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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 풍월당 주인 박종호의 음악이야기 ㅣ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 1
박종호 지음 / 시공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음악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내밀한 음성 엿보기
음악은 논리적 설명이나 설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비전공자인 나 같은 사람은 그럴 능력도 안 되거니와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음악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삶과 얽힌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물리적 음향이 청자들의 경험을 일치시키지는 않는다. 즉 어떤 한 음악을 같은 장소에서 듣더라도 각자의 의식은 제각각 반응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인 것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음악적 분석이 아니라 음악적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박종호는 책 제목을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이라 하였다. 그렇다! 음악은 ‘나의 체험’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자신의 편견이 배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데, 이런 개인적 편견은 양해를 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너무나 당연한 전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편하게 읽었다. 군데군데 유용한 음악 정보도 많지만 저자의 개인적 취향이 때로 나와 다르다 하더라도, 그것 역시 내게 또 하나의 유용한 정보가 될 뿐만 아니라, 그의 취향에 기대어 나의 묵은 취향도 다시 솔솔 피어나는 흥취를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가령 이런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 소개한 쇼팽 1번 협주곡에서 백건우를 내세우는 것이다. 나로서는 박종호의 평가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또한 책 뒤의 ‘추천 음반’에서 짐머만의 연주를 최고로 꼽는 것 역시 나로서는 수긍하기 힘들다. 이 책을 보고 백건우의 음반과 실황연주를 찾아 들었고 역시 그의 소리는 시적이고 영롱했다. 그럼에도 나는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아바도의 협연을 더 좋아한다. 대개 최고 명반으로 꼽는 루빈스타인보다 나는 언제나 아르헤리치에 손이 간다. 이 역시 지극히 나 개인의 취향 문제인 것이다. 잠깐 나의 개인적 체험을 말해야겠다.
젊은 날, 여느 청춘들처럼 한 여자를 만났고 단 몇 시간의 만남이 있은 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 2년 후 우리는 우연히 거리에서 다시 만났고, 그 후 우리는 줄곧 함께 했다. 그 아름다운 시절, 우리는 쇼팽의 1번 협주곡을 가장 대중적인 명반인 아르헤리치와 아바도 협연을 함께 들었다. 도서관과 거리에서 함께 듣고, 또 들었다. 이는 ‘그래 그 음반도 좋았지!’가 아니라 아르헤리치의 쇼팽은 우리, 나와 아내의 젊은 날 열정과 동의어인 것이다. 어떻게 아르헤리치의 쇼팽을 빼고 우리의 사랑을 말할 수 있겠는가? 음악이란 ‘나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쩌면 아르헤리치의 쇼팽이라서 보다는 우리의 사랑이 아름다웠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아르헤리치의 쇼팽을 듣는 것이리라.
덧붙여, 그녀에게 가장 먼저 선물한 것은 슈만의 연가곡집 ‘시인의 사랑’이었다. 프리츠 분더리히로 듣던 제5곡 ‘내 영혼을 담으리’에서 우리는 묵시적 믿음들을 키워 갔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음반을 선물할 때, 지금도 아내는 분더리히가 부른 시인의 사랑은 더 이상 선물 리스트에서 용납(?)하지 않고 있다. 분더리히가 부른 시인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만의 연애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은 후로는 저자가 추천한 이안 보스트리지 음반을 구입해 지금은 새로운 슈만을 느끼고 있다. 분더리히나 피셔 디스카우에 비해 가을 햇살 같은 청아함을 맛볼 수 있다. 마치 병약한 청춘의 쓸쓸함 같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망설이는 연인의 풋풋함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음반을 소개 받은 셈이다.
마찬가지로 박종호의 브람스 교향곡 1번과 3번에 대한 귀도 칸텔리는 무척 생소한 경우이기도 하고, 브람스 4번 교향곡도 저자는 첼리비다케를 권하지만 나는 조지 셀을 무척 좋아한다. 카라얀의 너무 뻔질한 연주에 질려 있었는데, 어느 날 조지 셀의 클리블렌드 연주를 듣고 가슴이 싸~하며 내려 앉던, 그 순간의 감흥을 아직 잊지 못한다. 1악장 현의 도입부부터 내 몸은 부서지기 시작하고, 말라붙은 나무 등걸처럼 처연하고 쓸쓸하게, 그러나 언제나 따뜻한 시선을 놓치지 않는 조지 셀의 브람스. 나는 그 쓸쓸함과 따뜻함을 대책 없이 수긍해야 했다. 지금은 브루노 발터의 브람스를 좋아한다.
독자와 저자와의 이런 차이는 마치 우리네 삶의 차이만큼 당연하고 또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사실, 공감하는 부분이 더 많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글렌 굴드와 안드라시 시프의 바흐 변주곡에 대해, 프리드리히 굴다의 모차르트에 대해, 말러의 교향곡에 대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음악이 아무리 개인적 편견을 배제할 수 없다 하다라도 극단의 평가가 나오기는 어려운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런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 공유감은 단지 음반 평가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의 음악 정보와 여행에 대해서는 공감을 넘어 질투가, 어쩔수 없이 질투가 … .
이 책은 일종의 수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곡가에 대한, 그리고 작품과 연주자, 음악회에 대한 정보로 솔솔한 재미가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느낀 가장 큰 재미는 저자에게 녹아 있는 외국 연주의 현장감과 연주자의 정보였다. 작곡가나 곡 정보, 음반 소개서는 이미 여럿 봐 온 터이기에, 그런 류의 정보는 사실 더 이상 특이할 것도 없다. 단지 저자의 여행길을 상상하면 시샘이 날 정도였다. 한 대목을 살펴보자.
