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누보의 장식성을 사랑하지만 사실 클림트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일단 금이 싫다. 금색을 칠한 게 아닌 금을 펴발랐다는 클림트의 대표작들을 근사하다고 좋아하지만 사랑하진 않는달까? 이제껏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역시 유디트고, 가장 먼저 클림트라는 화가를 인식한 계기 역시 유디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구입한데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매력과 김슨생이 클림트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고 싶었던 페소아를 제쳐두고 클림트부터 집어 들었다._ 과거의 사회적, 보편적 분위기와 현재의 시대상이 충돌할 때 갈등하게 된다. 예술을 작품으로서만 대할 것인가, 예술가의 일생을 포함할 것인가 역시 갈등 대상이다. 그 갈등을 외면할 수 만은 없어서 작품은 좋지만 사람은 싫어라던가, 그 때는 저랬다지만 옳지는 않지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면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 물론 내 자신도- 그래서 작품은 못 이긴 척 받아들이고 슬쩍 감탄한다. 원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원화가 주는 느낌과 인쇄된 것들 사이엔 분명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원화를 보게 된다면 이런저런 갈등 따위 까맣게 잊을지도 모른다. _ 예술가의 삶, 그가 빚어낸 작품, 영향을 끼친 모든 것들. 을 다 분석하고 헤집을 필요는 없겠다. 저마다의 기준이 다르니 내 기준만 옳다고 악을 쓸 이유도 없다. 가만히 생각하자면 클림트 역시 좀 외로운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거장의 삶이란 다 그런걸까? 원하고 원하지 않고. 바라고 바라지 않고. 절실하지만 버거운. 그렇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는가. ‘에밀리를 불러와’라는 그의 외마디가 그래 당신도 애썼구나 싶게 만들었다. _ 작품을 대할 때 해설은 미뤄둔다. 그림을 처음볼 때 도슨트의 설명은 불편하다. 온전히 찬찬히 뜯어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만 같다. 물론 두번째, 세번째 볼 때는 설명이나 분석도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 매력적인 것을 더 잘 알고 싶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_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매력은 거장의 삶을 그들의 공간에서 다시 만난다는 점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개인의 호오에 따라(작가의 역량이 아닌-) 많은 차이가 있을 수 있겠다. 니체를 읽으며 받은 느낌과 클림트나 셰익스피어를 읽으며 받은 느낌은 전혀 다르다. 읽는 중인 페소아 역시. 클림트나 셰익스피어는 느슨하게 읽은 반면 니체와 페소아는 책을 내려놓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러니 큰 관심없는 푸치니를 살까말까 갈등할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