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 미투 운동에서 기후위기까지
리베카 솔닛 지음, 노지양 옮김 / 창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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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에 방영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연상연하 커플의 연애를 현실적으로 그려내며 대중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이다. 여주인 손예진과 남주 정해인의 캐미가 너무 좋았던 드라마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내게는 좀 다른 기억으로 남아있다. 커피회사 가맹운영팀의 슈퍼바이저로 근무하던 손예진은 좋은 게 좋은 거다 주의로 회사 남자 상사들의 성추행을 웃으며 받아 넘기곤 해 동료들에게 '윤탬버린'으로 불린다. 하지만 자신을 소중하게 대하는 정해인을 통해 각성하고, 상사들의 성추행을 비롯한 꼰대짓을 일절 거부한다. 손예진의 변화를 시작으로 회사 내 여직원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남자 직원들의 성추행 문제가 공론화되지만 여자 직원들은 성추행 문제가 더 이상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나마 가해 남성들이 처벌받기를 원했던 손예진은 그 일에 대해 침묵 당하기를 강요받는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이야기인가?


  

  2017년 10월 할리우드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틴과 관련된 50명이 넘는 여성들의 증언으로 미국 내 미투운동이 촉발됐다. 미투운동은 SNS 등을 통해 성추행이나 성폭력 사건을 '#미투' 를 달아 고발했던 사회운동인데, 이 운동의 주체는 고발하는 여성이 아닌 여성들의 고발을 들어주는 우리 시민들이다. 


  2017년 이전에도 많은 여성들이 성폭력이나 성추행 사건을 고발했지만 우리 사회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가해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원하는 손예진을 찾아온 회사 측 변호사는 합의를 가장한 협박을 한다. "아직 피해자가 정해진 사건이 아니다. 성추행 사건이 공론화되면 당신 역시 비난을 피할 수 없을거다."


  1999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청바지를 입은 여성의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청바지를 입은 여성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바지를 벗길 수 없다는 이유로 피고 승소 판결을 내려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미투 운동 촉발 이후 피해자 여성들의 목소리에도 대중이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 대단한 성취다,


  리베카 솔닛은 이런 변화를 '새로운 성당을 짓고 자명종을 울리는 일'이라고 한다. 우리가 지금 맞이하고 있는 변화는 누군가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깨어나라고 소리쳐준 덕분이고 우리는 그들의 노동을 통해 변화를 맞이하고 깨어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됐다는 거다. 그래서 이전에는 들리지 않았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됐고, 주류의 언어가 아닌 비주류의 언어로 말하기가 가능해졌다. 가부장제 사회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여성들이 언어를 갖는 일이라고 한다. 여성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을 때 모든 관습과 통념은 무너지고 변화는 시작된다. 미투운동은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2012년 '아이들 노모어', 2013년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에서 이어져 2018년 '그린 뉴딜'로 이어졌다 . 주변부가 논의되다 중심으로 옮겨가는 일은 새로운 성당을 짓는 일이고, 비주류의 목소리로 말하는 이들은 자명종을 울리는 일이다. 그렇다면 보통 시민인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 필사하고 있는 책 정희진 선생님의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서 정희진 선생님은 공부하라고 한다. 여성의 일을 남성의 언어로 말하려 하는 순간 오류가 발생한다.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역사를 말하고 다음 세대 여성에게 전수해야 한다. 매 순간 공부하지 않으면 누가 여성이고, 문제인지 아닌지를 누가 정하는지를 알 수 없다고. 지금 나는 우리 시대 자명종 역활을 하는 분들의 글을 읽고 무작정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준이지만 책읽기를 통해 '나의 세계'는 분명 확대되고 있다.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지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그러다 보니 내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고, 참견하게 된다. 이런 변화 역시 새로운 성당을 짓는데 아주 작은 일부라도 보탬이 되고 있는 거겠지, 나는 연대란 기꺼이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공부하자.




