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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강경수 지음 / 창비 / 2021년 1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많은 생명이 함께 살아가지만, 이 세계를 지배하는 질서는 오로지 ‘인간’이라는 생명체만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인간 외의 생명들은 인간이 마음대로 세워놓은 질서에 굴복 당하며 지구에서 이뤄진 크고 작은 결정의 우선순위에서 자연스레 밀려났다. 많은 생명들은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들의 보금자리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게 됐고, 오늘날에도 이 멸종의 흐름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져야 할 인간은 과연 충분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점점 녹고있는 빙하 위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북극곰 ‘눈보라’. 이 가엾은 곰이 먹을 거리를 찾아 인간의 마을로 내려온 이유는 응당 인간에게 있거늘, 인간은 이를 미안하게 여기며 따스하게 품어주기는 커녕 눈보라를 인간을 해치는 ‘골칫거리’로 여기고 내쫓는다.
오래 이어진 삶의 터전과 생을 유지하게 하는 먹거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잘못이지만, 눈보라는 인간을 ‘말썽꾸러기’로 여기며 그들을 위협하지 않았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 사이에서 먹을 거리를 찾으려는 안쓰러운 북극곰 눈보라.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핑계를 내세우며 영원히 그들의 세계에 발을 들이지 못 하도록 눈보라를 위협한다. 그 위협에 반항할 수 없는, 눈보라와 같은 수많은 존재들은 지금도 인간에 의해 천천히 ‘살해’당하고 있다.
인간 중심의 질서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면, 적어도 직간접적 가해자로서 죄책감을 안고 수많은 생명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을 방법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속죄일 터. 나부터 익숙함과 편리함에 기대어 환경과 지구를 해치는 행동의 유혹에 빠질 때마다, 눈보라의 슬픈 눈빛을 떠올릴 수 있기를 다짐해본다.
자신의 본래 얼굴을 숨기고 인간이 좋아할 모습으로 변장할 수 밖에 없던 눈보라의 마음은 어땠을까. 흙으로 변장한 자신의 얼굴을 좋아하는 것 마저 철저히 인간의 필요에 의한 ‘이기적인 선호’임을 깨달은 눈보라. 나의 존재의 이유가 다른 이에 의해서 부정당하고, 그로 인해 진짜 내 모습을 숨기며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 애쓸 수 밖에 없는 눈보라.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고 사랑받길 원하나 존재 그 자체로만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눈보라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애달픈 현실을 발견할 것이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트린 전염병과 기후 이상 징후 등은 인간의 이기심을 향해 지구가 보내는 참혹한 경고일지도 모른다. 그 경고를 무시하지 않기를 바라며 간절한 마음으로 그려냈을 강경수 작가의 그림책 ‘눈보라’. 엄마의 마음을 다잡고, 아이가 한 살씩 성장할 때마다 아이의 마음 또한 넓혀줄 이 멋진 그림책을 접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출판 전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