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리오 휴버먼 지음 / 책벌레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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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세계의 관계’를 공부한다는 것일테이다.  자본주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훑어 본 느낌은, 암담하다는 한 마디로 충분할 것 같다.  자본(가)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것’을 해 왔다. 아니, 자본(가)의 문제가 아니다. 교회, 봉건 영주, 국왕, 부르주아, 그 누구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해 왔다. 그래서 이 책은 자본(가)의 본모습을 까발리는 것이라기보다, 인간의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과 발전, 그리고 그 작동 방법에 대해, 제도권 교육에서 교육받은 적이 없다. 기껏, 자본주의는 마치 ‘자유’와 동의어로 윤색되기 십상이었고, 인간본성에 가장 부합하는 체제로 선전 받아왔을 뿐이다. 덧붙여 공산주의와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 우월성을 주입받아 왔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는 교조적 공산주의 선전보다 결코 못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대한 교조적 세뇌였다.

 우리가 받은 교육에서는,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는 인간을 오직 ‘물질’로만 파악한다는 조악하기 그지없는 유물론으로 학습했고, 더불어 정치적 독재와 동의어로 교육 받았었다. (지금도 대부분 사람들은 경제체제로써의 자본주의와 정치체제로써의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자본주의라는 말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야말로 ‘자본=돈=물질’로만 인간과 세계를 규정하는 체제 아니겠는가.    

 

 이 책은 맑스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 발생과 변화를 사회 경제적 변동과 연관지어 서술하는, 맔스의 방법을 그대로 따른다. 또한 자본주의 분석을 말하며 맑스를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는가?   

   20대 때에는, 서구 철학과 사상사에서 끊임없이 출몰하는 맑스을 대면하면서도 단지 그를 ‘소문’으로 접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러다가 현실 사회주의(사실, 사회주의도 아니었지만!)이후, 폐기되던  맑스 이론과는 상관없이, 서구 철학계에서 그는 여전히 거쳐야할 거대한 산맥이었고, 그의 학설을 따르든 따르지 않든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는 벽 앞에 마주쳐서야, 나는 맑스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편협한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어 있었는지를 그때서야 깨달았었다. 우리는 제도 교육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폭력 혁명을 맑스의 주된 주장으로 학습 받았지만, 사실은 달랐다. 맑스는 무엇보다도 자본의 분석가였다. 자본이 무엇인지, 그것이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보다 더 정확하고 치열하게 보여준 사람이 있을까?   

 

맑스의 미래 세계 예측이 비록 맞지 않다하더라도 (현실에 존재했던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가 맑스와는 상관없는 ‘국가 자본주의’ 체제였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그의 자본주의 체제의 분석만은 부정할 수 없는 업적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맑스는 이상주의자로서 휴머니스트였다. 인간의 억압과 소외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분노했고, 인간 해방을 위해 열정을 갖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가 ‘폭력’을 말할 때조차, 휴머니스트의 냄새를 풍긴다. 왜? 지배자들은 항상 폭력으로 착취해 왔고, 또 억압받던 자들은 오직 폭력으로만 해방을 쟁취해 왔음을, 그래서 진정한 인간해방은 폭력을 동반 할 수밖에 없었음을, 그는 역사에서 봐 왔기 때문이다.

 덧붙여 맑스를 교조적으로 신봉하는 자들도 나는 불편하다. 맑스의 통찰과 업적이 뛰어나다해서 그의 통찰이 21세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는 보지 않는다. 모든 역사는 계급 투쟁의 과정이라는 맑스의 통찰은 너무나 명쾌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사회변혁을 경제 결정론인 계급 투쟁에만 기대는 것은 너무 단순하고, 어쩌면 게으르기까지 하다. 현대 자본주의 체제하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하게 독해되지도, 변화되지도 않을 것이다.

 단지 자본주의는 인간의 얼굴과 공존할 수 없으며, 이는 극복의 대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쩌면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라는 이 책을 선택한 것 자체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의 오해! 인간은 경제(물질)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불가피성을 사람들이 말하는 것. 혐오는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고. 그런데 자본주의 체제의 탄생 과정을 알게 되면 자본주의라는 것이 결코 인간 사회의 본질적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만약 인간의 생존이 물질(경제 혹은 돈)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를 말한다면, 유사이래, 자본주의 아닌 시대는 없었고, 자본주의 아닌 장소도 없었다. 인간은 언제나 생산했고, 소비했고, 교환해 왔지 않은가?   

 

휴버먼에 따르면, 경제체제로서 자본주의 태동은 멀리 잡아도 16C 정도이다. 자본주의의 시작은 ‘자본축적’과 ‘임금 노동자’의 등장이라는 2가지 조건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①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에 필요한 ‘자본 축적’은 16C에 아메리카로부터 금은(金銀)의 유입, 원주민의 노예화 등으로 이루어졌고 ②‘임금 노동자’는 16C~19C에 엔클로저 운동으로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이 도시 임금노동자로 전락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두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그 후 18C 프랑스 혁명 이후 부르주아 계급의 출현과, 기계의 발명 등 복합적인 것이 상호 영향을 주어 새로운 경제체제 즉 자본주의가 본격 작동한 것이다.

