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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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글렌 굴드를 들었을 때, 도대체 이런 바흐 연주가 가능하기라도 한 걸까라는 충격에 빠졌었다. 그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지 대학 1학년 때인지는 흐릿하지만, 그 날의 방에 흐르던 햇빛과 음들의 생경함은 아직 생생하다. 빌헬름 켐프의 연주로 골드베르그를 수없이 들었지만, 명암 구분이 흐릿하여 따분하기만 했었다. 그러다 굴드의 연주를 듣는 순간 한 음 한 음 성찰하듯 입체적으로 흘러 들어오는 바흐는, 말 그대로 충격적이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서양 고전 음악을 들으며 ‘처음 듣는 순간부터 놀라웠다’라는 순간이 몇 번이나 될까?   

 

 글렌 굴드를 들었을 때 바흐 해석의 충격은 너무나 강한 것이었다. 한 작곡가에 대한 것도 아니고 (과연 한 작곡가의 전 곡을 좋아할 수 있을까?) 연주자의 모든 연주를 좋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연주자에 대한 경이로움은 글렌 굴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비교해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피아노를 좋아하지만 이는 또 굴드에 대한 애착과는 다른 것이다.  

 

 

  당시 LP시대에는 골드베르그 변주곡과 2성 3성 인벤션만 출반되었었는데, 이제 그의 전집 에디션이 흘러 넘치고 있다. 레코드 샾에 가면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어쩌면 굴드에 대한 것은 ‘집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집착이 맹목적이긴 하지만 분명 나름의 이유가  있기에, 수 많은 굴드 팬들이 있을 것이다. 

 

 

   끊어치는 분명한 아티큐레이션 논 레카토 주법, 페달을 사용하지 않는 프레이징 구축, 왼손이 단지 반주로 그치지 않고 독립된 멜로디 라인을 구성하는 것, 그래서 두 손의 멜로디가 전혀 섞이지 않게 독립된 소리로 들리는 것, 아마도 이런 것들이 그의 독특한 소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다운 것은 이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어? 하는 정도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곡 해석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의 설득력을 가진 해석, 이를테면 빠르기를 일반적인 통념에 구애받지 않는 것(베토벤 14번 소나타, 바흐의 골드베르그 변주곡), 멜로디라인을 완전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주하는 것(특히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작품 310. 물론 굴드의 이런 모차르트 해석에 혹평을 가하는 평자들이 많다.) 그리고 장식음을  단지 장식음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멜로디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짚어주는 것 등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음악이 파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해석보다 더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또한 곳곳에 배어 나오는 그의 숨소리, 신음소리! 과연 이처럼 매력적인 노래가 있을까? 이 소리가 너무 심해 녹음에 지장이 생긴다고 방독면을 쓰고 계속 노래하며 녹음했다나? 그리고 이번 책을 통해 알게 된 그의 녹음상의 조작. 글쎄 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잘 모르겠다. 누구나 스튜디오 녹음에서는 반복과 편집을 하지만 굴드가 특히 이에 많이 의존했다는 것은 의외였다. 그리고 굴드의 초기 녹음보다는 후기 녹음들이 음질면에서도 그렇지만 음의 깊이나 강약, 힘의 강도에서 더 좋은데, 이도 녹음 편집의 영향일까?  


   이 책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마치 처음 맛보는 과자를 대하는 아이처럼 아껴가며 한 장씩 읽어갔다. 굴드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무척 흥미롭고, 작가가 그에 대한 감상부분은 굴드 팬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음악을 모르고는 전혀 이해될 수 없는 감정의 넘침이기도 하다.  오직 공감과 찬탄만이 흘러 넘쳐도 좋으리라.  

 

 특히 이 책의 저자는 브람스 발라드와 인터메쪼에 대한 예찬이 예사롭지 않다. 그는 굴드의 녹음 중 브람스의 피아노 소품들을 가장 사랑한다고 말했다. 굴드에 대한 애정을 가진 자라면 어찌 그 음반을 찾아보지 않겠는가?  

  굴드의 브람스는 느린 부분에서도 브람스 특유의 긴장감이 손상되지 않고 살아 움직인다. 듣고 있자면 참 묘하다. 발라드 4번에서 특히 그러하다. 음 하나하나에 싣는 음색이 대단히 정교하여 한 음이 그 다음 음을 항상 당기고 긴장시키는 것 같다. 브람스 초기 작품인 발라드를 굴드는 사망하기 바로 전인 1982년 2월 녹음했다. 그의 생을 마감하기전 녹음으로 (바흐의 골드베르크가 아닌) 브람스를 듣자니 묘한 긴장이 느껴진다. 그 다음 랩소디 op79의 두 곡이 있다. 82년 6, 7월 녹음이며 랩소디를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상대적으로 잘 듣지 않는 편이다. 그 다음 5 곡의 인터메쪼가 있다. 이 다섯 곡은 너무나 아름답다.(op 117-1, 117-2, 76-6, 118-1, 118-2) 이는 굴드의 초 중기인 1960년 11월 녹음이다.  루빈스타인이나, 길렐스, 라두 루푸의 연주와 비교해보면, 역시 굴드의 모음판에 손이 가장 자주 간다.   

