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매켄 단편선 2 아서 매켄 단편선 2
아서 매켄 지음, 김정주 옮김, 김선 해설 / 와이드마우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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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편

런던에 사는 에드워드 다넬은 빈 방에 가구를 놓을 계획을 세우고 부인과 의논하지만 주어진 돈 안에서 결정해야 되다 보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이후에도 하녀가 겪은 일에 이어서 아내의 이모에게 발생한 문제까지 겹치며 점차 삶의 고단함을 느낀다. 그렇게 다넬은 점차 도심의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자신 만의 환상의 세계로 가고 싶다는 갈망이 커지는데...

겉으로 나타난 내용만 보면 당대 런던 중산층의 삶을 다룬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처럼 보인다. 대체로 다넬 부부는 별다른 분쟁 없이 서로의 의견을 잘 주고 받으며 조용히 별 문제 없이 지내는 편이다. 진짜 문제라면 외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이다. 대부분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 일이나,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알게 되는 추악한 일과 당혹스러운 진실로 인해 삶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 다넬의 기분을 전환 시켜주는 건 공상의 세계다.

다넬의 공상이란 단순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신비롭고 복잡한 형상을 가진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도심의 모습에서 낯설다는 느낌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가지 않던 낯선 곳을 돌아다니고, 익숙한 풍경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낯선 무언가를 발견하는 식이다. 굉장히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걸 다넬이 어떤 식으로 즐기는지 장황하게 서술 되기에 상당한 깊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낯선 것에 대한 탐방과 감상은 대체로 페이지 하나를 넘어가거나, 두 페이지를 한 가득 채울 정도로 한 문장과 단락이 매우 긴 게 많고, 표현마저 과할 정도로 다채롭고 현학적이라 상당히 읽기 어려운 편이었다. 한편으로는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을 그 장대한 자연에 대한 묘사나, 평범한 도시 풍경이 한순간 그러한 자연물의 일부나 다름 없을 경이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진짜 삶의 일부분이나 다름 없을 거대함이 있긴 하다.

다소 현실 도피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맨 뒤에 나온 해설에 따르면 이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재발견이자 해방이라고 한다. 따분함과 권태로 가득한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한다. 사실 이건 어릴 적에 많이 해본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보던 새롭고, 신기하며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하던 그 시절의 감각. 그렇기에 어딘지 모르게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면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새롭고 신비한 판타지 같아 보이던 세상이 왜 이렇게 칙칙하고 재미 없는 곳이 되었을까. 내가 예전에 봤던 그 경이로운 풍경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은 걸까. 이걸 다넬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참 멋진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보통 이러한 초현실적인 요소가 공포로서 등장인물들을 망가뜨리고는 하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아름답고 이상적인 곳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서 의외였다. 자연에 대한 공포를 깊숙이 묘사할 수 있는 만큼 그 아름다움에도 통달했다고 봐야 할까. 언제나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밝은 면도 함께 있다고 말이다.

백색 인간

런던 북쪽 교외에 사는 앰브로즈라는 괴짜를 만나러 간 코트그레이브. 절대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오랜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앰브로즈는 초록색 수첩을 꺼내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소녀가 쓴 것으로 숲에서 백색 인간을 목격한 이후로 체험한 신비한 일로 가득했는데...

단락을 나누지 않고 끊임 없이 줄줄 이어지는 구성이라 〈삶의 단편〉보다 더 읽기 힘들 정도다. 얼마나 심하냐면 무려 20 페이지 이상이나 되는 분량이 하나의 단락으로 쭉 이어져 있어서 중간에 쉬었다가 다시 읽으려면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지 못해 헤맬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왠지 의도적인 것 같다는 인상이 들긴 하다. 왜냐하면 작중에서 나온 장대한 숲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숲의 공포란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원초적 공포 중 하나다. 구불구불한 형태가 징그럽게 보이기도 하는 나뭇가지. 한없이 척박하다는 환경을 강조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외형에서 문득 보이는 기이한 인상이 존재하는 바위. 보이지 않는 손이 마구 잡아당기고 할퀴는 듯한 느낌을 가진 가시 덩굴. 한낮에 봐도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만드는 큰 언덕. 여기에 사방이 전부 비슷 비슷하게 보여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같은 숲 속 한가운데. 이 작품 속에는 이러한 숲의 공포가 한가득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공포를 겪고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파고든다는 것을 통해 맑고 상쾌한 경이를 바라는 게 무엇인지 나타내서 상당히 특이하다.

