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디 머더 - 추리 소설에서 범죄 소설로의 역사
줄리안 시먼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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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나온 추리소설은 방대하고, 그 안에서도 여러분야로 나뉘어져 있다. 그 만큼 수많은 작가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한 시대를 넘어 오래 기억되기도 하고, 한 시대로 끝나기도 하며, 또 작품성과는 다르게 인기가 없거나 인기는 있지만 저평가 받기도 하고, 추리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정의나 생각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아무리 추리소설을 많이 읽고, 또 써봤다고 하더라도 추리소설에 대해서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블러디 머더는 추리소설에 대해 잘 설명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꽉 차 있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영미쪽의 새로운 추리작가의 이름을 찾아볼 기회도 있으며, 추리소설의 전망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추리소설의 기원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시대적 분위기와 그 당시 출판된 작품의 성격, 그리고 작가 개개인의 스타일로 분석했다. 국내에 출판되어 아는 이름이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모르는 이름이 더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보다 역사가 더 오래됐고, 많은 작품이 나왔으니 그럴 것이다. 대부분 저자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어서,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시선으로 추리소설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읽으면서 특히 주목했던 점은 각종 추리소설에 대한 줄리언 시먼스의 평가였다. 인기작이라고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작품이라도, 저자는 '아, 그렇구나.'하고 수긍하지 않고 이건 별로다, 이건 과대평가다, 이건 이름만 추리소설이고 내용의 성격은 영 딴판이다 등등으로 비판을 한다. 실제로 내용 중, 흔히 아는 유명작가가 과대평가 받은 인물이라 하지 않나, 이 작가는 처음에는 좋았으나 갈수록 실망이라 하던가, 이 작가는 추리로 인기를 끈 것이 아니라 선정적인 묘사로 인기를 끌었을 뿐이라던가. 보통은 생각지도 않은 점의 정곡을 찌르다보니, 아서 코난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 정도가 아닌 웬만한 작가들은 대부분 저자의 손에 난도질 당하고 심하면 걸래짝이 되기도 한다. 내가 봤을 때는 황금기 때의 추리작가 대부분이 그랬다.

 인터넷을 보면 추리소설 쓰고 싶은데 어떻게 써야하냐고 묻는 질문에 추리소설 쓰는 규칙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그 규칙들도 내용 속에 있었다. 규칙이 나온 배경이나 그 규칙을 세운 인물의 생각을 보고 말하자면, 지금 추리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규칙이 나온 시절에만 잘 먹히던 규칙이고, 소설이라기 보다는 거의 글로 푸는 추리퀴즈를 만든다는 취지로 나온데다, 이 규칙대로면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하드보일드라던가, 마쓰모토 세이초 같은 사회파 같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추리 분위기를 제한한다는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용에서 보면 규칙을 만든 분도 추리란 이렇게 제한되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고 나오니까.

 끝으로 추리소설의 번영을 염원하는 저자의 바람과 함께, 저자가 생각하는 추리소설 형식을 파괴하는 작품이 있었다. 줄리언 시먼스가 생각하기에 추리형식을 수단으로 사용해서 쓰는 것은 내부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라 한다. 즉, 추리가 주체가 되어야지 보조가 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런 작품을 조커라고 부르며, 대체로 추리소설 형식을 흉내내나 요점이 없는 것들이라고 한다. 줄리언 시먼스가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을 가지고 얼마나 격분하는지 읽어본 사람만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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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란토 성 환상문학전집 2
호레이스 월폴 지음, 하태환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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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세시대 고성을 배경으로 신비로우면서 한편으로는 공포스러운 분위기인 고딕소설은 대체로 공포소설에서 소재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고딕이라면 성에서 유령이 등장하는 소설이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딕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딕의 시초로 불리는 소설 오트란토 성을 보면 그렇다.

