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성 인간 - 단순한 회복을 넘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는 회복탄력성의 힘
알리아 보질로바 지음, 손영인 옮김 / FIKA(피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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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원상회복이 잘 되던 용수철도 시간이 지나면 탄성력이 떨어져 흐물흐물 늘어나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점점 신체적인 회복력뿐만 아니라 정신의 회복력 또한 현저히 느려짐을 느낀다. 어릴 때는 어른이 되면 성숙해져서 모든 일에 담담해질 줄 알았건만, 오히려 한번 무너진 정신은 작은 일에도 갉아먹히고 있다.


 '탄성인간'에서 저자는 회복탄력성을 개발하기 위해 Awareness(인식) - Belonging(소속감) - Curiosity(호기심) - Drive(추진력)이라는 ABCD 4단계를 제시한다. 이 책의 4장은 각 단계별로 매칭되고, 저자는 각 단계별로 실제 인물들의 경험을 토대로 회복탄력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며 실습과제들도 제시한다.


 첫 번째 단계, Awareness(인식)은 소크라테스의 말마따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명확하게 아는 것은 제대로 된 회복탄력성을 발휘하는 시작점이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불안이 팽배한 상황에서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나서기는 어렵다. 저자는 자기인식이 명확할 때, 건설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긍정적인 마인드셋을 설정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두 번째 단계, Belonging(소속감). 여기서의 소속감은 가족, 직장과 같은 집단뿐만 아니라 나의 목표, 경험, 믿음 등도 포괄한다. 인상적인 점은 주어진 집단이 비록 온전치 못하다 해도 이를 핑계삼아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조건을 찾고, 만들어 내야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다는 점이다. 어디 또는 무엇에 소속될 것인가는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 Curiosity(호기심)은 회복탄력성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 궁금했는데, 새로운 시각과 가능성을 탐구하려는 태도가 변화와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회복탄력성을 발휘할 기회의 창을 열어준다. 어떠한 장애물을 맞닥뜨렸을 때 멈추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저 장애물 뒤에 무엇이 있을지, 이 장애물은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지 궁금해 하며 장애물을 극복할 방법을 찾을 때, 나는 이전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네 번째 단계, Drive(추진력)이 있어야 ABC 세 단계를 거쳐 형성된 회복탄력성을 비로소 실천할 수 있다.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는 의지와 에너지가 바로 추진력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전진해야 지속적인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다.


 저자는 회복탄력성은 단순히 다시 일어서는 것을 넘어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이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리기조차 어려운데, 그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니 이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생의 목적을 생각해 보니 저자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어제와 같은 인간으로 살려면 어제와 같이 살면 되지만, 어제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오늘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 ABCD 4단계를 되새기며 하루하루 실천하다 보면 미래의 나는 좀 더 나은 인간, 어떤 고난과 역경에도 다시 튀어오르는 탄력성을 가진 인간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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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머더 클럽
로버트 소로굿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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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로 머더 클럽’은 발랄한 분홍색 표지와 제각기 역동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세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 표지만 봐도 경쾌하고 밝은 코지 미스터리임을 알 수 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인 말로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만족스러운 노년을 보내고 있는 주디스가 이웃집에서 총소리를 들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쾌한 톤을 유지한다.


 총소리를 들은 주디스는 즉각 경찰에 신고하지만, 타니카 경사의 미온적인 반응이 못마땅했던 그녀는 직접 자신이 이웃을 찾으러 옆집에 갔다가 그의 시체를 발견한다. 살인사건으로 전환되면서 경찰은 경찰대로, 주디스는 주디스대로 본격적인 수사에 나서지만 갈피는 잡히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비웃듯이 연쇄적으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주디스는 수사 과정에서 벡스와 수지를 만나게 되고 세 여성은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중년과 노년의 여성에게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점을 십분 이용하여 이들은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수사요원으로서 맹활약을 하고, 결국 경찰인 타니카도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서로 연관성 없어 보이는 세 건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 중 두 건의 살인사건은 각각 유력한 용의자가 있지만 이들의 알리바이는 굳건하다. 거기에 이 세 사건이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 졌다는 증거가 남아있다. 결국 이 미스터리의 열쇠는 세 건의 사건 사이의 연관성에 있고, 주디스는 십자말풀이를 풀듯이 사건을 차근차근 풀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세 여성이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소설의 유쾌함을 더해준다.


 미스터리의 해결 과정도 흥미롭지만, 이 소설의 묘미는 세 여성의 서사에 있다. 7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일을 하면서 멋진 저택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는 주디스는 젊었을 때 어두운 과거를 집 한 구석에 잔뜩 쌓아두고 있고, 이로 인해 타인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기피한다. 가끔 푼수같고 대책없어 보이지만 누구보다 용감한 수지는 그녀가 지닌 빛바랜 가족사진처럼 가족들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외롭게 지내고 있다. 벡스는 신부의 아내, 엄마라는 역할에 갇혀 자아를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 세 여성은 함께 살인사건을 수사하면서 각자의 껍데기를 깬다. 수지는 다시 딸과 연락을 시작하며 관계 회복을 시도하고, 처음에 '신부의 아내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며 수사 참여를 꺼리던 벡스는 어느새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고 마지막에는 처음의 벡스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주디스 또한 혼자보다는 여럿이 낫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된 수지와 벡스를 진정한 친구로 받아들인다.