분명 겉으로 보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인데, 영원히 빠져들고도 남을 신비를 목격하기 위해 굳이 여기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이어지는 사악한 의식 같은 행위들은 마치 숲의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닿고자 하는 문제의 신비란 아무리 봐도 백색 인간이란 한 없이 아름다운 경외의 대상이다. 빛을 보기 위해 빠져들게 되는 어둠. 공포에 빠져들 수록 더욱 활기찬 기운이 강해지는 분위기.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숲은 단순히 무섭다라는 걸로 전부 설명되지 않기에 더욱 기묘하다. 이래서 절대악이란 공포이자 경외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없이 아름다운 것에 닿기 위해 결국에는 더럽혀져야 하고, 반대로 더렵혀지기 위해서는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워야 하는 역설까지 성립하게 되니 말이다.

미지의 존재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 같은 모습에서 마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많이 보던 분위기가 있기도 했다. 신에 가까운 미지의 존재를 향한 탐구. 그 과정이 결국은 스스로의 파멸로 향하는 길이라는 점. 고대의 의식과 흑마술. 누군가 남긴 기록을 통해 진행되는 내용. 코즈믹 호러라는 면에서 상당수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러브크래프트 보다 아서 매켄이 먼저였기에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자연의 경이로움과 공포를 동시에 담으며 소설 자체도 미로 같은 숲의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이야기의 미로를 만들어버린 의도를 해설을 통해 확인하니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이 나온다. 대체 작가는 어디까지 자연의 깊이에 통달하고 가까웠던 걸까.

궁수

1차 세계 대전 중의 어느 전장. 독일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영국군의 어느 돌출부에 위치한 참호에서 있던 부대가 전멸 직전까지 몰린 최악의 상황이다. 참호 안에서 있던 병사 대부분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어떤 이들이 나타나 구해주는데...

현실적인 전쟁터를 배경으로 갑작스럽게 환상적인 판타지가 나타나는 내용이라 처음 봤을 때 다소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타임슬립에 가까운 내용이라서 그렇다. 내용만 보면 크게 별거 없긴 하나 이런 소재를 20세기 초반(궁수는 1914년에 발표됨.)에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참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가 1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되던 때였던 만큼, 아무래도 어떤 의도와 염원을 담아 썼을지도 모르겠다. 작중 내용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져서 최악의 상황을 이겨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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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으로 날아간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보은 옮김 / 다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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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바탕이 되는 건 언제나 찾기 힘들다고 여겨진다. 흔히 말하는 영감, 아이디어, 소재 같은 것이 해당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 유행에 따라 뜨는 게 있고, 못 쓰는 게 있다.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 생각되겠지만, 같은 문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보는 경우도 존재한다. 멀리 있던 것이 사실은 엄청 가까운 곳에 존재했듯이 말이다.

미국의 유명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 설명하는 창작에 대한 에세이다. 먼저 말해두겠지만 문장, 문법, 작법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이걸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생각해 보면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내는 편이긴 하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주변의 눈치가 보여서 숨기거나, 남들만 보며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진짜 자신을 잊어버린 채로 버려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게 없다. 이건 현재가 그렇다는 것이지, 과거에는 누구나 존재했다. 이미 유행이 끝나 지나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럼 유행 따지지 않고 그냥 좋아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이제 보면 유치할지 모른다고? 대체 어디까지 도망갈 생각인가. 계속 자신이 좋아하는 걸 스스로 없애버리고 있는 셈이잖나.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예시로 어린 시절을 비롯한 과거를 돌아보며 좋아했던 것, 싫어했던 것을 바탕으로 소재를 찾아낸 과정을 알려준다. 그게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자 훌륭한 소재라고 말이다. 이는 완전히 다듬어진 무언가를 찾지 말고, 원초적인 형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자신 만의 원석을 찾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좋아하던 걸 계속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강조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던 것은 무엇이든 버리지 말라고. 삶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이미 버린 좋아하던 것 뿐이라고. 나를 바보 취급하는 세상으로부터 좋아하는 걸 지키라고.

