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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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읽었다. 2015년 새롭게 번역 재출간된 책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입했던 것 같은데 책장에 꽂아두고 다른 책은 다 정리하면서도 언젠가는 읽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거의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신간을 읽다가 어떤 연관성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불현듯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다시 꺼내 보니 80페이지 정도에 붙여놓은 표시가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아니면 그때 억지로 읽으려 해서 인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있고 몰입감이 좋아서 예전에는 왜 읽다가 접어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책을 아무리 좋아해도 때에 따라서 몰입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백페이지 정도 읽다가 얼마전 교보문고에서 특별판이 나왔던 게 떠올라 다음 날 서점에서 바로 구입해서 이어 읽게 되었다. 특별판은 기존판보다 줄 간격이 조금 넓게 나와서 그런지 그리고 페이지를 넘기고 고정이 잘 되어서 그런지 읽기가 한결 수월했다. 그리고 하얀색 바탕에 그려진 빨간 새의 강렬한 이미지가 뭔가 더 특별한 느낌을 주었다. 같은 내용에 심지어 한 페이지에 담긴 글자수가 동일함에도 양장본이 주는 색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아무튼 특별판 덕분에 이번에는 완독을 할 수 있었고 저자의 유일한 또 다른 장편 소설인 [파수꾼]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추수꾼]과 마찬가지로 성장소설의 대표격이라 부를 수 있는 [앵무새 죽이기]는 유사한 형태로 주인공 스카웃이 성인이 되어 유년시절을 회상하며 과거에 있었던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깨닫게 된 진리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성장을 그려내고 있다. 소설의 공간과 시간적 배경이 미국 남부의 앨라베마주의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여전히 흑인에 대한 차별이 만연했던 1930년대를 그리고 있다. 실제로 저자가 살아왔던 시대와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에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막연히 그려낸 허구의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저자가 만났던 이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자의 작품 해설에서 설명하듯이 당시에 흑인에 대한 만연했던 차별적인 시선과 실제의 사건들은 여전히 인종차별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 현대사회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강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전에는 외국 사람을 보기가 힘들어서 인종차별이 어떤 느낌인지 잘 알지 못했다. 하긴 개화기에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 서양 사람을 보고 코쟁이라고 불렀던 것도 피부색과 겉모습을 보고 쉽게 판단하는 인종차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대체로 권력과 힘을 갖고 있었던 서양 사람들 특히 백인에 대한 시선은 폄하하고 깍아내리려는 시도보다는 막연한 동경과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근래에 이르러 우리보다 더 체구가 작은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노동자로 유입되면서 어느 때는 백이보다도 더 흰 피부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토종 한국인들이 저개발국가의 사람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해 조선족이라 불리는 중국 동포에 대한 잠재적 적대감과 심지어 탈북자가 중국동포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는다는 편견까지 더해진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인종차별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게 어떤 기분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알지 못한다. 아마도 인종차별을 겪은 이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를 느끼는 이유는 차별을 일삼는 이들이 아무런 동기나 근거없이 폭력적인 언어와 행동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해외여행을 하다가 버스를 탔는데 뒤에 앉은 현지의 십대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히히덕거리다가 갑자기 '너희 나라로 꺼져'라는 욕설과 함께 침을 뱉고 내려버린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일이 그냥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빈번하게 발생된다면 여행 자체를 망쳤다는 화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에 대한 실망과 허탈함에 이르지 않을까? 


스카웃이 사는 메이콤이라는 작은 마을에는 주민들 대부분이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스카웃의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현명한 변호사로 마을 주민들의 투터운 신망을 얻고 있다. 스카웃은 오빠 젬 핀치와 미시시피주에서 방학때만 머물러 오는 딜이라는 친구와 셋이서 즐거운 유년시절을 보내게 된다. 그들 셋이 가장 많이 하는 놀이 중의 하나는 스카웃이 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수년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은 부 래들리 아저씨에 대한 궁금증과 무서움을 시험해보는 장난이다. 소설 속에서 몇 번 언급되듯이 메이콤에 사는 스카웃의 이웃들의 거의 대부분 문을 잠그지 않고 생활했으며 서로의 가족사를 낱낱이 잘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메이콤의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아줌마들이 모여 마을 주민들의 대소사를 여기저기에 알리고 덧붙여 부풀리니 그야말로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스카웃 또래의 아이들은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단지 부 래들리 아저씨의 불운했던 어린 시절의 사건으로 인해 집에 감금되다시피 한 상황이 몹시도 궁금했고 과연 아서는 살아있기는 한 것인지도 의심이 되었던 것이다. 