 한편, 비어있는 상사의 자리를 메꾸며 본인 능력치를 훨씬 뛰어넘는 사건들을 해결해야 하는 타니카는 워킹맘으로서 남편과 아이들, 아버지까지 부양하는 부담을 짊어지고 있다는 설정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처음에는 그녀를 바라보던 삐딱한 시선은 어느새 공감으로 변해 있었다.


 이 책을 덮으며 주디스, 수지, 벡스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은 옮긴이의 말을 보며 후속작에서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을 발휘하는 세 여성의 새로운 활약상을 하루빨리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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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영국사 - 세계를 사로잡은 대중문화 종주국 영국의 도시와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김현수 지음 / 다산초당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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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사에 관심이 많긴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영국사는 단편적이다. 대학교에서 서양사 강의를 많이 듣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영국사와는 연이 닿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아는 영국사는 중간 중간 공백이 크게 뚫려 있어서 이 공백을 한번쯤 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30개 도시로 읽는 영국사’를 읽기 전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등을 이미 읽어봤기에 책의 구성이 어떨지에 대해서는 대강 짐작했다. 하지만 이 책은 기본적으로 지리적 위치와 함께 영국의 색슨족, 주트족, 앵글로족, 켈트족과 같은 부족과 이들이 세운 왕국들을 고려하여 30개 도시를 선정하고, 영국에 존재했던 수많은 왕국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도나 도시의 유적지 등 그림과 사진도 풍부해서 역사서이자 여행서 같은 느낌도 든다.


 책에서 다루는 30개 도시들 중 몇몇은 익숙하지만, 일리, 리즈 등 생소한 도시들도 많아서 목차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물론 익숙한 도시여도 도시가 지닌 역사까지 알고 있는 것은 아니어서 내가 생각하는 도시의 이미지와 역사를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다. 학구적인 대학 도시일 것 같은 옥스퍼드에 수 차례 피로 얼룩진 역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고, 로빈후드로만 알고 있었던 노팅엄이 근대에 레이스 산업으로 유명했다는 걸 알고 둘의 부조화에 피식 웃기도 했다. 특히 개인적으로 잘 알지 못했던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의 도시들을 다룬 3부를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각 도시들의 과거부터 현재 모습까지 폭넓게 다루다 보니 도시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과거 영국의 수도였던 윈체스터가 그 위상을 잃고 런던에 밀렸다는 점이나, 별 주목받지 못한 도시였던 맨체스터가 면직산업으로 성장하고 축구와 문화로 지금까지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라는 점 등을 보면 도시가 피워내는 역사의 역동성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영국은 언젠가 꼭 가보고 싶다 생각했으면서도, 정작 어디를 가고 싶은지 생각하면 런던 말고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글로스터에 가서 대성당의 찬란한 스테인드 글라스도 보고 싶고, 콜체스터에 가서 로마 성벽을 거닐며 브리타니아를 느껴보고 싶다. 카디프 성의 벽화나 사진으로만 봐도 황홀한 아랍 룸도 직접 가보고 싶다.


 세계사를 논할 때 영국은 빼놓을 수 없는 나라이다.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산업혁명의 발상지, 입헌군주국이라는 독특한 정체, 다채로운 대중문화의 종주국… 영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30곳의 도시들은 우리가 아는 영국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가 계속 나와서 더 많은 국가와 도시의 역사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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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은일당 사건 기록 - 사라진 페도라의 행방 부크크오리지널 3
무경 지음 / 부크크오리지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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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 너무 어둡고 무겁지는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창씨개명한 조선인 순사에게 고문을 당하고 이등시민 취급받는 조선인의 모습들이 나오기는 해도 전반적인 작중 분위기는 마냥 무겁지는 않고, 오히려 신식과 구식이 뒤섞인 당시 경성의 길거리나 생활상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작품의 주요 내용은 도쿄에서 돌아온 유학생 에드가 오가  두 건의 도끼 살인사건에 연루되면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범인을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살인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보다 작중 인물들이 더 흥미롭다.


 일단 작중 분위기를 끌어올리는데는 주인공 에드가 오의 역할이 크다. 일단 에드가 오라는 이름과 페도라부터 수트까지 완벽한 차려입은 겉모습, 말끝마다 강조하는 ‘모던’에 대한 집착부터가 식민지 조선과는 동떨어진 모습이다. 여기에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지식인인데 하는 행동은 철없는 대학생같은 괴리감은 잔인한 살인사건과 대비되어 작품 분위기를 한결 가볍게 만든다.


 하숙집 딸이자 과외 학생인 선화는 에드가 오와 함께 누이와 같은 케미를 보여주는데, 가끔은 선화가 누나 같이 여겨질 때도 있다. 또한 냉철한 상황 판단이나 추론 능력은 에드가 오보다 낫다. 탐정의 조수이지만 탐정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조수라는 클리셰를 뒤집은 캐릭터랄까. 아니, 사실 진짜 탐정은 선화일지도.


