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이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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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속의 자살

엄격하기로 소문난 솜 도매상인 오쿠로야에서 고용살이를 하게 된 긴지. 별처에 지내는 선대 주인이 몸이 편찮아지면서 심부름을 다니다가 병문안을 가는 가게 주인의 아들인 도이치로와 같이 다니며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도이치로에게 결혼 주선이 들어오고 아무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가게의 하녀 중 한 명이 도이치로와 사귀는 사이라고 갑자기 밝히는데...

가게 주인 측과 고용인 사이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을 다루는 내용이다. 단순 치정 싸움을 넘어 괴기의 영역으로 향해서 꽤 섬뜩하다. 여기서 메인 소재를 꿈이라고 간단하게 볼 수도 있지만, 정확히는 생령에 해당된다고 본다. 생령(生霊)은 일본에서만 많이 쓰이는 심령 요소다 보니 많이 생소할 것이다. 한자어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 있는 영혼이라는 뜻이다. 즉 살아 있는 채로 흘러나온 영혼이 해를 끼치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원념만 해도 상당한데, 아직 살아있는 사람의 영혼이 가진 원한이라니. 이건 이것대로 정말 무섭게 느껴진다. 현존하는 사람이 귀신처럼 해를 끼친다고 하니 말이다.

긴지를 통해서 고용인과 가게 측 사이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데, 보면 볼 수록 왜 그런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이건 맨 처음에 프롤로그 겸으로 보여준 수건 자살과도 연관성이 있다.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나, 고용인이나 분수를 넘어서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이건 신분이나 집안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검소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재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잘 판단하고.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라 본다.

그림자 감옥

납 도매상인 오카다야의 최고 대행수였던 마쓰고로를 찾아온 무사 이소베. 오카다야는 주인 가족이 모두 죽고 고용살이 일꾼들도 여기저기로 흩어진 뒤로 방치된 불길한 곳이 된지 오래다. 그런 곳을 이소베가 방문하고 온 길이라 들은 마쓰고로는 하나하나 털어 놓는다. 오카다야가 어떻게 망했고, 감옥방이란 곳에서 발생한 무서운 일까지...

잘못 자란 자녀로 인한 파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모양이다. 오카다야의 경우는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더욱 큰 악행까지 번졌으니 오래가지 못할 만했다. 쌓이고 쌓인 악행은 어떻게든 파멸하는 법이니까. 다만 이 작품은 단순한 권선징악을 다루는 게 아니라서 마지막까지 음울함이 깊게 남는다.

최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역시 최악의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으로 인한 제약이 많은 탓에 좋은 방법을 찾으려 해도 극단적인 수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최악의 상황이 끝나게 되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불미스러운 일에 결정타를 날린 재앙으로서 영원히 남을 상처가 된다. 세상에는 괴이한 일로. 스스로에게는 영원한 감옥에 갇힌 것과 같은 트라우마로. 이 작품이 한 사람의 독백으로만 진행되는 구성인 건 아마 이러한 짙은 그림자 감옥에 갇힌 개인을 나타내고자 했던 걸로 보인다.

이불방

히가시초에 위치한 술집인 가네코야는 주인이 단명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이곳에서 일하던 하녀인 오사토가 갑자기 코피를 흘리며 급사한 일이 벌어지고 그 하녀의 동생인 오유가 새로운 고용살이로 들어오게 된다. 오유는 가네코야의 고용살이 일꾼이라면 반드시 거쳐가는 이불방이라는 곳의 존재를 알게 되고 이제 곧 있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게 되는데...

수상한 방에 대한 이야기는 꽤 많은 편이다. 무엇이 나온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 가네코야의 이불방이 딱 그런 느낌을 준다. 출입구 하나만 있고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전부 막힌 방이라는 점만 봐도 음산한 느낌이 강하다. 말이 이불방이지 사실상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방처럼 보이니까.