소설의 앞부분은 스카웃과 젬과 딜의 부 래들리 아저씨에게 접근하려는 여러 시도에 대한 모험담이 주를 이루며 흥미를 더해가는데, 곧이어 이 소설의 핵심을 가로지르는 스카웃의 아빠 애티커스가 변호를 맡게 된 흑인 톰 로비슨의 사건으로 집중된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변호사 애티커스는 판사의 부탁으로 톰의 변호를 맡게 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애티커스의 처신을 몹시 못마땅해한다. 톰은 유얼집안의 장녀에게 도움을 주려다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무작정 유죄판결이 내려질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스카웃은 학교에서 너희 아빠는 검둥이 애인이라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되고, 애티커스는 스카웃과 젬에게 앞으로는 더욱 상황이 난처해질 것임을 예고하며 절대로 톰의 변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린다. 


사실 이 부분에서 스카웃의 아버지인 애티커스의 위대함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데, 자녀가 주위 사람들에게 이유없는 모함을 당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의 목숨의 위협을 가하는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톰을 변호하고 정의를 지키기 위한 양심의 소리에 온 몸과 마음을 다할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적인 고통과 어려움을 닥치게 되면 아무리 옳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도 결국 불의에 무릎을 꿇게 된다. 불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동조자들이 그렇게 많았던 것은 그들 모두가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피해를 보게 될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애티커스는 이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결심한다. 만약 그가 자녀와 자기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인해 거짓된 상황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기로 한다면, 앞으로는 절대 스카웃과 젬 앞에서 얼굴을 들고 눈을 마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런 위대한 선택으로 인해 스카웃과 젬의 상황은 급박하게 변하게 된다. 비록 톰의 무죄를 증명할 애티커스의 노련한 변호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의 결정으로 유죄판결을 받게 되지만, 유얼은 흑인을 변호하며 모멸감을 준 애티커스에게 앙심을 품고 복수할 것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이야기의 정점은 10월 말의 할로윈을 맞아 진행된 마을 행사에서 스카웃이 햄으로 분장하여 등장하는 연극을 마치고 오빠 젬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발생한다. 평소보다 더 어두컴컴한 길을 걸으며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반복되는 이상한 소리에 젬은 스카웃의 입을 다물게 하지만 햄 분장으로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스카웃은 어서 빨리 집에 도착해 이 거추장스러운 햄 옷을 벗어버리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 복수를 다짐했던 유얼이 젬과 스카웃을 공격하게 되고 스카웃이 앞을 볼 수 없어 듣기만 한 정황은 오빠가 누군가와 몸싸움을 벌이며 크게 다치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 가까스로 위급한 상황이 정리되고 마을 보안관 헥 아저씨에게 발견되어 다행히 목숨을 건지게 된 젬은 팔이 반대로 굽혀 부러지는 중상을 당하게 된다. 스카웃은 이마에 혹이 나는 정도의 경상에 그쳐 행여나 오빠가 죽지 않았을까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보안관의 확인에 따르면 유얼은 옆구리가 칼에 찔러 나무 아래에서 죽은 채로 발견이 되었고, 아버지 애티커스 핀치는 아마도 아들 젬이 그랬을 것이라 단정하며 아무리 정당방위라 할지라도 아들의 죄를 덮을 수 없다며 보안관과 설전을 벌이게 된다. 하지만 보안관 헥은 절대로 그럴리가 없으며 유얼은 넘어지면서 칼에 찔린 것이 확실하다며 한 발도 물러설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그때서야 젬의 침대 옆에서 우둑하니 서 있던 한 남자가 주목을 받게 되는데 그는 젬과 스카웃이 위기에 처했을 때 유얼의 공격을 저지한 인물로 추정되었으며 그는 바로 은둔자였던 부 래들리였다. 스카웃은 거추장스러웠던 햄 복장을 벗어던지고 오빠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이가 집에만 갇혀 있던 공포를 자아내는 소문의 주인공이었던 아서 아저씨라는 사실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젬과 스카웃을 구하고 젬의 안위가 걱정되어 스카웃의 집까지 동행했던 아서 래들리는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는데, 아마도 아주 오랜시간의 고립된 생활로 인해 타인과의 교류가 원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미 오랜시간 칩거한 상태에서도 젬과 스카웃을 위해 옹이구멍에 작은 선물을 놓아두는 선함을 보였기에 그에 대한 뜬소문은 거의 다 거짓이었음이 드러나는 놀라운 반전이었다. 그리고 스카웃은 오빠의 안정된 상태를 확인하고 아빠의 말을 따라 아서 아저씨의 손을 잡고 그를 데려다 주게 된다. 부 래들이의 현관 앞에 가는 것만으로도 벌벌 떨던 스카웃은 아서의 손을 잡고 그의 집에 도착해서 자신의 집을 바라보게 된다. 작품 해설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카웃은 톰의 재판과 얽힌 사건의 시간을 지나 부 래들리에 대한 소문으로 갖고 있던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나 완전하 달라진 새로운 삶의 시각을 얻게 된다. 이제 스카웃은 부 래들리를 의심하고 무서워하던 이전의 스카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이다. 


