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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향유 - 당황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길잡이
슬라보예 지젝 지음, 강우성 옮김 / 북스힐 / 202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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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지음)/ 북스힐 (펴냄)
아하! 지젝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을 보셨구나!! 이 책 P232에 언급된 문장을 통해 알 수 있다.
진정한 노동자 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정체성의 사슬에서 그러한 요소가 되기를 거부하는 일이다. 인도에서 최하위 카스트 불가촉천민인 건식 화장실 청소 노동자 대표들을 만난 것이 있는데, 그들에게 프로그램의 전제가 무엇인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 우리는 우리의 모습, 우리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아요." 자크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노동자는 사회에서 제대로 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 몫없는 몫'이며 적대성이 체화된 존재다. 우리 사회의 몫 없는 몫인 삶을 다룬 영화를 기대한다면 할리우드에 너무 낳은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 이 문장 빵 터짐.. 아 할리우드 넘들 ㅎㅎ)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이뤘고, 토드 필립스의 〉가 이뤘으며, 닐 버거의 〈다이버전트〉가 해냈으니, 또 이뤄질 수 있다. P232
감히, 이 분의 책 리뷰를 써도 되는가?
내가 과연 '자격'이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이 뭐라든지 (일단, 써보자는 마음. 깊은 우울감을 재료 삼아....)
이미 죽은 채로, 잠 못 드는 수많은 밤을 이 분의 책, 이 분의 저작물, 서신, 인터뷰 모음, 영상으로 겨우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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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병실에서 도스토옙스키 『악령 1, 2, 3』로 시작된 독서는 헤겔→ 라캉→ 슬라보예 지젝으로 이어졌다. ( 이 계보가 나오기까지 수많은 방황이 있었다) 한 권의 책은, 수없이 많은 연관되는 책을 읽고 또 읽게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4년 전 처음 북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딱 3년만 죽어라 읽으면 되겠구나 생각했던 어리석음! (책의 세계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라는 구차한 변명....)
죽기 전에 슬라보예 지젝의 저작물을 단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마치 슬라보예 지젝을 만나기 위해 위의 모든 독서가 이루어졌던 것처럼!!
아날로그에서 인공지능으로 갈아타는 중인, 첨단과학 대 우주시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지젝이라는 철학자와 동시대를 살다니!!!!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이 시대에 왜 굳이 지젝인가라고 질문해 볼 수 있다. ( 이 질문에 대답하기는 너무 어렵고 오히려 왜 지젝이 아니어야 하는가라고 반대로 물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왜 억압 자체를 즐기는가라는 지젝의 도발적인 질문!!!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우리는 행복하기만 한가....
그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권리 VS 의무...
누구나 노력? 하면 다 가질 수 있다. 좋은 옷, 먹을거리, 집과 자동차, 여자 혹은 남자..... 대상이 사물화되는 세계관 안에서 돈이 있으면 뭐든 가능한 형태로 심지어 새벽에도 집 앞으로 바로 배송되는 시대가 아닌가 ㅎㅎ 지젝 흉내 내기 ( 지젝처럼 삐딱하게 생각해 보면, 나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도 가질 수 없다. 나아가 학창 시절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서 다 탈락하고 지금의 현실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비관하게 된다. 이렇게 스스로를 비관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고 우리 사회가 이를 강요하기도 한다. 너는 공부를 못했기 때문에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없었기에 지금의 궁핍한 삶은 당연한 거라는 식의!! 아무도 의의를 가지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 스스로 선택하는 '자유'의 대가는 이렇게 혹독하다. ▶출발선이 동일한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했는가? 태어나 보니 알코올 중독, 가정 폭력의 딸이라면? 혹은 태어나자마자 버려지고 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면?
'잉여가치'는 마르크스 경제학의 주요 개념이자 '잉여 향유'는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이기도 하다. 지젝은 라캉이 말한 향유와 잉여 향유를 구분한다.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택하는 것보다 차라리 과격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독일의 반유대주의 같은....
▶▶소위 정통?( ☆나는 영원한 반골 기질, 비주류의 깊은 뿌리를 두고 있어서인지, 이 정통이라는 단어에 반감이 생긴다. ) 철학자들에게 지젝의 글쓰기는 주류 밖으로 빌려나 있다고 알고 있다. 비주류 철학자라 불리는 지젝이야말로 불과 수십 년 후에 사람들은 깨닫고 반성하게 될 것이다. 그가 주류이자 '정통'이었다는 것을!!!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그것을 인식할 때 이데올로기는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분단국가 출신으로 자연스럽게 '남북 이데올로기'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데올로기를 떠올리며 동시에 이데올로기 밖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더 이상 내게 이데올로기가 아닐 것이다 ㅎㅎㅎ
덧: 전에는 냉소적으로 생각했던 단어인데, 이젠 오히려 '주류'라는 단어가 무섭기까지 하다. 정통이 무섭다. 본질 안에 들어서지 못하고 늘 경계만 맴도는 두려움!! 본질은 본질 바깥에 있다. 진실은 진실 밖에서 만날 수 있고 A는 그저 A가 아닌 not A이기에......
이런 사유는 지젝이 가르쳐 주었다.
2장이 젤 재밌었다... (읽어보신 분만 알 듯ㅎㅎㅎ ), 비판의 비판이라는 2장은 그 서문부터 흥미진진!!
말할 수 없는 것을 대신 말해주는 지젝 선생님!!!
우리는 권위자로서의 스승이 오랜 지혜와 기존 견해를 강요할 뿐이며, 변화는 '아래로부터' 즉 스승의 오래된 지혜를 의심하는 사람들로부터 온다는 관점을 버려야 한다. 우리 이론가들은 히스테릭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스승이 필요하다. 이론의 발전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더 나은 추론 등을 통해 새로운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 합의된 이론적 억견을 뒤집는 스승의 '임의적'진술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필사적인 시도를 통해 새로운 것이 등장한다. 물론 이러한 '임의적' 진술이 그 자체로 위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헛발길질에 불과할 수도 있고, 새로운 이론적 발명이 아니라 그저 무의미한 자의적 주장으로 남을 수도 있다. 스승의 주장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의 히스테릭한 제자인 우리에게 달려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P173
내가 여기서 주장하고 싶은 것은 좀 더 근본적인 것, 즉 잠재력을 실현하고자 하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궁극적으로 사랑을 배제한다는 점이다. 커플 관계는 폭정에 반대하는 논쟁의 진정한 표적은 바로 급진적인 성격의 사랑이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에 빠졌을 때, 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제한은 그 반대, 즉 진정한 해방으로 경험된다. 내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내가 누구인지, 나의 욕구와 잠재력이 무엇인지 재정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전이적 반복을 넘어선 것이다.
광인은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거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왕이라고 생각하는 왕이라는 라캉의 유명한 말을 바꾸어 말하면, 광인은 자신이 분석가라고 생각하는 분석가이기도 하며, 이것이 바로 그들의 조직에서 분석가가 행동하는 방식이다.
♣ 한국에도 몇 번 오신 지젝 선생님 !!
♧ 슬라보예 지젝 입문서로 #불가능한것의가능성 함께 추천합니다
1949년~ 오래 건강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