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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3
장애령 지음, 문현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2월
평점 :
‘색, 계’를 포함한 5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단편선. 전반적으로 미묘한 인간 심리에 대한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었다. 단편 속에 압축된 감정들이 밀도 있게 쌓이며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장아이링의 “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작은 것들에 대해서만 글을 씁니다. (…) 나는 사람들이 연애할 때 전쟁이나 혁명을 할 때보다 더 단순하고 대담해진다고 믿습니다.”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작품들이다.
장아이링은 '증오의 굴레'의 머리말에서도 "나는 통속 소설에 관해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애정을 품고 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인물들이나 그들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때문이다. 충분히 깊이 들어가지 않고 피상적이라고 말한다면 돋을새김 역시 예술이 아니냐고 묻고 싶다."라는 작가의 말이 있었는데 이게 이 소설의 존재 의의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 체제와 사회를 떠나 개개인이 느끼는 순수한 감정들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색, 계>
영화로 유명한 ‘색, 계’가 이렇게 짧은 단편이라는 점이 의외였다. 영화의 막바지(다이아몬드 반지 씬)에 해당하는 파트인데, 그간의 서사가 왕지아즈의 회상 형식으로 펼쳐진다.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서사가 왕지아즈의 감정선을 이해하기는 더 쉬웠다. 소설은 압축적인 시간을 다루다보니 그녀의 감정이 다소 급작스럽게 전개되는 인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만큼 아슬아슬한 긴장감은 더 잘 와닿았다. 왕지아즈의 ‘어서 가요’ 한 마디에 그간 쌓여온 긴장감이 한 번에 터지는 것도 인상적이다. 전반적으로 소설은 ‘색’보다는 ‘계’에 더 집중한 느낌. 마지막에 서술되는 이 선생의 생각은 비정하면서도 처절하다. 그의 비틀린 욕망 속에서 오히려 사랑의 흔적이 드러난다.
<정처없는 발길>
망망대해를 떠도는 배처럼,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듯한 분위기의 소설. 읽는 내내, 그리고 읽고 난 뒤에도 막막함이 남는다. 삶에 대한 주체적인 의지 없이 환경에 떠밀리듯 살아가는 소시민인 주인공과, 영국, 상하이를 거쳐 홍콩에 이르기까지 점점 시들어가는 패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일본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제목 그대로 ‘정처없는 발길’을 상징한다. 배라는 공간 역시 흘러가는 인생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처럼 느껴진다.
<붉은 장미, 흰 장미>
주인공 전바오보다는 장미들의 입장에 이입하게 되었다. 붉은 장미 자오루이는 자유와 욕망을, 흰 장미 옌리는 순종과 의무를 상징한다. 전바오는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옌리는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선택의 기회조차 없이 당대 여성에게 주어진 굴레에 매인 옌리를 생각하면 안타깝게 여겨진다.
전바오가 옌리와 결혼한 이후 자오루이를 만나는 장면이 인상깊은데, 옌리와의 결혼을 후회하는 전바오가 자기 나름의 행복을 찾은 자오루이를 보고 질투를 느끼다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회한이었을까? 정작 당시에는 두려움을 느껴 안전지대로 도망친 후 이를 후회하는 전바오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봉쇄>
전차가 멈춘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남녀 간의 감정이 빠르게 고조된다. 그러나 봉쇄가 풀리는 순간, 그 감정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짧지만 강렬한 감정의 생성과 소멸을 효과적으로 보여준 작품이다.
<증오의 굴레>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 가난한 가정교사와 부유한 유부남 고용주라는 설정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그들이 나누는 감정의 결이 섬세하게 잘 드러났고, 현실적인 결말도 작품의 여운을 깊게 만든다.
'증오의 굴레'라는 제목도 인상적이다. 위자인은 아버지를, 샤쭝원은 그의 아내를 증오하고, 위자인은 자신이 샤쭝원과 결혼할 경우 샤오만이 자신을 증오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사랑과 증오라는 감정이 얽히고 섥히는 게 마치 위자인이 뜨다 만 실타래 같다. 결국 증오의 굴레 앞에서 꺾이는 사랑은 몹시도 덧없고 애잔하다.
탁자에 구불구불 쌓인 실은 ‘끊어낼 수 없어 뒤엉킨 상태‘였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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