이 소설이 유년시절의 스카웃이 겪었던 일을 통해 독자들에게 일깨우고 싶은 것은 무엇보다도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마음과 양심을 따르는 결정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가 서려오는 피해를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 한 인간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이다. 유얼이 상습적으로 딸에게 폭행을 일삼으며 별다른 일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복지혜택을 받고 있음에도 단지 백인이라는 이유로 여타의 사람들에게 당했던 무시와 모멸감에 대한 분노를 사회적 약자였던 흑인인 톰에게 뒤집어씌우는 일은 비단 소설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애티커스 변호사처럼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바로 잡으려는 이가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또 다시 저열하고 비겁한 이들끼리의 담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퇴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은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 존 테일러 판사, 메이콤 군의 보안관 헥 테이트, 모디 앳킨슨과 같은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난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래서 때로 어려움에 처할 때가 있지.... 누가 욕설이라고 생각하는 말로 불린다 해서 모욕이 되는 건 절대 아니야. 욕설은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인간인가를 보여 줄 뿐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지는 못해.(207)"


"네가 할머니에 대해 뭔가 배우기를 원했거든. 손에 총을 쥐고 있는 사람이 용기 있다는 생각 말고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말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213)"


"젬, 너무 마음 아파 하지 마라. 세상만사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형편없진 않단다. 난 다만 이 세상에는 우리를 대신해 유쾌하지 않은 일을 하도록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을 뿐이야. 너희 아빠가 바로 그런 사람 중 한 분이시거든.(397)"


#하퍼리 #앵무새죽이기 #ToKillaMockingbird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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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그녀의 것
김혜진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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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의 [오직 그녀의 것]을 읽었다. 서점을 갈 때마다 매순간 놀라게 되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이렇게 매일 신간이 쏟아져나오는 것인가이다. 아니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든다고 하는데, 글을 쓰는 사람은 반대로 늘어나는 것인지? 출판계가 호황이었던 적이 언제였는지, 책을 내서 때돈을 버는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그러다보니 수없이 많은 책 중에서 내게 맞는 책, 또는 내게 필요한 책을 선별하는 것이 쉽지 않을 때가 있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예고편을 보고 어느 정도 감이 오면 좋을텐데 띠지에 씌인 문구나 미리보기 몇 페이지만 읽고 나서는 좀처럼 감이 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러다보니 그냥 무작정 책을 사들이다가 다 읽지도 못하고 먼지만 쌓이게 한 책도 꽤나 많았다. 