 

 

 이 책은 일반적인 전기와는 사뭇 다르다. 굴드의 객관적인(무엇이 객관적일까?) 행적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대부분 작가의 심리를 굴드의 음악에 겹쳐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굴드의 음악을 사랑하지 않으면 결코 읽어내지 못할 책이다. 오직 굴드에 대한 애정으로만 끝까지 읽힐 수 있는 책이다. 어쩌면 우리는 굴드에 대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굴드에 대한 애정의 확인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굴드를 사랑하는 우리가 서로 다르지 않음을 확인하는 독서이리라. 또 이 책에서 밝힌  ‘브루노 몽생종’의 글들이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의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어줄까.  

 

  굴드의 연주로 모차르트의 소나타를 듣는 이 아침, 그의 숨소리와 노래소리와  함께 그의 현존을 느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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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의 탄생 돌베개 한국학총서 11
강명관 지음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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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문학자 강명관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무척 인상적이었다. ‘고루한’(?) 한문학 전공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상당히 현대적이었 기 때문이다. 그의 문장이 세련되었다거나 자료가 새롭다거나 한 것 이 아니라, 옛 서책을 대하는 그의 ‘관점’이 신선하다는 것이다. 대개    한문을 좀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현학 취미를 내세워 현대인을 경박 하다 비판하고, 자신들의 복고 지향을 내세워 현대 문화 자체를 경멸하기까지 한다.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는 자신을 스스로 도덕적 인간으로 규정고, 그 우월감으로 현대인들을 겁박하려는 불순한 권력 욕망도 엿보인다.   

 만약 그들 한학자들이 복고적 사회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면, 그들은 오늘날에 적용 가능한 현대적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강명관은 옛 텍스트를 통해 ‘지금’을 말한다. 특히 옛 텍스트에 드러난 권력 관계를 오늘날과 연관 지어 설명한다. 그가 언급하는 과거 자료들은 모두 지금 이 땅의 모습들과 대비되어,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래서 그에게 옛적 우리 선조들의 삶은 찬미 받아 마땅한 것으로만 읽히지 않고, 인간을 억압하는 옛 사회의 모든 것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지금-여기’의 삶과 유리된 학문은 쓸모없는 현학 취미일 뿐이다. 모든 학문이 현실에 바로 적용 가능한 실천 학문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옛 것을 혹은 외국 것을 공부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 여기>의 문제와 접속되어야 한다. 지금 -여기의 삶과 무관한 지식은 그것이 아무리 상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죽은 지식일 뿐이며, 그런 단절된 앎으로는 ‘나’의 삶을 추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특히 이 땅의 한학자들은 우리 선조들의 텍스트를 주로 찬양하는데 급급하고, 그런 회고적 찬양은 나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선조들의 텍스트는 언제나 찬미 받아야 마땅한가? 특히 고전 문헌을 다루는, 그리고 외국 문헌을 다루는 자들 가운데, 지금-여기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외눈박이들이, 너무 많다. (나는 특히 한문학자들이 자신들의 한문 실력을 마치 지식과 교양의 척도인양 하는 것을 경멸한다. 일반인들이 한문 원텍스트를 독해할 필요가 없도록 번역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이다. 서양 애들이 라틴어 해석을 다 잘하는가? 학자가 아닌 이상, 일반인들이 한문 해석까지 할 필요는 없다. 영어 잘 하는 무식한 인간들이 많듯이, 한문 잘하는 무식한 인간들도 많다.)   

 

 강명관의 작업은 인문학의 모범 사례이다. 학문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간을 억압하는 어떤 권력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우리가 개혁 군주로만 칭송하는 정조에 대해서도 그가 어떻게 백성을 억압했으며, 당대 사회의 한계와 함께 정조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지적하곤 하는 것처럼, 그는 언제나 인민의 시각에서 텍스트를 읽는다.  

 

 이 책의 제목이 『열녀의 탄생』이라는 것에서, 미셀 푸코의 방법론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푸코를 언급하지도 않기에, 푸코의 방법과 무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줄곧 푸코의 계보학적 방법론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자신의 주체를 스스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푸코의 기본입장이다. 인간 주체(지식, 도덕, 앎)가 구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권력의 전략이 행사되는데, 도처에 배치된 권력은 미세혈관처럼 세세하게 기능함으로써 인간 주체를 구성해간다는 것이다. 이 때 권력은 가시적이거나 폭력적인 물리력이 아닌, 여러 ‘담론’의 형태를 띠게 된다. 푸코는 이런 권력의 작용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계보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즉 주체를 둘러싼 관계항들을 통사적으로 훑어 내려감으로써 주체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들이 『임상의학의 탄생』, 『감옥의 탄생』, 『성의 역사』로 이름 지어진 것이리라.

