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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생각되는 우리의 엄마.
나는 과연 그런 엄마의 자격이 있나..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
2010년 3월에 이 책을 읽고 간단하게 적는 소감 평이다.
정말 신기한 것은 5년이 지나 읽은 지금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새로웠다.
그 당시에는 새댁이기만 하고 간절히 아이를 기다리는 상태였고 지금 어느새 딸 둘 엄마가 되어있었다.
애 둘을 낳으면서 생긴 산후 건망증의 영향이 가장 큰 것 같지만 아무래도 내 상황이 바뀌니 이 소설을 읽는 관점이 많이 변하지 않았나 싶다.
글과 책은 그대로 있는데 내가 바뀌면서 이 책은 내게 정말 다른 책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책이란 것은, 글이란 것의 힘은 그런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엄청나게 변하는데 지금 이 시간 생각을 고이 접어 넣은 이 글은 그대로 있다는 것.
글과 나와의 신기한 접점이다. 그래서 글은 계속 써야 하고 보존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 과거가 비록 벽을 찰 창피한 기억이라도 말이다.
(사실 이 세 줄의 감상평 뒤에 베껴 쓴 글이 한 문장에 4개 이상의 오탈자가 발견되어 내가 쓴 글이라도 매우 신경이 거슬렸음을 알려둔다.)
이 책은 한 상황을 놓고 가족 구성원인 5명의 화자가 돌아가면서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 상황은 계속 시골에서만 계셨던 엄마가 당신의 생일상을 받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실종되어 버린다.
결국 엄마는 9개월 넘도록 실종이 됐고 아마도 시체를 찾지 못한 채 행려병사자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이야기는 셋째 딸, 교수인 남자친구를 둔 작가인 딸이다.
엄마를 잃고 발만 동동 구르는 그녀의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았다.
모녀관계는 서로 아주 잘 알거나 타인보다도 더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지난가을까지만 해도 너는 너의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엄마가 화났을 때 어떻게 해야 누그러지는지, 엄마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 누가 지금 엄마가 뭘 하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으면 고사리를 말리고 있을 걸요, 일요일이니 성당에 가셨겠는데, 십초 내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의 생각은 지난가을에 조각이 났다. 엄마에게 너란 존재가 딸이 아니라 손님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은 엄마가 네 앞에 집을 치울 때였다. 어느 날부턴가 엄마는 방에 떨어진 수건을 집어 걸었고, 식탁에 음식이 떨어지면 얼른 집어냈다. 예고 없이 엄마 집에 갈 때 엄마는 너저분한 마당을, 깨끗하지 못한 이불을 연방 미안해했다. 냉장고를 살피다가 네가 말려도 반찬거리를 사러 시장엘 나갔다. 가족이란 밥을 다 먹은 밥상을 치우지 않고 앞에 둔 채로도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관계다. 어질러진 일상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엄마 앞에서 네가 엄마에게 손님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았다.(26)
가장 친하고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멀어 보이게 느끼는 셋째 딸.
그렇게 첫째 딸은 엄마를 애틋하게 그리워하며 아쉬워만 한다.
두 번째 파트는 장남 형철이 시점이다.
작가는 엄마가 가장 애틋하게 생각하지만 누구보다 먼 아들임을 증명하듯 아들을 `그`로 지칭하고 있다.
항상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두 딸에게는 `너`라고, 한 평생 인생을 같이 했던 남편에게는 `당신`이라고 지칭한 것과 사뭇 비교가 된다.
어머니가 없어지는 큰일이 벌어지자 역동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 또한 아들이다.
아들이 전단지를 만들어 곳곳에 엄마가 어딨는지를 물어본다.
이 부분은 옛날 어르신들이 딸 둘인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꼭 아들은 있어야 해. 큰일 때는 아들이 다 한다니께..`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첩을 집 안에 들이고 엄마를 쫓아낸 거다.
아들은 이에 단식투쟁을 하고 밥을 안 먹는다는 얘기에 엄마는 돌아와 아들을 다그치지만 그로 인해 엄마는 다시 제자리에 돌아올 수 있었다.
능력에 비해 환경이 열악하여 현실과 타협해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아들을 보며 엄마는 항상 `미안하다.`며 죄인처럼 스스로를 여긴다.
이 부분에 있어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아내가 해외에 가고 싶다는 얘기에 동의한 남편인 장남.
하염없이 아들을 기다리며 명절을 기다리는 엄마가 못 온다는 아들 말에 맥을 놓는다.
이런 과거와 엄마의 실종을 두고 아들은 아내에게 죄를 전가하려는 비겁한 모습을 보인다.
세 번째는 남편 입장이다.
어쩌면 남편은 자신의 누이가 아내에게 했던 매서울 일들만 기억이 나는지 자신이 바람피우고 아내를 버린 이야기는 쏙 빼버린다.
애정 없이 한 결혼.
그냥 나오니까 생긴 자식들.
결국 처가에 간 아내를 찾아오는데 그때 장모가 `그냥 거기 가지 말고 여기 와 살아라.`라는 말에 아내가 `내 살 곳은 저기다.`라는 말을 듣는 부분.
얼마나 많은 시간 남성들은 자신이 아내의 희생을 통해 얻는 특권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 화가 났다.
지금 여기에 나온 `엄마`에 비하면 지금 딸들의 권리는 눈에 띄게 높아졌다.
하지만 `여자란 원래 그래야 하는 역할.`이라고 얘기하는 남성에게는 절로 주먹이 꽉 쥐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엄마의 위치에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해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냥 답답해하며 끝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엄마의 희생을 통해 꿀같은 특권을 얻은 남자들이`여자란 원래 저래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재고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한다.