 오트란토 공국의 왕 만프레드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가 실현되는 것을 막기위해 병약한 아들을 이웃나라 공주인 이사벨라와 결혼시켜 대를 이을려 한다. 순조롭게 결혼식이 진행되던 중, 아들이 앞뜰에 나갔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투구에 깔려 즉사하면서 오트란토 성은 파국을 맞는다.

 왕가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발생한 비뚤어진 욕망과 앞뒤 가리지 않고 연결된 인연으로 만들어진 삼각관계로 복잡한 상황이 펼쳐지고, 이 모든 것을 앞도하는 초월적인 공포의 존재가 간간히 등장해서 분위기를 섬뜩하게 만든다.

 사실 내용상 오트란토 성의 왕족 간에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면 현대 막장극에 버금간다고도 할 수 있다.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결혼하려 한다던가, 의문의 인물이 잃어버렸던 아들이라던가, 여자와 만나면 무조건 사랑으로 연결되서 삼각관계가 된다던가, 적과 싸웠는데 알고보니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였다던가... 밑도 끝도 없이 뜬금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작품이 쓰인 시기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 고딕소설의 묘미인 공포의 존재는 기대치 만큼 등장하지 않고, 주로 왕족들 간의 막장 드라마라서 무서운 걸 기대하고 보면 실망감이 클 것이다.

 좀 오래된 작품이라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보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 작품이 나온 이후로 자극적인 내용이 많이 나온 더라 여기에 나온 표현들을 보면 싱거운 걸 넘어서 시시하게 보일 수도 있다.

 본인이 재미있게 본 것은 주로 중세 시대 배경이다. 영주와 대공의 관계라든지, 성에 있는 비밀통로, 옛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의 느낌, 약간 유럽 설화 같은 분위기가 그러하다. 물론 다른 분들이 똑같이 느낄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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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김유철 지음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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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큼이나 피냄새가 진동하는 내용이긴 했지만,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추리라고는 했지만 분량에 비해 상당히 지루하기만 한 이걸 추리라고 봐야 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차라리 스릴러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스릴러 쪽에서도 달가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스릴러라고도 하면 안 될 것 같다. 추리가 되고 싶은 추리소설이라고 해야 되겠다.

 잔인한 살인마가 나오는 내용치고는 너무 붕 떠있는 인상이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살인마와 경찰, 그리고 주변인물들이 한 공간에 있으나, 전부 따로 노는 것이다. 여백의 미를 강조해서 종이 하나에 살인마가 나오는 장면을 아래, 경찰이 수사하는 장면을 오른쪽 위, 그리고 주변인들이 나오는 장면을 중앙에 했다가, 왼쪽 아래구석에 있는 등 난잡하게 널린 느낌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나온다 하더라도 스릴이라던가, 진지함 같은 느낌이 살아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의 잃어버린 기억에 대한 부분도 애매하게 보였다. 책 소개에서 미리 알게 해놓고 막상 내용에서는 잘 다루지 않다가 갑자기 뜬금없이 툭 던져놓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기억상실을 내용이 아닌 책 설명에서 미리 알고 들어가라고 대충 때워 놓은 게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이나 읽을 때 불편했던 것은 숫자나 영어를 한글 그대로 써놓았던 것이다. 연도나 날짜를 해깔리게 하려는 서술트릭이라면 모를까, 일관성 없게 어디서는 숫자로 써놓고, 어디서는 한글로 써놓고 하면서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문체 스타일이라 보기도 어렵고 그냥 독자를 신경쓰지 않고 불친절하게 썼다는 인상이다.

 그 밖에도 인물들의 말투가 전부 똑같아서 개개인의 차이를 느낄 수 없었던 것과, 반복되는 문장과 표현이 계속 사용된 점은 안 그래도 지루한 내용을 더욱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인물도 명칭으로 되어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아 보기 힘들 때가 많아서 몰입이 상당히 힘들었다.

