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타인의 고통 ㅣ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수전 손택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전쟁의 기원을 성찰한 책, 『3 기니』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비판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끔찍한 사진이 폭력이나 전쟁을 반대하도록 할 것이라는 울프 같은 일반적 생각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손택은 동일한 사진이 교전 양국의 선전도구로 서로 이용되거나, 조작되기도 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러한 끔찍한 사진들이 평화 혹은 복수를 주장하는 데 모두 이용된다고 한다.
더구나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멀리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는데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그래서 끔찍한 사진들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가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 것”(41) 이기에 현대인들은 사진을 ‘소비’할 뿐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군 병사의 죽음>이 조작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또 그 죽음의 사진 바로 옆에는, 남성용 헤어 크림 선전 광고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이처럼 죽음도 소비 산업에 봉사할 뿐이다. 영상 매체가 대세인 오늘날에도, 사진은 여전히 영상보다 더 <고정된 기억>을 각인시키는 매체이다. 그래서 더욱 ‘사진 산업은 충격을 소비하는 주된 요소’(45)가 되었다. 이는 1936년 이전 까지만 해도 잔인한 사진이 별로 없었다는 것과 대비된다.
자유계약으로 일하는 사진가들의 조합인 매그넘이, 공정한 목격자의 한 사람으로 시대를 기록하겠다는 취지로 출발했지만, 오히려 이들 프리랜스의 출현은 사진이 전 세계적인 사업이 됐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사진이 자본 권력에 더욱 가까워질 수 밖에 결과를 가져왔다.
끔찍한 사진을 찍고, 보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하여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65) 그래서 이런 참혹한 사진 앞에서 우리는, 겁쟁이나 구경꾼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그 묘사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게 된다. 보고 배우는 것이다.
또 사진은 사실 혹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에 손장난을 치는 일은 디지털 사진과 포토샵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74)
그래서 사진을 찍어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도 하겠지만, 찍는 행위 그 안에 이미 뭔가를 재구성하며 자신의 욕망도 함께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찍는 자의 욕망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초창기 사진들 중 걸작이라고 칭송 받는 사진들이 대부분 연출된 것이었다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84)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처럼. 예를 들면 주검들을 짜 맞춰 옮기거나, 장소 혹은 장면 등을 통째로 연출까지 하는 것이다. 또 전쟁터에서도 장면을 재구성하거나 연출한 수많은 사진들이 역사적 증거물로 혹은 한 시대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각인되는 것이다. 이런 연출은 베트남 전쟁 이후로 없어지게 되는데, 이는 이제 텔레비전이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매체가 됐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사진과 함께 존재해왔는데,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104)인 것이기에, 사진과 전쟁은 함께 해왔다.
그런데 대중이 끔찍한 장면을 대중적으로 소비해 온 것과는 달리,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은 자국민의 끔찍한 주검에서 그 얼굴을 그대로 노출시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빈국)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110) 즉 끔찍한 신체 훼손은 문명국인 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나 발생하는 것으로 대중에게 조작되고, 결국 유럽인들은 이국적 인종의 비참을 ‘구경’하는 오래된 관행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비참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어떤 고통을 전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122)
충격적인 이미지에 노출될수록, 대중은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공포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텔레비전의 끔찍한 전쟁이 ‘지금 이곳’의 일이 아니기에, 안도하며,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외면하며, 해결을 위한 실천을 강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있지만,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없다는 것은, 흑인사 노예 박물관은 ‘현재 진행형인 미국의 위험’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체 게바라는 소비되면서도, 국가 보안법은 맹위를 떨치는 기괴함처럼.
그래서 “미국인들은 저곳, 그리고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134)는 것이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국가 권력의 입장일 것이다. 현실은 일종이 스펙터클이 되고, 부유한 세계는 이런 스펙터클한 뉴스가 오락으로 변모해 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모는 것이 바로 이들[부유한 나라의 교육받은 사람들]의 방식이다. (…) 이들의 방식으로 보자면, 이 세계에는 현실적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163)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접하는 끔찍한 전쟁 사진은,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우리가 뭔가를 기억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은 퇴색된다.”(135) 이는 중층적이고 다양한 현실면을 기억이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에 찍혀야만 ‘현실적’이 되며, 찍히지 않는 것은 현실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144)라며, 조르쥬 바타이유의 경우를 제시한다. 바타이유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의 광경을 찍은 사진을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책상 속에 평생 간직했단다.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 잡았다’라는 바타이유의 말에서, 나는 무척 혼란스럽다. 148쪽에 그 사진이 실려 있는데, 끔찍한 사진만 나열된 이 책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진이다. 범죄자를 산 채로 조각조각 잘라내는 장면은, 관찰자로서도 견디기 힘든 ‘역겨움과 공포’를 느낀다. 이 사진을 언제나 보며 영감(?)을 얻었다는 바타이유(내가 아주 오래전 좋아했던, 그러나 오래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바타이유)가 더욱 기괴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직 바타이유만큼 탈도적적이지 못하거나, 바타이유 만큼 자신의 무의식을 대면할 능력이 모자라거나 혹은 미적 훈련이 촌스럽거나 일 것이다. 그럼에도 바타이유의 ‘전위적 감식안(?)’에 공감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바타이유에게 그 사진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 아닌지.
끔찍한 사진의 구경꾼들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신체의 훼손을 구경해 왔다. 마치 포르노를 염탐하듯이. 사람들은 일상으로 접하는 폭력의 이미지 때문에 오히려 폭력에 무감각하게 되고, 폭력을 외면하게 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 연민은 어느 정도 뻣뻣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154)
그렇게 끔찍한 타인의 고통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폭력에 무감하다는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오직 타인의 것으로만 남겨 두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이 책의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인 이유일 것이다.
부록에 실린린 몇 편의 길도 인상적이다.
「문학은 자유이다」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 연설 기록으로, 주로 9.11에 대응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미국이야말로 이중적 종교사회이며, 이런 국가의 허영심과 편협성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한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 세 쪽의 아주 짧은 글이지만, 강한 인상이 남는다. 9.11 공격이 야만국의 비겁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는 것. 또 미국민 모두가 미국의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소련 당 대회의 만장일치처럼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며, 모두 슬퍼하되, 바보는 되지 말자고 한다.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밀로세비치가 코소보 학살(2차 대전 후 처음 벌어진 전쟁)을 저지르는 동안, 유럽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주권 국가의 내정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손택은 모든 폭력이 똑같이 비난받는 것은 아니라면서, 유럽이 코소보 사태에 폭력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즉각 개입해, 인종주의자인 밀로세비치라는 근본적 악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