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편지
설라리 젠틸 지음, 최주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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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라리 젠틸의 '살인 편지'는 두 겹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첫 번째는 도서관 열람실에서 울려 퍼진 비명 소리를 들은 네 명의 낯선 이들이 우정을 맺으며 전개되는 '소설 속 이야기'다.

 각각의 개성이 강한 이들의 관계는 ‘인간이 타인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한 인물의 어두운 과거와 그 주변에서 연달아 일어나는 범죄들은 그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이야기의 긴장감을 켜켜이 쌓아올린다. 뻔하게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는 통속적으로 느껴질 수는 있어도 각자의 서사가 탄탄한 덕에 지루하진 않다. 게다가 결말부의 반전은 작품의 재미를 더한다.

 이 책이 지닌 두 번째 이야기는 이 소설을 써 내려가는 작가 해나와, 그녀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 '리오'라는 수신자의 관계다. 개인적으로 첫 번째 이야기보다 더 흥미로웠던 부분이었다. 처음엔 단순한 팬과 작가의 관계로 보였지만, 리오의 피드백이 점점 ‘소설의 방향을 지시하는’ 수위로 올라가면서 ‘관찰자’가 ‘창조자’를 압도하는 묘한 불쾌함을 안겨준다. 피가 낭자하거나 폭력적인 장면 등 잔혹한 묘사가 없는데도 리오의 편지를 읽다보면 가슴 한 켠이 서늘해진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비뚤어진 관심을 받는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싶어진다.

 책의 디자인도 주목할 만하다. 편지지 모양의 표지, 피 묻은 지문, 실링 스티커까지.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이미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살인 편지'는 글 너머의 감각까지 동원해, 독서라는 행위를 한층 더 입체적인 체험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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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
리처드 바크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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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처드 바크의 『나는 자유』라는 제목은 책을 펼치기 전부터 내 마음을 끌었다. "I am free"라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하고, 하늘을 나는 자유(flying freedom)를 의미하는 듯도 하다. 이러한 중의적 표현은 원제인 『Travels with Puff: A Gentle Game of Life and Death』보다도 이 책의 성격과 주제를 더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실제로 책을 읽는 내내 ‘자유’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떠올랐다.


 이 책은 저자가 ‘퍼프(Puff)’라는 이름의 경비행기를 타고 미국 대륙을 횡단한, 5,000km가 넘는 여정을 담은 여행기다. 퍼프와의 첫 만남부터 비행 훈련, 본격적인 대륙 횡단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 책이 단순한 비행 모험기가 아니라 인생과 자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특히 저자인 리처드와 퍼프의 관계가 인상 깊었다. 저자는 비행기를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닌, 인격을 지닌 존재처럼 대하고 대화를 나눈다. 무생물에 이름을 붙이고 친구처럼 여겨본 적 있는 독자라면 그 마음을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엔 서로를 낯설어 하지만, 실수하고, 배우고, 다독이는 과정을 거치며 점차 신뢰가 쌓여간다. 결국 어느 날 퍼프는 저자에게 자신을 퍼프라고 불러 달라고 말하고, 그 순간부터 둘의 진짜 비행이 시작된다. 나 역시 그 장면에서 나와 무언가 혹은 누군가 사이에 오랜 시간 쌓여온 우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자유’는 여행 에세이로서도 탁월한 책이다. 책에 수록된 생생한 사진과 저자의 유쾌한 문장은 독자에게 마치 하늘을 함께 나는 듯한 착각을 선사한다. 폭풍우를 만나거나, 악천후로 시계가 나쁘거나, 무언가가 퍼프와 충돌하는 아찔한 순간에는 나도 괜히 숨을 죽이고 책을 꼭 쥐었고, 고요한 호수 위에 매끄럽게 착륙해 평화를 누릴 땐 마치 내 얼굴에도 바람이 스쳐가는 듯한 느낌과 함께 부러움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5,000km가 넘는 비행이 항상 평온하진 않았지만, 이 긴 여정 속에서 저자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한다. 동시에 그는 동시에 그 자유가 결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님을 고백한다. 이 비행을 위해 포기해야 했던 것들, 수없이 반복된 연습, 겸손함, 실패를 견디는 인내가 있어야만 퍼프와의 비행이 가능했다. “인생에서 모험을 원한다면, 모험을 가능하게 할 사람은 바로 나뿐”이라는 저자의 깨달음은 진정한 자유란 나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저자는 서문에서 누군가 자신에게 “자유를 얻었나요?”라고 물었을 때, “소형 수상비행기 두 대, 그리고 만 개의 지평선을 가진 대륙으로” 대답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같은 질문이 내게 주어진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아직 내게 자유란 무엇인지, 나는 어떤 순간에 자유를 느끼는지조차 명쾌하게 알지 못한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책이 내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는 데 있어 든든한 ‘1호기’가 되어줄 거라는 사실이다. 나도 이제, 나만의 ‘나는 자유’를 찾아 떠나볼 때다.