 다방 흑조의 주인이자 과거 에드가 오의 과외학생이었던 연주는 등장이 많지는 않지만 출중한 능력을 보여준다. 선화와 마찬가지로 탐정보다 능력있는 조언자로서 신스틸러 역할을 톡톡히 했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연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를 먼저 읽어서 연주가 이 소설에서 어떻기 그려질지 궁금했는데, 비중이 크지 않아서 아쉬웠다. 


 이외에 어딘가 수상해 보이는 계향, 헌책방 할아버지, 약방의 감초같은 영돌아범, 냉정하기 그지없는 미나미 순사부장 등 소설 속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개성이 강해서 1920년대 경성의 모던 보이인 에드가 오가 크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근현대사 시간이나 문학시간이 항상 암울한 시기로만 배웠던 일제강점기에도 이렇게나 다양한 사람들이 나름의 일상을 영위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보통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들은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하여 일제와 맞서 싸우는 내용이 많다. 하지만 그 당시에 그들과 같은 영웅 또는 악질적인 친일파만 있었을까. 독립에 대한 열망은 있어도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거나, 아니면 나라가 어떻게 되든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에드가 오 또한 일제의 만행과 그에 영합한 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독립 운동에 투신할 정도의 적극적 열정은 없고, 그저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모던을 부르짖으며 계몽을 외친다. 뒤팽이나 홈즈같은 탐정을 꿈꾸며 사건 조사에 나서지만 엄청난 추리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에드가 오가 밉지 않게 여겨지는 것은, 그의 소시민적 모습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사건 자체도 거창한 대의가 아닌 순전히 개인적 동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에드가 오의 캐릭터성과 궤를 같이 한다.


 1929년 경성, 누군가는 독립운동을 하고, 누군가는 일제에 부역하던 그 시간, 그 곳에는 지금 우리와 같은 일반 사람들이 있었다. 하루하루를 살아내기 바쁜 사람들, 마음 속에 뜻은 있지만 아직 펼치지 못한 자들. 개인적으로는 시리즈가 진행될 수록 에드가 오가 어떤 모습을 보일지가 기대된다. 그리고 선화의 가족사, 연주와 에드가 오의 과거 등 에드가 오를 둘러싼 사람들이 펼쳐낼 드라마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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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산티아고인가
나선영 지음 / 바른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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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산티아고인가’는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유명한 프랑스 길, 그 800km 긴 여정 동안 저자가 만난 순례길을 글과 사진으로 생생하게 보여준다. 순례길의 시작, 생장 피에 드 포르부터 팜플로나,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사리아 등 차근차근 저자가 걸어간 길을 따라가다보면 나도 어서 이 길을 걷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른다.


 저자는 그 길에 나름의 이름을 붙였다. 사랑의 길, 영혼의 길, 비움의 길, 외로움의 길, 후회의 길, 고독한 길 등등. 길을 꾸며주는 다채로운 수식어를 보고 있자니 그 길의 어떤 부분에서 저자는 이러한 단어들을 떠올렸을지, 이 단어들이 지금 내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 단어 자체에 대해서 차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800km를 사람의 힘으로 걷다 보니 산티아고 순례길은 편안한 여행길만은 아닐테다. 평탄한 길도 있고 오르막길도 있고, 진창인 길도 있고 돌밭도 걸어야 한다. 하지만 마냥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에 문득 마주치는 해바라기 꽃밭이나 십자가 등이 주는 울림이 더욱 크지 않을까. 저자가 길을 걸으며 곱씹었던 감정들과 깨달음은 아직 산티아고 순례길을 밟아보지 못한 내게 감동과 함께 순례길에 대한 갈망을 일깨웠다.


 ‘왜, 산티아고인가’ 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 왜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존재를 알게 된 건 10년도 더 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가 없는 나는 순례라는 행위 자체에 큰 감흥이 없었고, 800km를 걷는다는 건 순례보다는 고행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게 힘든 길을 지나 도달한 곳에서 과연 그 고생에 상응하는 보람이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직장인이 되고, 여기저기 치이다가 바닥까지 내려앉았을 때, 우연히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에서 감격에 겨워하는 순례자들의 영상을 보고 문득 나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나서고 싶어졌다. 그 기나긴 길 위에서 혼자만의 싸움을 이겨낸 뒤 맞이한 대성당은 어떤 느낌일까. 온갖 외부 변수에 의해 부평초마냥 흔들리다 가라앉은 상황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내게 종교적 의미보다는 온전히 나 자신의 의지로 행할 수 있는 탈출구처럼 보였고, 40살이 되던 해에 그 길을 걸으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면 어떤 단어들이 떠오를지, 어떤 감정이 밀려올지 궁금하다. 저자와는 또 다른 나만의 감정과 단어로 완성될 길, 그 길을 걸을 날을 기대하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간다. 결과만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세상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많은 이들이 찾는 이유는 결과가 아닌 그 과정이 더 의미있는 행위이기 때문이 아닐까. 가리비 문양과 노란 화살표를 따라 묵묵히 걸어갈 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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