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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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의 자살

엄격하기로 소문난 솜 도매상인 오쿠로야에서 고용살이를 하게 된 긴지. 별처에 지내는 선대 주인이 몸이 편찮아지면서 심부름을 다니다가 병문안을 가는 가게 주인의 아들인 도이치로와 같이 다니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도이치로에게 결혼 주선이 들어오고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게의 하녀 중 한 명이 도이치로와 사귀는 사이라고 갑자기 밝히는데...

가게 주인 측과 고용인 사이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을 다루는 내용이다. 단순 치정 싸움을 넘어 괴기의 영역으로 향해서 꽤 섬뜩하다. 여기서 메인 소재를 꿈이라고 간단하게 볼 수도 있지만, 정확히는 생령에 해당된다고 본다. 생령(生霊)은 일본에서만 많이 쓰이는 심령 요소다 보니 많이 생소할 것이다. 한자어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뜻이다. 즉 살아 있는 채로 흘러나온 영혼이 해를 끼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원념만 해도 상당한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 가진 원한이라니. 이건 이것대로 정말 무섭게 느껴진다. 현존하는 사람이 귀신처럼 해를 끼친다고 하니 말이다.

긴지를 통해서 고용인과 가게 측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데, 보면 볼 수록 왜 그런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이건 맨 처음에 프롤로그 겸으로 보여준 수건 자살과도 연관성이 있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나, 고용인이나 분수를 넘어서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건 신분이나 집안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검소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잘 판단하고.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 본다.

그림자 감옥

납 도매상인 오카다야의 최고 대행수였던 마쓰고로를 찾아온 무사 이소베. 오카다야는 주인 가족이 모두 죽고 고용살이 일꾼들도 여기저기로 흩어진 뒤로 방치된 불길한 곳이 된지 오래다. 그런 곳을 이소베가 방문하고 온 길이라 들은 마쓰고로는 하나하나 털어 놓는다. 오카다야가 어떻게 망했고, 감옥방이란 곳에서 발생한 무서운 일까지...

잘못 자란 자녀로 인한 파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오카다야의 경우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더욱 큰 악행까지 번졌으니 오래가지 못할 만했다. 쌓이고 쌓인 악행은 어떻게든 파멸하는 법이니까. 다만 이 작품은 단순한 권선징악을 다루는 게 아니라서 마지막까지 음울함이 깊게 남는다.

최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역시 최악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제약이 많은 탓에 좋은 방법을 찾으려 해도 극단적인 수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최악의 상황이 끝나게 되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결정타를 날린 재앙으로서 영원히 남을 상처가 된다. 세상에는 괴이한 일로. 스스로에게는 영원한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트라우마로. 이 작품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만 진행되는 구성인 건 아마 이러한 짙은 그림자 감옥에 갇힌 개인을 나타내고자 했던 걸로 보인다.

이불방

히가시초에 위치한 술집인 가네코야는 주인이 단명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일하던 하녀인 오사토가 갑자기 코피를 흘리며 급사한 일이 벌어지고 그 하녀의 동생인 오유가 새로운 고용살이로 들어오게 된다. 오유는 가네코야의 고용살이 일꾼이라면 반드시 거쳐가는 이불방이라는 곳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제 곧 있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게 되는데...

수상한 방에 대한 이야기는 꽤 많은 편이다. 무엇이 나온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 가네코야의 이불방이 딱 그런 느낌을 준다. 출입구 하나만 있고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전부 막힌 방이라는 점만 봐도 음산한 느낌이 강하다. 말이 이불방이지 사실상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방처럼 보이니까.

죽어서도 계속 함께 한 오사토와 오유를 통해 밝혀진 이불방의 진실은 번영과 행복이 언제나 비례하지 않는 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사실 가네코야의 주인이 단명한다는 점에 비해 장사나 고용인에 대한 문제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예측이 될 만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뭔가 잘 된다면 좋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이불방이었고, 가게의 역사 만큼이나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빛이 언젠가 찾아오듯이 영원한 어둠은 없다. 한줄기 빛으로 점차 틈이 보이기 시작한 어둠은 결국 끝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 묵혀둔 업화를 토해내면서 말이다.