그날 오후부터 나는 회전 속도계를 확인하는 대신 내 심장이 된 엔진음에 귀를 기울였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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꿰뚫는 세계사 - 시대를 이끈 자, 시대를 거스른 자
김효성.배상훈 지음 / 날리지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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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만든 것은 인물이지만, 그 인물의 이면은 종종 잊힌다. '꿰뚫는 세계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류사에 큰 영향을 남긴 역사적 인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며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 책은 기존의 역사 서술이 승자의 시선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영웅 또는 악인이라 불렸던 이들의 이면을 면밀하게 파헤친다. 아테네 민주정의 상징인 페리클레스가 다른 편에서는 참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점, 사자왕 리처드 1세가 내정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명성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 등이 그 예이다.

인물 중심의 역사 서술은 복잡해 보이는 역사적 사건을 인물의 선택과 결정이라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페리클레스나 아돌프 히틀러의 사례는 민주주의가 언제나 순수한 형태로 유지되지 않으며, 오히려 대중의 지지를 권력 장악에 활용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담고 있다. 또한, 복잡다단한 인물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환경을 조명함으로써, 시대적 맥락 속에서 그들의 행동을 재해석할 기회를 얻게 된다. 이를 통해 인물을 영웅 또는 악당으로 단순하게 규정짓지 않고, 그들의 삶을 다각도로 분석해 역사적 서사의 빈틈을 채워나간다.

이 책은 정치인과 군인, 최악의 군주들과 여성, 신대륙의 위인 16명을 다루고 있다. 이 인물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에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나가며 역사에 흔적을 남겼다. 특히 이 책은 인물들을 해석하는데 프로파일링 기법을 활용해서 인물의 심리와 동기, 그들의 선택을 면밀히 분석한다. 아울러 과거에 그치지 않고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진다.

'꿰뚫는 세계사'는 단지 과거의 인물을 열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역사의 갈림길에서 어떤 결정을 내렸고, 그 결과가 어떻게 현재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독자는 역사를 단순히 과거의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현재와 연결된 거대한 서사로 인식하게 된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가 단편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인물의 이면을 통해 역사를 재해석할 때, 진정한 역사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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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초대륙 - 지구과학의 패러다임을 바꾼 판구조론 히스토리
로스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흐름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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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자 로스 미첼은 '다가올 초대륙'에서 인류가 결코 직접 목격한 적 없던 초대륙의 존재를 추적하고, 초대륙의 형성되고, 분열하는 장구한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판게아’는 학생 때 배워 익숙했지만, 그 이전에 ‘로디니아’와 ‘컬럼비아’라는 이름의 초대륙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처음 접하는 내용이라 흥미로웠다.

