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버린걸까를 한참 생각하다 보면 잠깐 시작이 어디었지?하고 원점으로 돌아온다. 가벼운 농담, 약간의 용기, 작은 호기심 따위에서 시작된 그것이 어째서 이토록 집요하게 따라붙어 옭아 메는지 알 수 없게 되버린다. 고작 그런 것 따위가 일을 이 지경으로 몰고왔다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다. 아니 납득할 수가 없다. 대체 어디까지 계산하고 얼마나 조심하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시시각각 긴장의 날을 세우고 기민하게 대처해야만 겨우 나를 지킬 수 있다. 삶이란 지독히 위험하고 위태롭다. -- 별 일일 수도 별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날 덜컥 벌어진 어떤 사건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농담이 될 수도 있고 인생을 뒤흔드는 충격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무수한 사건과 사고 속에 우리는 놓여진다.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몫이어야 하는데, 왠갖 참견과 간섭이 넘쳐난다. 남의 얘기는 쉽고 남의 사건은 고통없이 흥미진진하다. 다정한 이웃이나 위로자가 될 수도 있고 교묘한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 당사자와 주변인. 정작 당사자는 선택이 어렵고 주변인은 쇼핑하듯 선택할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노릇이다.-- 소설집.속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난 ‘밀회’가 가장 좋았고 실제로는 ‘오늘의 커피’를 꿈꾼다. 다행히도 얻어맞을 일보다는 후려쳐줄 일이 많다. 언젠가를 위해 커피숍도 다니고, 손힘도 좀 길러둬야겠다. 거듭 생각하기 억울하고 서러워 적당히 용서하고 열심히 지운 기억들이 언젠가 나를 가볍게 떠날 상상을 하니 즐겁다.
- 읽으며 한숨을 푹푹 쉬었더니 무슨 일이냐 묻더라. ‘편치 않아서’라고 했다. 멕시코 이민 1세대의 이야기라 마음이 편치 않다고. 나는 어쩐지 쭈욱 그래왔다. 그냥 그렇구나, 안타까운 비극이구나로 그치지 못하고 몹시 불편하게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행동하고 실천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래 불편하고 오래 부대낀다. 억울한 것들만 보면 그렇다. 참 견디기 힘들다. 왜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했을까, 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을까. 그 한을 누가 달래주려나. 누가 알아주려나. - 망국의 한이 내내 들러붙어 이도저도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 같은 작금의 현실. 그 당시를 살아냈던 사람들은 어땠을까 그들이 잃은 것과 지금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스개로 ‘국가가 국민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냐’라며 자조섞인 농담을 뱉다가 최근에야 ‘세금 내는 게 안아까워졌어. 최소한 전처럼 사용되진 않겠지’라고 말하게 되었다. 국가가 최소한의 역할을 해줄 거라는 소박한 기대를 품는 요즘, 어느 자리에서건 인간의 됨됨이가 가장 중요하구나를 깨닫는다. 방법이야 다를지라도 기본이 된 인간이어야 겠구나 싶어진다. 우리는 너무 오래 국가에게 버림받았던 것이 아닐까? 너무 오래 쓸모를 강요당했다. 망국의 한은 국민보다 국가가 더 중요하다고 우리를 집요하게 붙들었다. 나는 어디서건 어느때건 보이지도 않는 국가보다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사람이 중하다. - 인간의 목숨은 참으로 모질고 대단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 참으로 집요해서 어떻게든 적응하고 어떻게든 살아낸다. 그 모진 목숨의 선택에 대해 누가 항변해줄까. 그저 살아내는 것외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고 누가 말해줄까. 각기 다른 마음으로 출발했고 각기 다른 선택을 하며 각기 다른 삶을 살아낸다. 그들은 아주 멀리서 와서 아주 멀리서 죽었다. 그래도 살아낸 흔적은 여기저기 남는다. -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믿는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같은 것을 믿는다 말해도 그것이 다른 경우가 많다. 무엇을 믿는가와 어떻게 믿는가는 따로 생각해선 안된다. 무엇을 어떻게 믿을 것인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야 한다. 끝없이 의심하고 끝없이 반성하고 끝없이 확인해야 한다. 최소한 내가 믿는 것을 누구도 비난하게 해선 안된다. 내가 믿는 대상의 가치를 내 스스로 떯어트려선 안된다. 한국의 교회에 대해 다시 생각이 많아진다. 사실 한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마음이 아프다, 계속 그럴 것이다.- 작가의 글 속에서 견디고 살아내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가공의 존재 같아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렇게 살아냈을 법하고 이름과 모습을 바꾸어 어딘가 살고 있을 법하다. 살아내는 것과 살아가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김슨생에게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꽤 나이가 많아서 우리 어머니보다 연상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시선이 자유롭고 왕성한 호기심을 드러내고 위트가 넘친다고. 종종 그들이 어린시절(젊은 시절)이나 나이를 언급할 때 마다 놀란다고. 그들이 젊어서 쓴 글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변해왔고 그 속에 그들의 나이와 경험과 지혜를 발견하면 더더욱 신기하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폴 오스터는 내가 십수년 전 처음 만났던 ‘달의 궁전’때부터 늘 40대 같은 인상인데도 이 글에선 유독 그의 나이를 느끼게 된다. 