 결말에 가서는 거의 짬뽕이 되어 있다고 밖에 할말이 없다. 복수, 사회문제, 범죄자가 등장하는 이유,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 그리고 거의 어거지로 끼워 넣은 피와 연관된 살인이 나타나 있다. 게다가 분위기도 결말을 내기 위해 에필로그라는 이름만 붙여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나마 좋게 평가할 수 있는 건, 경찰 조사과정에 대한 세세한 면과 피와 연관된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정보다. 그러나 지적 미스터리가 아닌 이상, 이 장점들은 내용을 더욱 지루하게 만드는 요소에 지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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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도연대 雨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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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괴하면서 무거운 느낌이 특색인 교고쿠도 시리즈의 외전 치고는 상당히 유쾌한 내용이었다. 요괴를 빙자한 범인을 잡는 게 본편의 매력이라면, 백기도연대는 도리어 본인들이 요괴와 관련시켜서 사기를 치는 과정이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본편 주요 인물의 시점이 아닌 타인의 시선으로 전개되는 탓인지, 그 동안 본편 주요인물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떻게 보였는지 알 수 있기도 했다.

 본편에 대한 스포일러에 대해서 말하자면 자세한 내막은 나타나 있지 않아서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껏 해야 어디에서 무슨 사건이 있었다, 누가 그 사건으로 인해 어떻게 됐다, 정도라서 궁금증만 생길 것 같다.

 내용은 재미있었지만, 그 동안 교고쿠도 시리즈를 번역하던 분이 아니라서 읽는 내내 번역 때문에 이래저래 불편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일본어 표준법을 사용해서 생긴 어색함과 어투에서 오는 이질감은 둘째치고, 아무리봐도 나오키 상을 받은 인기작가의 작품이라고 팔릴 것만 염두해 번역에 큰 신경을 쓰지 않은 듯 하다. 일본어에서 が와 の가 들어간 문장을 직역한 부분이 보이고, 대화문에서 작은 따옴표를 빼먹은 게 눈에 띄일 정도로 심했다. 역자를 바꿔서 다시 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리가마

 

 

 전기배선 공사일을 하는 화자는 어느 날, 관방차관의 저택에서 시중을 들던 조카가 강간을 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지인의 소개로 탐정에게 의뢰를 하기로 결정한다. 의뢰를 하고 탐정 에노키즈와 조수 마스다를 따라 도착한 교고쿠도라는 고서점에서 주인인 추젠지와 이런저런 논의가 이루어지던 중, 추젠지는 씻어 놓은 가마를 보며 좋은 계획을 떠올리게 된다...

 고서점상이자 점포이름인 교고쿠도로 불리는 추젠지와 친구들? 이외의 타인이 이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도 해도 될 정도로 화자가 극도로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본편에서도 등장 했다하면 이름 바꿔부르기라던가, 대화를 공중분해 시키는 등의 개그를 남발한 에노키즈가 주연을 맡아서, 심각한 사건이 있고 교고쿠도의 박식함이 있다하더라도 결국에는 개그가 되버리는 어이없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철서의 우리에서 첫 등장했던 마스다가 에노키즈를 따라가면서 정상인의 범주를 벗어나고, 에노키즈의 가장 가까운 지인인 도라카치 마저 기묘하게 보이는 등, 지금까지 본편에서 보아왔던 그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현대에 와서 여성이 받는 차별과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이것은 이 당시 일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여성인권 문제라든가, 사회제도 등등은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든 사건의 모든 것은 공개되기 때문에 결국에는 보여주기 싫은 부분까지 공개되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남자 답다는 것도 고려해 볼 점이었다. 여기저기서 남자답다, 남자답다라는데 도대체 뭐가 어떠면 남자답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오는 화자의 말이 나의 생각과 비슷하고, 동감하기 때문에 인용한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술자리에서 마실 줄 모른다고 하면 그게 어디 남자냐는 비웃음을 당했다. 체력에도 자신이 없어 비실거리면 무슨 남자가 이러냐고 핀잔을 들었다. 매를 맞고도 반격하지 않으면 여자 같다는 조롱을 받았다.