  


이 건물의 자재는 우리의 아이디어와 희망과 가치이며 이는 우리의 대화와 에세이와 사설과 주장에서 나왔다. 누군가의 슬로건, 소셜미디어 메세지, 책, 저항 운동, 시위 또한 재료가 되었다. 우리는 항상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에 대해 말을 꺼냈고 자연, 권력, 기후 이야기를 하면서 이 세 요소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주장했다. 또 다른 사람은 공감과 연대, 인내, 협동과 집단행동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했다. 공정, 평등, 가능성을 말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처음에는 크지 않은 개별적인 목소리였고 먼저 도착한 사람들의 주장이었으나 점차 집단이 함께 추구하는 사업이 되었는데, 한 사람이 말하면 중요해 보이지 않지만 백만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말하고 그들의 말을 각자의 세계관과 매일의 행동에 적용하기 시작하면 힘을 얻는다. 이 구조 안에 살고 있는 우리도 점점 성장한다. - P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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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5-2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글 잘 읽었습니다 요새 저 밥누나 보는 중이거든요!! 전에 보다 말았었어요 그래서 더 잘 읽었습니다 뒤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군요
 
도시인의 월든 - 부족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태도에 대하여
박혜윤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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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1845년부터 1847년까지 2년간 사회를 떠나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갔던 시간을 기록한 에세이 [월든]을 출간한다. [월든]은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고전인데, 이 책을 잘 읽는 방법은 부유하듯, 산책하듯 소로의 문장을 그냥 읽는 것이다. 소로는 [월든]을 통해 인생의 정답이 아닌 마음 가는대로 살며, 느끼는대로 말하고 쓰며, 그래서 가끔은 모순적이긴 해도 괜찮음을 보여준다. 내 삶의 주인으로, 내 인생의 저자로 내가 중심을 잡고 서 있으면 다 괜찮음을 이렇게 멋지게 말해줄 수 있다니 그래서 나는 [월든]을 좋아한다. 


  [도시인의 월든]은 [숲속의 자본주의자]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박혜윤 작가님의 책이다. 서울대학교 영어영문과를 졸업하고 4년 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미국워싱턴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가족과 함께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미국의 시골로 들어가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는 삶을 산다.


  "정기적인 임금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도 생존할 수 있을까?" 

 

  실험처럼 시작된 '은둔'은 정혜윤 작가님에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되는 멋진 삶을 선물한다. 문명을 움직이기 위해서 모든 개인들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같은 속도로 더 많은 것을 늘 생산해야 하지만 정혜윤 작가님은 이에 반항한다. 정혜윤 작가님은 삶에 여백이 있음이 좋음을 알게 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고, 내가 내 삶의 유일한 주인이어야 하고, 세상 모든 것을 의식적으로 나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함을 깨닫는다. 그동안 배운 걸 사회에 되돌려줘야 하지 않냐, 깊은 산 속에서 소비를 줄여 소득없이 사는 사람은 패배자가 아닌가, 등의 사회적 시선은 무시해버린다. 세상일에는 정답이 없고, 그저 내가 원하고 내가 주인인 삶을 살면 된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옥수수가 자라는 것만 바라보고 있어도 내게는 그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

 

  [월든]에서 인상적이었던 문장 중에 '집안일을 즐거운 소일거리라고 생각해라.'가 있었는데 박혜윤 작가님 역시 집안일을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집안일은 굉장히 하찮지만 끝이 없다. 오늘 먹은 걸 치우고 오늘 입은 옷을 빨아도 내일이 되면 똑같은 양의 일이 쌓여 있다. 집안일은 절대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에 공포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저자는 어느날 문득 깨닫는다.내가 더럽힌 변기를 남에게 청소시킨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 존재의 핵심은 집안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우리 삶은 아무 의미 없지만 의미없음에 우울해하거나 고민하지 말고 집안일을 시작하는 거다. 내가 먹은 그릇을 치우고, 내가 더럽힌 화장실을 치우다보면 이 하찮은 노동에서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박혜윤 작가님은 아이들이 가사를 주도적으로 하게 하는데, 집안일을 통해 삶에 대한 기본적인 태도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집안일의 하찮음을 통해 모든 것을 하찮게 바라볼 수 있는 태도를 배울 수 있고, 하루만 물컵을 치우지 않으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때문에 오늘 하루 물컵을 닦지 않음이 결국은 죽음과 같다고. 집안일에서 시작해 죽음을 논하기까지 한다.

 

  퇴근무렵이 되면 늘 오늘 저녁을 뭘 해먹나,를 고민하는데 대충 먹어야지,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가사분담을 해서 지금 고등학교 딸아이는 빨래개기를, 재활용 버리기를 담당했던 아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떨어져 지내게 돼 그 일이 남편 몫이 됐다는게, 내가 그 동안 아이들에게 삶의 하찮음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생각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기도 했다. 내 꿈은 둘째가 대학교를 졸업하는 6년 후에 회사를 그만두고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있는 폐가를 구입해 리모델링해서 자연과 동물과 가까이 사는 것이다. 다들 노후자금을 걱정하고 투자에 골몰하고 있을 때 자연으로 돌아가는 삶을 꿈꾸는 내가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도시인의 월든]을 읽으면서 다 괜찮다,는 위로를 받았다. 모든 일에는 정답이 없으므로 지금 당장 노후 자금을 준비하지 않고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지 않더라도 내 마음이 가는 곳이 그 곳이라면 다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도 충분히 멋지고 의미있다고 내 어깨를 토닥여주는 책이었다.