이제 삶을 돌아보며 그간의 일들 속에서 굳이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끄집어 낼 수 할아버지인 것이다. - 무려 47년생! 줄리언 반스는 46년생, 하루키는 49년생. 나는 그 시대의 작가들을 좋아한다. 그때마다 동 시대의 한국인들에 대해 생각한다. 왜, 그들은 딴나라의 동시대 사람들처럼 자유롭고 편안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피맺힌 절규나 소리없는 눈물이나 자기 가슴을 치는 글을 쓰고야 마는 것일까.를 생각하다보면 슬프고 아프다. 한국의 그 세대가 가진 고통과 절망과 분노와 불안과 인내에 대해 안타깝고도 고맙다. 그들 덕에 이만큼의 나라가 되었다고 참 고생 많으셨다고 당신들도 젊어서 많은 기회와 선택이 가능했다면 더 크고 거창하고 더 섬세하고 내밀한 세계를 가질 수 있었겠지만 그 대신 나라를 나라꼴로 만드는 것에 기여해준 것에 감사한다. - 작가의 많은 흔적들이 담겨있다. 자서전이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의 기억을 고스란히 따라갈 수 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30년을 함께한 그의 아내를 여전히 너무도 사랑한다는 고백이다. 정말 꼭 맞는 제 짝을 만나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고 그런 면에서 폴 오스터는 엄청난 행운아다. 물론 아무런 착오도 갈등도 혼란도 없이 파바박 짠하고 그 행운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몹시 부럽다.- 폴 오스터는 인생의 겨울로 들어섰다. 나는 어느 계절을 살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무관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감추고 살아가는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 뒤엔 무엇이 감춰져 있고 어떤 다음이 있을까. 내가 가장 궁금한 것은 사람이고 그들의 삶이다. 낱낱이 알 필요는 없다. 그들이 억울했다하면 내 억울함을 떠올리며 함께 분개하고 그들이 울음을 터트리면 손수건을 건내며 내 눈물을 손등으로 쓱 닦고 싶다. 그들이 웃는다면 언제고 내게도 즐거운 일이 생길거라 기대하고 그들이 반짝이면 내게 반사광이라도 비춰줄 것만 같다. 그저 이해하고 이해받고 싶은 욕구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은 실제로 듣지 못할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 삐삐 세대. 라고 말하는 것도 좀 재밌다. 삐삐가 주는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감과 불안과 초조와 긴장에 대해 생각해봐도 그 시기에 내가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고등학생일 때라 감흥이 덜하지만. 삐삐를 받고 전화기를 애타게 찾던 사람들과 울리지 않는 삐삐를 한없이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떠올라 그랬었지 싶어진다. 단절도 아니고 소통도 아닌 일방통행의 그 기계가 많은 이들을 안달나게 했음은 틀림없다.- 이 글을 쓸 무렵의 작가는 아마도 30대가 아니었나 싶다. 어떤 허구의 글에서도 작가란 살폿 드러나게 마련이고 소재도 단어도 막 어른이 된 듯한 인상이 남아있다. 지금 글에 비하면 어딘지 날 것 같아서 작가의 세월이 어땠을지 궁금해진다.- 현실과 상상을 잘 버무리면 소설이 된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떠랴. 즐거우면 그만이다.
작가의 글을 처음 만났는데, 신인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꽤 연배가 있는 작가였다. 내가 모르는 작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만나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될 지. 언제 뒤통수를 후려 맞을지 대성통곡을 하게 될 지 즐겁게 기다려야겠다.- 단편 모음인데 빠짐없이 다 좋았다. 그 중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강의’, ‘신의 말을 듣다’,’안정한 하루’는 특히 더 좋았다. 8편 중에 4편이 특별히 좋았다고 말하게 된 것이 기쁘다. 다른 글이 더 읽고 싶어졌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많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시대가 아버지들에게 더 많은 변화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내 아버지의 아버지 세대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한 가족의 상징이고 대장이었다. 내 아버지 세대는 가족의 생계와 안녕을 책임져야했다. 그리고 지금의 많은 ‘아빠’들은 다정하고 가정적이고 섬세함을 요구당한다. 경제적 능력은 기본이다. 이토록 급진적이고 과격한 요구를 감당하면서도 존경받지 못한다. 물론 시대와 사회가 아버지들만 몰아세우는 것은 아니지만 완고한 그들이 감당하기엔 버거울거라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응원한다. 내 아버지의 작은 뒷모습도 이십 몇년 전의 편지도 이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도 그 모든 것을 대신해 지금의 아버지들을 응원한다.- 작가의 말에서 사람을 이해하고 세상을 파악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모든 다른 이야기는 닿아있다. 우리가 오해와 불안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첫단추를 잘못 끼운 우리가 돌이킬 방법은 없는지, 우리가 혹 잊은 것은 없는지에 대해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건과 사람과 세상을 많은 작가들의 시선을 통해 만남으로써 오해를 줄일 수 있길 바란다. 우리의 편협한 시야를 넓혀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