 

 고집을 부리거나 허세를 부린다, 억지를 쓰거나 폭력을 휘두른다. 여자를 폭행하거나 잘난 체하고 남을 경멸한다...이런 것을 남자답다고 예찬한다면 나는 남자이기를 그만두고 싶다.-172p

 

 

 가마에 대한 옛 전설로 시작된 사기극은 이런저런 일을 다겪은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너무나 자연스럽고 치밀하게 계획되고 실행되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인 항설백물어와 비교할 수도 있지만, 권선징악이라는 건 같아도 결국은 난장판을 만들고야 마는 에노키즈 때문에 전혀 성격이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단 에노키즈가 하고자 하는 일의 취지는 뭔지 알겠지만, 그 과정이 문제라서 교고쿠도가 경계하는 것 같다.

 

 

가메오사

 

 

 가마 사건 이후, 웬지 모르게 에노키즈를 찾아가 보고 싶어진 화자는 장미십자탐정사무소를 방문한다. 거기서 에노키즈는 거북과 해깔리게 하는 가메 얘기만 늘어 놓다가 아버지로 부터 도자기를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골동품상 이마가와를 불렀다며 한바탕 소란이었다. 뭐가 뭔지 혼란스러운 화자는 결국 교고쿠도를 방문하게 되고, 추젠지에게 항아리 수집광 저택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된다...

 본격적으로 화자가 에노키즈에게 점점 말려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나리가마 때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순식간에 세키구치와 비슷하게 되버려서 적지 않은 파장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자에게 에노키즈가 본편에서 사건의 상징이 되는 요괴로 취급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도 꽃미남이자 자칭 신이라 하는 탐정 요괴.

 교고쿠도 시리즈에서 그나마 정상적이고, 화자 또한 그나마 말이 통하는 상대라고 생각하던 추젠지도 모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니 에노키즈 만큼이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보면 교고쿠도는 평균을 넘어서는 상식인에, 예의를 알고 나름대로 관대해서 그렇지 이 사람도 에노키즈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을 바보 취급하는 빛과 어둠의 양대산맥이라 해도 되겠다.

 철서의 우리와 아직 국내에 미발매된 무당거미의 이치에서 나름대로 활약을 하는 이마가와가 주연급으로 나와서 골동품이라던가,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 그리고 도자기와 독, 항아리에 대한 내용이 많았다. 본편에서 특이한 용모로 인상 깊은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보통사람의 시선으로는 정말 괴상하게 보이는 모양이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것은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표현이고, 독과 항아리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드는 가메라는 명칭이었다.

 물건에 가격을 매기는 행위가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아무리 진귀한 물건이라도 낮은 가격을 매기면 쓰레기가 되고, 땅에 굴러다니는 흙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고 모사품임에도 불구한데도 가격이 높으면 진귀한 물건이 된다고 한다. 또한 가격은 일종의 한계점을 만드는 주술 작용도 한다고 나온다. 한 번 가격이 정해지면 아무리 가치 있던 것이라도 영원히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가치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이런 주술은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을 거슬러 진행한 대대적인 사기와 죄책감이라는 벌을 받으며 살아온 여자 사이에 항아리를 통해 끼어든 에노키즈는 어김없이 대대적인 계획을 통해 진상을 밝혀내고, 전작보다도 더한 난장판을 만들었다. 아마 이번 작품은 에노키즈의 기물파손이 적나라하게 들어난 내용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야마오로시

 

 

 그림연극을 하는 곤도는 화자에게 탐정물을 쓰기 위해 탐정 에노키즈 취재를 부탁한다. 최근 사건이라면 추젠지에게 듣는 편이 더 현명할 것으로 판단한 화자는 나가노로 갔다가, 역에서 소설가 세키구치를 함께 만난다. 그들은 하코네에서 신세를 진 승려에게 오래전 인연을 맺은 승려에 대한 기묘한 일을 의뢰받게 된다.