매화 비가 내리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름 장수 일을 하던 미노키치는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누나 오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엔은 미노키치가 어릴 적부터 엄마를 대신할 정도로 주변에서 훌륭한 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음식점의 고용살이 일꾼으로 가게 됐다가 외모를 문제 삼아 거절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 이후로 오엔에게 기이한 일이 발생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는데...

사람의 외모는 무엇으로 판단하느냐의 문제에 가까운 내용이다. 대체로 겉모습인 얼굴로 판단하는 일은 예로부터 많은 편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다. 마음이 곧 얼굴이자 외모다. 아무리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이 추악하다면 얼굴로 나타난다고 말이다. 대체로 이런 문제가 나오면 나쁜 사람이 천벌을 받는 내용인데, 이 작품은 다소 방향성이 다르게 보인다.

살면서 남을 저주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아마 한 번도 안 해봤다고는 못할 것이다. 누구나 기분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면 반쯤 장난삼아,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저주를 입에 담아 내뱉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매우 진지하게 염원하고 진짜 이루어지면 어떨까.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혹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가진 나쁜 마음이 누군가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는 곧 마음이 추악해졌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하다. 언제 어떻게 마음처럼 추악한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서민에 해당되기에 안타까움이 담긴 음산한 느낌이다. 부족하더라도 올곧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그 죄책감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이를 통해 당사자인 오엔은 물론이고 동생인 미노키치도 깨닫는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보고서 함부로 악의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마음이 병들어 겉으로도 추한 사람이 되고 마니까.

아다치 가의 도깨비

붓과 먹을 파는 가게인 사사야에 시집을 가게 된 어느 하녀. 사사야의 주인인 도미타로는 나이 많으신 어머니를 잘 모실 만한 검소한 여자를 원해서 결혼하게 된 것이라 주변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별다른 문제 없이 결혼 생활이 이어지던 중, 시어머니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사람이 사람을 멀리하게 되면 결국 가까워지게 되는 건 무엇인가. 결국에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일 테다. 보통은 불길한 존재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과연 언제나 그럴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고,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기댈 곳은 어디인가. 세상 한 구석으로 몰린 이들끼리 만나 서로가 무해하다는 판단을 한 이상 다른 이들의 의견은 그저 괜한 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도깨비라는 존재가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점 역할을 해서 꽤 묘했다. 사람에 따라 눈에 보이는 외형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온 마법 생물인 보가트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보가트는 상대가 무서워 하는 걸로 변신하는 반면, 이 작품의 도깨비는 마치 거울처럼 그 사람의 내면을 형상화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추악할 수록 무서운 형상을 하고,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라면 초라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작중 주인공의 눈에 도깨비가 어떤지 밝혀질 때는 꽤 의미심장했다. 겉으로는 알 수 없을 내면의 공허를 마치 시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런 분위기의 작품이다 보니 단순히 무섭다는 인상이 아닌 순수한 괴이함을 보여줬다고 본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반드시 무서운 것은 아니며, 때로는 이렇게 사람과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괴이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존재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여자의 머리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여자애 같다는 말을 자주 들은 다로.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잃고 공동주택 관리인에게 맡겨져 있다가 손재주 덕분에 주머니 가게인 아오이야에 고용살이를 하러 가게 된다. 태어나서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던 다로를 아오이야에서는 별문제 삼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며 잘 지내던 중, 창고방에서 허공에 떠 있는 여자의 머리를 보게 되는데...

자녀에 대한 문제를 다룬 괴이한 이야기로 공포와 감동을 동시에 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했다는 기이한 점에, 고용살이를 한 가게에서 목격하게 된 괴이까지 해서 겉으로만 보면 무서운 면이 꽤 많다. 그러나 다로와 아오이야 간의 숨겨진 사연과 진실을 보면 또 다른 괴이함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추악한 악인은 죽어서까지 괴물이 되고, 죄 없는 이는 하늘이 끝까지 도와준다는 다소 흔한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단순한 우연으로 보일 부분을 나름의 복선으로 꽤 그럴싸한 연결성을 보여줘서 한층 더 흥미롭다. 뭔가에 대한 믿음이 생기거나, 이해 못할 풍습이 생기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나 보다.