집안일에 매진하는 건 내게 있어서 죽음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말한 지혜, 즉 죽음을 기억하고 매 순간 충실하게 사는 일을 나는 도저히 할 수 없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어떻게 내일 죽을 것처럼 살 수 았는가? 그러다가 오래오래 살면 어떡하나? 그런데 드딛어 매 순간 죽음을 생각하며 오늘 이 땅에 발을 꼭 딛는 법을 알아냈다. 나 자신도, 이 세상도, 별것 아닌 나 자신이 살아가는 인생도 하찮다. 그걸 똑바로 바로 응시하는 일은 바로 집안일을 하는 것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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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랜드
제시카 브루더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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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희경 작가님의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두 명의 하우스리스가 나온다. 김우빈 배우가 맡은 정준은 버려진 버스를 예쁘게 리모델링해서 바닷가에서 산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하는데, 경매일부터 배의 선장, 은희의 생선가게에서 생선 판매까지. 하지만 정준이 보여주는 삶은 억척스러움이나 가난이 묻어 나지 않는다. 그저 낭만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병헌 배우가 배역을 맡은 동준은 트럭 하나에 살림살이를 싣고 다니며 섬사람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엄마의 재혼 이후 엄마와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진 동석은 엄마 집이 있지만 엄마 집에 들어가지 않고 반항하듯 집 없이 트럭에서 산다.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하우스리스 두 사람은 빈곤이나 추락이 아닌 자유와 반항의 이미지로 비춰지기 때문에 어찌보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한다.



  <노마드랜드>에 등장하는 린다는 자신을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라고 불리기를 바란다. 열심히 살았지만 예순네 살 여성인 린다는 결국 가진 집도 없이 소형 트레일러에 살며 살아남기 위해 앞 날을 알 수 없는 저임금 임시 노동에 의존하고 있다. 자급자족을 꿈꾸고 소형 트레일러의 삶이 자유롭다고 말하지만 현재 그녀의 삶은 선택이 아닌 '떠밀림'에 의해서였다. 

  현재 미국에는 전통적인 형태의 주거지를 갖지 않고 밴이나 RV 차량을 이용해 길에서 생활하는 노마들들이 많다. 2007년에서 2009년에 미국을 시작으로 전 세계를 경제 위기로 몰고 온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많은 미국인들이 집값보다 더 많은 집담보 대출을 견뎌내지 못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튕겨져 나왔다. 이들은 차량에서 생활하며 임시직 일자리를 찾아 이동한다.

