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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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어딘지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부분이 많고 두서없는 느낌인데 화자가 아직 14세 소녀라는 점을 감안하면 납득이 된다. 끔찍한 동화와 정체성에의 확인과 좁은 세계의 시선에 대해 가족을 통해 그려냈다.
아무리 똑똑해도 인정받을 수 없는 3겹의 드레스를 입고 동생이나 돌봐야하는 14세 소녀가 늘 올곧고 지적이고 냉철한 아버지를 존경하고 두려워하는 반면 아름다운 미모에 치장에 신경쓰는 어머니를 멸시하는 것을 보며 꼭 같진 않더라도 내 어릴적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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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고향에서 성장한 나는 종종 동네에서 아버지의 총각시절에 대해 들었다. 시골 동네의 훤칠하고 사람좋은 공무원, 집에는 우리 책보다 아버지 책이 많았고. 어딜가도 누구 딸이라는 말을 듣던 어린시절이었다. 더군다나 소극적이고 조용했던 동생을 더 아끼셨던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내게 기대가 많으셨다. 나를 힘들게 하고 늘 불만이 가득해 보였던 어머니를 이해하고 인정하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부모 자식의 관계에서 벗어나 개인 대 개인으로 찬찬히 생각하다보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어머니를 만나고 가정적이지 못했던 아버지를 발견한다. 불가피한 현실을 인지한 후에나 가능한 것이었다. 다정하고 밝은 어머니는 어머니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찍 알게 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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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먹고 나무가 자라난다. 음침한 냄새를 풍기며 시커먼 덩굴을 뻗는다. 불안과 공포와 긴장 속에서 시작된 속삭이는 거짓말은 순식간에 스스로 날개를 달고 제 몸을 키운다.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엄청난 것이 되버리고 만다. 어쩔 수 없었다고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해봐야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혼자 감당해낼 수 없다. 내가 아직 솔직한 지,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로 시작한 실체없는 혼란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적어도 나 자신은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수 있는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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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겐 깨끗한 새 영혼이 있어, 그걸 버리지 마!”
깨끗한 새 영혼까진 아니라도 깨끗한 부분이 조금 남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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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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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나오기 전부터 기다렸다. 난징대학살을 소재로 해서 일본 우익의 반발이 있었다고 한다. 작가의 에세이에서 난징을 방문했던 이야기를 읽었었다. 그래서 다 기다려서 구입했는데, 왠지 읽으면 안될 것 같았다. 김슨생이 먼저 읽고 너무 재밌고 잘 쓴 글이라며 만족을 표했다. 이 책을 읽고 다른 책을 읽으면 재미없을 거라고도 했다. 여러 이유로 미루다가 이제야 읽었고 역시 재밌었고 역시 감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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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월드. 작가는 현실과 허구의 세계를 버무리는 데 탁월하다. 오래 글을 써왔기 때문에 잘하게 된 것이 아니라 20년 전에 읽었던 그것도 한참 전에 나왔던 ‘양을 쫓는 모험’에서도 그랬다. 그것은 하루키만의 신비한 재능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절묘하게 이어낸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을 보여주고 그 두 세계가 더는 두 세계가 아닌 세번째 세계가 되게 만든다. 마치 ‘닥터후’의 그 틈처럼 이 세계와 저 세계가 연결된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에서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도 종종 기묘하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딘지 알 수 없고, 무언가 이상하고, 어쩐지 실재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종 잡을 수 없고 비현실적이지만 실재하는 것 같은 어떤 세계 속에 잠깐 머물다가 돌아온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 것이다. 생경하지만 매력적인 어떤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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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괜찮다. 아무래도 좋다는 기분을 준다. 내가 믿어왔던 것이나 정해진 규칙이나 당연시 했던 것들에 대해 과연 그럴까? 아닐수도 있는 건 아닐까? 그게 정말 중요한 걸까? 더 중요한 것은 다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철학적이고 성찰을 동반하는 의문이 아닌 뭐 그래도 별 문제는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말하자면 크게 벗어나진 않지만 약간 헐렁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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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뭔가 다른 것을 할 때마다 책이 나를 잡아채는 느낌을 받는다. 더욱 이상한 것은 자꾸 딴 짓이 하고 싶다는 점이다. 책을 내려놓고 인형옷을 끄적거리다가 차를 우리다가 맥주를 꺼내고 이런 저런 잡다한 행위들을 한다. 그리고 다시 책을 읽는다.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괴리가 줄어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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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내서 어떻게 받아들이게 만드느냐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민감할 수도 있는 부분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만든다. 가치관이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내겐 물론이고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제 3자, 혹은 의문의 인물에게도 그러리라 여겨진다. 물론 작가의 글을 좋아하고 아니고는 다른 문제다. 그 부분은 확실히 취향의 문제고 개인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렵고 짜증나는 글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쉽게 이해시키는 능력은 어물쩡 넘어갈 수 있는 능력과도 좀 닮았다. 요컨대 느슨하다. 얼마든지 다른 것들을 끼워넣을 수 있다. 확대하고 축소하고 확장하고 축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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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사연을 가진 30대 남자가 이혼을 하고 겪는 약간 이상한 이야기. 재능은 있지만 스스로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을 깨달아가는 이야기. 거대하고 어두운 역사가 개인과 그 속한 세계에 조용히 작용하는 이야기. 어쩌면 사랑 뒤에 오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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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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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적 이상론자인 나는 ‘너는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고쳐 읽는다.