가을비 도깨비

고용살이 하는 곳을 바꾸기 위해 오신은 자신이 알던 중개업소를 찾아간다. 가게에는 자신이 알던 주인 아저씨가 아닌 모르는 여자가 있었다. 오츠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중개업소 주인과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사이라 하며 오신의 용건을 들어준다. 오신은 가노야라는 방앗간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해고를 당하게 됐고 그 이유가 연애 문제로 인한 것이었는데...

사람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되느냐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다. 이게 과연 선한 의도로 하는 제안일까. 겉모습만 보면 분명 괜찮아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수상쩍은 면이 적지 않은데 믿어도 될까.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이 무작정 믿고 싶어도 마음 한구석에는 뭔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기에 안심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도깨비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사람의 가죽을 쓴 도깨비가 숨어 살고 있다고 말이다.

외적으로 사람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설명되던 것과 다르게 이 작품의 괴이는 순수하게 사람 그 자체를 지칭한다. 멀쩡하게 사람과 섞여 살 수 없어, 사람을 해치고 살 수 밖에 없으니, 도깨비와 같은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살아 생전에 인간성을 잃은 이들이 괴기한 요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 만큼,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지칭되는 건 그 만큼 무거운 의미나 다름없다. 말이 어느 정도 순화되서 그렇지, 사실상 귀축 취급을 하는 것이니까.

명쾌한 해결과 답을 보여주던 다른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다소 애매모호하게 끝을 낸다. 이는 사람에 대한 판단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의미로 보인다. 겉만 봐서 누가 도깨비인지 알 수 없으니, 답을 정해주는 이 역시 도깨비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본인의 마음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다. 사람으로 살게 될지, 아니면 도깨비로 살게 될지.

재티

기류초 5번가에 있는 나막신 가게인 다이라야에서 고용살이 일꾼이 칼부림을 저질렀다는 신고를 받은 세이고로 대장. 다친 사람은 가게 주인의 동생인 젠키치로 잠들어 있던 중에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세이고로 대장은 가해자인 하녀 오코마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보고 의원을 불러 살펴보게 한다. 그러던 중, 오코마가 하얀 재를 뿜으며 죽어버리는데...

어떠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 가까워서 다소 추리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현실적인 사건이 아니라 괴이한 사건이다 보니 논리적인 추리가 아닌 호러 미스터리에 가깝다. 그래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도, 추측과 해석의 영역으로 남기에 여전히 미스터리가 깊게 남는 편이라 할 수 있다.

낡은 집에서 무언가가 나오듯이 물건도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씌여서 그걸 사용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재티의 형태로 나타난다.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허연 연기. 보통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사물에 붙어 있는 존재를 형상화하기 딱 좋은 매개체다.

연기란 이전부터 무언가를 숨기거나 어떠한 형체를 만들기 위해 자주 쓰이는 요소다. 이러한 연기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불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며 생활에서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그것과 언제나 함께한다. 그렇다 보니 연기에 대해 어떠한 인상이 생긴다면 언제나 가까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건 진짜 무언가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연기처럼 쉽게 없어지지 않는 사람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를 테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업보나 트라우마 같은 것 말이다.

바지락 무덤

요네스케는 중개업소를 물려준 돌아가신 아버지의 바둑 친구였던 할아버지인 마쓰베에의 문병을 가기 위해 바지락을 산다. 병석에 있던 마쓰베에는 문득 요네스케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들었던 얘기가 떠올라 말해준다. 요네스케의 아버지는 10년마다 똑같은 얼굴의 다른 이름, 다른 경력을 가진 처녀가 고용살이할 곳을 찾으러 오는 일을 겪었다고 한다. 문제는 마쓰베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인데...

나이를 먹지 않고 겉모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 불로불사로 살아가는 이에 대한 전설은 전세계적으로 꽤 있는 편이다. 이 작품 역시 비슷한 소재로 볼 수 있으면서, 뭔지 모를 기분 나쁜 섬뜩함을 매우 강하게 준다. 단순한 괴이를 넘어서는 꺼림직한 느낌이 유독 강해서 그렇다. 자세히 알면 안 되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지 마라. 알면 다친다. 이게 사실상 이 작품의 진짜 소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왜 하필이면 바지락일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작중 주요 인물들 간의 관련성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단순히 바지락을 먹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를 보고서 모른 척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바지락 무덤이란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일종의 경고 표시라고 본다. 평소 조개류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던 편이라,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처럼 섬뜩한 묘사가 가능할 줄은 몰랐다. 역시 해산물이라면 뭐든 무섭게 만드는 게 가능한 걸까.

