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소아를 알게 된 것은 ‘불안의 책’ 때문이다. ‘불안의 책’을 알게 된 것은 몇년 전 서점나들이에서 제목만으로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미루다가 읽었는데 반하고 말았다. 내게 ‘불안의 책’은 잠못드는 밤을 위한 책이었다. 거의 정확히 그렇게 말했는데, 김한민 작가도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낮에 읽을 수 없어, 소란 중에 읽을 수 없고 무작정 활자만 따라갈 수도 없어.였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같은 이유로 미루고 있는 책이 있는데 이젠 준비가 된 것도 같다. _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라는 김광석의 노래가 있다. 페소아는 너무 골몰했던 게 아닐까 싶다. 깊이 빠지고 쉽게 질린다고 했지만 실제로 가장 골몰했던 것은 자신이고 그 너무 깊은 생각이 많은 이명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어느 심리테스트에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라고 나온 적이 있다. 나는 페소아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타인과 함께 할 수 없다. 무엇을 완성해낼 수(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없다. 그것이 주는 공포나 외로움도 컸겠지만 자유로움이나 편안함 또한 컸을 것이다. 나는 종종 아, 나는 정말 사람들을 싫어하나?와 왜 너무 내 일처럼 아픈가?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런 갈등을 페소아를 통해 만난다.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 너무 지치고 괴롭다가 아무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 뜻하는 바를 위해 대담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가 좀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 우리는 보통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꼬집을 수 없다.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다. 이럴 수도 있도 저럴 수도 있다. 때론 스스로에 대한 편견으로 자신을 가두기도 한다. 점점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어지러워진다. 왜 그냥 가볍게 살아지지 않는지 생각하다가 그렇게 사는 것은 시체나 다름없다며 분노한다. 내겐 페소아가 나의 상위버전 같다. 물론 30000% 업그레이드된 상위버전이지만 말이다._ 페소아의 무수한 이명들에 대해 몰랐다. 사실 아는 게 전혀 없었다. 그저 글 속의 페소아에게 깊이 공감했을 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손톱만큼 더 페소아와 가까워진 것 같다. ‘불안의 책’에서 느꼈던 페소아가 내가 생각했던 인물이 맞다고 확인한 기분이다. ‘불안의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그 책을 읽는 동안 이무도 만나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다.
아르누보의 장식성을 사랑하지만 사실 클림트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일단 금이 싫다. 금색을 칠한 게 아닌 금을 펴발랐다는 클림트의 대표작들을 근사하다고 좋아하지만 사랑하진 않는달까? 이제껏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유디트고, 가장 먼저 클림트라는 화가를 인식한 계기 역시 유디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구입한데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매력과 김슨생이 클림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고 싶었던 페소아를 제쳐두고 클림트부터 집어 들었다._ 과거의 사회적, 보편적 분위기와 현재의 시대상이 충돌할 때 갈등하게 된다. 예술을 작품으로서만 대할 것인가, 예술가의 일생을 포함할 것인가 역시 갈등 대상이다. 그 갈등을 외면할 수 만은 없어서 작품은 좋지만 사람은 싫어라던가, 그 때는 저랬다지만 옳지는 않지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면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내 자신도- 그래서 작품은 못 이긴 척 받아들이고 슬쩍 감탄한다. 원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원화가 주는 느낌과 인쇄된 것들 사이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화를 보게 된다면 이런저런 갈등 따위 까맣게 잊을지도 모른다. _ 예술가의 삶, 그가 빚어낸 작품, 영향을 끼친 모든 것들. 을 다 분석하고 헤집을 필요는 없겠다.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니 내 기준만 옳다고 악을 쓸 이유도 없다. 가만히 생각하자면 클림트 역시 좀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거장의 삶이란 다 그런걸까? 원하고 원하지 않고. 바라고 바라지 않고. 절실하지만 버거운. 그렇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에밀리를 불러와’라는 그의 외마디가 그래 당신도 애썼구나 싶게 만들었다. _ 작품을 대할 때 해설은 미뤄둔다. 그림을 처음볼 때 도슨트의 설명은 불편하다. 온전히 찬찬히 뜯어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만 같다. 물론 두번째, 세번째 볼 때는 설명이나 분석도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 매력적인 것을 더 잘 알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_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매력은 거장의 삶을 그들의 공간에서 다시 만난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개인의 호오에 따라(작가의 역량이 아닌-)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니체를 읽으며 받은 느낌과 클림트나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받은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읽는 중인 페소아 역시. 클림트나 셰익스피어는 느슨하게 읽은 반면 니체와 페소아는 책을 내려놓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러니 큰 관심없는 푸치니를 살까말까 갈등할 밖에.