 이러한 산업으로써의 공장제는 19C에야 출현한 것이기에, 자본주의 역사를 짧게 잡으면 200여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유일무이한 최후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맑스가 말했듯, 자본주의 역시 생산 양식의 변화에 따른 경제체제의 변동일 뿐이며, 자본주의 내적 모순에 따라 변혁의 대상일 뿐이다.

  맑스는 자본주의 생산 방식이 가지는 본질적 모순, 즉 이윤율 하락과 자본 축척의 한계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는 그 내부에서 붕괴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그 대표적 징후가 바로 ‘공황’이다. 고전학파 등에서는 공황을 자본주의 체제의 일시적 문제로 파악하지만, 맑스의 지지자들은 자본주의의 필연적 귀결로 파악했다. 이제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할 시점인가?   

 

지금 미국을 위시한 세계 경제의 동반 추락에 대해, 신자유주의(시장 근본주의)의 폐해일 뿐, 자본주의의 자체의 실패로 보지 않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는 것 같다. 그래서 케인즈 식의 국가 개입 정책으로 경제를 다시 살릴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의 일시적 소강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분명한 몰락과 함께) 자본주의 장기적 쇠퇴 혹은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에 따른 붕괴의 시작으로도 분석하기도 한다.   

 무엇이 정확한 판단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혹 자본주의 체제 붕괴의 시작이라면, 이 다음 체제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노동 착취에 바탕한 자본주의가 몰락한다는 것이 곧 노동 해방을 의미한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자본주의 이후의 체제가 인간의 모습을 할 것이라는 것 역시 우리의 희망이자, 망상일 뿐이지 않겠는가?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봉건제가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하지 않은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처럼!

 맑스는 우리가 희망한다고 새로운 사회가 오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존 사회경제 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하고, 새로운 생산 양식이 출현해야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맑스는 당대의 사람들은 당대의 모순의 극한을 파악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 이 세계의 모습이 자본주의 모순의 극한이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의 추락이 어디까지 이르러야만 모순의 극한이란 것인지, 두렵기까지 하다.   

 

 내가 늦게, 아주 늦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이 세계는 절대로 도덕과 윤리, 즉 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힘’의 관계에 의해서만 움직이며, 특히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눈꼽만큼의 ‘인간애’도 발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 역시  언제나 ‘힘’에 호소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연대와 투쟁으로 이루어낸 결과물이  ‘그나마 지금의 사회’라는 것이다. 결국 이 세계는 서로의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것이다.

 자본가는 과학과 자연법칙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착취해왔고, 노동자는 ‘힘’으로 맞설 수 밖에 없었다. 왜 노동조합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왜 노조의 탄생은 역사적으로 필연적 결과일 수밖에 없었는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19C 제국주의 발생과 식민지 쟁탈 전쟁의 원인이었고, 이는 과잉 생산과 자본 과잉이 부른 필연적 결과였으며, 세계惡의 중심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풍요로운 상품 속에서도 대중은 가난할 수 밖에 없는, 인간 소외를 기본으로 하는 모순의 체제이다.  


 철거민들이 불에 타 죽었다. 전태일이 불에 타 죽은지 약 30년이 지나도 불에 타 죽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는, 이 땅은 어떤 곳인가? 폭력은 어떤 경우에도 나쁘다고 우리는 교육 받아 왔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배담론의 이데올로기임을 알아야 한다. 국가/자본/지배 권력은 언제나 폭력을 행사해 왔다. 경찰, 군대를 동원한 물리적 폭력 뿐 아니라, 법과 제도 등 은폐된 폭력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확대해 왔다. 약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호소할 경찰도 법도 가지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폭력이 나쁘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윤리의 외피를 두른 지배자의 담론에 봉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질문의 방식을 바꾸자. 당신이 나쁘다고 말하는 폭력은 누구를 위한, 어떤 폭력인가?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저항하는 철거민이 5명이나 불에 타 죽는 이 땅에서, 폭력은 나쁘다고만 말하는 당신은 윤리적인가? 

 왜 인간 해방은 힘을 동반하지 않고는 불가능할까? 지배자들은 절대로 스스로 양보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폭력과 개인의 윤리 도덕을 입술로만 말하며, 그들의 이익을 확대할 뿐이었다. 내가 역사에서 얻은 깨달음은, 폭력을 동반한 힘이든, 정당 정치의 힘이든, 단결과 연대에 기초한 운동이든, ‘정치적 힘’만이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라는 것이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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