한편으로는 호기심과 공포,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금단의 비밀을 파해치는 원동력이 되는 건지 궁금해진다. 보통은 호기심이 먼저라고 여겨지는 편이었는데, 이 작품을 보면 때로는 공포가 더 부추기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목격한 것이나 들은 것이 제발 틀리길 바라는 마음인 셈이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거나, 확신을 가지며 불확실한 불안감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 확인하는 과정이야 말로 곧 공포에 집어 삼켜지는 과정이나 다름 없다. 이걸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시인 고딕 장르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실상 어떻게 하든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선택지가 없는 셈이라 애초에 위화감을 인식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최선이다. 이미 인식해 버렸다면 지나가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듯이 최대한 신경 쓰지 않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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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리를 목이라고 치면 바톤핑크 환상문학 서클 33
제럴드 그리핀 / 바톤핑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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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의 애비도니 마을에서 무릎 바로 위부터 잘려진 채로 돌아다니는 다리가 갑자기 나타난다. 그 다리는 어딘 가를 향해 계속 나아가자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지 궁금한 나머지 계속 따라가게 되고, 이 다리에 관해 전해지는 어떤 전설을 알게 되는데...

1827년에 출간된 단편집이자 민담집인 <Holland-Tide: Or Munster Popular Tales>에 수록된 작품이다. 특정 신체 부위만 살아서 돌아다닌다는 얘기는 전 세계적으로 꽤 많은 편이다. 대체로 손이나 팔이 제일 많고, 그 다음으로 발이나 다리, 잘린 목이 자주 나오는 편이다. 아무래도 손이나 팔은 그 자체로 기어 다니는 모습만 해도 상당히 기괴한 인상을 주고. 목 역시 그 자체 만으로 상당한데 말을 걸기까지 할 수 있으니 더욱 소름 끼칠 것이다. 그렇다 보니 발이나 다리는 상대적으로 강렬함이 떨어져 보일 만하다.

이 작품에 나온 다리에 대한 묘사를 보면 공포보다는 신비한 면이 더욱 강했다. 자신을 쫓아온 사람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는 것 같은 가볍고 익살스러운 걸음걸이이나, 요상할 정도로 쫓고 쫓는 추격전을 이어간 사람들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기묘함과 유쾌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다리의 외형도 뭔가 고풍스러운 옛 귀족 같은 분위기가 가득하다는 점도 이러한 환상적인 면을 더 돋보이게 한다.

다리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는 전설은 중세 유럽 귀족의 추악한 면과 권선징악을 다룬 흔하면서 섬뜩한 이야기이긴 하다. 다만 다리가 잘리게 된 경위에 다소 황당한 면이 있어서 무서움 반, 익살스러움 반이 섞인 느낌이다. 이래서 떠돌아 다니는 다리에 무서운 인상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원한을 품은 일은 끝났지만 성불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무서운 인상을 주지 않으려 할 만하다.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대부분 도망쳐 버리고도 남으니까. 다리만 있으니 의사소통은 애초에 불가능해서 더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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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매켄 단편선 2 아서 매켄 단편선 2
아서 매켄 지음, 김정주 옮김, 김선 해설 / 와이드마우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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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편

런던에 사는 에드워드 다넬은 빈 방에 가구를 놓을 계획을 세우고 부인과 의논하지만 주어진 돈 안에서 결정해야 되다 보니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이후에도 하녀가 겪은 일에 이어서 아내의 이모에게 발생한 문제까지 겹치며 점차 삶의 고단함을 느낀다. 그렇게 다넬은 점차 도심의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발견한 자신 만의 환상의 세계로 가고 싶다는 갈망이 커지는데...

겉으로 나타난 내용만 보면 당대 런던 중산층의 삶을 다룬 순문학에 가까운 단편처럼 보인다. 대체로 다넬 부부는 별다른 분쟁 없이 서로의 의견을 잘 주고 받으며 조용히 별 문제 없이 지내는 편이다. 진짜 문제라면 외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이다. 대부분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 쓰는 일이나, 가까운 사람들로 인해 알게 되는 추악한 일과 당혹스러운 진실로 인해 삶이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에드워드 다넬의 기분을 전환 시켜주는 건 공상의 세계다.

