보다는 좋은 약자를 위한 장치임을 구체적 예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명제가 어떻게 독재자에 의해 날조되어 지배자의 통치에 전용되었는지를 길게 설명한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그의 철학적 신념에 따라 민중에 의한 직접 민주정에 우호적이지 않았다. 정치적 반대파에 의해 정치재판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의 오점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즉 ‘잘못된 기소에 의한 배심원들의 부당한 판결’을 자신의 죽음이라는 준법을 통해 입증하려는 저항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법은 ‘존재의 학문’이 아니라 ‘당위의 학문’이기에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정구 교수 사건’으로 설명한다. 또한 법 ‘실증주의자들의 법 개념’은 있는 그대로의 법규범만을 연구하고 그 법이 좋은가 나쁜가는 정치의 영역으로 미루어 놓는데 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한다. 이와 대비되는 ‘마르크스식의 고전적 법 개념’은 영구 불변의 법적 정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법이란 지배계급의 의지일 뿐이다. 그럼에도 피지배계급은 법을 일반 정의로 착각하고 그 지배계급의 정의 실현에 동의한다. 이렇게 되면 법은 동의를 통해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즉 허위의식이 된다. 끝으로 법은 모순적인 현실의 반영이며, 법의 발생, 적용, 진화의 총과정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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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들지 않는다는 것 - 하종강의 중년일기
하종강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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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강의 책은 재미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후, 그의 글들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틈틈이 읽어도 쉬운 책이다. 한겨레 칼럼-그의 강연- 책『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으로 연결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따뜻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신변잡기적인 단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군데군데, 그 특유의 유머가 있어 키득거렸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토요일 밤 책을 읽다가 그의 홈피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고는 무척 놀랐다. 노동운동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아주 잘 정리된 글들, 사진을 구경하느라 새벽 4시까지 돌아 다녔다. 특히 자녀들과의 관계짓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나의 행태를 또 반성했다. 

  감히 말하면, 그 어떤 우아(?)하거나 또는 고급한(?) 이론서보다도,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 내게 준 추동력이 너무 크다.  10년 쯤 전에 전태일 평전에 눈시울 적시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만  나의 부채감을 탕감 받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불의한 현실을 대면하고, 재작년 직장에 새롭게 노조가 결성되었고 대표를 맡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작년 봄에 그의 책을 읽었는데, 비등점을 이미 초과해버린 나는 하종강에 의해  더욱 촉발되었고, 내 삶은 완전히  터닝 포인트해 버렸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은 나의 정체성을 노동자로, 그리고 나의 계급의식을 확고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까운 동료에게 5권 사서 한 권씩 드렸다. 심각하게 읽는 사람, 읽어도 밋밋한 사람, 안 읽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또 동지를 얻기도 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먼저 권한다. 강추!) 
 나의 계급의식을 일깨운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하종강이었다.^^  마르크스의 통찰에 감탄은 했어도, 노동자는 이해의 대상일 뿐, 내가 노동자임을 깨닫지는 못했다. 이렇게 먹물 먹은 나 같은 자들의 자기 개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마치 개종(改宗)의 차원이다. 내가 하종강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그 전에 내 직장의 부정과 불의에 분노하고, 우리 사회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누가 성찰하는가? 왜 나보다 더 처절하게  ‘당하는’ 다른 사람들은 개종하지 못하는가?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부르디외의 상징폭력 개념, 미셀 푸코의 권력 담론이론 등등을 내세워도 현실은 막막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그의 강연을 듣고 난 후, 회식 자리에서 그와 대면하며 밥을 먹으며, 우리 사회 노동 활동과 의식에 대해, 답답한 마음에,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질문을 던져도, 그는 웃으며 자분자분 내 질문을 받아 주었었다. 그는 ‘크게 보고 멀리 보자’고 답해 주었었는데, 당시에는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노조 일을 맡아 하면서 이제야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그래서 변하겠는가?” 나는 대답한다. “내 당대에 승리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딸이나, 내 딸의 딸이 살 세상은 이보다는 좀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으로 한다. 내 딸이 ‘그 때 아빠는 뭐했어요?’라고 물으면 그래도 할 말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지금 당장은 세상을 변화 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자세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멀리 보면 우리 사회는 분명 우리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함께 가자!” 
  나는 우리 사회가 ‘경제, 경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김구 선생이 ‘이제 우리 민족도 이만하면 먹고 살만한 사회이니 이제 문화국가를 만들자’라 한 것이 당시 좀 오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지금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먹고 사는 모습을 본다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이제는 좀 우리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도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아니 너무 늦지 않았는가?  … 우리 사회는 미쳤다.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먹고 살아야, 이제 먹고 살만큼 되었으니, 이제는 좀 인간다운 사회를 고민해 보자라고 할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거리만 나오면 다른 모든 가치는 함몰되어 버리고 오직 ‘먹는 것’의 블랙홀로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서민으로 박봉에 넉넉하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그래도 행복하다. (너무 이기적인가?)