소설의 주인공 홍석주가 살아간 시대적 배경은 지금보다 몇 십년 전으로 석주가 대학을 다닐 때에 학생 운동이 정점이 아니지만 여전히 데모가 지속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이 아닐까 싶다. 컴퓨터 사용이 상용화되기 전이라 전동타자기를 쓴다던지, 손으로 필사를 하는 장면들은 지금과는 사뭇다른 아날로그 시대의 단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나 저작권과 관련된 출처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던 관습이나 도서정가제가 실행되지 않아 도매급으로 책이 팔리던 때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석주를 비롯한 출판계에 일생을 투신한 이들의 책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책이 얼마나 많이 팔리고, 또 얼마나 다양한 신간이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작가와의 만남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체감이 된다. 온오프라인을 통해 북토크가 열리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내어 작가의 이야기를 귀담에 듣는다. 소설 속에서도 석주의 회사 산티아고북스에서 발행한 여행 에세이의 북토크가 열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석주는 그 여행 에세이가 별로 탐탁지 않았고 북토크에 참석한 독자가 친구의 죽음 이후 그 책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는 너무나도 사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의아함을 갖는다. 하지만 곧 석주는 책이란 저자의 생각과 경험만을 전하는 저자 개인만의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는 독자와의 공감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몇몇 사람이 손을 들고 수줍게 자리에서 일어나 감상을 밝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책에 표정을 더하고 목소리를 불어넣었다. 저자의 손을 떠난 책은, 독자들의 내면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쓰이고 완성되어가는 듯했다. 

행사가 끝났을 때 석주는 그 책 [내 마음의 지도를 따라]가 완전히 다른 책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거의 매일 독자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도 지금껏 진지하게 독자를 고려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만든 책이므로 성패가 모두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편협하고 오만했는지도.(187)"


북토크에 몇번 참석해보고 나니 석주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단순히 나 혼자 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저자를 중심으로 편집자가 사회를 보거나 또 다른 작가가 사회를 보면서 그 책에 대한 또 다른 시선과 감상이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도록 이끄는 분위기가 책을 읽고 난 후의 여운을 길게 만들어주었다. 


학교 선생님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바랐던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대형 출판사의 교열업무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석주는 굉장히 소심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보인다. 자기가 맡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과 정말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었던 20대 초반의 새내기 직장인은 이미 맡은 분야에서 전문가였던 숙달된 상사의 지시와 호된 질책을 무던히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수용의 자세를 보여준다. 석주가 살았던 시대의 엄격한 상하 수직관계에서 비롯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여타의 직장인들을 다룬 소설에서 반복된 상사에 대한 불만과 불합리함을 지속적으로 지적했던 피곤함에서 벗어나 성실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후배를 적정한 선에서 배려하고 가르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읽는 내내 마음이 밝아졌다. 


석주는 성실한 사수들을 만나 제대로 일을 배웠지만 갑작스러운 회사의 구조 조정에서 밀려나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되고 석주의 삶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될 산티아고북스에서의 일상이 시작된다. 편집부의 대리부터 시작하여 어느덧 은퇴를 앞둔 주간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석주가 보여준 성실함과 인내는 책에 대한 사랑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읽고 또 읽고 수정할 부분을 엄선하고 개선될 방향을 모색하고 저자와 수없이 오갔을 연락과 어느 정도의 양보와 물러설 수 없는 부분을 타협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석주는 묵묵히 살아낸다. 사랑하는 원호와의 결혼도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저자와 국가의 통제라는 거대한 사건으로 석주와 원호 사이에는 서서히 균열이 발생된다. 


사실 석주가 맏딸로서 중식당을 운영하며 넉넉치 못한 형편에서 자라 안정된 교사라는 직업을 기대했던 부모의 바람을 저버리는 것과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해 찾아뵈었던 원호의 부모가 결혼하고 나면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어 아이를 낳고 원호의 뒷바라지를 해주기를 바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낙담함을 느끼는 장면은 그녀가 결코 수동적인 삶을 살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석주는 다소곳하고 소심해 보이지만 평범한 삶을 포기할 만큼 용감했다. 석주가 편집자로서의 삶을 선택하고 원호와의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이 수 있었던 것은 첫 직장에서부터 아주 오랜시간 한 글자 한 글자가 이어져 책 한권을 이루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귀중하게 여겨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석주의 변화와 단단함은 평범해서 지루하게까지 느껴지는 일상의 단조로움을 깊이 있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석주의 하루는 이른 아침 원룸을 나서면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면서,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시작되었고 저녁 무렵 같은 풍경을 되짚어 오면서 끝이 났다. 멀리서 보면 단조로워서 똑같은 하루를 이어붙인 것 같은 나날,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리 새로웠다. 조마조마하고 필사적인 마음 사이로, 이상한 기대감과 설렘 사이로 속절없이 흩어지는 시간은 너무 빨라서 모두 기억할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으나 석주를 그 일상의 진짜 주인으로 만들었다.(115)"