다넬의 공상이란 단순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신비롭고 복잡한 형상을 가진다. 늘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도심의 모습에서 낯설다는 느낌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가지 않던 낯선 곳을 돌아다니고, 익숙한 풍경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며 낯선 무언가를 발견하는 식이다. 굉장히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걸 다넬이 어떤 식으로 즐기는지 장황하게 서술 되기에 상당한 깊이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낯선 것에 대한 탐방과 감상은 대체로 페이지 하나를 넘어가거나, 두 페이지를 한 가득 채울 정도로 한 문장과 단락이 매우 긴 게 많고, 표현마저 과할 정도로 다채롭고 현학적이라 상당히 읽기 어려운 편이었다. 한편으로는 간단하게 설명되지 않을 그 장대한 자연에 대한 묘사나, 평범한 도시 풍경이 한순간 그러한 자연물의 일부나 다름 없을 경이를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진짜 삶의 일부분이나 다름 없을 거대함이 있긴 하다.

다소 현실 도피라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맨 뒤에 나온 해설에 따르면 이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의 재발견이자 해방이라고 한다. 따분함과 권태로 가득한 세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관찰한다. 사실 이건 어릴 적에 많이 해본 것이기도 하다. 무엇을 보던 새롭고, 신기하며 무엇이 있을지 호기심을 자극하던 그 시절의 감각. 그렇기에 어딘지 모르게 과거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면이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새롭고 신비한 판타지 같아 보이던 세상이 왜 이렇게 칙칙하고 재미 없는 곳이 되었을까. 내가 예전에 봤던 그 경이로운 풍경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에 지나지 않은 걸까. 이걸 다넬처럼 현재의 시점에서 다시 찾아갈 수 있다고 한다면 참 멋진 일이 아닐 수 없겠다.

보통 이러한 초현실적인 요소가 공포로서 등장인물들을 망가뜨리고는 하는데, 이 작품은 오히려 아름답고 이상적인 곳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서 의외였다. 자연에 대한 공포를 깊숙이 묘사할 수 있는 만큼 그 아름다움에도 통달했다고 봐야 할까. 언제나 어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밝은 면도 함께 있다고 말이다.

백색 인간

런던 북쪽 교외에 사는 앰브로즈라는 괴짜를 만나러 간 코트그레이브. 절대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오랜 대화를 이어가던 중, 앰브로즈는 초록색 수첩을 꺼내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소녀가 쓴 것으로 숲에서 백색 인간을 목격한 이후로 체험한 신비한 일로 가득했는데...

단락을 나누지 않고 끊임 없이 줄줄 이어지는 구성이라 〈삶의 단편〉보다 더 읽기 힘들 정도다. 얼마나 심하냐면 무려 20 페이지 이상이나 되는 분량이 하나의 단락으로 쭉 이어져 있어서 중간에 쉬었다가 다시 읽으려면 어디까지 읽었는지 찾지 못해 헤맬 수 있을 정도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왠지 의도적인 것 같다는 인상이 들긴 하다. 왜냐하면 작중에서 나온 장대한 숲 속을 헤매는 듯한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숲의 공포란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원초적 공포 중 하나다. 구불구불한 형태가 징그럽게 보이기도 하는 나뭇가지. 한없이 척박하다는 환경을 강조하며 때로는 날카로운 외형에서 문득 보이는 기이한 인상이 존재하는 바위. 보이지 않는 손이 마구 잡아당기고 할퀴는 듯한 느낌을 가진 가시 덩굴. 한낮에 봐도 짙은 어둠을 드리우게 만드는 큰 언덕. 여기에 사방이 전부 비슷 비슷하게 보여서 쉽게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 같은 숲 속 한가운데. 이 작품 속에는 이러한 숲의 공포가 한가득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공포를 겪고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파고든다는 것을 통해 맑고 상쾌한 경이를 바라는 게 무엇인지 나타내서 상당히 특이하다.

