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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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었을 때 남자들만 드글드글하던 작품 속 초선의 존재는 눈에 띄었다. 초선의 역할과 이야기에 끼친 영향, 비극적인 말로는 초선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내가 본 삼국지에서 초선은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자살하는데 어린 마음에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디 그냥 도망가서 살면 되지, 생각하며 초선의 죽음에 한참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갑자기 등장했다 갑자기 퇴장한 초선. 박서련은 그런 초선에게 새로운 서사를 부여한다. 초선의 어린 시절부터 삼국지에 언급됐던 시기, 그 이후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초선의 삶을 따라가며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초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초선의 삶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다. 기근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의 부모인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이웃집 아이와 바꿔지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거지떼들에게 구출된 이후 황건적의 난에 휩쓸린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왕윤에게 또 다시 구해진다. 이후 왕윤의 양녀로서 호의호식하면서도 아버지와 헤어질까봐 두려워 하던 그녀 앞에 거지이던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그녀는 그토록 숨기던 진실을 왕윤에게 밝히고 사랑을 고백하지만 양녀에서 가기가 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삼국지의 이야기. 한 가지 다른 점은 초선은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남아 역사를 제 눈으로 똑똑히 바라본다는 점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시련이었던 초선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하고 남을 해치기 위한 계책도 세워서 자기 자신을 지킨다. 게다가 욕망 앞에도 솔직하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양부 왕윤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지만 그녀는 당당하다. 하지만 이 사랑도 생존에 대한 그녀의 질긴 욕구 앞에서는 스러진다.


 한때 왕윤의 초선관을 돌보고 싶어했던 그녀는 세상이 그녀에게 부과했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산자락에서 초(매미), 선(담비)와 함께 산다. 그토록 아름답던 외모도 잃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 외모에 딸려온 다른 이들의 욕망을 그녀는 원한 적 없었기에, 차라리 볼품없는 외모로 자유로운 지금이 그녀에게는 더 낫다.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그녀의 힘으로 생을 일구는 결말이 그녀가 이어온 삶과의 싸움에 대한 승리와 같아 뭉클하기까지 했다.


 난세의 한복판에서 대의를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이용당한 그녀. 누군가를 제물삼아 이루는 대의는 대의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그 대의를 쫓던 수많은 사람들은 죽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이 이상하다는 초선의 물음 앞에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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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티브 이코노미 -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시그널에 관하여
유리 그니지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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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외부 변수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변수가 바로 인센티브로, 우리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하는 신호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인센티브를 우리가 직접 설정할 수는 없을까? 이 책, ‘인센티브 이코노미’는 현실에서 인센티브가 작동하는 구조와 활용 방법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바보같은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잘못된 신호를 주는 인센티브가 많다. 보통 인센티브는 정량적 기준에 따라 주어지는 반면, 정말로 달성하고 싶은 목표는 정성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양자가 어느 정도 어긋날 수 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인센티브를 보고 있자면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영악한건지, 아님 인센티브 구조를 짠 사람들이 생각이 부족했던 것인지 헷갈린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는 돈이 최고의 인센티브라고 생각해 왔는데 의외로 자기 만족도 강력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환경 문제와 같이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투영되는 영역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금전적 보상이 오히려 개인의 순수한 동기를 왜곡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금전적 인센티브만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 속물적인가 반성하면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인센티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꼈다.


 실제로 책에서도 새로운 습관을 만들거나, 나쁜 버릇을 끊기 위한 인센티브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금전적 인센티브는 단기적인 효과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습관을 만들거나 그만두는 일은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한 문제인데, 저자는 금전적 인센티브를 보완하기 위해서 주변인과의 네트워크와 같은 추가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인센티브를 활용하여 한 부족의 문화까지도 바꾼 사례였다. 사자 사냥은 케냐의 마사이족 전사의 전통이었지만, 이들의 이익 구조를 조금 바꾸자 이제 마사이족 전사들은 이전과는 정반대로 사자 보호에 나서게 되었다. 구시대적 악습인 여성 할례를 근절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도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고등교육 지원이라는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개인에게 새로운 선택권을 부여한다면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는 인센티브라고 하면 조직이나 개인적 차원에서 활용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채을 읽고나서 인센티브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인센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부의 정책뿐만 아니라 부동산 거래 등 크고 작은 협상에서도 인센티브는 중요한 도구이다. 인센티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는 어긋난 시그널을 주고 받으며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서는 인센티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적절히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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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차트 볼 때 나는 따박따박 배당 월급 받는다 - 소득의 파이프라인 늘리는 배당투자 A부터 Z까지
차창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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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첫 주식은 리얼티 인컴 10주였다. 미국 주식 붐이 일어날 때라 한국 건너뛰고 미국 주식 시장으로 들어갔다. 마침 또 우연히 도서관에서 배당투자 책을 보게 되었고, 매달 배당금이 나오는 리얼티 인컴을 산 것이다. 매달 야금야금 리얼티 인컴을 모으다가 분기별 배당 차트를 보고 코카콜라나 P&G 등을 샀던 기억이 난다. 매달 들어오는 소소한 배당금들이 작지만 얼마나 소중했던지, 혼자서 배당금으로 용돈벌이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이후 현금이 필요해서 주식을 정리하긴 했지만, 요즘 다시 배당투자를 해볼까 고민하던 중 읽게 된 이 책은 주먹구구식으로 투자하던 과거의 내가 배당투자에 대한 이해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선 1부에서 배당투자의 개념을 짚고 넘어간다. 얼추 아는 내용이라며 술술 넘어가다가 마지막에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배당투자가 유효하다는 저자의 설명이 의외의 사실이라서 흥미로웠다. 소심한 개미 입장에선 달러가 강세일 때 미국 주식에 투자하기 부담되는데 한국 주식시장과 분담해서 투자하면 부담도 덜고, 아무래도 한국 기업들은 좀 더 익숙하니 한국 배당투자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올 초 주식시장을 흔들었던 밸류업 정책과 배당투자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다. 밸류업 정책에 대해서는 말만 들었지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저자가 밸류업 정책이 배당투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하기 때문에 밸류업 정책 이후에 배당투자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있다.