  내 가족과 친지 중에 '전문가-고소득자들'로 적어도 쁘띠-부르주아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더 걱정하고 먹고살기 힘든 사회에 분노한다. 자신들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이기심을 비판한다. 듣고 있으면 속이 불타고, 한 마디 거들면 집중 포화를 맞는다. 그들은 내게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 ‘아직 철들지 않았구만’하는 딱 그런 표정들을 짓는다. 딱 그런 표정^^. 그 상황에서 ‘그것이 누구의 현실인지, 철듦이 무엇인지’ 나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에 불타고 있는 그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더 분노하기 때문이다. '완죤 조중동 스타일'에 대한 내 이견도 역시 진도가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철 없는'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들 전문가에게는 교화의 대상일 뿐이다. 이는 한편으로 계급의식이겠지 한다. 그러나 더 깊은 심급은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에 기초한다. 오랜동안, 많이 빼앗겼던 자들의, 자기 몫 찾기라고 생각한다. 마치 신분제도 철폐와 같은 양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노동운동의 본질은 사실상 ‘인간화’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억압과 차별을 그대로 두고 ‘휴머니즘’을 말할 수 있는가?

  전문 지식 기술자들은 추상적 담론과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한다. 이 땅의 가진 자들은 자신의 계급 의식을 주류 의식으로 위장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굴종을 깨닫지도 못한다.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언행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전혀 성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옳바르게 분노하는 법을 모른다. 분노가 어떻게 사랑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웃긴다

 사랑하는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이보다는 더 아름다워야 한다. 자신의 딸이 차별과 억압과 폭력의 그늘 아래 있는데, 당신은 나서지 않겠는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여성/장애인/동성애자’등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딸이 노동자로서 착취당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차별 받지 않고, 또 장애인이나 동성애자가 되더라도 폭력에 희생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를 이해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딸, 그리고 직장의 동지들, 그리고 이 땅 곳곳에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나도 철들지 않을 것이다.

하종강 동지(라고 부르고 싶다)에게 감사하며,

봄 날, 나도 꽃 피고 싶어 환장한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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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 풍월당 주인 박종호의 음악이야기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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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내밀한 음성 엿보기


  음악은 논리적 설명이나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전공자인 나 같은 사람은  그럴 능력도 안 되거니와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삶과 얽힌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물리적 음향이 청자들의 경험을 일치시키지는 않는다. 즉 어떤 한 음악을 같은 장소에서 듣더라도 각자의 의식은 제각각 반응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인 것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음악적 분석이 아니라 음악적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박종호는 책 제목을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이라 하였다. 그렇다! 음악은 ‘나의 체험’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자신의 편견이 배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런 개인적 편견은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전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편하게 읽었다. 군데군데 유용한 음악 정보도 많지만 저자의 개인적 취향이 때로 나와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내게 또 하나의 유용한 정보가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취향에 기대어 나의 묵은 취향도 다시 솔솔 피어나는 흥취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 소개한 쇼팽 1번 협주곡에서 백건우를 내세우는 것이다. 나로서는 박종호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또한 책 뒤의 ‘추천 음반’에서 짐머만의 연주를 최고로 꼽는 것 역시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들다. 이 책을 보고 백건우의 음반과 실황연주를 찾아 들었고 역시 그의 소리는 시적이고 영롱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을 더 좋아한다. 대개 최고 명반으로 꼽는 루빈스타인보다 나는 언제나 아르헤리치에 손이 간다. 이 역시 지극히 나 개인의 취향 문제인 것이다. 잠깐 나의 개인적 체험을 말해야겠다.