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경험에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만 한정되지 않고, 지난 날의 추억, 아니면 바로 어제의 기억도 될 수 있다. 확실하게 기억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렴풋하게 남은 인상이나 별거 아닌 일화까지 버릴 것 하나 없다. 재미 없게 본 것과 관심 없던 분야도 마찬가지다. 잘 만든 것과 흥미 있는 분야만 봐서 알 수 없는 걸, 정반대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싫어하는 것에 대한 부분 역시 강조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생각 비우기라는 부분도 꽤 큰 의미를 준다. 창작에서 생각을 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다. 망설임 없이 글을 쓰게 하는 흐름. 망설임의 이유로 여러가지 많지만 그 중에서 글쓰기 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한다는 지적이 꽤 적절하게 보였다. 자신의 글쓰기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 외적 시선과 다른 면을 신경 쓴다는 얘기니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의 연장선이다. 자기가 좋아 하는 걸로 쓰고 싶고, 좋은 대로 쓰고 싶은데 눈치를 본다는 것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면서 자신 만의 낭만을 찾아가는 방법을 말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재미 없는 삶이 만들어진 이유와 과거의 자신이 무엇을 버렸으며, 다시 활기차게 살아가게 하는 조언. 레이 브래드버리의 글쓰기에는 이런 부분으로 꽉 차 있다. 한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여 살았다. 너무나 부럽게 보이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 누구나 시도해 보기 쉽다. 필요한 건 이것 밖에 없다. 세상의 눈치를 신경 쓰지 않고 즐길 용기. 한 번이 어려울 뿐이다. 즐기는 자야 말로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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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석신(石神)의 연못 - 몬스터 연대기 | 아라한 호러 서클 038 아라한 호러 서클 38
에이브러햄 메릿 / 바톤핑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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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마스턴 교수는 화석 연구 때문에 탑승한 뉴기로 향하는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해 기니 해안 인근의 어느 섬에 표류 했던 일을 들려준다. 그 섬에는 수 많은 날개로 뒤덮인 석상이 세워져 있는 연못이 있었고, 그 꺼림직한 석상으로 인해 무서운 일을 겪었다는데...

외딴 섬에 있는 원시 문명을 연상시키는 어느 석상. 미지의 공포와 석상이라는 고전적인 공포 요소가 섞인 형태다 보니 너무나 무난한 내용에 가깝긴 하다. 석상과 관련된 무서운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접해서 흔하고, 외딴 섬이라는 부분도 너무 옛날 클리셰라는 느낌을 줘서 그렇다. 다만 그렇다고 석상과 관련된 부분까지 별로라는 건 아니다. 외형도 그렇고 이게 대체 뭔지 궁금하게 만들기에 마지막 끝까지 보게 만든다.

분명 돌로 된 석상의 일부인데 생명체와도 같은 질감을 준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문제의 날개에 대한 묘사만 보면 보호색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숨어 있는 곤충 같은 느낌이다. 피부가 딱딱한 동물이나 거북이 등껍질 같은 걸 떠올려 봐도 암석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피부나 껍질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냥 커다란 날개 한 쌍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개체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은 모양새라 하니 외형적으로도 꺼림직함이 강하다.

석상의 실체가 밝혀지는 부분은 마치 흡혈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무지막지한 괴물 하나가 아니라 야생 동물 떼에 가깝지만, 원시적인 컨셉의 공포라는 면에서 어울린다. 석상이 아니라 석신이라 지칭 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자연환경과 하나인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숭배 받는 형태나 다름 없어서 그렇다. 신선함에서는 다소 아쉬울 수 있지만, 정석적인 공포라는 부분에서는 나쁘지 않게 볼 여지가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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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러브크래프트 서클 25
헨리 커트너 / 바톤핑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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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순 부족의 주술사들이 만든 저주 받은 종이자 놀랄만한 음색과 음질에 관한 전설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려진 산 하비에르 종. 캘리포니아의 피노스 산맥에서 발굴 됐지만 직후에 부숴버리고 파편마저 다시 비밀리에 파묻어 버린 걸로 알려졌다. 이 발굴과 관련된 자이자 캘리포니아 역사 학회의 간사인 로스는 이 종과 관련해 벌어진 무서운 일에 대해 밝히는데...

사악한 존재를 소환하는 매개체와 관련된 내용은 대체로 전조 현상 선에서 끝나기 마련이다. 무언가 나오려다 중간에 끊기다 보니 애매한 인상만 남는다고 여길 수도 있으나 막상 접하면 시시하지 않다. 직접적인 존재를 들어내지 않아도 끼치는 영향력이 가진 섬뜩함과 파멸 직전의 상황이라는 혼란이야 말로 초월적인 공포에 걸맞는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 하비에르 종은 그걸 아주 잘 나타냈다고 본다.