 1, 2부에서 배당투자의 기본을 다지고, 3, 4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개별주와 ETF 등 배당주에 대해 다룬다. 우선 배당주를 고를 때 가장 고민되는 지점인 고배당주와 배당성장주 중 무엇을 고를지에 대해 저자는 당연하게도 적절히 혼합해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비율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주로 한국 배당주에 대해서 다루는데, 한국 주식에 관심 없었던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해당 주식의 장단점을 고루 다루기 때문에 자신의 여건이나 성향에 맞는 주식을 찾기 좋다. ETF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으로 ETF를 골라야 할지 먼저 짚고 넘어간다. 유명 ETF만 알던 내게는 앞으로 ETF 투자 종목을 발굴할 때 많은 참고가 될 내용이었다.


 마지막 5부는 투자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한, 말 그대로 꿀팁을 알려준다. 배당주 투자는 사실 단기간 내의 수익을 보기 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테마주로 얼마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흔들리기 쉬운데 저자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라고 조언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과거의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모르고 투자에 나섰는지 새삼 느꼈다. 그래도 그때 느꼈던 배당주를 사고 팔며 느꼈던 즐거움이 다시 배당투자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파이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돈 때문에 퇴직을 늦추지 않길 바라며 이번에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성공적인 투자를 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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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왕국
다니엘 튜더 지음, 우진하 옮김 / 김영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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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친왕에 대해서 처음 들은 때는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이었다. 그저 고종의 아들이었다, 정도로 듣고 지나갔었다. 망국의 왕족에 대해 깊게 다루기에는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시간과 배워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사실상 의친왕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외국인이 의친왕에 대해 쓴 소설이라니, 마치 조선 개화기 선교사나 외교관 같은 외국인들이 와서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 같기도 하고, 외국인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마지막과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는 어떠했을지 궁금했다.


 이 책은 의친왕의 생애 전체를 다루지 않는다. 궁에 들어간 10대부터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다 잡힌 40대까지, 1890년부터 1919년까지의 기간만을 다룬다. 입궁한 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낯설어 하고, 또 외로움에 사무치다 이복형과 우애를 다지며 혼인 이야기에 설레어 하는 의친왕의 모습은 그 나이대의 소년 같아 웃음이 나온다. 정작 혼인한 후에는 아내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며 보는 사람 속터지게 하지만. 언더우드 부인에게 영어도 배우면서 궁궐 밖, 조선 밖 세상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배워나간다. 하지만 임오군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혼란의 시기를 고스란히 맞아내야 했고,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했던가, 의친왕은 미국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한다. 신분을 초월해 형님 아우로 지내던 원식와도 멀어지고, 몸도 마음도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낸시를 만나게 된다. 조선의 개화를 위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먼 미국까지 와서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그녀를 보며 의친왕은 내심 그녀를 동경하고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원식과 낸시가 조선을 구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한 것을 알고 그도 귀국을 선택한다.