 설명에서는 야마오로시가 가시두더지, 즉 호저라고는 하지만, 일본 사이트에서 부엌을 배경으로 그려 놓았다고 해서 일각에서는 강판을 나타낸 것이라고 주장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가마에 항아리까지 나왔으니 이쯤되면 백기도연대 雨를 주방 3종 세트라 해도 될 듯하다. 요괴 전문가인 작가도 이 점을 염두해 둔 것인지 작중에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강판이 등장했다.

 철서의 우리 관계자가 등장하고, 배경 역시 사찰이었던 곳이기 때문에 철서의 우리 외전이라고 해도 될 듯하다. 선종 관련이기는 하나, 요리와 관련되어 있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다는 것 말고는 잘 알지 못했던 요리 분야에 대해 어느 정도 나타나 있었다. 그 밖에도 요리 관련 고서적이라던가, 에도 초기의 음식 문화 같은 것도 나와서 에노키즈가 미식가 탐정 같이 되는 줄 알았다. 에노키즈 성격이라면 미식이고 고급이고 뭐고, 가치를 알려고 하지 않겠지만.

 가시두더지에 대한 얘기는 큰 분량은 아니지만 약간은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물학적인 면도 그렇지만, 옛날 사람 눈에 보여진 특이한 생물이 요괴로 비칠 수도 있다는 것도 그럴 사 하게 느껴졌다. 일단은 그 당시에 설명 불가능한 것들은 모두 괴(怪)였으니 말이다.

 여기서 번역에 대해 지적을 하자면 에노키즈가 세키구치를 부를 때의 호칭을 반영하지 않은 점이다. 본편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은 걸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에노키즈와 관련 인물(정확하게 얘기하면 본편 관련인물이다.)이 꽤 많이 나오는 편이라서 화자가 세키구치와 같은 취급을 받고, 심지어 세키구치와 점점 비슷해지는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화자 말고는 전부 정상인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도 그렇다. 어딘가 특이한 사람이라도, 그나마 평범해 보여도, 멀쩡하게 생겼어도 결국에는 에노키즈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기물파손에 이은 에노키즈의 활극이 잘 나타나 있었다. 흉기를 든 적과 대치하고 쫓고, 멱살을 잡는 등, 에노키즈의 폭력성이 들어나는 것 같았으나 절반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고 해야 될 것이다. 어쨌거나 활극은 활극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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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 보르헤스 전집 2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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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르헤스라는 이름을 들어본 것은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보고서였다. 뭔가 특별한 구석이 있다는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단편이 들어있는 이 책을 골랐다. 대체로 상상이 실제처럼 보이게 상상과 실제를 섞은 구성이라서 내용이 어렵게 보였다. 플라톤 같은 고대 그리스부터 칸트, 쇼펜하우너, 사무엘 존슨 등등에 이르는 철학에 대한 거라던가, 저자가 달아 놓은 것과 역자가 달아 놓은 방대한 양의 주석은 단편소설이라 해도 장편소설에 버금가는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역자 주석은 해석을 중점으로 했지만 저자인 보르헤스가 달아놓은 주석을 보면 거의 주석에도 소설의 한 부분을 써놨다는 느낌이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개인적 취향인지는 몰라도 어느정도 흥미롭고 재미있게 봤다.

 책은 1부 픽션들과 2부 기교들로 이루어져 있다.

 

 

픽션들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 되어 있다. 페이지 수로 보면 분량이 많지 않아 보이지만 각각의 내용이 굵직굵직 해서 빨리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주로 존재하지 않는 책이 사건의 중심이 되거나 주제가 되는 내용이 많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알모따심에로의 접근》,《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바벨의 도서관》,《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 그러하다. 가상의 책이지만, 작중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신문, 잡지에 실렸었다던가 실존작가가 그 작품에 대한 해설을 썼다는 부분이 있다. 물론 이 역시 사실이 아니며 작가가 실제성을 부여하기 위한 장치였다.