  『열녀의 탄생』 역시, 여성의 의식화가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어지는가를 추적한 책이다. 이 책은 <조선-남성>이 여성을 의식화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열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국가의 의식화 교육이 → 여성의 내면화를 거쳐 → 여성의 자발적 실천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의식화 작업은 여성의 성적 종속을 기본으로 하고, 결국 남성에 대한 전반적 복종을 내면화시키는 국가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국가-남성-교육이 함께 동원된다. 한 사회의 보편 의식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어떤 의도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구성되어지는 ‘구성물’임을 보여준 것이다.

 저자와 푸코를 자꾸 연결시키는 것이 저자에게 결례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우리 학계에 미셀 푸코에 대한 많은 소개와 연구에도 불구하고, 이 책처럼 우리 사회의 권력 담론을 계보학적으로 분석한 작업은 흔치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열녀’라면 대체로 수절하거나 정절을 위해 목숨을 버린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본 구체적 장면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우아한 정절의 여인 이미지가 아니라, 한마디로 엽기적이었다. 이 책의 부제가 ‘조선 여성의 잔혹한 역사’라는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저자는 많은 인용을 제시하는데 하나같이 끔찍한 이야기들 뿐이다.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봉양하기, 허벅지 살을 구워 남편 먹이기, 혼인도 하기 전 사망한 남자를 따라 목 매달기, 어린 자식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사회가 요구하는 죽음으로 나아가기, 왜구의 칼 앞에 팔 다리가 잘리고, 머리가 짓이겨 죽어도 오로지 저항하기, 다른 남자의 손이 닿은 것만으로 자신의 손을 끊어내기, 자신의 육신을 고기로 팔아 남편 여비 보태주기 등등,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적 잔혹함에 어안이 벙벙해질 따름이다.  

 

 더구나 이런 끔찍한 행동들이 여성들 스스로 내면화한 ‘자발성’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국가-남성에 의한 끊임없는 의식화 교육의 결과였다. 대단한 의식화 교육 아닌가? 조선 여성들의 신체에는 국가-남성의 언어가 깊숙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신체에 각인된 기표!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끄 라캉이 생각났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언어에 몰수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단지 살아 있는 시체(우리의 몸은 우리 안에 기생하는 언어에 의해 덧쓰여져 있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 치명적인 운명을 스스로 주체화하여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 이런 맥락에서 라캉은 분석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주체는 자신의 욕망이 타자의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도록 놔둬선 안 된다”(『라캉과 정신의학』, 브루스 핑크 著, 353~354쪽)처럼,

 국가-남성의 욕망을 여성 자신의 욕망으로 의식화하기.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소외시킨 조선조 여성들. 라캉은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는데, 자신의 진짜 욕망과 대면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작업이 아니지 않는가! ‘나’의 욕망은 누구에 의해 욕망되어지는 것일까? ‘나’의 의식 그리고 무의식은 어떻게 구성되어진 것일까? 결국 ‘나’란 무엇인가?  

 

 그래서 이 책의 의미는 조선 여성의 잔혹사를 고발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과 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결국 지금 ‘나’의 욕망과 의식 역시 상대적이고 구성되어진 역사적 산물임을 성찰하게 하는 것에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조선 시대 남성-양반 국가권력을 동원해 가부장적 욕망을 실현하는 텍스트를 여성의 대뇌에 설치하는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이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와 통한다. 내가 일상에서 내뱉는 언어, 어떤 사태에 갖는 태도, 나아가 나의 가치관, 미의식 등은 과연 나의 것인가? 국가와 자본은 교육과 미디어라는 권력 기구를 통해 개인을 끊임없이 제작하고 간섭한다. 그 목적은 겉으로 내건 ‘인간평등’의 원리에 반하는 인간의 차별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와 자본의 권력이 지향하는 바대로 한 개인의 주체성이 만들어진다. 그 개인은 국가와 자본의 욕망을 자기 대뇌에 설치하고는, 그 욕망에 따라 인간의 차별을 당연시하게 된다. (…) 이렇듯 ‘나’는 권력적 타자에 의해 제작된 존재다.” (7)  

 

