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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왕국
다니엘 튜더 지음, 우진하 옮김 / 김영사 / 2024년 8월
평점 :
의친왕에 대해서 처음 들은 때는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이었다. 그저 고종의 아들이었다, 정도로 듣고 지나갔었다. 망국의 왕족에 대해 깊게 다루기에는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시간과 배워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사실상 의친왕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외국인이 의친왕에 대해 쓴 소설이라니, 마치 조선 개화기 선교사나 외교관 같은 외국인들이 와서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 같기도 하고, 외국인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마지막과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는 어떠했을지 궁금했다.
이 책은 의친왕의 생애 전체를 다루지 않는다. 궁에 들어간 10대부터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다 잡힌 40대까지, 1890년부터 1919년까지의 기간만을 다룬다. 입궁한 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낯설어 하고, 또 외로움에 사무치다 이복형과 우애를 다지며 혼인 이야기에 설레어 하는 의친왕의 모습은 그 나이대의 소년 같아 웃음이 나온다. 정작 혼인한 후에는 아내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며 보는 사람 속터지게 하지만. 언더우드 부인에게 영어도 배우면서 궁궐 밖, 조선 밖 세상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배워나간다. 하지만 임오군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혼란의 시기를 고스란히 맞아내야 했고,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했던가, 의친왕은 미국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한다. 신분을 초월해 형님 아우로 지내던 원식와도 멀어지고, 몸도 마음도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낸시를 만나게 된다. 조선의 개화를 위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먼 미국까지 와서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그녀를 보며 의친왕은 내심 그녀를 동경하고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원식과 낸시가 조선을 구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한 것을 알고 그도 귀국을 선택한다.
하지만 돌아온 의친왕을 맞이하는 건 쇠락한 아버지와 형,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조선과 권력암투와 위협이었다. 원식과 낸시는 의친왕이 조선을 위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지지를 보내지만 그는 친일파들이 득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며, 뒤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할 뿐인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교육으로 조선을 부흥시키려던 원식과 낸시도 일제의 폭압 앞에서 신념이 흔들리고, 안중근 의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의친왕은 새로운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가 자유를 잃고 집에 갇혔듯이 조선이 일제에 강제병합되면서 그는 자신 앞에 놓인 현실에 더더욱 염증을 느낀다. 그나마 혜랑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독립운동을 도우면서 그 시간을 버텨나간다. 점점 극단으로 몰리던 의친왕에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는 한 줄기 희망을 엿보고, 아들을 위해 살게 된다. 그는 민주공화국이 된 조선을 꿈꾸며 상해 임시정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망명하려고 하나 만주에서 붙잡혀 또 다시 기나긴 가택연금에 들어가고,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작품 속 의친왕을 보면 패배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왕자로 태어나 남들보다 풍족하게는 살았지만 그는 항상 결핍을 느끼며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부재와 사회적으로는 국가의 부재까지. 혼돈의 시기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그에게 삶은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 아니었을까. 누나와 같이 아끼던 낸시의 죽음에 크게 절망했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의 평범한 국민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도 왕가에 얽매여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벗어던지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의친왕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왕실 인물 중에서 가장 왕자답기도 하다. 유약한 황제, 아픈 이복형, 어릴 때는 제멋대로 자랐고 일제에 의해 일본인으로 키워진 이복동생. 의친왕은 자신이 원식이나 낸시와 같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해 안타까워 했지만 그는 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고 본다. 그 시대에는 저항의지를 놓치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이 정말 인상깊었다. 이 소설을 읽고 진짜 의친왕과 진짜 김란사(낸시)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그들의 진짜 역사를 찾아보라는 말. 이 소설을 쓴 동기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을 기억하고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뭉클하기 까지 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켜켜히 쌓인 시간의 틈에 묻혀 있었던가. 독립운동가라는 5글자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단어 하나로 이들을 뭉뚱그리기에는 개개인이 지닌 시간과 역사가 소중하다. 이 소설이 그간 우리가 모르고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