  젊은 날, 여느 청춘들처럼 한 여자를 만났고 단 몇 시간의 만남이 있은 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2년 후 우리는 우연히 거리에서 다시 만났고, 그 후 우리는 줄곧 함께 했다. 그 아름다운 시절, 우리는 쇼팽의 1번 협주곡을 가장 대중적인 명반인 아르헤리치와 아바도 협연을 함께 들었다. 도서관과 거리에서 함께 듣고, 또 들었다. 이는 ‘그래 그 음반도 좋았지!’가 아니라 아르헤리치의 쇼팽은 우리, 나와 아내의  젊은 날 열정과 동의어인 것이다. 어떻게 아르헤리치의 쇼팽을 빼고 우리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음악이란 ‘나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아르헤리치의 쇼팽이라서 보다는 우리의 사랑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아르헤리치의 쇼팽을 듣는 것이리라.

  덧붙여, 그녀에게 가장 먼저 선물한 것은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이었다. 프리츠 분더리히로 듣던 제5곡 ‘내 영혼을 담으리’에서 우리는 묵시적 믿음들을 키워 갔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음반을 선물할 때, 지금도 아내는 분더리히가 부른 시인의 사랑은 더 이상 선물 리스트에서 용납(?)하지 않고 있다. 분더리히가 부른 시인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만의 연애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후로는 저자가 추천한 이안 보스트리지 음반을 구입해 지금은 새로운 슈만을 느끼고 있다. 분더리히나 피셔 디스카우에 비해 가을 햇살 같은 청아함을 맛볼 수 있다. 마치 병약한 청춘의 쓸쓸함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망설이는 연인의 풋풋함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음반을 소개 받은 셈이다.

  마찬가지로 박종호의 브람스 교향곡 1번과 3번에 대한 귀도 칸텔리는 무척 생소한 경우이기도 하고, 브람스 4번 교향곡도 저자는 첼리비다케를 권하지만 나는 조지 셀을 무척 좋아한다. 카라얀의 너무 뻔질한 연주에 질려 있었는데, 어느 날 조지 셀의 클리블렌드 연주를 듣고 가슴이 싸~하며 내려 앉던, 그 순간의 감흥을 아직 잊지 못한다. 1악장 현의 도입부부터 내 몸은 부서지기 시작하고, 말라붙은 나무 등걸처럼 처연하고 쓸쓸하게, 그러나 언제나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조지 셀의 브람스. 나는 그 쓸쓸함과 따뜻함을 대책 없이 수긍해야 했다. 지금은 브루노 발터의 브람스를 좋아한다.

  독자와 저자와의 이런 차이는 마치 우리네 삶의 차이만큼 당연하고 또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사실,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글렌 굴드와 안드라시 시프의 바흐 변주곡에 대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모차르트에 대해, 말러의 교향곡에 대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음악이 아무리 개인적 편견을 배제할 수 없다 하다라도 극단의 평가가 나오기는 어려운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런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 공유감은 단지 음반 평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의 음악 정보와 여행에 대해서는 공감을 넘어 질투가, 어쩔수 없이 질투가 …  .

  이 책은 일종의 수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곡가에 대한, 그리고 작품과 연주자, 음악회에 대한 정보로 솔솔한 재미가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가장 큰 재미는 저자에게 녹아 있는 외국 연주의 현장감과 연주자의 정보였다. 작곡가나 곡 정보, 음반 소개서는 이미 여럿 봐 온 터이기에, 그런 류의 정보는 사실 더 이상 특이할 것도 없다. 단지 저자의 여행길을 상상하면 시샘이 날 정도였다. 한 대목을 살펴보자.

  ‘마드리드를 떠난 소형 여객기가 고도를 낮추다가 지중해의 바람과 부딪혀 엄청난 요동을 친다. 곧 짙푸른 바다 가운데 초록색 섬이 나타난다. 마요르카 섬이다. 이제 비행기는 안정을 찾아 마요르카 수도인 팔마 공항에 내린다.(118쪽)’ 쇼팽의 전주곡집을 설명하는 이 도입 부분의 서술 자체가 쇼팽 전주곡집의 변형이자 은유로 느껴진다. 쇼팽과 상드의 애정행각, 건강이 악화된 쇼팽, 빗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음악 혼을 불태우던 쇼팽. 나 역시 이 곡으로 내 젊음을 불태우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저자가 극찬하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로! (여기에서 저자의 나의 선택은 일치한다)

