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쳤지만 무너지지 않는 삶에 대하여 - 탈진의 시대, 인류사 내내 존재했던 피로의 인문학 A to Z
안나 카타리나 샤프너 지음, 김지연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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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아웃이라는 말이 비교적 최근에 광범위하게 쓰이기 시작했지만 이미 번아웃은 과거에도 존재했던 정신적 상태였다. 조금이라도 자기 일에 진심을 담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겪는 것이 번아웃이 아닐까. 저자의 말처럼 번아웃을 최선을 다해 불타버린 이후 조용한 절망에 빠져있는 작은 영웅들의 훈장이라고 정의한다면 더더욱이나 그렇다.

하지만 번아웃을 경험하는 그 순간에는 최선을 다했다거나, 훈장이라거나 하는 말이 그저 공치사로만 들리고, 그저 허탈함과 막막함만 느껴질 뿐이다. 지쳐서 이제 뭘 해야할지, 뭘 할 수는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직장이든 가정이든 어딘가에 매여서 계속 무언가를 바쁘게 해야 하는 상황. 이 구조를 바꿔보겠다고 착실히 걸어오던 길의 경로를 확 틀어버리는 것도 사실 쉽지 않은 결정이라 어떻게든 자기를 추스르고 달래 일으켜 가던 길을 쭉 걸어가는 게 할 수 있는 게 최선책으로 보인다.


 ‘지쳤지만 무너지지 않는 삶에 대하여’은 저자가 번아웃, 넓게 말하면 피로에 대해 쓴 A부터 Z까지의 26편의 글의 집합체이다. 무언가 읽기조차 힘들 사람들을 위해 짧은 글로 구성한 저자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26편의 글은 심리학, 사회학, 역사학, 철학, 문학 등에서 발췌한 키워드에 대한 저자의 단상을 다룬다. 단순히 심리학적으로 번아웃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보다는 번아웃의 근원과 역사부터 시작해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에서 다뤄진 번아웃이나 이를 극복하는 방법 등을 제시하고 있어서 보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특히, 저자가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번아웃을 극복하려면 이렇게 해야한다는 식의 행동 방침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경험담이나 역사 속 위인들의 이야기도 풀어놓으면서 마치 이야기를 듣는 느낌으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본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점이 신선하고, 그저 대단한 인물이었던 사람들도 다들 번아웃을 겪어봤다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그 자체로 위로가 되었다.


 번아웃이라는 현상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최근에 좀 더 번아웃에 대한 인식이나 민감도가 커진 것을 느낀다. 그만큼 지친 사람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지쳤다고 삶을 무너뜨리기에는 삶이 아깝다. 지쳤다는 것 자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해왔다는 방증일텐데, 그렇게 살아온 삶은 한순간에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다만 지친 만큼 잠시 쉬어가야 할텐데, 그때 이 책을 옆에 두고 쉬엄쉬엄 읽어나간다면 다시 일어나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리 예방조치처럼 그날 그날 끌리는 알파벳을 골라 읽어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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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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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삼국지를 읽었을 때 남자들만 드글드글하던 작품 속 초선의 존재는 눈에 띄었다. 초선의 역할과 이야기에 끼친 영향, 비극적인 말로는 초선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내가 본 삼국지에서 초선은 모든 일이 끝난 이후 자살하는데 어린 마음에 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었다. 어디 그냥 도망가서 살면 되지, 생각하며 초선의 죽음에 한참 안타까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갑자기 등장했다 갑자기 퇴장한 초선. 박서련은 그런 초선에게 새로운 서사를 부여한다. 초선의 어린 시절부터 삼국지에 언급됐던 시기, 그 이후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초선의 삶을 따라가며 한 인간이자 여성으로서의 초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초선의 삶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다. 기근에 시달리다 못해 자신의 부모인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이웃집 아이와 바꿔지는 상황에서 도망치고, 거지떼들에게 구출된 이후 황건적의 난에 휩쓸린 그녀는 기지를 발휘해 왕윤에게 또 다시 구해진다. 이후 왕윤의 양녀로서 호의호식하면서도 아버지와 헤어질까봐 두려워 하던 그녀 앞에 거지이던 시절을 아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위기를 무사히 넘긴 그녀는 그토록 숨기던 진실을 왕윤에게 밝히고 사랑을 고백하지만 양녀에서 가기가 된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삼국지의 이야기. 한 가지 다른 점은 초선은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살아남아 역사를 제 눈으로 똑똑히 바라본다는 점이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시련이었던 초선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하다.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그럴 듯하게 하고 남을 해치기 위한 계책도 세워서 자기 자신을 지킨다. 게다가 욕망 앞에도 솔직하다. 그녀는 자신을 구해준 양부 왕윤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지만 그녀는 당당하다. 하지만 이 사랑도 생존에 대한 그녀의 질긴 욕구 앞에서는 스러진다.