분명 겉으로 보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인데, 영원히 빠져들고도 남을 신비를 목격하기 위해 굳이 여기로 향한다. 이 과정에서 이어지는 사악한 의식 같은 행위들은 마치 숲의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닿고자 하는 문제의 신비란 아무리 봐도 백색 인간이란 한 없이 아름다운 경외의 대상이다. 빛을 보기 위해 빠져들게 되는 어둠. 공포에 빠져들 수록 더욱 활기찬 기운이 강해지는 분위기. 이러한 양면성을 가진 숲은 단순히 무섭다라는 걸로 전부 설명되지 않기에 더욱 기묘하다. 이래서 절대악이란 공포이자 경외라고 하는 모양이다. 한없이 아름다운 것에 닿기 위해 결국에는 더럽혀져야 하고, 반대로 더렵혀지기 위해서는 완전무결하게 아름다워야 하는 역설까지 성립하게 되니 말이다.

미지의 존재에게 도달하고자 하는 노력 같은 모습에서 마치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에서 많이 보던 분위기가 있기도 했다. 신에 가까운 미지의 존재를 향한 탐구. 그 과정이 결국은 스스로의 파멸로 향하는 길이라는 점. 고대의 의식과 흑마술. 누군가 남긴 기록을 통해 진행되는 내용. 코즈믹 호러라는 면에서 상당수 비슷하게 보인다. 물론 러브크래프트 보다 아서 매켄이 먼저였기에 여기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듯 자연의 경이로움과 공포를 동시에 담으며 소설 자체도 미로 같은 숲의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이야기의 미로를 만들어버린 의도를 해설을 통해 확인하니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이 나온다. 대체 작가는 어디까지 자연의 깊이에 통달하고 가까웠던 걸까.

궁수

1차 세계 대전 중의 어느 전장. 독일군의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영국군의 어느 돌출부에 위치한 참호에서 있던 부대가 전멸 직전까지 몰린 최악의 상황이다. 참호 안에서 있던 병사 대부분이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어떤 이들이 나타나 구해주는데...

현실적인 전쟁터를 배경으로 갑작스럽게 환상적인 판타지가 나타나는 내용이라 처음 봤을 때 다소 당황스러웠다. 왜냐하면 요즘 시대에 유행하는 타임슬립에 가까운 내용이라서 그렇다. 내용만 보면 크게 별거 없긴 하나 이런 소재를 20세기 초반(궁수는 1914년에 발표됨.)에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참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시기가 1차 세계 대전이 막 시작되던 때였던 만큼, 아무래도 어떤 의도와 염원을 담아 썼을지도 모르겠다. 작중 내용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져서 최악의 상황을 이겨냈으면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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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으로 날아간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보은 옮김 / 다른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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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바탕이 되는 건 언제나 찾기 힘들다고 여겨진다. 흔히 말하는 영감, 아이디어, 소재 같은 것이 해당된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진다.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다. 유행에 따라 뜨는 게 있고, 못 쓰는 게 있다. 상당히 어려운 문제라 생각되겠지만, 같은 문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보는 경우도 존재한다. 멀리 있던 것이 사실은 엄청 가까운 곳에 존재했듯이 말이다.

미국의 유명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자신의 삶을 통해 설명하는 창작에 대한 에세이다. 먼저 말해두겠지만 문장, 문법, 작법 같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멀리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닌,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방법을 알려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이걸 끊임없이 질문한다는 점이 특별하다.

생각해 보면 많은 이들이 잊고 지내는 편이긴 하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주변의 눈치가 보여서 숨기거나, 남들만 보며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진짜 자신을 잊어버린 채로 버려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보면 얼마나 많은 것이 있었는데 말이다. 좋아하는 게 없다. 이건 현재가 그렇다는 것이지, 과거에는 누구나 존재했다. 이미 유행이 끝나 지나가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럼 유행 따지지 않고 그냥 좋아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이제 보면 유치할지 모른다고? 대체 어디까지 도망갈 생각인가. 계속 자신이 좋아하는 걸 스스로 없애버리고 있는 셈이잖나.

저자는 자신의 작품을 예시로 어린 시절을 비롯한 과거를 돌아보며 좋아했던 것, 싫어했던 것을 바탕으로 소재를 찾아낸 과정을 알려준다. 그게 자신을 나타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자 훌륭한 소재라고 말이다. 이는 완전히 다듬어진 무언가를 찾지 말고, 원초적인 형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는 자신 만의 원석을 찾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본다. 다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좋아하던 걸 계속 가지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강조한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던 것은 무엇이든 버리지 말라고. 삶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건 이미 버린 좋아하던 것 뿐이라고. 나를 바보 취급하는 세상으로부터 좋아하는 걸 지키라고.