주말에 갈비탕을 먹고 걸어오며 아들과 나눈 대화의 마무리는 ‘나는 주인공이다’였다. 에반게리온을 시작으로 천국으로 이어진 대화의 마무리로 적절했다. 자기가 한 참 생각을 해봤는데, 이런저런 이유고 뭐고 필요없이 자기는 주인공이고 나도 주인공이란다. 각자의 삶과 각자의 몫. 그에 대한 답변으로 내가 한 이야기는 내가 주인공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뭔가 대단하고 근사한 이야기를 꿈꿔서 같다고 했다. 아직 결론도 나지 않았고 내 이야기의 장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인공이면서 들러리로 살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엄청 다양하다. 장르에 따라서 주어진 환경과 등장인물에 따라서 수백, 수천, 수억가지의 이야기가 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 다르고 다른 것 같으면서 비슷하다. 끝까지 내가 주인공이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이란 슬프고 안타깝다. 우리는 주인공이고 결말은 주인공에 따라 좌우된다. 주인공인 동시에 작가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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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끝내고 싶은 이유는 너무 많다. 하지만 살고 싶은 것은 그저 살고 싶어서면 충분하다. 우리는 여러 문제를 안고 여러 아픔을 견디며 살아가는데 종종 혹은 자주 제발 그만하고 싶다는 욕구를 마주한다. 다시 생각해보자. 죽음이 단순한 끝이고 종료라고는 누구도 확인시켜준 바가 없다. 훨씬 지독한 것이 훨씬 길고 끔찍하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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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이다. 문장이 늘어지지 않으니 휙휙 머릿속으로 들어온다. 거창하게 쓰여지지 않아서 누구를 대입하든 공감이 가능하다. 이 시대의 속도와 닮았다. 나는 휙휙 읽으며 이만큼 왔는데 얼만큼 달라졌나를 가늠해본다. 나를 오래 알아온 사람들은 과거의 내가 가진 검고 어두운 느낌이 많이 밝아졌다고 말한다. 색이 바뀔만큼의 변화라면 나는 꽤 달라졌고 더 달라질 가능성을 가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달라진다. 변한다. 가 무조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변화를 기대한다면 넘어질 것 같은 상태로 페달을 밟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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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부러뜨리는 남자를 위한 협주곡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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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책을 두어권쯤 읽었고 구판 ‘사막’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책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이 책 역시 엄청 재미나다거나 인상적이라는 느낌은 아니다. 살인사건, 시간왜곡, 빈집털이범 등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잔잔하고 일상적이다. 그것이 아름답게 그려진 것도 독특하게 씌여진 것도 아니고 그저 그렇게 당연하고 자연스레 씌여있다. 지극히 일상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사건은 발생한다. 왠지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일들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목 부러뜨리는 남자는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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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이라서 모든 이야기가 긴밀하게 이어진 것은 아니지만 인물이나 사건이 슬쩍 걸쳐져 있다. 크게 웃을 일도 울 일도 아니고 잔잔하게 미소지을 것도 아니지만 종종 끄덕이게 된다. 이렇게 저렇게들 살아가고 있구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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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리는 신을 찾고, 그 신에게 따진다. 대체 어디 있는 거냐고 뭐하길래 이 지경이 되도록 신경도 안쓰고 있느냐고 따지고 원망한다. 나는 지극히 종교적인 대답을 할 수 있지만 나름의 깨달음이 있었지만 이 소설에선 재미난 답변을 준다. 그 답변에서 그래도 신이 있어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게 한다. 신은 우리를 버린 것도 포기한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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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강철의 숲
미야시타 나츠 지음, 이소담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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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슨생은 ‘아름다움’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피아노와 피아니스트와 조율사 그리고 듣는 사람. 음악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들려준다.
사실 더 말할 것도 없이 성실하고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다. 한 학생이 조율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고 그 안에서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밝고 사랑스러운 에너지,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 순진한 마음까지 더할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종종 이렇게 맑고 밝은 이야기를 만나면 아, 역시 그렇지- 세상은 아름답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유는 내게 있었지. 너무 익숙해서 매순간의 기적을 감동도 감사도 없이 지나쳐 와버렸구나.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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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좋아하는 것, 그래서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이 재능이라면 내겐 무엇에 대한 재능이 있을까? 내가 질리지 않고 지치지 않고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내년이면 마흔인데 난 여전히 잘 모르겠고, 사춘기에 접어드는 아들과 함께 자아정체성을 찾아 떠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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