 내용은 대체로 환상적이고, 실존하는 책처럼 비평하는 것도 있으며 때로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심지어 우주와 시간적 개념의 내용도 보인다. 틀뢴의 언어가 지구를 휩쓴다는 음모론을 다룬《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서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리태거 백과사전이 1달러 지폐에 숨겨진 프리메이슨의 삼각형이나 전시안 같은 상징이 숨어있는 것으로 둔갑하고, 한 작가의 시간적으로 거꾸로 된 소설을 분석한 것을 다룬《허버트 퀘인의 작품에 대한 연구》에서 복잡한 시공간 개념을 나타낸 것처럼 보르헤스의 작품 속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고, 세상은 무한하다는 느낌이다.

 인도 최초의 탐정소설에 대한 비평을 담은《알모따심에로의 접근》과 현대에 다시 쓰인 돈키호테를 다룬《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전적으로 가상의 책을 존재하고 읽었던 것처럼 쓰여있다. 내용에 대한 해석이나 글쓴이가 어떤 의도가 있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있어서 문학이론처럼 보였다.

 꿈을 통한 신전의 탄생과 멸망이 반복되는 《원형의 폐허들》과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성행한 추첨권을 다룬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약간 고대문명 분위기였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원형의 폐허들》은 창조신화 같은 분위기라면,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먼 옛날에도 존재한 어리석은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읽을 수없는 언어로 된 책으로 구성된 도서관을 다룬 《바벨의 도서관》은 하나의 거대한 우주관을 보는 것 같아서 상상도 못할 정도의 공간을 느끼는 것 같았다. 도서관의 모양과 구성도 멋졌지만, 실제로 이런 도서관이 있다면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탐정소설이라 밝혔으나 우주와 시간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은 생각할 거리와 함께 충격적인 반전의 재미를 준다.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지만, 전쟁과 관련없는 내용이 나오다가 본분을 잊지 않았다는 듯이 시원하게 뒤통수를 치는 맛이 정말 일품이라고 생각한다.

 

 

기교들

 

 

 총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픽션들에서 주제가 책이었다면, 기교들은 주로 인물로 유대인이 많았고 대체로 종교와 차별받은 민족에 관한 관련된 내용이었다.

 브라질에 사는 칼에 베인 상처 자국이 있는 영국인의 사연을 다룬《칼의 형상》, 19세기 중엽의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유명 저작을 따라해서 영웅인 된 자의 이야기를 쓸 과정을 다룬《배신자와 영웅에 관한 논고》, 2차세계대전 당시 프라하에서 처형 대상이 된 유대인 극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다룬《비밀의 기적》, 게르만혈통의 피를 가진 아르헨티나인이 겪는 불행을 다룬《남부》같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세상 전부를 기억할 수 있는 소년을 다룬《기억의 천재 푸네스》는 소재부터가 정말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쓴 글이라는 걸 생각하면 할 수록, 얼마나 심각한 불면증이었는지 대충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유대인 연쇄 살인사건에 나타난 기묘한 상징을 통해 범인을 추격하는 탐정을 다룬《죽음의 나침반》은 추리소설 구성이라서 약간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고,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만큼 충격적인 반전이 있어서 나름대로 재미면으로도 최고였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배신한 유다의 숨겨진 의도를 다룬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 아르헨티나의 유명 서사시를 패러디한《끝》, 고대 이집트에서 유래한 신비로운 종교를 다룬《불사조 교파》는 종교적인 면이 강했다. 고대 이집트 종교를 다룬 《불사조 교파》는 픽션들에 있는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와 비슷한 비밀결사가 나오지만, 음모론에 나올 법한 사악한 집단이 아니라서, 종교의 자율성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이 들게 했다. 성경을 기반으로 한 《유다에 관한 세 가지 다른 이야기》는 성경에 대해 전무해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유다와 예수의 관계를 다룬 내용이라서, 어디까지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라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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