 한때 왕윤의 초선관을 돌보고 싶어했던 그녀는 세상이 그녀에게 부과했던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산자락에서 초(매미), 선(담비)와 함께 산다. 그토록 아름답던 외모도 잃었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 외모에 딸려온 다른 이들의 욕망을 그녀는 원한 적 없었기에, 차라리 볼품없는 외모로 자유로운 지금이 그녀에게는 더 낫다. 그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온전히 그녀의 힘으로 생을 일구는 결말이 그녀가 이어온 삶과의 싸움에 대한 승리와 같아 뭉클하기까지 했다.


 난세의 한복판에서 대의를 세우겠다는 명분으로 이용당한 그녀. 누군가를 제물삼아 이루는 대의는 대의라고 할 수 있을까. 결국 그 대의를 쫓던 수많은 사람들은 죽고 그녀는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것이 이상하다는 초선의 물음 앞에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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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티브 이코노미 - 사람을 행동하게 하는 시그널에 관하여
유리 그니지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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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스스로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하지만, 외부 변수에 영향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변수가 바로 인센티브로, 우리를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하는 신호의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인센티브를 우리가 직접 설정할 수는 없을까? 이 책, ‘인센티브 이코노미’는 현실에서 인센티브가 작동하는 구조와 활용 방법을 풍부한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저자가 제시한 사례들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 바보같은 인센티브 구조를 만들 수 있나 싶긴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잘못된 신호를 주는 인센티브가 많다. 보통 인센티브는 정량적 기준에 따라 주어지는 반면, 정말로 달성하고 싶은 목표는 정성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라 양자가 어느 정도 어긋날 수 밖에 없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잘못된 인센티브를 보고 있자면 이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영악한건지, 아님 인센티브 구조를 짠 사람들이 생각이 부족했던 것인지 헷갈린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는 돈이 최고의 인센티브라고 생각해 왔는데 의외로 자기 만족도 강력한 인센티브가 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특히 환경 문제와 같이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투영되는 영역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금전적 보상이 오히려 개인의 순수한 동기를 왜곡하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금전적 인센티브만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 너무 속물적인가 반성하면서도, 제대로 작동하는 인센티브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많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꼈다.