작가가 언급한 역사서 중 읽은 것은 사피엔스 뿐이다. 언급된 모든 책들 중 읽을 엄두가 나는 것은 ‘총.균.쇠’와 ‘창백한 푸른 점(이건 역사서로 분류되있진 않지만-)’ 단 두 권 뿐이다.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사기 열전’ 정도? 역사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릴적부터 관심이 많았다. 제법 열심히 공부했지만 그래봐야 기억나는 것들은 지극히 단편적이다. 역사의 큰 줄거리를 읊을 수도 없고 왕조와 사건을 짝지을 수도 없다. 그저 인류는 이렇게(적당히) 시간을 지나왔고 지나갈 것 정도만 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가 가지는 의의에 대해 역사서의 중요성에 대해선 절감하고 있다. 답습하는 것들이 눈에 보인달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각기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밖에 없다._ 작가가 이해하기 쉽게 써 준 덕분에 역사서들에 대해, 역사가들에 대해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 관점에서는 사건들보다 흐름이나 이해가 중요하게 다가오고 그것들이 마치 복선처럼 여겨진다. 과거에 사로잡히기 위한 것이 아닌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말처럼 이 책은 잘 만들어진 패키지가 아닌가 싶다. 궁금하지만 엄두가 안나는 것을 갈무리해서 슬쩍 알려준 느낌이다. _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좀 어둡다. 아니 어둡다기 보다는 두렵다. 다만 늘 감당해온 것에 대해 막연한 희망을 품을 뿐이다. 문제의식을 갖는 것, 그 안에 살아움직이는 인간의 면면을 살피는 것. 어떻게든 우리는 변화할 것이고 미력이나마 보태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길 바랄 뿐이다. _ 통찰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정답이든 아니든 각자의 생각과 기준으로 멀리보고 과거를 통해 확인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역사란 거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아주 사소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많은 것들이 지금을 바꾸고 미래를 만든다. 그 많은 것들에 희망을 걸어본다. #역사의역사 #유시민 #돌베개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장은진/ 무엇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에 대해선 모두 다를 것이다. 어딘가에서 날리는 부드러운 티슈가 될 수도 있고, 배고픔이 될 수도 있고, 고양이가 될 수도 있다. _대기자들-김숨/ 숨이 막힐 지경이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모든 것에 그렇더라. 불이익을 당하지 않으려고 촉각을 곤두세운다. 억울한 것이 많아서 그런가 싶어진다._엘로-윤이형/ 습작 판타지 소설들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글은 좀 더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_키즈스타플레이타운-김이설/ 무엇에 대항하기 위해 같은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다. 다만 나를 죽도록 아프게 했던 일에 눈감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다._낙하하다-황정은/ 어디쯤인지 알 수가 없다. 끝 혹은 시작이 언제인지도 모른다. 결론이나 원인 따위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저 그 지난한 과정 중에 있을 뿐.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찾고 몰두하는 사람들. 이제까지의 대단하고 엄청난 세상을 변화시킨 모든 것들은 전부 사람이 한 일이다. 언젠가는 사람이 아닌 것들로 인한 변화와 발전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아직까지는 전부 사람이 한 일이다. 무엇이든 그 뒤에 사람이 있다. 그 뒤에만 있는가. 아니 결국 그 모든 결과도 사람에게 작용한다. 그것을 간과할 순 없다. 그래선 안된다._인류의 비약적인 발전과 참담한 비극을 가져온 원자과학은 이제 너무도 익숙한 일상이 되었지만 여전한 공포로 존재한다. 처음 순간을 만든 사람들의 의도는 어땠을까? 모든 것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그것이 대단한 것일수록 그 간극은 크다. 에너지의 미래냐, 도시를 날려버릴 무기냐는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의 몫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이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아선 안된다. 그들 역시 사람이고 그들 역시 갈등한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변화엔 갈등과 혼란과 고뇌가 따르기 마련이다. 개인들이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인가에 대해 원자과학은 지나치게 위험하고 매력적인 부분일 것이다._ 과학과 과학자들이 어디까지 감당해야 할까? 그것으로 파생되는 모든 문제들에 그들의 책임을 물어야 할까? 사실 나는 정치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악용한 이들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인류에게 위험가능성을 따져 모든 것을 결정하고 판단하라고 한다면 인류는 성장할 수 없다.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단 그것이 생명이어선 안된다. 내 기준은 명료하다. 원자과학은 우리에게 엄청난 에너지와 비극을 동시에 제공했다. 원자과학자들을 비난할 순 없다. 그들의 목적을 모두 따져볼 수도 없다. 난제다. _ 읽기에 어렵진 않았다. 과학적 이해가 있다면 좀 더 읽기가 즐거울지도 모르겠으나 과학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의 열정, 갈등, 혼란, 경이, 고뇌, 관계와 상황들에 대한 이야기다. _ 그 찬란한 빛 뒤의 위험과 공포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할 시점이다. 미래를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가. 불편을 감수하는 대신 안전을 얻는다면 인류는 과연 안전을 택할까? 불편을 견딜 수 있을까? 발전과 변화의 옳고그름에 대해 생각할 것은 아니다. 단 그것을 최우선으로 삼느냐는 고민해야 할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