  린다 역시 캠핑장에서 관리자로 일하기도 하고 아마존 물류창고에서도 일한다. 아마존은 배송 피크 시작 전 육체적으로 힘든 업무를 여름 휴가를 보내는 일처럼 아마존 창고에서 일하며 우정을 쌓으라고 일자리를 홍보하지만 창고에서의 도난을 막기 위해 실내온도가 섭씨 37도가 넘는데도 창고문을 열어주지 않고 문 앞에 엠블런스를 대기 시켜놓고 임시직 노동자를 착취한다. 축구장 13개를 붙여 놓은 크기의 창고에서 은퇴한 나이를 넘긴 노마들들이 창고를 가로지르며 육체를 혹사시키며 돈을 번다. 미국의 아메리카 드림은 깨진 지 오래다. 아메리카 드림 뿐만 아니라 미국식 자본주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역시 깨지고 있다. 오히려 미국식 자본주의의 각자 도생만 남아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저자는 노마들을 피해자 집단으로 규정하지 않고 이들의 연대, 꿈과 희망을 그리며 책을 마무리한다. 린다는 어스십을 짓기 위해 땅을 사고, 어스십을 짓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 노마들들은 서로를 환대하고 서로를 도우며 공동체를 만들어 나간다. 결국 희망은 사람일까? 착취적 자본주의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구조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덜 소비하고, 최소한의 소득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자본주의에 속박된 삶이 아닌 내가 주체적으로 이끄는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길거리에서 잠을 자는 걸 법적으로 금지하고, 아마존과 같은 기업들은 저임금으로 임시직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결국 정치와 사회문제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데,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삶을 강제로든 자율적 의지로든 선택했더라도 국가의 보호 아래 최소한의 기본권은 지키며 살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표지를 채운 서부의 황량한 사막 풍경과 좁고 긴 길이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떠올리게 해 요즘 재독중이다. 1930년대 트랙터의 등장으로 땅을 잃은 소작농들이 캘리포니아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 1권에, 과일을 마음껏 따먹으며 돈을 벌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이들이 농장주에게 찾취당하며 멸시와 빈곤에 시달리게 되는 이야기가 2권을 이루고 있다. 대공황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가 와 닿은 곳은 결국 길에서의 삶이다. 우리에게 아직 선택지는 있을까? 이대로 계속 열심히 살아간다면 나의 노년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떠돌이,뜨내기,부랑자,정착하지 못하는 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밀레니엄에 들어선 지금, 새로운 종류의 유랑 부족이 떠오르고 있다. 결코 노마드가 되리라고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 여행길에 나서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형태의 주택과 아파트를 포기하고 누군가는 ‘바퀴달린 부동산‘이라고도 일컫는, 벤과 중고 RV, 스쿨버스, 캠핑용 픽업트럭, 여행용 트레일러, 그리고 평범한 낡은 세단에 들어가 산다. 그들은 중산층으로 직면하던 선택들, 선택 불가능한 그 선택들로부터 차를 타고 달아나는 중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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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밤 - 당신을 자유롭게 할 은유의 책 편지
은유 지음 / 창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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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회사일이 바쁜 하루였다. 퇴근 시간은 다가오지만 집에 가도 가사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더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옆 자리 동료에게 "퇴근해서 집에 갔는데 누가 짠 하고 저녁을 차려 놓고 있으면 너무 좋겠다"며 퇴근했는데, 진짜 저녁이 차려져 있었다. 목감기가 심해서 연차를 내고 쉬고 있던 신랑이 컨디션이 좋아졌다며 차려준 밥상이었다. 정희진 작가님은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에서 자기 입에 들어가는 밥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늘 신랑과 아이들의 입에 들어갈 밥을 차려주면서도 내 입에 들어갈 밥을 해준 신랑에게 "고마워"라고 말한다. 옛날 사람이라 그런가. 신랑의 가사노동이 늘 고맙고,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해방의 밤]은 은유 작가님이 주부로서 살아온 지난 삶이 녹아있어서 유난히 공감하며 읽은 책이다. '할 것들로 꽉 짜인' 일상에서 '밤'은 은유 작가님에게 해방의 시간이었다고 한다. 하루치 노동을 마치고 나를 대면하는 시간, 가까스로 입장할 수 있는 나만의 시간.


20년을 직장일과 가사일, 육아를 병행하며 살아오면서 나 역시 아이들이 잠이 들고 난 후의 '밤'에만 오롯이 나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아들이 성인이 되고 딸이 17살이 되면서 '나를 위한 시간'이 많아지지 않을까, 라는 기대로 시작한 여러가지 것들을 해내는 게 여전히 버겁고 힘들 만큼 시간은 늘 부족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동, 가사노동. 


은유 작가님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는 밤'에 '나를 살린 숨구멍'인 책으로 편지를 쓴 글을 모은 [해방의 밤]은 '살림서사'와 책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보물 같은 책이었다. 


'책을 통해 대비할 수 있는 일이란 없고 벌어진 일은 벌어지고 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밤에는 문학만이 나를 살려두었다" -박혜진 [이제 그것을 보았어] 중에서 / [해방의 봄] p.358


좋은 책을 너무 많이 소개해주셔서 장바구니가 폭파 직전이지만 가사일과 직장일 등 꽉 짜인 일상 속에서 '바깥을 보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낀 책이었다.


+책은 책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나온 책은 '나'를 통과하면서 또 따른 색을 띄게 되겠지.