 그래서 또 이 책은 교육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담론들이 결국 어떤 모습인지를 날것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 서구의 의무교육은 시민권의 확장에 따른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산업 사회의 노동자 생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국가-지배계급은 교육을 통해 인민을 ‘신체-규율’ 기계로 재코드화하여 노동자를 생산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래서 교육은 언제나 국가주의와 시장주의의 자장 아래 놓이게 된다. 물론 지배권력을 노동 대중이 접수할수록 당연히 교육 헤게모니의 변동도 일어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하물며 모든 책의 발행과 유통을 국가가 담당한 조선사회에서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 책은 850여 쪽의 두께로 선뜻 손이 안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약 300여쪽의 주석과 부록을 빼면 본문은 500쪽 정도가 된다. 저자가 어떤 인터뷰에서 말하길, 그토록 세세하고 많은 주를 단 이유는 우리 사회에 넘쳐나는 마초들의 공격을 의식해서 일일이 사료를 제시한 때문이란다. 저자가 수많은 사료를 추적하고 제시하고 분류한, 꼼꼼함이 돋보인다. 철저한 원문 인용과 그에 바탕한 설명은 충분히 객관적이다. 본문 읽기도 수월하여 가독성이 높아 힘든 독서는 아니다. 책의 두께에 눌리지 말고,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이다. 단지 저자가 할말이 많은 관계로 군데군데 중복된 설명이 나온다. 엄밀하고 정치한 서술이라기보다는, 자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본 개념이 반복 서술되는 곳이 꽤 있다. 물론 이것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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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2-2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학자들의 거드름 피우는 자세에 대한 파란말 님의 비판이 아주 아주 시원합니다.강명관 씨가 민족편향과 근대화 논리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것도 괜찮더군요.
 
다시 그람시에게로
칼 보그 지음, 강문구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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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오 그람시!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시자이자, 뭇솔리니에 의해 투옥되어 수 십년 감옥에서 이론 작업을 수행한 초인적 혁명가. 마르크스 혁명이론을 자본주의 세계에 적용을 탐색하여 ‘헤게모니’ 이론을 창안한, 최고의 마르크스 이론가!  

 

 나는 지금 왜 마르크스를 다시 읽고 있는가?  ‘한국 사회에서 반 마르크스주의자는 없다’라는 명제는 타당하다. 왜냐하면 적어도 87년 체제 이전까지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대중에게 한 번도 마르크스가 제대로 이해된 적이 없기에, 이는 마르크스를 반대할 지식 기반조차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풍자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오직 강단 학자들에 의해 독점되어 왔고, 그나마 마르크스의 사회 혁명 이론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더욱 힘을 잃어 가고, 그의 저작들이 폐기처분 되는 추세인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비록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이후 사회변혁 이론에서는 문제가 많지만, 적어도 마르크스만큼 자본주의의 속성을 정확하게 분석 통찰한 자는 역사상 없었고, 지금도 그의 ‘자본’이나  ‘계급이론’ 등 자본주의 본질에 대한 분석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위한 지형도를 새롭게 그리는 데에 마르크스는 지금도 매우 유용한 토대이고, 신자유주의의 세계적 확장에서, 그 작업은 이제 우리 세대의 몫이기도 하다. 이미 마르크스의 방법론이 다시 학계와 운동가들 사이에서 활발히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마르크스와 그의 후속 이론들을 개괄하는 것은 지적 탐구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현실 사회의 변혁 논리로도 충분히 유용한 작업이다.

 A. 그람시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마르크스 혁명이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마르크스는 물적 토대인 하부구조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비해, 그람시는 상부구조 즉 의식, 교육, 가치 등이 혁명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임을 말하고 있다.  

 이를 헤게모니 이론으로 정립하고 있다.  자본주의 세계에서 계급 지배는 교육, 언론, 법, 대중문화 등으로 ‘대중의 동의’를 통해서 행사 된다. 이는 노동조합, 학교, 교회, 가족 등 일상생활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조직 원리이다. 지배 엘리트들은 그들의 권력과 부, 지위 등을 영속시키기 위하여, 바로 그들 지배계급의 철학과 문화, 도덕성 등을 대중화하여 그것을 자연적 질서로 규정한다. 이러한 지배계급의 의식이 대중들에게 내면화될수록 그것은 ‘상식’이 되고, 지배계급은 이에 기초하여 대중을 지배한다.

<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그람시 정치사상 개요>

① 사회주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자본주의의 붕괴 후에 자연적으로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은 목적지향의 인간 행위를 통해 성취되어야 할 것이다.   

② 혁명은 합리적 인식 행위일 뿐 아니라, 일상적인 정치 투쟁에 뿌리 내린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당파심, 즉 참여 의식을 요구한다

③ 자본주의 세계에서 지배계급은 대중의 동의를 통해 대중을 지배한다. 그렇기에 의식변혁은 구조변혁과 분리할 수 없다.

④ 혁명은 사회의 모든 측면들, 인간 존재의 모든 차원을 포괄하여 ‘총체적으로’ 진행되어야만 진정한 변혁이 가능하다. 하나를 변혁하려는 투쟁은 모든 것, 총체적인 것들을 변혁하려는 투쟁과 엮이게 된다.

⑤ 고전적 레닌주의에 내재한 엘리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법을 극복하고자 했다. 노동자 계급과 농민내의 자각적인 대중투쟁 과정을 강조했다.

