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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ㅣ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김영하 작가님을 ‘보다’라는 산문집으로 처음 만나게 됐다. 산문집은 세 권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이야기에 두 번째 책이 나오길 기다렸다 당연하다는 듯이 집어 들었다. 말한다고 하기에 도대체 무얼 말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글 쓰는 게 업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강의란 당연히 자신이 잘 하는 일에 대한 강의이겠지. 의도치 않게 이 책은 또 글쓰기에 대한 책이었다. 왜 글을 써야하는지 그리고 개인적으로 작가 김영하는 왜 글을 쓰고 소설을 쓰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에 대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사실 이 책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 그것도 그런 게 요즘 계속 읽고 있는 책이 작문이나 글쓰기에 대한 책이고 가볍게 읽는다는 생각으로 집어든 이 책마저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란 사실 때문이다. 사실 중고등학교 때 달달 암기하여 생각보다 남의 생각이나 결과를 외운 것에 대한 것으로만 우열을 적용하는 게 우리 나라 교육의 현실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교육은 지식을 습득하고 그에 대해 이해한 것을 에세이라는 글의 형식으로 제출하는 창의성과 독창성을 요구하는 교육을 펼친다. 왜 우리는 틀린 답 4개와 맞는 답 1개 혹은 그 반대되는 답안지에 그냥 꽃표만 하는 수동적인 공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백지에 한 글자 한 글자 내가 소화한 지식을 쏟아내는 수단으로 글을 써야 할까? 김영하 작가님은 이에 이렇게 대답한다.
글쓰기는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왜냐하면 글을 쓰는 동안 우리 자신이 변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기 전까지 몰랐던 것들, 외면했던 것들을 직면하게 됩니다.(057)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에게 허용된 최후의 자유이며, 아무도 침해할 수 없는 마지막 권리입니다. 글을 씀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폭력에 맞설 내적인 힘을 기르게 되고 자신의 내면도 직시하게 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뭔가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이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직장이나 학교, 혹은 가정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나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혼자가 아닙니다. 한계에 부딪쳤을 때 글쓰기라는 최후의 수단에 의존한 것은 여러분이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그런 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일단 첫 문장을 적으십시오. 어쩌면 그게 모든 것을 바꿔놓을지도 모릅니다.(060)
이 책을 통해 김영하는 독자들이 수동적으로 남의 글을 읽고 있음에 탈피해서 스스로도 창조를 하라고 독려한다. 어쩌면 자신처럼 작가가 되라는 조언은 쉽게 나올 수 없는 영역이다. 이른바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도 있기에 ‘너도 내 일을 해봐.’라는 생각보다는 ‘이 일이 그렇게 만만한 일인 줄 알아?’라며 자신의 업계에 대해 배타적인 위치에 충분히 설 수 있다. 그러나 김영하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라도 글을 쓰는 것이 내 스스로를 위해 필요하고 더 나아가 가정의 안정과 타인이 글을 읽으면서 느낄 영향력에 대해 알려준다.
특히 글을 통해 내 인생과 희노애락을 표현함으로써 내면에 잠자고 있던 예술가의 모습을 꺼내라고 한다. 특히 김영하 작가가 학생들에게 제안한 방법이 참신하다. 그는 문예창작과 학생에게 반대욕망을 이용해서 차라리 대학교 1학년 때까지는 단편을 쓸 수 없고 3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장편소설을 창작하기 못하게 하면서 갈급함을 느끼게 하는 방법을 쓰면 어떨까 생각했다. 항상 무언가 쓰라고 강요만 받다가 쓰지 말라는 명령에 따른 반사적 욕망을 이용한 지혜였으리라. 또한 글을 쓸 때 부모님이 보지 말았으면 하는 글을 쓰라고, 그것이 진정 자신의 진정한 내면과 조우하는 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사실 우리 부모님은 블로그 서로 이웃이다. 가끔 내가 부모님이 보시기에 극단적인 내용의 글을 올리면 3분 안에 검열이 들어간다. 그래서 엄청나게 순화된 글 모음이 바로 이 블로그이다. 그런데 작가님의 글과 전에 랄랄라님과의 대화를 떠올려보면 이렇게 계속 글을 쓰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있는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 글이 무뎌졌거나 부모님이 관대해졌거나 둘 중에 하나의 가능성이 있겠다. 이 부분을 읽고 정말 심각하게 내 글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자, 이제 우리가 마음속의 악마를 잠재우고 자기 예술을 시작하려고 할 때, 이제는 밖에서 적들이 나타납니다. 배우자일 수도 있고, 부모일 수도 있고, 회사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현실적인 이유들을 들어 여러분이 하려는 작업을 막아섭니다. 여러분이 뭔가를 하겠다고 할 때, 그들은 묻습니다. 이건 정말 마법의 질문입니다. “그건 해서 뭐하려고 그래?”힘이 쭉 빠집니다. 