죽어서도 계속 함께 한 오사토와 오유를 통해 밝혀진 이불방의 진실은 번영과 행복이 언제나 비례하지 않는 다는 증거 그 자체였다. 사실 가네코야의 주인이 단명한다는 점에 비해 장사나 고용인에 대한 문제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예측이 될 만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뭔가 잘 된다면 좋지 않은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이불방이었고, 가게의 역사 만큼이나 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빛이 언젠가 찾아오듯이 영원한 어둠은 없다. 한줄기 빛으로 점차 틈이 보이기 시작한 어둠은 결국 끝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 묵혀둔 업화를 토해내면서 말이다.

매화 비가 내리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름 장수 일을 하던 미노키치는 가까운 이웃으로부터 누나 오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오엔은 미노키치가 어릴 적부터 엄마를 대신할 정도로 주변에서 훌륭한 딸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음식점의 고용살이 일꾼으로 가게 됐다가 외모를 문제 삼아 거절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 사건 이후로 오엔에게 기이한 일이 발생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지냈는데...

사람의 외모는 무엇으로 판단하느냐의 문제에 가까운 내용이다. 대체로 겉모습인 얼굴로 판단하는 일은 예로부터 많은 편이긴 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다. 마음이 곧 얼굴이자 외모다. 아무리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마음이 추악하다면 얼굴로 나타난다고 말이다. 대체로 이런 문제가 나오면 나쁜 사람이 천벌을 받는 내용인데, 이 작품은 다소 방향성이 다르게 보인다.

살면서 남을 저주해본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아마 한 번도 안 해봤다고는 못할 것이다. 누구나 기분 좋지 않은 일을 겪으면 반쯤 장난삼아,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저주를 입에 담아 내뱉고는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매우 진지하게 염원하고 진짜 이루어지면 어떨까. 아마 평범한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혹스러울 것이다. 자신이 가진 나쁜 마음이 누군가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는 곧 마음이 추악해졌으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어졌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하다. 언제 어떻게 마음처럼 추악한 얼굴이 될지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하루하루 살아가기 바쁜 서민에 해당되기에 안타까움이 담긴 음산한 느낌이다. 부족하더라도 올곧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한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잘못된 마음을 가지고 말았다. 처음부터 마음씨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그 죄책감이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이를 통해 당사자인 오엔은 물론이고 동생인 미노키치도 깨닫는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 보고서 함부로 악의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면 마음이 병들어 겉으로도 추한 사람이 되고 마니까.

아다치 가의 도깨비

붓과 먹을 파는 가게인 사사야에 시집을 가게 된 어느 하녀. 사사야의 주인인 도미타로는 나이 많으신 어머니를 잘 모실 만한 검소한 여자를 원해서 결혼하게 된 것이라 주변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별다른 문제 없이 결혼 생활이 이어지던 중, 시어머니에게 숨겨진 뭔가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사람이 사람을 멀리하게 되면 결국 가까워지게 되는 건 무엇인가. 결국에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것일 테다. 보통은 불길한 존재는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과연 언제나 그럴까?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고, 사람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과연 기댈 곳은 어디인가. 세상 한 구석으로 몰린 이들끼리 만나 서로가 무해하다는 판단을 한 이상 다른 이들의 의견은 그저 괜한 참견에 지나지 않는다.

이 도깨비라는 존재가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점 역할을 해서 꽤 묘했다. 사람에 따라 눈에 보이는 외형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온 마법 생물인 보가트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보가트는 상대가 무서워 하는 걸로 변신하는 반면, 이 작품의 도깨비는 마치 거울처럼 그 사람의 내면을 형상화 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이 추악할 수록 무서운 형상을 하고,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라면 초라한 모습으로 말이다. 그래서 작중 주인공의 눈에 도깨비가 어떤지 밝혀질 때는 꽤 의미심장했다. 겉으로는 알 수 없을 내면의 공허를 마치 시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런 분위기의 작품이다 보니 단순히 무섭다는 인상이 아닌 순수한 괴이함을 보여줬다고 본다.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니라고 반드시 무서운 것은 아니며, 때로는 이렇게 사람과 공존할 수 있다. 그리고 괴이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존재일 수도 있다고 말이다.