 하지만 돌아온 의친왕을 맞이하는 건 쇠락한 아버지와 형,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조선과 권력암투와 위협이었다. 원식과 낸시는 의친왕이 조선을 위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지지를 보내지만 그는 친일파들이 득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며, 뒤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할 뿐인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교육으로 조선을 부흥시키려던 원식과 낸시도 일제의 폭압 앞에서 신념이 흔들리고, 안중근 의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의친왕은 새로운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가 자유를 잃고 집에 갇혔듯이 조선이 일제에 강제병합되면서 그는 자신 앞에 놓인 현실에 더더욱 염증을 느낀다. 그나마 혜랑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독립운동을 도우면서 그 시간을 버텨나간다. 점점 극단으로 몰리던 의친왕에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는 한 줄기 희망을 엿보고, 아들을 위해 살게 된다. 그는 민주공화국이 된 조선을 꿈꾸며 상해 임시정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망명하려고 하나 만주에서 붙잡혀 또 다시 기나긴 가택연금에 들어가고,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작품 속 의친왕을 보면 패배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왕자로 태어나 남들보다 풍족하게는 살았지만 그는 항상 결핍을 느끼며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부재와 사회적으로는 국가의 부재까지. 혼돈의 시기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그에게 삶은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 아니었을까. 누나와 같이 아끼던 낸시의 죽음에 크게 절망했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의 평범한 국민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도 왕가에 얽매여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벗어던지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의친왕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왕실 인물 중에서 가장 왕자답기도 하다. 유약한 황제, 아픈 이복형, 어릴 때는 제멋대로 자랐고 일제에 의해 일본인으로 키워진 이복동생. 의친왕은 자신이 원식이나 낸시와 같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해 안타까워 했지만 그는 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고 본다. 그 시대에는 저항의지를 놓치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이 정말 인상깊었다. 이 소설을 읽고 진짜 의친왕과 진짜 김란사(낸시)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그들의 진짜 역사를 찾아보라는 말. 이 소설을 쓴 동기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을 기억하고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뭉클하기 까지 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켜켜히 쌓인 시간의 틈에 묻혀 있었던가. 독립운동가라는 5글자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단어 하나로 이들을 뭉뚱그리기에는 개개인이 지닌 시간과 역사가 소중하다. 이 소설이 그간 우리가 모르고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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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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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미국과 유렵에서는 강령술이 꽤나 인기였다. 산업혁명으로 한창 근대화되면서 과학기술도 발전하던 시절에 강령술이라니 의아하긴 하지만, 강령술을 하나의 과학 현상으로 보고 이를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있었고 유명인들도 많이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코난 도일도 말년에 심령현상에 관심을 가졌다고 하니, 이성적, 과학적 사고의 대표 주자인 셜록 홈즈의 창작자인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도 강령술이 여러 번 등장한다. 장편 ‘시태퍼드 미스터리’에서 테이블 터닝은 작품 전개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고, ‘엔드하우스의 비극’에서도 결말부에서 푸아로가 강령회를 연다. 그 외에 여러 단편에서도 영매나 강령술이 작품의 주요 요소로 쓰인 것을 보면 당시에 강령술이 엄청난 인기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런던 비밀 강령회’ 또한 19세기 런던을 배경으로 런던 강령술 협회와 영매 그리고 영매의 제자를 둘러싼 미스터리 소설이다. 소설은 영매의 제자 레나와 런던 강령술 협회의 부회장인 몰리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주요 인물은 이 둘 외에 유명한 영매인 보델린까지 3명이다. 과학과 이성을 신봉하던 레나는 보델린의 제자이자 강령술에 관심이 많았던 여동생 에비가 살해당하자 그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보델린의 제자로 들어가고, 몰리는 런던 강령술 협회의 회장이던 볼크먼의 사망에 얽힌 진상을 알고자 보델린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협회에 문제가 있어서 볼크먼과의 합의 하에 파리로 피신했던 보델린은 몰리의 청을 받아들여 레나와 함께 런던으로 오고, 두 여성은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조사가 진행되면서 서로 무관해 보였던 에비와 볼크먼의 사망은 런던 강령술 협회를 중심으로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 드러나고, 레나는 동생이 부정한 일에 엮였다 살해당했다고 생각하며 괴로워 한다. 이 와중에 레나와 보델린의 관계도 제자와 스승에서 변화를 맞이하고, 도움을 요청한 몰리는 한없이 수상쩍기만 하다. 


 사실 소설을 읽다 보면 대강 진상을 알 것 같지만, 사건의 진행이나 인물관계의 변화로 인해 작품 내내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또 미스터리 소설이 그렇듯이 결말부에 가면 누구나 예측했던 진상을 비튼 반전이 있기 때문에 다 읽고 나서도 식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작품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클럽과 연관된 연쇄살인을 여성인 영매가 해결한다는 부분이다. 작중 배경이 19세기니까 일종의 성역할이 반전된 셈인데 사실상 강령술은 테마이고 결국 부패한 남성들에게 복수하는 여성이 이 작품의 주된 서사이다.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하고 진실에 도달한 레나는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물질의 세계에 대한 굳은 믿음을 깨고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레나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그녀는 자신이 얽매여 있던 규범들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당시로서는 금기여서 그토록 조심스러웠던 레나와 보델린의 관계에서도 레나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 소설은 오컬트 미스터리 소설로도 충분히 재미있지만, 여성 서사의 측면에서 읽어도 흥미롭다. 부패와 맞서 싸우는 여성들의 이야기로 볼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의 욕망에 좀 더 솔직해지는 레나의 성장소설로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소설의 묘미이다. 아마 읽을 때마다 다르게 읽힐 것 같아서 재독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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