‘마드리드를 떠난 소형 여객기가 고도를 낮추다가 지중해의 바람과 부딪혀 엄청난 요동을 친다. 곧 짙푸른 바다 가운데 초록색 섬이 나타난다. 마요르카 섬이다. 이제 비행기는 안정을 찾아 마요르카 수도인 팔마 공항에 내린다.(118쪽)’ 쇼팽의 전주곡집을 설명하는 이 도입 부분의 서술 자체가 쇼팽 전주곡집의 변형이자 은유로 느껴진다. 쇼팽과 상드의 애정행각, 건강이 악화된 쇼팽, 빗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음악 혼을 불태우던 쇼팽. 나 역시 이 곡으로 내 젊음을 불태우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저자가 극찬하는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로! (여기에서 저자의 나의 선택은 일치한다)
암울했던 대학 시절, 삶의 즐거움이 현실적으로 부재하던 그 때에, 하굣길 버스 안에서 폴리니로 듣던 전주곡집. LP를 테이프에 녹음하여 듣고 또 들었다. 이는 당시 화염병과 회색빛 낮은 하늘 아래의 풍경과는 상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지만, 현실에서는 기묘한 흡입력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유약하지 않고 확신에 찬 쇼팽의 열정을 폴리니는 분명하다 못해 차가운 터치로 강건하게 구축해 가고 있다. 그것은 당시의 회색빛 세상과 또 다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저자 박종호가 마요르카 섬의 온화한 기후 아래 전주곡집이 탄생한 ‘바람의 집’에서 쇼팽을 갈구한 것이나, 20대 회색 빛 세상에서 내가 만난 쇼팽은 같은 쇼팽이었을까? (여기에서 폴리니에 대한 저자와 나의 풍경화는 거리감이 있다.)
이에 대해 슈베르트의 ‘겨울 여행’(저자에 의하면 ‘겨울 나그네’가 아니다.-247쪽. 나 역시 ‘겨울 여행’이 훨씬 좋다)의 경험을 짚어 봐야 할 것 같다. ‘겨울 여행’ 24곡을 다 듣고 나면 깊은 상념으로 세상은 완결된 비극으로 다가오곤 했다. 피셔 디스카우로만 듣던 이 곡을 저자의 추천으로 접한 크바스토프의 노래에서는 완결된 비극이라기보다는 삶에 대한 애정과 여과된 희망이 느껴진다. 그런 것인가? 내가 보고, 겪고, 들은 것이 전부 다는 아닌 것인가? 내게 ‘겨울 여행’은 비극적 완결성이었을 뿐이었는데, 이제 저자는 내게 또 다른 여행의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세상은 여기에서, 저기에서,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흘러가는 모양이다. 그의 말대로 스페인에서 싸구려 와인 한 잔이면 어떻고 나처럼 동성로 뒷골목 선술집이면 또 어떤가? 라 스칼라에서 레나토 브루손이면 어떻고 내 친구와 함께한 ‘광야에서’면 또 어떤가? 아직도 나는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제 카라얀을 만날 수 없다면,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 필을 그야말로 ‘베를린’에서 들으면 어떨까하듯, 마요르카의 쇼팽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눈앞의 오디오 저 너머로는 과거의 시간과 상상의 공간이 퍼져 나간다. 그래서 이 책은 음악에 접근하려는 입문자에게는 정보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내밀한 음성’을 엿보게 하는 재미가 있다. 박종호의 다른 책 ‘불멸의 오페라’를 보라! 그의 현장 체험과 분석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나는 푸치니의 오페라를 들으며 펼쳐 놓은, 그의 책 앞에서 질투의 화신이 된다. 그러나 너무 질투하지는 말자. 나 같은 일상의 소시민이 대부분인 이 땅에, 박종호야말로 비상식적인 생활인(?)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비상식적인 저자의 즐거움이 무척 탐난다는 것 또한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다시 음악이란 무엇인가? 악보에 기록된 음표들인가? 음과 음의 역동적 관계인가? 우리는 그 어떤 설명보다도 완전하고 뚜렷한 ‘마음속 경험’으로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 음악의 의미를 그 어떤 다른 방식으로 ‘진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비유적으로 음악을 설명하려 하지만 그런 류의 설명들은 항상 실패하고 만다. 음악은 다른 비유와 번역을 거부한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면 음악을 사랑하는 자만이 진정 이 책을 ‘읽은 것’이리라. 음악적 감흥은 없고 문자와 그 문자의 상상만으로는 이 책의 즐거움을 절반도 누리지 못하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음악을 정의할 수 없지만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는 쇼펜하워의 말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본다. 언어의 관념성으로 인한 애매한 문학, 형태와 색체에 갇혀 있는 미술 등에 비하면, 음악은 그것을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서 비언어적이고 물질적이며, 형태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재적이다. 한 음에서 반응하는 감정의 즉각적 측면에서는 가장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기 때문에 음악이야말로 모든 예술의 동경 대상인 것이다.
이 책은 음악을 사랑하고 동경하는 자의 내밀한 고백이다. 역시 음악을 사랑하는 나에게, 저자는 음악적 동경을 다시 일깨워 주었다. 그것은 저 지중해 푸른빛일수도 있지만, 회한과 연민이 얽힌 내 젊은 날의 풍경을 결코 떠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자세이다. 자, 이 땅의 아름다운 사람들과 다시 함께 들어 보자. 지금, 여기에서, 함께, 모차르트와, 춤을 춰 보자. 기쁘게, 기쁘게, 칸타빌레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