평생을 당신은 늘 아내보다 앞서서 걸었다. 어느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길모퉁이를 돌기도 했다. 뒤처져서 아내가 당신을 부르면 당신은 왜 그리 걸음이 늦느냐고 타박했다. 그러는 사이 오십 년이 흘렀다. 아내는 걸음이 늦긴 했어도 자신이 얼마간 기다려주면 뺨이 붉어진 채로 곁으로 다가와서는 여전히 좀 천천히 가먼 좋겠네, 하며 웃었다. 그렇게 남은 생을 살아갈 줄 알았다. 그런데 한 걸음이나 두 걸음 늦었을 뿐인 그 서울역에서 당신이 먼저 탄 지하철이 출발해버린 뒤로 아내는 여태 당신 곁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168)
네 번째는 원혼이 된 엄마 입장의 글이다.
셋째 딸의 살림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그 후 아직은 미혼인 첫째 딸을 생각하고 그 후 아들을 걱정한다.
엄마에게는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못한 로맨스가 있었다. 이은규.
같은 동네에 살던 남자로 아픈 산모인 아내의 미역국 값을 마련하기 위해 엄마의 밀가루가 든 함박을 훔쳐 가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결국 은규의 아내는 애만 낳고 저세상으로 가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 집에 가 살림을 해주면서 정이 들었나 보다.
커가는 마음에 이은규는 곰소로 이사를 갔지만 굳이 엄마는 그 남자가 사는 곳을 찾아 힘들 때면 그 남자를 만났다.
이 부분을 통해 엄마는 무성의 `엄마`라는 철인에서 낭만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픈 연약한 여성으로 새로 보이게 된다.
엄마 입장으로 자신의 숨은 얘기를 꺼내기 전에 이런 엄마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가족들에게 엄마는 `소`나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저 자신을 위해 일해주고 먹을 것을 내 주고 나중에 뼈를 고아 국까지 만들어주는..
불륜일 수 있는 이은규의 존재로 인해 엄마가 그나마 한 인격이 되어 있음이 서글펐다.
마지막은 처음 시작한 셋째 작가인 딸 시점의 글로 끝맺는다.
엄마가 된 여동생이 쓴 엄마에 대한 편지를 읽고 상념에 잠긴다.
그러고는 이탈리아에서 피에타 상을 본다.
피에타 상의 마리아의 슬픔을 보면서 책의 제목을 읊조리며 끝난다.
엄마를 잃어버린 다음에야 너는 엄마의 이야기가 너의 내부에 무진장 쌓여 있음을 새삼스럽게 실감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던 엄마의 일상. 엄마가 곁에 있었을 땐 깊이 생각하지 않은 엄마의 사소하고 어느 땐 보잘것없는 것같이 여기기도 한 엄마의 말들이 너의 마음속으로 해일을 일으키며 되살아났다. 너는 깨달았다. 전쟁이 지나간 뒤에도, 밥을 먹고살 만해진 후에도 엄마의 지위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아버지와 밥상 앞에 둘러앉아 대통령 선거 얘기를 나눌 때도 엄마는 음식을 만들어 내오고 접시를 닦고 행주를 빨아 널었다. 엄마는 대문과 지붕과 마루를 고치는 일까지도 도맡아 했다. 엄마가 끊임없이 되풀이해내야 했던 일들을 거들어주기는커녕 너조차도 관습으로 받아들이며 아예 엄마 몫으로 돌려놓고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273)
두 번째 이 책을 읽고 정말 화가 났다. 호구가 진상을 낳는다는 요즘 말이 떠올랐다. 엄마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남편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삶의 마지막을 쓸쓸히 집을 지키며 죽을 날을 기다릴 거다. 엄마는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기대며 마음의 안식을 얻었고..
엄마는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서 이 가정을 유지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들은 엄마의 진정한 모습을 알 기회가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엄마는 자신이 외롭다는 얘길 하지 않았고 아프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자식들에게 걱정이 되고 민폐가 된다고 생각해서 였겠지.결국 그 일은 자식들을 부모의 시체도 못 찾고 길에서 엄마를 죽여버린 천하의 못쓸 자식들로 만들었다. 이 엄마가 정말 착한 사람인 건지 정말 의문이다. 참고 남을 위해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이 미덕일 수 없다. 정말 엄마가 원망스러워 분노가 일었다. 어쩌면 저번 주 문학회에서 읽었던 `고령화사회`에서 화자가 얘기했던 죄책감을 뛰어넘어 그 대상을 미워하기로 한 그 경지가 아닐까 싶었다. 이런 분노는 `혹시 표절 작가인 신경숙에 대한 나의 잘못된 프레임 때문이 아닐까`까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 신경숙 작가님이 이 소설을 쓰면서 소회를 적은 글을 보면서 이 분노는 이내 잠잠해졌다.
작가님은 한 달동안 엄마와 같이 지내며 싸우기도 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엄마가 싸우다가 중간에 나가겠다고 짐을 싸는 그 모습까지도 어쩌면 엄마가 살아있기에 겪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을 느꼈단다. 이런 자신의 엄마에 대한 벅찬 감정이 작품에서는 `엄마를 잃어버렸다.`라는 글을 시작으로 이 소설을 창조할 수 있었다고 했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에 그만큼 빠져들었던 게 아닌가 한다.
다시금 살짝 소설에서 빠져나와 작가와 같이 행복을 같이 해 볼까 한다.
아직 나는 싸울 수 있는 말을 나눌 수 있는 엄마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