이 작품에서 말하는 영원한 어둠이란 처음부터 너무나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보통 어둠이라 하면 무엇인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것. 빛이 사라진 순간. 하늘이나 날씨, 공간적인 면에서 보면 상당히 초월적이라고 볼 여지가 많다. 그러나 가장 원초적이고 손쉬운 영원한 어둠은 정말 별거 아니다. 생명체는 무엇으로 세상을 보고 빛을 감지하는가. 그것이 없다면 곧 영원한 어둠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작중에서는 영원한 어둠과 관련해서 끔찍한 묘사가 꽤 나온다.

특정한 상황에서 울리는 종은 분위기를 고조 시키고는 하는데, 성 하비에르 종 만큼 기괴함을 주는 경우가 또 있을까 싶다.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어봤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울림이 얼마나 깊고 오래가는지. 맑거나 웅장하면 듣기 좋은 음색이겠지만, 지하로부터 전해지는 듯한 땅울림이자 엄청난 무게감을 가진 기분 나쁜 진동이라면 대체 어떤 소리일까. 이 종소리가 완전한 형태로 울리지 않았는데도 벌어진 참사를 보면 불러 일으키는 대상이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인지 단 번에 느낄 수 있다.

마지막까지 끝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 결말은 종의 존재감을 계속 강조한다. 마치 종의 울림처럼 한 번 시작되면 그 잔향이 오래 남는다고 말이다. 인위적인 영원한 어둠이 아니라 일시적인 영원한 어둠도 존재하기에 그 잔향은 언제 어떻게 다시 영향력을 들어낼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끝나지 않은 공포란 불안을 단순 기분 탓이 아닌 눈에 보이는 현실로 보여줬기에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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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림자의 미사 Mystr 컬렉션 185
아나톨 프랑스 / 위즈덤커넥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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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율리아 성당의 교회지기가 막 장례식을 치른 무덤 파는 일을 하던 자신의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해준다. 캐서린 퐁텐이라는 어느 노부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매일 아침 6시에 성당 미사에 참석 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12월, 평소처럼 6시 미사에 참석한 노부인은 놀라고 만다. 전부 처음 보는 사람들만 있었고, 그 안에서 유일하게 알아본 사람은 젊은 시절에 일찍 죽어버린 옛 애인이었는데...

1892년에 출간된 단편집 〈마더 오브 펄 L'Étui de nacre〉에 수록된 작품이다. 옛날에 이 소설과 비슷한 내용의 무서운 이야기를 본 기억이 있다 보니 꽤 놀랐다. 새벽에 열리는 미사. 죽은 사람들 사이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한 사람. 여기까지는 비슷했지만 결말은 완전 다르다. 그 이야기는 단순 괴담에 가까운 결말을 보여줬고, 이 작품은 죽음에 대한 깊은 고찰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그 무서운 이야기의 원본이 이 소설이지 않았을까 싶다.

공포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긴 하지만 사실상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이 어째서 떠돌아 다니고, 가까운 이의 앞에 계속 나타나는가. 이걸 섬뜩함이 아닌 담담함으로 바라보는 분위기라 진짜 미사를 진행하듯이 엄숙하다. 이해할 수 없는 괴현상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저지르게 되는 잘못이자 원한이다. 사랑해서 저지르게 된 이러한 죄를 속죄하는 방법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물론이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직업적으로 죽음과 가까운 것이 아니라면 그건 곧 죽음이 가까워 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기에 캐서린 퐁텐의 경험은 의미심장하게 볼 여지가 많다. 한순간의 주마등 같은 것일지, 아니면 인생의 말년에 이루어진 환상과도 같은 염원일지. 결말을 보면 무엇이 먼저였을지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걸 따져봐야 의미가 있을까 싶다. 어쨌든 캐서린 퐁텐은 살아서 죄를 속죄하고 기억 속에 오래도록 간직한 사랑하던 이와 다시 만나게 됐으니 말이다.

무엇에 대한 죄이고, 무엇을 속죄해야 한다는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자면 미련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놓아 줘야 할 순간에 확실하게 보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피해를 준다. 이를 두고 죄라 말하는 것이고, 캐서린 퐁텐의 마지막 순간은 그걸 확실하게 놓음으로서 속죄를 하게 된 셈이다. 교회지기가 마지막에 말하는 것도 이를 의미하는 걸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작품 속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미련 없는 완전한 끝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털어버림으로서 산 자와 죽은 자는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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