⑦ 민족적 토착적 대중 운동을 구성하는 이탈리아적 맑스주의를 창안했다. 즉, 혁명이 진정으로 대중적인 현상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민족적인 성격을 띠어야 한다.

⑧ 개방성과 비당파성을 강조한다. 즉 일반 대중의 반발과 항의, 원시적인 소요 등을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대중들과의 격리를 경계했다. 

 원저자의 문장이 그러한지, 역자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글을 읽는 것에 속도가 잘 붙지 않는다.  특히 끝의 부록으로 붙은 ‘역자 논문’은 최악이다. 명확하지 않은 문장, 불필요한 단어의 반복, 비문 등 최악의 글이다. 아마도 이 책의 가독력을 떨어뜨리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은 역자의 문제인 것 같다.

 시중에 나온 그람시 관련 책들 중 이 만한 책을 고르기도 쉽지 않다. 여러 책 중에서 이번 책이 그나마 가장 추천할 만하다. 엄청남 분량과 난해하기 그지없는 主著 『옥중수고』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래전에 가진 곤혹스러운 의문으로 1,800만 노동자 농민이 왜 자신의 계급적 기반과 어긋나는 정치적 행동을 하는가, 즉 왜 부르주아 정당에 투표하는가하는 문제가 있었다. K. 마르크스는 이를 피지배계급의 허위의식이라 하였는데, A. 그람시에 의하면 대중이 지배계급의 헤게모니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덧붙여 P. 부르디외는 이를 민중계급이 자신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해석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이를 보이지 않는 문화 권력인 ‘상징 폭력’ ‘문화자본’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노동자들의 정체성이 사회적 가치체계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며, 또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혜택으로 노동자들의 소비 양식이 변화하여 자신을 스스로 피지배자로 인식하기보다는 문화적 혜택을 누리는 계급으로 오인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한다.  M. 푸코는 개인의 주체란 것이 그 시대의 권력 담론에 의해 ‘구성되어 지는 것’이며, 이때 개인의 신체는 경제적으로는 노동력을 지닌 대상으로 정치적으로는 복종할 수 있도록 훈련 받는다고 한다.   

  A.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이 피에르 부르디외의 ‘상징 폭력’과 ‘문화 자본’ 이론과도 통하고 미셸 푸코의 ‘권력 담론’과도 통하고 있기에, 지배/억압의 이해를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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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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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세계의 관계’를 공부한다는 것일테이다.  자본주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훑어 본 느낌은, 암담하다는 한 마디로 충분할 것 같다.  자본(가)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왔다. 아니, 자본(가)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봉건 영주, 국왕, 부르주아, 그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해 왔다. 그래서 이 책은 자본(가)의 본모습을 까발리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그 작동 방법에 대해, 제도권 교육에서 교육받은 적이 없다. 기껏, 자본주의는 마치 ‘자유’와 동의어로 윤색되기 십상이었고, 인간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체제로 선전 받아왔을 뿐이다. 덧붙여 공산주의와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 우월성을 주입받아 왔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는 교조적 공산주의 선전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대한 교조적 세뇌였다.

 우리가 받은 교육에서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인간을 오직 ‘물질’로만 파악한다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유물론으로 학습했고, 더불어 정치적 독재와 동의어로 교육 받았었다. (지금도 대부분 사람들은 경제체제로써의 자본주의와 정치체제로써의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야말로 ‘자본=돈=물질’로만 인간과 세계를 규정하는 체제 아니겠는가.    

 

 이 책은 맑스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생과 변화를 사회 경제적 변동과 연관지어 서술하는, 맔스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다. 또한 자본주의 분석을 말하며 맑스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20대 때에는, 서구 철학과 사상사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는 맑스을 대면하면서도 단지 그를 ‘소문’으로 접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다가 현실 사회주의(사실, 사회주의도 아니었지만!)이후, 폐기되던  맑스 이론과는 상관없이, 서구 철학계에서 그는 여전히 거쳐야할 거대한 산맥이었고, 그의 학설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벽 앞에 마주쳐서야, 나는 맑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었는지를 그때서야 깨달았었다. 우리는 제도 교육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폭력 혁명을 맑스의 주된 주장으로 학습 받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맑스는 무엇보다도 자본의 분석가였다. 자본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보다 더 정확하고 치열하게 보여준 사람이 있을까?   

 

맑스의 미래 세계 예측이 비록 맞지 않다하더라도 (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가 맑스와는 상관없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의 자본주의 체제의 분석만은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맑스는 이상주의자로서 휴머니스트였다. 인간의 억압과 소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분노했고, 인간 해방을 위해 열정을 갖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가 ‘폭력’을 말할 때조차, 휴머니스트의 냄새를 풍긴다. 왜? 지배자들은 항상 폭력으로 착취해 왔고, 또 억압받던 자들은 오직 폭력으로만 해방을 쟁취해 왔음을, 그래서 진정한 인간해방은 폭력을 동반 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는 역사에서 봐 왔기 때문이다.