  암울했던 대학 시절, 삶의 즐거움이 현실적으로 부재하던 그 때에, 하굣길 버스 안에서 폴리니로 듣던 전주곡집. LP를 테이프에 녹음하여 듣고 또 들었다. 이는 당시 화염병과 회색빛 낮은 하늘 아래의 풍경과는 상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기묘한 흡입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유약하지 않고 확신에 찬 쇼팽의 열정을 폴리니는 분명하다 못해 차가운 터치로 강건하게 구축해 가고 있다. 그것은 당시의 회색빛 세상과 또 다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자 박종호가 마요르카 섬의 온화한 기후 아래 전주곡집이 탄생한 ‘바람의 집’에서 쇼팽을 갈구한 것이나, 20대 회색 빛 세상에서 내가 만난 쇼팽은 같은 쇼팽이었을까? (여기에서 폴리니에 대한 저자와 나의 풍경화는 거리감이 있다.)

  이에 대해 슈베르트의 ‘겨울 여행’(저자에 의하면 ‘겨울 나그네’가 아니다.-247쪽. 나 역시 ‘겨울 여행’이 훨씬 좋다)의 경험을 짚어 봐야 할 것 같다. ‘겨울 여행’ 24곡을 다 듣고 나면 깊은 상념으로 세상은 완결된 비극으로 다가오곤 했다. 피셔 디스카우로만 듣던 이 곡을 저자의 추천으로 접한 크바스토프의 노래에서는 완결된 비극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애정과 여과된 희망이 느껴진다. 그런 것인가? 내가 보고, 겪고, 들은 것이 전부 다는 아닌 것인가? 내게 ‘겨울 여행’은 비극적 완결성이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저자는 내게 또 다른 여행의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세상은 여기에서, 저기에서,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흘러가는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스페인에서 싸구려 와인 한 잔이면 어떻고 나처럼 동성로 뒷골목 선술집이면 또 어떤가? 라 스칼라에서 레나토 브루손이면 어떻고 내 친구와 함께한 ‘광야에서’면 또 어떤가?  아직도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제 카라얀을 만날 수 없다면,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 필을 그야말로 ‘베를린’에서 들으면 어떨까하듯, 마요르카의 쇼팽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눈앞의 오디오 저 너머로는 과거의 시간과 상상의 공간이 퍼져 나간다.  그래서 이 책은 음악에 접근하려는 입문자에게는 정보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밀한 음성’을 엿보게 하는 재미가 있다. 박종호의 다른 책 ‘불멸의 오페라’를 보라! 그의 현장 체험과 분석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나는 푸치니의 오페라를 들으며 펼쳐 놓은, 그의 책 앞에서 질투의 화신이 된다. 그러나 너무 질투하지는 말자. 나 같은 일상의 소시민이 대부분인 이 땅에, 박종호야말로 비상식적인 생활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상식적인 저자의 즐거움이 무척 탐난다는 것 또한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다시 음악이란 무엇인가? 악보에 기록된 음표들인가? 음과 음의 역동적 관계인가? 우리는 그 어떤 설명보다도 완전하고 뚜렷한 ‘마음속 경험’으로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음악의 의미를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 ‘진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비유적으로 음악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런 류의 설명들은 항상 실패하고 만다. 음악은 다른 비유와 번역을 거부한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면 음악을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 이 책을 ‘읽은 것’이리라. 음악적 감흥은 없고 문자와 그 문자의 상상만으로는 이 책의 즐거움을 절반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음악을 정의할 수 없지만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쇼펜하워의 말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본다. 언어의 관념성으로 인한 애매한 문학, 형태와 색체에 갇혀 있는 미술 등에 비하면, 음악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서 비언어적이고 물질적이며,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적이다. 한 음에서 반응하는 감정의 즉각적 측면에서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에 음악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동경 대상인 것이다.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자의 내밀한 고백이다. 역시 음악을 사랑하는 나에게, 저자는 음악적 동경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저 지중해 푸른빛일수도 있지만, 회한과 연민이 얽힌 내 젊은 날의 풍경을 결코 떠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자세이다. 자, 이 땅의 아름다운 사람들과 다시 함께 들어 보자. 지금, 여기에서, 함께, 모차르트와, 춤을 춰 보자. 기쁘게, 기쁘게, 칸타빌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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