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지 않는다는 것 - 하종강의 중년일기
하종강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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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강의 책은 재미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후, 그의 글들을 주목하고 있었는데 이 책은 틈틈이 읽어도 쉬운 책이다. 한겨레 칼럼-그의 강연- 책『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으로 연결되는 그의 모습은 언제나 ‘따뜻하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의 신변잡기적인 단상이 주를 이루고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그가 살아가는 모습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군데군데, 그 특유의 유머가 있어 키득거렸고,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시선이 따뜻하게 다가왔다. 토요일 밤 책을 읽다가 그의 홈피에 처음으로 들어가 보고는 무척 놀랐다. 노동운동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아주 잘 정리된 글들, 사진을 구경하느라 새벽 4시까지 돌아 다녔다. 특히 자녀들과의 관계짓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나의 행태를 또 반성했다. 

  감히 말하면, 그 어떤 우아(?)하거나 또는 고급한(?) 이론서보다도,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 내게 준 추동력이 너무 크다.  10년 쯤 전에 전태일 평전에 눈시울 적시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으로만  나의 부채감을 탕감 받으려 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불의한 현실을 대면하고, 재작년 직장에 새롭게 노조가 결성되었고 대표를 맡은 나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작년 봄에 그의 책을 읽었는데, 비등점을 이미 초과해버린 나는 하종강에 의해  더욱 촉발되었고, 내 삶은 완전히  터닝 포인트해 버렸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은 나의 정체성을 노동자로, 그리고 나의 계급의식을 확고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까운 동료에게 5권 사서 한 권씩 드렸다. 심각하게 읽는 사람, 읽어도 밋밋한 사람, 안 읽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또 동지를 얻기도 했다.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을 먼저 권한다. 강추!) 
 나의 계급의식을 일깨운 것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하종강이었다.^^  마르크스의 통찰에 감탄은 했어도, 노동자는 이해의 대상일 뿐, 내가 노동자임을 깨닫지는 못했다. 이렇게 먹물 먹은 나 같은 자들의 자기 개조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마치 개종(改宗)의 차원이다. 내가 하종강을 받아들인 것도 어쩌면 그 전에 내 직장의 부정과 불의에 분노하고, 우리 사회에 대한 나름의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면 누가 성찰하는가? 왜 나보다 더 처절하게  ‘당하는’ 다른 사람들은 개종하지 못하는가?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 부르디외의 상징폭력 개념, 미셀 푸코의 권력 담론이론 등등을 내세워도 현실은 막막하기 마련이다. 
 언젠가 그의 강연을 듣고 난 후, 회식 자리에서 그와 대면하며 밥을 먹으며, 우리 사회 노동 활동과 의식에 대해, 답답한 마음에,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질문을 던져도, 그는 웃으며 자분자분 내 질문을 받아 주었었다. 그는 ‘크게 보고 멀리 보자’고 답해 주었었는데, 당시에는 그리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서 노조 일을 맡아 하면서 이제야 그 말을 가슴 깊이 새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그래서 변하겠는가?” 나는 대답한다. “내 당대에 승리하기 위해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딸이나, 내 딸의 딸이 살 세상은 이보다는 좀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겠는가하는 마음으로 한다. 내 딸이 ‘그 때 아빠는 뭐했어요?’라고 물으면 그래도 할 말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지금 당장은 세상을 변화 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자세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멀리 보면 우리 사회는 분명 우리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함께 가자!” 
  나는 우리 사회가 ‘경제, 경제’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김구 선생이 ‘이제 우리 민족도 이만하면 먹고 살만한 사회이니 이제 문화국가를 만들자’라 한 것이 당시 좀 오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가 지금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먹고 사는 모습을 본다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이제는 좀 우리 사회의 어려운 사람들도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아니 너무 늦지 않았는가?  … 우리 사회는 미쳤다. 

   먹고 사는 문제,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먹고 살아야, 이제 먹고 살만큼 되었으니, 이제는 좀 인간다운 사회를 고민해 보자라고 할 것인가? 먹고 사는 문제거리만 나오면 다른 모든 가치는 함몰되어 버리고 오직 ‘먹는 것’의 블랙홀로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나는 서민으로 박봉에 넉넉하지 않지만, 우리 가족은 그래도 행복하다. (너무 이기적인가?)

  내 가족과 친지 중에 '전문가-고소득자들'로 적어도 쁘띠-부르주아들이 많다. 그런데 그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더 걱정하고 먹고살기 힘든 사회에 분노한다. 자신들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이기심을 비판한다. 듣고 있으면 속이 불타고, 한 마디 거들면 집중 포화를 맞는다. 그들은 내게 ‘네가 현실을 몰라서 그래’ ‘아직 철들지 않았구만’하는 딱 그런 표정들을 짓는다. 딱 그런 표정^^. 그 상황에서 ‘그것이 누구의 현실인지, 철듦이 무엇인지’ 나는 더 이상 진도가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정의에 불타고 있는 그들이 오늘날의 현실에 더 분노하기 때문이다. '완죤 조중동 스타일'에 대한 내 이견도 역시 진도가 나갈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철 없는' 낭만주의자이기 때문에 그들 전문가에게는 교화의 대상일 뿐이다. 이는 한편으로 계급의식이겠지 한다. 그러나 더 깊은 심급은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은 기본적으로 계급투쟁에 기초한다. 오랜동안, 많이 빼앗겼던 자들의, 자기 몫 찾기라고 생각한다. 마치 신분제도 철폐와 같은 양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노동운동의 본질은 사실상 ‘인간화’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억압과 차별을 그대로 두고 ‘휴머니즘’을 말할 수 있는가?

  전문 지식 기술자들은 추상적 담론과 그들만의 리그에 안주한다. 이 땅의 가진 자들은 자신의 계급 의식을 주류 의식으로 위장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굴종을 깨닫지도 못한다. 또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언행이 정치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 전혀 성찰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옳바르게 분노하는 법을 모른다. 분노가 어떻게 사랑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웃긴다

 사랑하는 내 딸이 살아갈 세상은, 이보다는 더 아름다워야 한다. 자신의 딸이 차별과 억압과 폭력의 그늘 아래 있는데, 당신은 나서지 않겠는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여성/장애인/동성애자’등 억압받는 자들의 연대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삶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딸이 노동자로서 착취당하지 않고, 여성으로서 차별 받지 않고, 또 장애인이나 동성애자가 되더라도 폭력에 희생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나를 이해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딸, 그리고 직장의 동지들, 그리고 이 땅 곳곳에 함께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 나도 철들지 않을 것이다.

하종강 동지(라고 부르고 싶다)에게 감사하며,

봄 날, 나도 꽃 피고 싶어 환장한 남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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