 덧붙여 맑스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자들도 나는 불편하다. 맑스의 통찰과 업적이 뛰어나다해서 그의 통찰이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과정이라는 맑스의 통찰은 너무나 명쾌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사회변혁을 경제 결정론인 계급 투쟁에만 기대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어쩌면 게으르기까지 하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하게 독해되지도, 변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과 공존할 수 없으며, 이는 극복의 대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라는 이 책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오해! 인간은 경제(물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 혐오는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 과정을 알게 되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결코 인간 사회의 본질적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약 인간의 생존이 물질(경제 혹은 돈)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말한다면, 유사이래, 자본주의 아닌 시대는 없었고, 자본주의 아닌 장소도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생산했고, 소비했고, 교환해 왔지 않은가?   

 

휴버먼에 따르면,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 태동은 멀리 잡아도 16C 정도이다. 자본주의의 시작은 ‘자본축적’과 ‘임금 노동자’의 등장이라는 2가지 조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①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 축적’은 16C에 아메리카로부터 금은(金銀)의 유입, 원주민의 노예화 등으로 이루어졌고 ②‘임금 노동자’는 16C~19C에 엔클로저 운동으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이 도시 임금노동자로 전락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두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그 후 18C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과, 기계의 발명 등 복합적인 것이 상호 영향을 주어 새로운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가 본격 작동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으로써의 공장제는 19C에야 출현한 것이기에, 자본주의 역사를 짧게 잡으면 20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유일무이한 최후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가 말했듯, 자본주의 역시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경제체제의 변동일 뿐이며, 자본주의 내적 모순에 따라 변혁의 대상일 뿐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가지는 본질적 모순, 즉 이윤율 하락과 자본 축척의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 내부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 대표적 징후가 바로 ‘공황’이다. 고전학파 등에서는 공황을 자본주의 체제의 일시적 문제로 파악하지만, 맑스의 지지자들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로 파악했다. 이제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할 시점인가?   

 

지금 미국을 위시한 세계 경제의 동반 추락에 대해, 신자유주의(시장 근본주의)의 폐해일 뿐, 자본주의의 자체의 실패로 보지 않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그래서 케인즈 식의 국가 개입 정책으로 경제를 다시 살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일시적 소강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분명한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 장기적 쇠퇴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에 따른 붕괴의 시작으로도 분석하기도 한다.   

 무엇이 정확한 판단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시작이라면, 이 다음 체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노동 착취에 바탕한 자본주의가 몰락한다는 것이 곧 노동 해방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가 인간의 모습을 할 것이라는 것 역시 우리의 희망이자, 망상일 뿐이지 않겠는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봉건제가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처럼!

 맑스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새로운 사회가 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존 사회경제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하고, 새로운 생산 양식이 출현해야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맑스는 당대의 사람들은 당대의 모순의 극한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 세계의 모습이 자본주의 모순의 극한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의 추락이 어디까지 이르러야만 모순의 극한이란 것인지, 두렵기까지 하다.   

 

 내가 늦게, 아주 늦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이 세계는 절대로 도덕과 윤리, 즉 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힘’의 관계에 의해서만 움직이며, 특히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눈꼽만큼의 ‘인간애’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 역시  언제나 ‘힘’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연대와 투쟁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  ‘그나마 지금의 사회’라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는 서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다.

 자본가는 과학과 자연법칙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착취해왔고, 노동자는 ‘힘’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다. 왜 노동조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노조의 탄생은 역사적으로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었는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19C 제국주의 발생과 식민지 쟁탈 전쟁의 원인이었고, 이는 과잉 생산과 자본 과잉이 부른 필연적 결과였으며, 세계惡의 중심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풍요로운 상품 속에서도 대중은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소외를 기본으로 하는 모순의 체제이다.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었다. 전태일이 불에 타 죽은지 약 30년이 지나도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땅은 어떤 곳인가?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나쁘다고 우리는 교육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배담론의 이데올로기임을 알아야 한다. 국가/자본/지배 권력은 언제나 폭력을 행사해 왔다. 경찰, 군대를 동원한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법과 제도 등 은폐된 폭력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해 왔다. 약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호소할 경찰도 법도 가지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폭력이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윤리의 외피를 두른 지배자의 담론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질문의 방식을 바꾸자.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는 폭력은 누구를 위한, 어떤 폭력인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저항하는 철거민이 5명이나 불에 타 죽는 이 땅에서, 폭력은 나쁘다고만 말하는 당신은 윤리적인가? 