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경험에서부터 비롯되기도 한다. 까마득한 어린 시절만 한정되지 않고, 지난 날의 추억, 아니면 바로 어제의 기억도 될 수 있다. 확실하게 기억되는 것 뿐만 아니라 어렴풋하게 남은 인상이나 별거 아닌 일화까지 버릴 것 하나 없다. 재미 없게 본 것과 관심 없던 분야도 마찬가지다. 잘 만든 것과 흥미 있는 분야만 봐서 알 수 없는 걸, 정반대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동시에 싫어하는 것에 대한 부분 역시 강조하는 건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생각 비우기라는 부분도 꽤 큰 의미를 준다. 창작에서 생각을 빼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하겠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이거다. 망설임 없이 글을 쓰게 하는 흐름. 망설임의 이유로 여러가지 많지만 그 중에서 글쓰기 외적으로 생각을 많이 한다는 지적이 꽤 적절하게 보였다. 자신의 글쓰기에 확신을 가지지 않고 외적 시선과 다른 면을 신경 쓴다는 얘기니까. 이것도 어떻게 보면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의 연장선이다. 자기가 좋아 하는 걸로 쓰고 싶고, 좋은 대로 쓰고 싶은데 눈치를 본다는 것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글쓰기에 대한 내용이면서 자신 만의 낭만을 찾아가는 방법을 말해주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재미 없는 삶이 만들어진 이유와 과거의 자신이 무엇을 버렸으며, 다시 활기차게 살아가게 하는 조언. 레이 브래드버리의 글쓰기에는 이런 부분으로 꽉 차 있다. 한평생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둘러싸여 살았다. 너무나 부럽게 보이면서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라 누구나 시도해 보기 쉽다. 필요한 건 이것 밖에 없다. 세상의 눈치를 신경 쓰지 않고 즐길 용기. 한 번이 어려울 뿐이다. 즐기는 자야 말로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고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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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석신(石神)의 연못 - 몬스터 연대기 | 아라한 호러 서클 038 아라한 호러 서클 38
에이브러햄 메릿 / 바톤핑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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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마스턴 교수는 화석 연구 때문에 탑승한 뉴기로 향하는 배가 침몰하는 사고를 당해 기니 해안 인근의 어느 섬에 표류 했던 일을 들려준다. 그 섬에는 수 많은 날개로 뒤덮인 석상이 세워져 있는 연못이 있었고, 그 꺼림직한 석상으로 인해 무서운 일을 겪었다는데...

외딴 섬에 있는 원시 문명을 연상시키는 어느 석상. 미지의 공포와 석상이라는 고전적인 공포 요소가 섞인 형태다 보니 너무나 무난한 내용에 가깝긴 하다. 석상과 관련된 무서운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접해서 흔하고, 외딴 섬이라는 부분도 너무 옛날 클리셰라는 느낌을 줘서 그렇다. 다만 그렇다고 석상과 관련된 부분까지 별로라는 건 아니다. 외형도 그렇고 이게 대체 뭔지 궁금하게 만들기에 마지막 끝까지 보게 만든다.

분명 돌로 된 석상의 일부인데 생명체와도 같은 질감을 준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문제의 날개에 대한 묘사만 보면 보호색을 이용해 자연스럽게 숨어 있는 곤충 같은 느낌이다. 피부가 딱딱한 동물이나 거북이 등껍질 같은 걸 떠올려 봐도 암석과 구분이 안 될 정도의 피부나 껍질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그냥 커다란 날개 한 쌍이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개체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은 모양새라 하니 외형적으로도 꺼림직함이 강하다.

석상의 실체가 밝혀지는 부분은 마치 흡혈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무지막지한 괴물 하나가 아니라 야생 동물 떼에 가깝지만, 원시적인 컨셉의 공포라는 면에서 어울린다. 석상이 아니라 석신이라 지칭 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본다. 자연환경과 하나인 동시에 자연으로부터 숭배 받는 형태나 다름 없어서 그렇다. 신선함에서는 다소 아쉬울 수 있지만, 정석적인 공포라는 부분에서는 나쁘지 않게 볼 여지가 있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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