 실제로 책에서도 새로운 습관을 만들거나, 나쁜 버릇을 끊기 위한 인센티브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금전적 인센티브는 단기적인 효과는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습관을 만들거나 그만두는 일은 장기적인 접근이 필요한 문제인데, 저자는 금전적 인센티브를 보완하기 위해서 주변인과의 네트워크와 같은 추가적인 장치가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또 한 가지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인센티브를 활용하여 한 부족의 문화까지도 바꾼 사례였다. 사자 사냥은 케냐의 마사이족 전사의 전통이었지만, 이들의 이익 구조를 조금 바꾸자 이제 마사이족 전사들은 이전과는 정반대로 사자 보호에 나서게 되었다. 구시대적 악습인 여성 할례를 근절하기 위해서도 단순히 도덕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고등교육 지원이라는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개인에게 새로운 선택권을 부여한다면 보다 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전에는 인센티브라고 하면 조직이나 개인적 차원에서 활용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채을 읽고나서 인센티브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인센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다. 정부의 정책뿐만 아니라 부동산 거래 등 크고 작은 협상에서도 인센티브는 중요한 도구이다. 인센티브에 대한 이해 없이는 우리는 어긋난 시그널을 주고 받으며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다. 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서는 인센티브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적절히 활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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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차트 볼 때 나는 따박따박 배당 월급 받는다 - 소득의 파이프라인 늘리는 배당투자 A부터 Z까지
차창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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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첫 주식은 리얼티 인컴 10주였다. 미국 주식 붐이 일어날 때라 한국 건너뛰고 미국 주식 시장으로 들어갔다. 마침 또 우연히 도서관에서 배당투자 책을 보게 되었고, 매달 배당금이 나오는 리얼티 인컴을 산 것이다. 매달 야금야금 리얼티 인컴을 모으다가 분기별 배당 차트를 보고 코카콜라나 P&G 등을 샀던 기억이 난다. 매달 들어오는 소소한 배당금들이 작지만 얼마나 소중했던지, 혼자서 배당금으로 용돈벌이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이후 현금이 필요해서 주식을 정리하긴 했지만, 요즘 다시 배당투자를 해볼까 고민하던 중 읽게 된 이 책은 주먹구구식으로 투자하던 과거의 내가 배당투자에 대한 이해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선 1부에서 배당투자의 개념을 짚고 넘어간다. 얼추 아는 내용이라며 술술 넘어가다가 마지막에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배당투자가 유효하다는 저자의 설명이 의외의 사실이라서 흥미로웠다. 소심한 개미 입장에선 달러가 강세일 때 미국 주식에 투자하기 부담되는데 한국 주식시장과 분담해서 투자하면 부담도 덜고, 아무래도 한국 기업들은 좀 더 익숙하니 한국 배당투자도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올 초 주식시장을 흔들었던 밸류업 정책과 배당투자의 관계에 대해 살펴본다. 밸류업 정책에 대해서는 말만 들었지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는데 이번 기회에 조금이나마 자세히 알게 되었다. 또 저자가 밸류업 정책이 배당투자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심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설명하기 때문에 밸류업 정책 이후에 배당투자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 지 감을 잡을 수 있다.


 1, 2부에서 배당투자의 기본을 다지고, 3, 4부에서는 본격적으로 개별주와 ETF 등 배당주에 대해 다룬다. 우선 배당주를 고를 때 가장 고민되는 지점인 고배당주와 배당성장주 중 무엇을 고를지에 대해 저자는 당연하게도 적절히 혼합해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비율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설정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주로 한국 배당주에 대해서 다루는데, 한국 주식에 관심 없었던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해당 주식의 장단점을 고루 다루기 때문에 자신의 여건이나 성향에 맞는 주식을 찾기 좋다. ETF에 대해서도 어떤 기준으로 ETF를 골라야 할지 먼저 짚고 넘어간다. 유명 ETF만 알던 내게는 앞으로 ETF 투자 종목을 발굴할 때 많은 참고가 될 내용이었다.


 마지막 5부는 투자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한, 말 그대로 꿀팁을 알려준다. 배당주 투자는 사실 단기간 내의 수익을 보기 보다는 장기적 관점에서 안정적 수익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테마주로 얼마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흔들리기 쉬운데 저자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라고 조언한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과거의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모르고 투자에 나섰는지 새삼 느꼈다. 그래도 그때 느꼈던 배당주를 사고 팔며 느꼈던 즐거움이 다시 배당투자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파이어까지는 바라지 않지만 돈 때문에 퇴직을 늦추지 않길 바라며 이번에는 이 책의 도움을 받아 좀 더 성공적인 투자를 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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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왕국
다니엘 튜더 지음, 우진하 옮김 / 김영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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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친왕에 대해서 처음 들은 때는 고등학교 근현대사 시간이었다. 그저 고종의 아들이었다, 정도로 듣고 지나갔었다. 망국의 왕족에 대해 깊게 다루기에는 앞으로 헤쳐나가야 할 시간과 배워야 할 내용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사실상 의친왕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이다. 심지어 외국인이 의친왕에 대해 쓴 소설이라니, 마치 조선 개화기 선교사나 외교관 같은 외국인들이 와서 조선에 대해 남긴 기록 같기도 하고, 외국인의 시각에서 본 조선의 마지막과 일제의 식민지배 시기는 어떠했을지 궁금했다.