이 책은 단순히 변성암의 광물 패턴, 고지자기, 지질구조 해석 등 다양한 지질학 이론을 나열하는데 그치지 않고, 초대륙 연구를 통해 과학이 발전해가는 실제 과정을 조망한다. 초대륙에 대한 이론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론이 발전해 나가는 과정은 한 편의 드라마같다.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각 국의 지질학자들이 전 세계 오지에서 암석 등을 채집하며 연구하고 있다. 때로는 서로 협력하고, 의견이 대립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과학이야말로 집단 지성의 결정체임을 실감하게 된다. 여기에 현장조사에 나선 저자가 엄지손가락을 잃을 뻔한 에피소드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있을 지질학자들의 노고와 열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인간의 수명에 비해 기나긴 지구의 시간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페름기 대멸종이 판게아의 형성, 분열과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그 실마리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선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인류는 먼 미래에 새로 형성될 초대륙에 존재할 수 있을까? 최근의 기후 위기와 이에 대한 대응을 보면 비관적인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지점에서 과학의 역할을 강조한다. 우리가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지구를 좀 더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게 그 지식을 전하는 것. 지질학 연구 결과가 지구의 과거와 미래를 알려줌과 동시에 기후변화를 해결할 실마리를 주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다가올 초대륙'을 읽으면서 E.H.카의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이 떠올랐다. 과거를 알 아야 비로소 미래를 상상할 수 있듯, 이 책은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고 인간의 미래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수억 년이라는 지질학적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한없이 짧은 기간 살다 자멸하는 생명체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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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대가야 여행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13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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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가야는 제대로 다룬 적이 없었다. 백제, 고구려, 신라 삼국시대의 형성기에 금관가야가 전기 가야동맹의 맹주였다는 점은 그나마 좀 다뤄졌지만, 한창 백제, 고구려, 신라가 한강 유역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 후기 가야동맹의 주도국이었던 대가야는 '이런 나라가 있었다'는 식으로만 언급되곤 했다.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대가야 여행’은 바로 이 잊혀진 대가야의 흔적을 따라가는 특별한 여정을 담은 책이다.


 여행의 시작은 의외로 해인사다. 저자를 따라 통일신라의 유산으로만 알았던 해인사에 남아 있는 대가야의 흔적을 발견하는 과정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만든다. 난생설화로만 알고 있었던 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얽힌 또 다른 설화가 있다는 점도 이채로웠다. 다음에 해인사를 가게 된다면 정견모주가 그려진 불화를 찬찬히 들여다 보고 싶다.


 저자의 글을 읽고 있자면 동네 토박이 어른이 해당 지역이 오랜 세월 품어온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가이드 투어를 하는 듯하다. 시간 순서가 아닌 장소를 따라 역사를 탐험하는 방식도 색다른 매력을 더한다. 게다가 풍부한 사진 자료는 글로만 상상하기 어려운 유적지의 생생함을 잘 전해준다.


 아무래도 고대사는 남아있는 유적이 고분군이 많다 보니 이 책에서도 가야의 고분군을 주로 탐방한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고분이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당대 사회 구조와 세력 구도를 반영하는 '살아 있는 증거'임을 깨닫게 된다. 합천 옥전고분군에서 백제 금동관 → 신라 로만글라스 → 대가야 고리자루큰칼 → 신라 금동관 → 백제 금세공품이 순차적으로 출토된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편 개인적으로 신라 로만글라스의 존재가 이색적이었는데, 삼국시대를 한반도 안에서만 바라보던 시각에서 탈피해서 이 시기가 생각보다 훨씬 글로벌하고 복합적인 시대였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는 아라가야의 국제회의인 안라회의에서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다.


 가야사를 이야기하면서 임나일본부설을 빼놓을 수 없다. 임나일본부의 존재와 별개로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이 왜 성립하지 않는지에 대해 저자는 사서의 기록과 출토된 유물을 기반으로 반박한다. 학교에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배운 적이 없었던지라 꽤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대가야 여행’은 단순한 여행기나 지역 소개서가 아니다. 백제, 신라, 고구려 삼국의 그늘에 가려졌던 가야를 하나의 '국가'로 조명하면서 한국의 고대사가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였음을 보여준다. 해인사에서 시작해 고령, 합천, 진주, 함안, 창녕으로 이어지는 저자의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그간 알지 못했던 가야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깨어난다. 날이 좋은 요즘, 이 책을 들고 대가야 여행을 훌쩍 떠나 유적지 앞에서 저자의 글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싶다.

유네스코에서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 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을 주목"하여 가야 고분을 세계유산으로 등재시켰다고 한다. 무엇보다 다양성이라는 표현이 가야 역사의 키포인트 같군.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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