 왜 인간 해방은 힘을 동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할까? 지배자들은 절대로 스스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폭력과 개인의 윤리 도덕을 입술로만 말하며, 그들의 이익을 확대할 뿐이었다. 내가 역사에서 얻은 깨달음은, 폭력을 동반한 힘이든, 정당 정치의 힘이든, 단결과 연대에 기초한 운동이든, ‘정치적 힘’만이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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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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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수전 손택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읽은 책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전쟁의 기원을 성찰한 책, 『3 기니』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는 비판으로 이 책은 시작한다. 끔찍한 사진이 폭력이나 전쟁을 반대하도록 할 것이라는 울프 같은 일반적 생각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손택은 동일한 사진이 교전 양국의 선전도구로 서로 이용되거나, 조작되기도 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러한 끔찍한 사진들이 평화 혹은 복수를 주장하는 데 모두 이용된다고 한다.   

 

 더구나 현대인은 타인의 고통을 멀리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는데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다. 그래서 끔찍한 사진들은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다. 게다가 카메라가 찍힌 형태인 한, 그 의식은 금방 불타올랐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된 뒤, 곧장 우리의 생각에서 사라져갈 것”(41) 이기에 현대인들은 사진을 ‘소비’할 뿐이다.   

 너무나 잘 알려진 로버트 카파의 <어느 공화군 병사의 죽음>이 조작되었을 가능성과 함께, 또 그 죽음의 사진 바로 옆에는, 남성용 헤어 크림 선전 광고 사진이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이처럼 죽음도 소비 산업에 봉사할 뿐이다. 영상 매체가 대세인 오늘날에도, 사진은 여전히 영상보다 더 <고정된 기억>을 각인시키는 매체이다. 그래서 더욱 ‘사진 산업은 충격을 소비하는 주된 요소’(45)가 되었다. 이는 1936년 이전 까지만 해도 잔인한 사진이 별로 없었다는 것과 대비된다.  

 

 자유계약으로 일하는 사진가들의 조합인 매그넘이, 공정한 목격자의 한 사람으로 시대를 기록하겠다는 취지로 출발했지만, 오히려 이들 프리랜스의 출현은 사진이 전 세계적인 사업이 됐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는 사진이 자본 권력에 더욱 가까워질 수 밖에 결과를 가져왔다.  

 

  끔찍한 사진을 찍고, 보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다.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은 지옥의 묘사를 통하여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65) 그래서 이런 참혹한 사진 앞에서 우리는, 겁쟁이나 구경꾼으로 만들거나 아니면 그 묘사가 원하는 바대로 행동하게 된다. 보고 배우는 것이다.   

 

 또 사진은 사실 혹은 진실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라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다. “사진 이미지도 누군가가 골라낸 이미지일 뿐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다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에 손장난을 치는 일은 디지털 사진과 포토샵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74)

 그래서 사진을 찍어 전쟁의 참상을 알리기도 하겠지만, 찍는 행위 그 안에 이미 뭔가를 재구성하며 자신의 욕망도 함께 구성하게 되는 것이다. 찍는 자의 욕망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초창기 사진들 중 걸작이라고 칭송 받는 사진들이 대부분 연출된 것이었다거나 피사체에 손을 댄 흔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84)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닌 것처럼.   예를 들면 주검들을 짜 맞춰 옮기거나, 장소 혹은 장면 등을 통째로 연출까지 하는 것이다.  또 전쟁터에서도 장면을 재구성하거나 연출한 수많은 사진들이 역사적 증거물로 혹은 한 시대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각인되는 것이다. 이런 연출은 베트남 전쟁 이후로 없어지게 되는데, 이는 이제 텔레비전이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매체가 됐기 때문이다.    

 

 전쟁은 언제나 사진과 함께 존재해왔는데, “카메라와 총, 그러니까 피사체를 ‘쏘는’ 카메라와 인간을 쏘는 총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행위는 곧 사진을 찍는 행위”(104)인 것이기에, 사진과 전쟁은 함께 해왔다.   

 

  그런데 대중이 끔찍한 장면을 대중적으로 소비해 온 것과는 달리, 미국과 유럽의 나라들은 자국민의 끔찍한 주검에서 그 얼굴을 그대로 노출시키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빈국)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 밖에 없다.”(110)  즉 끔찍한 신체 훼손은 문명국인 유럽에서는 일어나지 않고, 아프리카 같은 곳에서나 발생하는 것으로 대중에게 조작되고, 결국 유럽인들은 이국적 인종의 비참을 ‘구경’하는 오래된 관행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비참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어떤 고통을 전세계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써 실제보다 과장되게 만들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보호’받아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게다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고통이나 불행은 너무나 엄청날 뿐만 아니라, 도저히 되돌릴 수도 없고 대단히 광범위한 까닭에 아무리 특정 지역에 개입을 하고 정치적으로 개입을 하더라도 그다지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느끼게 만들어 버린다. 어떤 문제가 이 정도의 규모로 인식되어 버리면, 고작 연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해당 문제를 추상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122)  

 

 충격적인 이미지에 노출될수록, 대중은 점점 더 무감각해지고 공포에 익숙해진다. 그래서 텔레비전의 끔찍한 전쟁이 ‘지금 이곳’의 일이 아니기에, 안도하며, 연민을 보내는 것으로 사태를 외면하며, 해결을 위한 실천을 강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있지만, 흑인 노예사 박물관이 없다는 것은, 흑인사 노예 박물관은 ‘현재 진행형인 미국의 위험’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체 게바라는 소비되면서도, 국가 보안법은 맹위를 떨치는 기괴함처럼.