 이 책은 의친왕의 생애 전체를 다루지 않는다. 궁에 들어간 10대부터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다 잡힌 40대까지, 1890년부터 1919년까지의 기간만을 다룬다. 입궁한 뒤 갑자기 바뀐 환경에 낯설어 하고, 또 외로움에 사무치다 이복형과 우애를 다지며 혼인 이야기에 설레어 하는 의친왕의 모습은 그 나이대의 소년 같아 웃음이 나온다. 정작 혼인한 후에는 아내와 데면데면하게 지내며 보는 사람 속터지게 하지만. 언더우드 부인에게 영어도 배우면서 궁궐 밖, 조선 밖 세상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배워나간다. 하지만 임오군란, 을미사변, 아관파천 등 혼란의 시기를 고스란히 맞아내야 했고, 도망치듯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 했던가, 의친왕은 미국에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한다. 신분을 초월해 형님 아우로 지내던 원식와도 멀어지고, 몸도 마음도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낸시를 만나게 된다. 조선의 개화를 위해 남편과 아이를 두고 먼 미국까지 와서 교육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그녀를 보며 의친왕은 내심 그녀를 동경하고 의지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던 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원식과 낸시가 조선을 구하기 위해 귀국을 결정한 것을 알고 그도 귀국을 선택한다.


 하지만 돌아온 의친왕을 맞이하는 건 쇠락한 아버지와 형, 돌이킬 수 없는 상태인 조선과 권력암투와 위협이었다. 원식과 낸시는 의친왕이 조선을 위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고 지지를 보내지만 그는 친일파들이 득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며, 뒤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할 뿐인 자신에 대해 혐오감을 느낀다. 교육으로 조선을 부흥시키려던 원식과 낸시도 일제의 폭압 앞에서 신념이 흔들리고, 안중근 의사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의친왕은 새로운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가택연금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가 자유를 잃고 집에 갇혔듯이 조선이 일제에 강제병합되면서 그는 자신 앞에 놓인 현실에 더더욱 염증을 느낀다. 그나마 혜랑을 통해서 위안을 받고, 독립운동을 도우면서 그 시간을 버텨나간다. 점점 극단으로 몰리던 의친왕에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는 한 줄기 희망을 엿보고, 아들을 위해 살게 된다. 그는 민주공화국이 된 조선을 꿈꾸며 상해 임시정부에 힘을 보태기 위해 망명하려고 하나 만주에서 붙잡혀 또 다시 기나긴 가택연금에 들어가고, 그토록 사랑하던 아들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으로 떠나면서 소설이 마무리된다.


 작품 속 의친왕을 보면 패배하는 인간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왕자로 태어나 남들보다 풍족하게는 살았지만 그는 항상 결핍을 느끼며 살아왔다.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의 부재와 사회적으로는 국가의 부재까지. 혼돈의 시기 부평초처럼 흔들리던 그에게 삶은 결핍을 해소하는 과정 아니었을까. 누나와 같이 아끼던 낸시의 죽음에 크게 절망했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그가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의 평범한 국민이 되고 싶어 했다는 점도 왕가에 얽매여 불행했던 자신의 삶을 벗어던지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의친왕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왕실 인물 중에서 가장 왕자답기도 하다. 유약한 황제, 아픈 이복형, 어릴 때는 제멋대로 자랐고 일제에 의해 일본인으로 키워진 이복동생. 의친왕은 자신이 원식이나 낸시와 같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해 안타까워 했지만 그는 그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했다고 본다. 그 시대에는 저항의지를 놓치 않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작가의 말이 정말 인상깊었다. 이 소설을 읽고 진짜 의친왕과 진짜 김란사(낸시)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그들의 진짜 역사를 찾아보라는 말. 이 소설을 쓴 동기가 더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을 기억하고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뭉클하기 까지 했다. 지금껏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켜켜히 쌓인 시간의 틈에 묻혀 있었던가. 독립운동가라는 5글자 자체로도 훌륭하지만, 단어 하나로 이들을 뭉뚱그리기에는 개개인이 지닌 시간과 역사가 소중하다. 이 소설이 그간 우리가 모르고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을 다시 되살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이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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