인터넷에서 인종차별 철폐 집회 사진을 봤는데 흑인이 든 피켓에는 이런 문구가 써 있었다. ‘평화는 백인의 단어다. 해방이 우리의 언어다.‘ 모아놓고 나니 이 책에도 해방이란 말이 꽤 여러번 등장한다. 읽는 사람이 되고부터, 즉 고정된 생각과 편견이 하나씩 깨질 때마다 해방감을 느꼈기에 쓴 것 같다. 나도 해방을 우리의 언어로 삼는다. 비록 앎이 주는 상처가 있고 혼란과 갈등이 불거지기도 하지만, 무지와 무감각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의 무신경함이 누군가의 평화를 깨뜨릴 수 있으며, 적어도 약자의 입막음이 평화가 아님은 알게 되었다. 더디 걸리더라도 배움을 통한 해방은 내적 평안에 기여하고 낯빛과 표정을 바꿔놓는다고 믿는다. 해방은 평화를 물고 오는 것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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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끝의 버섯
애나 로웬하웁트 칭 지음, 노고운 옮김 / 현실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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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수작'을 발견한다."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강원도 동해로 이사 온 지 올해로 10년 차가 됐다.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는 90년대 후반에 지어진 저층 아파트로 건물의 노화만큼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주로 거주하는데, 옆집 할머니, 5층 할머니, 201호 아줌마 등 주거민이 서로 가깝게 지내며 '두레'의 역활을 한다. 


"옥수수 살래?" 하고 엄마에게 전화가 오면 장마철이 다가오는 구나 생각하고(1층 할머니가 텃밭 정도의 땅에서 옥수수를 키우신다) "고구마 살래?" 하고 전화가 오면 늦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겠구나(5층 할머니가 텃밭에서 고구마를 키우신다) 생각한다. 202호 아저씨는 퇴직 후에도 몸을 놀리지 않고 버섯도 따서 나눠 먹고, 참두릅도 따서 나눠 먹는다. 제삿상에 올라오는 문어는 늘 202호 아저씨가 잡았을 때 미리 사서 냉동실에 얼려 놓은 것이다. 


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의 어르신들은 돈의 가치로 환산되지 않는 노동을 하지만 나는 엄마를 '현장중개인'으로 끼고 돈을 주고 옥수수와 고구마 등을 구입한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하다."


라는 문장 때문에 읽게 된 <세계 끝의 버섯>은 폐허가 된 오리건주의 소나무숲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통해 다양한 '패치'들로 구성된 주변 자본주의적 세계를 너무 멋지게 보여주는 '수작'이었다. 제국주의적 수탈과 전쟁으로 오리건주로 온 미옌인과 몽인, 난민으로 미국에 왔다가 오리건주로 온 이주민들, 베트남 참전 상이용사로 자본주의적 세계와 맞지 않아 오리건주로 온 미국인 등  '확장적 자본주의'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이 목재산업으로 폐허가 된 오리건주의 숲에서 버섯을 채집한다. 송이버섯은 1980년대 초고속 성장을 이룬 일본에서 최고급 선물로 통용되는데, 일본에서 채집된 송이버섯으로 수요가 충족되지 않자 오리건주에서 채집된 송이버섯을 수입한다. 채집인들에 의해 채집된 송이버섯은 '프리랜서 구매인'과 '현장중개인', '대규모구매업자'를 통해 상품화되고 자본화되는데, 이 과정을 저자는 구제축적이라고 한다. 


비자본주의적인 패치들이 자본화되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책을 시작한 저자는 파괴된 숲을 어떻게 부활할지,자본주의와 지구 생태계 간의 어떻게 형성해나가야 할지, 다종의 얽힘이 만들어가는 자본주의적 교환가치, 주변자본주의적 공간을 어떻게 형성해나갈지, 소나무와 버섯처럼 사람과 자연은 어떤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로 확장해서 나간다. 


부모님이 거주하는 아파트의 어르신들의 옥수수 농사와 고구마 농사 역시 비자본의적 패치이고, 부모님의 아파트는 패치를 구성하는 공간으로서 자본주의적 노동을 하지는 않지만 자본을 생성하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공간일 것이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조교수로 계시는 노고운 교수님이 번역을 하셨는데, 번역가님은 <해재>에서 묻는다. "번역은 노동일까?"


번역도 너무 훌륭하고 구성도 훌륭하고, 오랜만에 읽는 내내 감탄하면서 읽은 책이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지, 여러가지 질문을 함께 던져주는 책. 




이보다 더 글로벌 공급 사슬에 더 적합한 참여자가 있을까? 자본이 있든 없든 자발적이고 준비된 기업가들, 거의 모든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신들의 종적적이고 종교적인 동료를 동원할 수 있는 기업가들과의 접점이 바로 여기다. 임금과 혜택은 필요하지 않다. 공동체 전체가 동원될 수 없고,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동의 이유 때문이다, 복지의 보편적인 기준은 거의 유의미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들의 활동은 자유의 프로젝트다. 구제축적을 찾는 자본가들이여, 여기에 주목하라.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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