 그래서 “미국인들은 저곳, 그리고 미국이 개입되지 않는 곳에서 행해진 악을 사진으로 찍기를 더 좋아한다.”(134)는 것이다. 이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부분 국가 권력의 입장일 것이다. 현실은 일종이 스펙터클이 되고, 부유한 세계는 이런 스펙터클한 뉴스가 오락으로 변모해 버리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일종의 구경꾼으로 모는 것이 바로 이들[부유한 나라의 교육받은 사람들]의 방식이다. (…) 이들의 방식으로 보자면, 이 세계에는 현실적인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163)  전쟁터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접하는 끔찍한 전쟁 사진은,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줄 뿐이다.   

 

 우리가 뭔가를 기억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사진만을 기억한다는 데에 있다. 이렇듯 사진만을 통해서 기억하게 되면 다른 형태의 이해와 기억은 퇴색된다.”(135) 이는 중층적이고 다양한 현실면을 기억이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에 찍혀야만 ‘현실적’이 되며, 찍히지 않는 것은 현실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매혹적인 육체가 외부의 공격을 받는 광경을 보여주는 모든 이미지들은 어느 정도 포르노그라피이다.”(144)라며, 조르쥬 바타이유의 경우를 제시한다. 바타이유가 ‘백 조각으로 찢겨 죽는 형벌’의 광경을 찍은 사진을 아무 때나 볼 수 있도록 책상 속에 평생 간직했단다. ‘황홀하기 그지없으면서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이 이미지, 고통의 광경을 담은 이 이미지는 평생 나를 사로 잡았다’라는 바타이유의 말에서, 나는 무척 혼란스럽다. 148쪽에 그 사진이 실려 있는데, 끔찍한 사진만 나열된 이 책에서도 가장 끔찍한 사진이다. 범죄자를 산 채로 조각조각 잘라내는 장면은, 관찰자로서도 견디기 힘든 ‘역겨움과 공포’를 느낀다. 이 사진을 언제나 보며 영감(?)을 얻었다는 바타이유(내가 아주 오래전 좋아했던, 그러나 오래전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바타이유)가 더욱 기괴하게 느껴진다. 나는 아직 바타이유만큼 탈도적적이지 못하거나, 바타이유 만큼 자신의 무의식을 대면할 능력이 모자라거나 혹은 미적 훈련이 촌스럽거나 일 것이다. 그럼에도 바타이유의 ‘전위적 감식안(?)’에 공감하지 못하겠다. 어쩌면 바타이유에게 그 사진은 타인의 고통일 뿐이 아닌지.   

 

 끔찍한 사진의 구경꾼들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신체의 훼손을 구경해 왔다. 마치 포르노를 염탐하듯이. 사람들은 일상으로 접하는 폭력의 이미지 때문에 오히려 폭력에 무감각하게 되고, 폭력을 외면하게 된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 연민은 어느 정도 뻣뻣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154)   

 

 그렇게 끔찍한 타인의 고통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은 폭력에 무감하다는 것이고, 타인의 고통을 오직 타인의 것으로만 남겨 두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이 책의 『Regarding the Pain of Others』인 이유일 것이다.  

  

부록에 실린린 몇 편의 길도 인상적이다.   

 

「문학은 자유이다」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 연설 기록으로, 주로 9.11에 대응하는 미국의 대외 정책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미국이야말로 이중적 종교사회이며, 이런 국가의 허영심과 편협성을 드러내 밝히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라고 한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 세 쪽의 아주 짧은 글이지만, 강한 인상이 남는다. 9.11 공격이 야만국의 비겁한 공격이 아니라, 미국이 저지른 행위에 대한 당연한 결과라는 것. 또 미국민 모두가 미국의 전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소련 당 대회의 만장일치처럼 한심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말하며, 모두 슬퍼하되, 바보는 되지 말자고 한다.   

 

「우리가 코소보에 와 있는 이유」

-밀로세비치가 코소보 학살(2차 대전 후 처음 벌어진 전쟁)을 저지르는 동안, 유럽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주권 국가의 내정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을 비판하고 있다. 손택은 모든 폭력이 똑같이 비난받는 것은 아니라면서, 유럽이 코소보 사태에 폭력의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즉각 개입해, 인종주의자인 밀로세비치라는 근본적 악을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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