여자의 머리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좋아서 여자애 같다는 말을 자주 들은 다로.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를 잃고 공동주택 관리인에게 맡겨져 있다가 손재주 덕분에 주머니 가게인 아오이야에 고용살이를 하러 가게 된다. 태어나서 단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던 다로를 아오이야에서는 별문제 삼지 않고 친절하게 대해주며 잘 지내던 중, 창고방에서 허공에 떠 있는 여자의 머리를 보게 되는데...

자녀에 대한 문제를 다룬 괴이한 이야기로 공포와 감동을 동시에 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말을 하지 못했다는 기이한 점에, 고용살이를 한 가게에서 목격하게 된 괴이까지 해서 겉으로만 보면 무서운 면이 꽤 많다. 그러나 다로와 아오이야 간의 숨겨진 사연과 진실을 보면 또 다른 괴이함을 느끼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있을 수 있을까.

추악한 악인은 죽어서까지 괴물이 되고, 죄 없는 이는 하늘이 끝까지 도와준다는 다소 흔한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단순한 우연으로 보일 부분을 나름의 복선으로 꽤 그럴싸한 연결성을 보여줘서 한층 더 흥미롭다. 뭔가에 대한 믿음이 생기거나, 이해 못할 풍습이 생기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다 있나 보다.

가을비 도깨비

고용살이 하는 곳을 바꾸기 위해 오신은 자신이 알던 중개업소를 찾아간다. 가게에는 자신이 알던 주인 아저씨가 아닌 모르는 여자가 있었다. 오츠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은 중개업소 주인과 결혼 한지 얼마 안 된 사이라 하며 오신의 용건을 들어준다. 오신은 가노야라는 방앗간에서 하녀로 일하다가 해고를 당하게 됐고 그 이유가 연애 문제로 인한 것이었는데...

사람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되느냐의 문제를 다루는 내용이다. 이게 과연 선한 의도로 하는 제안일까. 겉모습만 보면 분명 괜찮아 보이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수상쩍은 면이 적지 않은데 믿어도 될까.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이 무작정 믿고 싶어도 마음 한구석에는 뭔지 모를 불안감이 감돌기에 안심할 수가 없다. 이 문제를 도깨비에 비유하며 설명한다. 사람의 가죽을 쓴 도깨비가 숨어 살고 있다고 말이다.

외적으로 사람이 아닌 초자연적인 존재로서 설명되던 것과 다르게 이 작품의 괴이는 순수하게 사람 그 자체를 지칭한다. 멀쩡하게 사람과 섞여 살 수 없어, 사람을 해치고 살 수 밖에 없으니, 도깨비와 같은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살아 생전에 인간성을 잃은 이들이 괴기한 요물이 된다는 이야기가 많은 만큼, 사람이 아닌 존재라고 지칭되는 건 그 만큼 무거운 의미나 다름없다. 말이 어느 정도 순화되서 그렇지, 사실상 귀축 취급을 하는 것이니까.

명쾌한 해결과 답을 보여주던 다른 작품과 달리 여기서는 다소 애매모호하게 끝을 낸다. 이는 사람에 대한 판단은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의미로 보인다. 겉만 봐서 누가 도깨비인지 알 수 없으니, 답을 정해주는 이 역시 도깨비일지 모른다고 말이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본인의 마음에 달린 거나 마찬가지다. 사람으로 살게 될지, 아니면 도깨비로 살게 될지.

