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를 수선하기
마일리스 드 케랑갈 지음, 정혜용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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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슨생은 이 글이 묘하게 느려서 집중하기 힘들다고 했다. 내겐 좀 달랐다. 독특한 속도감. 막 달음치는 구간이 있고 멈춰선 듯한 구간이 있다. 문장의 속도감에 적응할 수 없어서 급했다가 늘어지는 상황이 반복되며 긴장을 더했다.
- '수선'이라는 단어는 원작 그대로인지 번역하며 따라붙은 것일지 모르겠다. 그 '수선하다'와 '생명'의 대비가 너무도 선명해서 거부감이 들다가도 장기이식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풀어낸 이야기에서 '수선하다'는 단어는 너무도 적절했다.
- 장기이식의 처음부터 끝. 모든 인물이 그려졌다. 그 장기이식에 관계된 모두, 그들 각자에겐 너무 다른 제멋대로의 일상이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생명을 옮겼다. 살아있는 듯 죽은 자인 시몽과 시몽의 마지막을 결정한 의사와 시몽의 생명을 나누는 것에 동의한 그의 부모와 시몽의 심장이었던 쥘리에트와 시몽의 심장을 꺼낸 비르질리오와 시몽에게 심장은 받은 클레르와 클레르에게 시몽의 심장을 옮긴 아르팡과 그 중심에 있던 토마. 그들 모두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 나는 한번도 그런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 생명이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고에서 둘. 주는자와 받는자 그리고 그의 가족들 이상은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무도 평이하고 너무도 다양한 일상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장기이식'이 아니어도 모든 순간 모두에게 각자의 삶이 있다. 그것이 어떻게 닿아 있든 그들 각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든 그들은 살아왔고 살아간다. 그 살아감에 대해 별거 아닌 치열함에 대해 놀라게 된다. 살아있는 모든 자들은 대단하다. 그 생명은 놀랍다.
- 한참전에 장기기증 서약을 해두었다. 쓸모있는 몸뚱이가 되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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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하는 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8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박인원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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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초에 겨우 반 읽고 던져뒀다. 어쩐지 읽히지가 않았고 마음이 심란했었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겠지만 왠지 내용이 그랬다. 글렌 굴드에 대한 아니 글렌 굴드가 등장하는 글이라니 클래식에 문외한이면서도 글렌 굴드 연주곡들을 들으며 읽었는데 도무지 집중할 수 없었다.
때가 있는 모양이다. 책도 딱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어제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지난 번에는 겨우겨우 반을 읽은 거라 처음부터 다시.
이번에는 잘 읽힌다. 그래, 이런 내용이었지. 아, 이런 내용도 있었던가? 다 때가 있는 것이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르가 친구고 거기에 살리에르와 수준이 비슷한 친구가 한 명 더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을 다 해도 열 명 남짓이다. 글렌 굴드, 범접할 수 없는 천재성을 눈 앞에서 만나고 심지어 그와 친구가 된다면. 시시각각 상대의 천재성을 확인하고 매번 자신과의 차이를 절감하게 된다면. 천양지차라 어차피 틀려먹은 것도 아니고 아주 약간이지만 극명한 수준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그런 상대가 나를 몰락하는 자라고 부른다면- 몰락하는 자는 어떤 것도 남길 수가 없고 몰락하는 자를 지켜보는 자만이 무엇이건 남길 수 있다. 서서히 무려 28년간 몰락하는 자를 지켜본 자가 남긴 이야기인 것이다.
나는 어차피 천재도 수재도 아니고 범인에 불과해서 편하다. 굳이 올라갈 일도 없고 올라가려 노력해 본 적도 없고 정점에 서는 것 따위 꿈조차 꿔본 적이 없고 덕분에 굳이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 다행이다.
한 때, 지독하게 나만 당하고 있는 것 같아 괴롭던 시기가 있었는데 지나보니 뭐 다들 그렇더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해도 각자에겐 각자의 고통이 가장 큰 법이니 그것도 의미가 없다. 다들 아프고 울고 억울해하며 산다. 그것도 어느 이상이 지나면 지치고 질리게 마련이라 그만두기로 했다. 상대적인 평가는 집어치우고 자기 본위의 만족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니 좀 더 편해졌다.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것을 당연하게 손에 쥔 상대를 만나고 나는 절대 그것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은 좀 비참할 것 같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안분지족의 자세로 살아가야겠다고 한번 더 다짐해본다. 응? 이거 이 묘한 이야기에 대한 감상보다는 문장에 대해, 서술 방식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그것을 설명하기엔 내 수준이 비루하다. 독특하고 놀랍다는 말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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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처 나비사냥 2
박영광 지음 / 매드픽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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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그니처 - 박영광 ]
작가의 전직이 형사다. 아니 전직도 아니고 현직으로 수사팀에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선지 경찰 조직 내의 일들이 현실성있게 그려져 있다. 과하지 않고 자연스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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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전 정말 모든 뉴스에서 다루던 유영철, 정남규 사건을 재구성해서 작가적 상상력을 추가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런 범죄들을 마주할 때마다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럴수가 있을까 나름 납득해보려 시도한다. 하지만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들의 삶에 어떤 고통과 참혹함이 있었다해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다. 처벌도 중요하지만 어떻게하면 그런 사람을 덜 생기게 하느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점점 더 범죄자의 연령이나 특징이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옛날엔 힘세고 무섭게 생긴 아저씨, 어딘지 수상해보이는 얼굴이 범죄자의 전형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끔찍한 강력범죄도 우리 머릿속에 자리한 무서운 사람들이 아닌 어디에나 있을 법한 심지어는 전혀 범죄자스럽지 않은 사람이 저지르기도 한다. 위험한 사람을 외관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조심해야할까? 그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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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심리학이나 형프로파일링에 대해 관심이 많다. 아니 범죄가 들어가지 않아도 심리나 인간유형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다. 조금씩 알아갈수록 인간은 점점 위험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잔인하고 위험해지고 있다. 과거엔 끔찍한 범죄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얼마전까진 사회에 대한 원망이나 보복이었고 지금은 그냥 흥미와 재미를 위한 살인에 이르고 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을까? 호신장비를 갖추고 위험에 너출될 일을 삼가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과 누구에게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끝없이 의심하고 조심하며 살아가게 될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선 또다른 범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인간이 인간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고 최소한의 인간성을 교육해야하고 어떤 것보다 도덕과 양심에 대해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의 자유를 부르짖는 동시에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자격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나는 상상할 수 없을만큼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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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일선에 있기 때문에 더욱 현실적인 묘사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너무 잔인한 묘사에 치중하지 않고 피해자와 가해자의 드라마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들의 인생. 어디에나 있을법한 삶과 상상도 끔찍한 삶 사이. 그 어느 순간에도 살인은 용납될 수 없으며, 70억 모두의 목숨은 중요하다.
이성은 가해자들의 참혹한 삶을 측은히 여기고 감성은 그들에게 최대한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형벌이 내려지길 원한다. 아, 나는 아니 내가 아는 그 누구도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길 기도할 뿐이다.