"어린 시절, 석주는 사랑을 정념, 충동, 정열과 같은 단어로 이해했다. 운명에 의해 선택된 두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무엇. 다른 모든 것을 단번에 시시하게 만들어버리는 무엇. 석주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은 극적이기보다 안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오래전 자신이 상상한 것처럼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었으나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에 스며드는 방식으로 기능했다. 그건 언제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었다.(211)"


"시시하고 평범한 그 이야기는 다른 아닌 자신의 삶이었다. 석주가 미약하게나마 감동을 느낀 건 쓰지 않은 것과 쓸 수 없는 것까지 모두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그 여정은 오직 석주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만의 것이었다.(263-264)"


#김혜진 #오직그녀의것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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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대삼각형 ㅣ 오늘의 젊은 작가 51
이주혜 지음 / 민음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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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혜 작가의 [여름철 대삼각형]을 읽었다.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51번째 작품이다. 별자리에 별 관심이 없던터라 제목을 보고 내용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표지를 조금만 유심히 살펴보면 밤하늘을 수놓은 밝기가 조금씩 다른 별이 점처럼 찍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소설의 첫머리에 오리온 자리에 대한 서양과 동양의 해석이 길잡이처럼 나왔음에도 '여름철 대삼각형'이 세 개의 빛나는 별에 대한 독특한 명칭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갑자기 '우주소년단'에 들어갔다. 그동안 별과 별의 마당인 우주에 관심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더 늦기 전에 뭔가 단복을 갖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표면적 이유였을테고, 초등학생 때 보이스카웃 활동에 돈이 많이 들어가 애초에 가입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뒤늦은 보상심이 발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주소년단의 단복은 스카웃 단복처럼 그럴싸한 스카프와 베레모은 커녕 어디서 물을 들인건지 모를 시퍼러둥둥하니 촌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미 회비를 지불했으니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고 마음에 들지 않는 단복을 입고 남쪽의 먼 지역까지 캠프에 참가하여 처음보는 아이들과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했던 기억이 남았다. 지금도 앨범 어딘가에 우주 공간에서 조이스틱을 움직여 이동하는 영화에 등장하는 모빌을 타고 몹시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찍은 사진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처음보는 이들과 순식간에 친해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성정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전국에서 지극히 촌스러운 단복을 입고 모인 이들과 친분을 쌓고 거대한 천체망원경으로 바라본 별자리를 재미있게 논할 줄 알았다. 우주소년단 모임 때문에 별자리에 더 관심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성인이 될때까지 반딧불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남쪽 나라의 휴양지에서 반딧불 투어에 참여하게 되었고, 야트막한 배를 타고 현지 가이드의 후레쉬 불빛에 반응하는 엄청난 무리의 반딧불을 보고 깜짝 놀랐었다. 그때 가이드는 이렇게 인위적으로 반딧불에게 후레쉬 불빛을 비추는 것이 그들의 개체수를 줄이기 때문에 얼마 안가 반딧불 투어를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어떨까? 그런데 최근에 제주도를 방문했다가 반딧불 투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마도 한 해의 어느 짧은 계절에만 볼 수 있는 반딧불을 구경하기 위해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스마트폰 불빛과 어린 아이들의 반짝이는 신발 불빛까지 차단한 채 앞사람과 여러번 박치기할 뻔 하며 1시간 넘게 어둠의 곶자왈을 걸었다. 띄엄띄엄 눈 앞을 반짝이며 날아다니는 반딧불을 보고 있자니 불현듯 아니 그 옛날 선비들은 반딧불로 글공부를 했다는데 대체 얼마나 많은 반딧부를 잡은 것인가, 그때 반딧불은 지금보다 더 크고 밝았던 것인가 엉뚱한 상념에 사로잡히며 어서 이 코스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꽤나 많이 걸어서인지 출발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가 대절되어 있었는데, 차에 오르니 근래에 빅히트를 친 '나는 반딧불이'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절묘한 타이밍이란 말인가 싶기도 하고, 그냥 짧은 생을 살다가는 자연의 반딧불이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돈벌이가 되겠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반딧불 투어에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였다. 어린이들이 무척 많았기에 요즘 저출생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린이들은 엄마, 아빠, 조부모의 손을 잡고 아마도 처음 마주할 반딧불을 볼 생각에 몹시 흥분되어 있었다. 소설 속 중년의 세 여성과 우주와 시오가 무주의 반디별 소풍 프로그램에 참석해 다른 이들이 대부분 가족 단위로 참석했다는 것을 의식했던 것처럼, 제주의 반딧불 투어 또한 유사한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의 주인공 태지혜, 송기주, 반지영은 비슷한 또래의 중년 여성이다. 태지혜가 두 번의 유산을 겪고 아픔을 이겨내고 있을 때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고 손을 털듯 쉽게 이혼했다면, 송기주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할머니의 손에 자라 사랑인지도 모른 채 남편의 고백과 직진에 결혼하여 태어난 딸 시오에게 전심전력을 다하지만 점점 손에서 멀어지는 관계를 무력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상태라면, 반지영은 오십대의 엄마를 지난한 암투병으로 떠나보내고 재벌집 사모의 운전기사로 살며 친자식보다 사모 딸의 시중을 드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그려진다. 