재티

기류초 5번가에 있는 나막신 가게인 다이라야에서 고용살이 일꾼이 칼부림을 저질렀다는 신고를 받은 세이고로 대장. 다친 사람은 가게 주인의 동생인 젠키치로 잠들어 있던 중에 습격을 당했다고 한다. 세이고로 대장은 가해자인 하녀 오코마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보고 의원을 불러 살펴보게 한다. 그러던 중, 오코마가 하얀 재를 뿜으며 죽어버리는데...

어떠한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과정에 가까워서 다소 추리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현실적인 사건이 아니라 괴이한 사건이다 보니 논리적인 추리가 아닌 호러 미스터리에 가깝다. 그래서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도, 추측과 해석의 영역으로 남기에 여전히 미스터리가 깊게 남는 편이라 할 수 있다.

낡은 집에서 무언가가 나오듯이 물건도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씌여서 그걸 사용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여기서는 그것이 재티의 형태로 나타난다.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허연 연기. 보통은 형체를 알 수 없을 사물에 붙어 있는 존재를 형상화하기 딱 좋은 매개체다.

연기란 이전부터 무언가를 숨기거나 어떠한 형체를 만들기 위해 자주 쓰이는 요소다. 이러한 연기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불이다. 오랜 인류의 역사와 함께 하며 생활에서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그것과 언제나 함께한다. 그렇다 보니 연기에 대해 어떠한 인상이 생긴다면 언제나 가까이에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건 진짜 무언가가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연기처럼 쉽게 없어지지 않는 사람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일까. 이를 테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업보나 트라우마 같은 것 말이다.

바지락 무덤

요네스케는 중개업소를 물려준 돌아가신 아버지의 바둑 친구였던 할아버지인 마쓰베에의 문병을 가기 위해 바지락을 산다. 병석에 있던 마쓰베에는 문득 요네스케의 아버지가 죽기 전에 들었던 얘기가 떠올라 말해준다. 요네스케의 아버지는 10년마다 똑같은 얼굴의 다른 이름, 다른 경력을 가진 처녀가 고용살이할 곳을 찾으러 오는 일을 겪었다고 한다. 문제는 마쓰베에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것인데...

나이를 먹지 않고 겉모습을 그대로 유지한채 오랜 세월을 살아온 자. 불로불사로 살아가는 이에 대한 전설은 전세계적으로 꽤 있는 편이다. 이 작품 역시 비슷한 소재로 볼 수 있으면서, 뭔지 모를 기분 나쁜 섬뜩함을 매우 강하게 준다. 단순한 괴이를 넘어서는 꺼림직한 느낌이 유독 강해서 그렇다. 자세히 알면 안 되는 무언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지 마라. 알면 다친다. 이게 사실상 이 작품의 진짜 소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왜 하필이면 바지락일까 싶었는데, 생각해 보면 작중 주요 인물들 간의 관련성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한다. 단순히 바지락을 먹었다는 정도가 아니라 뭔가를 보고서 모른 척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바지락 무덤이란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일종의 경고 표시라고 본다. 평소 조개류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없던 편이라, 이 작품의 마지막 부분처럼 섬뜩한 묘사가 가능할 줄은 몰랐다. 역시 해산물이라면 뭐든 무섭게 만드는 게 가능한 걸까.

한편으로는 호기심과 공포, 둘 중에서 무엇이 더 금단의 비밀을 파해치는 원동력이 되는 건지 궁금해진다. 보통은 호기심이 먼저라고 여겨지는 편이었는데, 이 작품을 보면 때로는 공포가 더 부추기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목격한 것이나 들은 것이 제발 틀리길 바라는 마음인 셈이다. 그래야 안심할 수 있거나, 확신을 가지며 불확실한 불안감을 내려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 확인하는 과정이야 말로 곧 공포에 집어 삼켜지는 과정이나 다름 없다. 이걸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시인 고딕 장르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사실상 어떻게 하든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선택지가 없는 셈이라 애초에 위화감을 인식하지 않도록 조심하게 최선이다. 이미 인식해 버렸다면 지나가는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듯이 최대한 신경 쓰지 않아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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