#시그니처 #박영광 #은행나무 #매드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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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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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의 구성이 매우 적절하다. 영화 실미도의 시나리오 작가라는데 그래서인지 영상에 어울린다는 인상을 받았다. 크게 손대지 않고 시나리오 작업이 가능할 것 같다.
- 이야기를 읽고 결론이 드러난 다음에도 어딘지 납득할 수 없다. 선입견이나 보편적 잣대 때문이 아니라 인물이 가지는 극단적인 변화 때문이다. 그 정도의 극단적인 변화가 가능한 인물이 실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실제하지 않더라도 실제하는 것 같은 인물이거나 완벽한 허구의 이질적인 존재같은 인물. 둘 모두 아니고 비틀린 인물로 보기에도 인물의 감정선이 이상했다. 이런저런 반전을 두고라도 인물에 대한 감정이입이 불가능하다.
- 사회적인 자아와 내면의 자아의 괴리가 클 수 있다. 현대인(?)에게는 알러지나 감기처럼 친숙한 상황일 수 있겠다. 탈출구가 필요없이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유스럽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하지만 일정이상의 괴리는 일반적이지 않다. 스스로 판단하는 나와 타인의 평가는 다를 수 있지만 두 존재가 완벽히 분리되고 양극단에 놓이는 것이 가능할까? 인간이 그렇게나 기계처럼 이분화 될 수 있는 존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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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라는 참을 수 없는 농담 - 짧지만 우아하게 46억 년을 말하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지음, 이상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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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을 근거로 삼은 정보를 개인의 해석을 통해 주관적으로 서술한 역사의 줄거리. 인류의 역사는 뭐죠?라는 질문에 대한 요약본.

새로 습득한 정보- 48p, 칼뱅과 루터가 자본주의와 교회 사이에 구름다리를 설계한 것. 교회가 성공이나 재물과 친해진 것을 다 저 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기분.
131-136p, 바울의 선교가 인류의 가치관 변화에 끼친 영향.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과 영웅에 대한 인식의 변화. 138p, <출애굽기>가 인류의 첫번째 혁명?

- '희생'에 대한 오래된 생각.을 최근 꺼낼일이 잦았다. 무엇을 위한 희생, 숭고하다 알컬어지는 희생에 대해 대전제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희생의 결과와 목적에 앞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성이 아닐까? 자의에 의한 희생은 그 본연의 의미대로 숭고하고 가치 있지만 타의에 의한 희생은 그저 억울한 죽음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대단한 목적과 찬란한 결과로 이어진다해도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저당잡히는 것은 범죄가 아닐까? 누가 인간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했는가. 어느 누가 감히 그것에 대해 옳다말할 수 있는가. 희생당한다는 것은 변명에 가까운 합리화일 뿐이다. 희생은 당해서는 그 의미가 없다. 누가 타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가. 희생이란 스스로 자의에 의해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이행되어야만 그것이 그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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