하지만 예술이라는 것은, 뭘 하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지요. 그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유용한 것도 생산하지 않고 우리 앞날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작곡을 한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벌거나 좋은 직장을 얻지는 못할 겁니다. 그러나 방치해두었던 우리 마음속의 ‘어린 예술가’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술과 약물의 도움 없이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뭔가를 시작하려는 우리는 “그건 해서 뭐하려고 하느냐”는 실용주의자의 질문에 담대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하는 거야” “미안해. 나만 재밌어서”라고 말하면 됩니다. 무용한 것이야말로 즐거움의 원천이니까요. (077)
좀 더 나아가 작가는 더 자세히 자신이 직접 글쓰기 지도를 한 경험과 내용을 알려준다. 이 내용은 내 습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글에 자유를 주는 것. 아마도 김영하 작가님의 젊었을 때 단편의 끔찍한 내용들은 제한 없는 그 상상력 안에서 태어난 것 같다. 글을 쓰면서 저자는 계속 나는 왜 이런 소설을 쓰는지에 대해 계속 물어본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본질을 잊지 않으려는 윤리적 몸부림이다. 만약 내가 왜 글을 쓰고 있는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오로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글을 쓰는 삶에 들어가면 이번 문학계의 비극이 일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갑자기 오늘 미덕 모임에서 리더 님이 얘기했던 문구가 기억이 난다. ‘생각대로 행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평범한 한 어린이를 작가로 만든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한동안 저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제가 읽은 작가들, 예컨대 췰 베른이나 프란츠 카프카, 코넌 도일 같은 선배 작가들에게서 찾아왔습니다. 어쩌면 그쪽이 정답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요즘 들어선 점점 더 유년의 기억 쪽으로 탐색 등을 돌리게 됩니다. 내 발밑에 있을지도 모를 길고 음험한 땅굴, 멀리서 들려오는 지뢰의 폭발음, 돼지의 멱을 따는 북한군인들, 일본의 사무라이처럼 주군과 운명을 함께한 스무 살짜리 운전병의 삶 같은 것들입니다. 거기에는 분명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행위는 이해할 수 없었고 존재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해괴한 일들, 원시적이거나 혹은 반대로 아주 부조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인간들이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물음표 속에 갇혀버립니다. 어쩌면 그 물음표를 문장들로 바꾸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저는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211-212)
어쩌면 이 책은 작가가 미래의 작가를 만들려는 일종의 영업 글이다. 다단계 회사원이 물건을 파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물건을 사는 구입자에게 다단계 회사에 들어오라는 유혹과도 같다. 하지만 엄연히 다단계 회사와 소설이나 책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다단계 회사는 돈을 목적으로 모이지만 책은 내 스스로의 영혼과 마음으로 모인다. 내가 왜 이런지 내 감정이 왜 그런지를 가시적으로 알 수 있는 매개체가 바로 글쓰기이고 더 나아가 허구이지만 어느 정도 내면이 들어있는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내 스스로를 알고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리고 느꼈다, 글을 쓴다는 것,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 도서관에 있는 거대한 책들, 심지어 정말 의미 없다고 생각했던 시답지 않은 책들까지도 위대해 보였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나올수록 내 맨 얼굴을 보는 것처럼 당혹스럽고 힘들 때도 있다. 이것을 견디고 책 한 권이란 기나긴 이야기 하나가 만들어진다니. 책 한 권 만든 사람들에 대해 정말 부러움을 넘어선 경외심이 느껴진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작가는 말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살인 같은 나쁜 행동이 아니라 어쩌면 무정하게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래서 시간이 지나기 전에 최근의 기분을 남기기 위하여 이렇게 블로그에 짧은 잡담을 남기기도, 사진을 남기며 짧은 설명을 남기기도 한다. 7년 동안 문법도 엉망이고 어법도 엉망일 수 있지만 그 당시의 기억을 부지런히 남겨 놓은 게 내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정말 창피한 과거의 나라도 사랑해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렇게 내가 글을 쓰고 남겨 놓는 이유다.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읽다’가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https://youtu.be/55O1ODpX3fQ
http://tvcast.naver.com/v/53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