그리고 태지혜에게는 이혼하고 7년이 지난 후 시누이의 딸 우주가 고등학생의 몸으로 갑작스럽게 임신 사실을 고백하며 아이를 지우고 검정고시를 봐 대학에 갈때까지 함께 살게 해달라는 어이없는 부탁을 받게 된다. 송기주는 딸바보인 남편 지철과 다르게 시오가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시오는 점점 더 멀어지며 급기야 독립을 하기 위해 집에서 멀리 떨어진 대학을 들어간다. 시오의 서운한 말과 행동에 상처받지만 당장이라도 시오의 원룸에 가서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반찬을 한가득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억누르며 '너 노예냐'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반복적으로 던진다. 반지영은 엄마의 바람대로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지만 영어 수행능력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 수호의 엄마가 학교에 이의제기를 하며 위기를 겪게 된다. 하지만 지영이 학교를 그만두게 된 것은 수호 엄마의 몰상식한 행동으로 인해 느낀 수치심 때문이 아니라, 수호의 성정체성을 드러나게 만든 자신의 무심경함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세 명이 중년 여성에게는 공통된 삶의 장애물이 있었는데, 바로 반복되는 악몽을 꾼다는 것이다. 


태지혜와 우주, 송기주와 시오, 반지영과 수호가 가족과 직장이라는 사회적 구조 안에서 나이와 무관한 깊은 연관을 맺게 되면서 세 명의 여성이 밤마다 시달리는 악몽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미 어그러져 버린 다음 세대와의 연결을 회복하는 길 뿐임을 무주 여행을 통해서 드러난다. 여름철 대삼각형 별자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망원경으로 별을 구경하는 여정을 통해 나이를 잊고 철부지 아이들처럼 시시덕대는 엄마 세대의 모습을 보고 서운한 마음을 소거하는 시오의 모노레일을 탄 산 중턱의 산행과 기꺼이 용기를 내어 그 옛날 신라와 백제의 경게를 넘는 동굴을 통과하는 우주의 새벽 산책은 누구나 반짝이는 별처럼 빛을 내며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고요히 인정하게 만든다. 당신이 누군가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그 사람이 가만히 희붐한 빛을 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기를...


"잠은 잠깐의 죽음과 다름없는데 꿈이 있어 우리가 그 죽음의 허방에 빠지지 않고 무사히 삶 쪽으로 건너오는 거라고. 

악몽이라도? 

악몽이라도.

그럼 악몽은 조약돌이면서 닻이기도 하네?

고통으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조약돌. 삶에 드리운 닻.(120-121)"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삶이란 이토록 예측 불가능하면서 동시에 유한하다는 사실에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201)"


#이주혜 #여름철대삼각형 #민음사 #오늘의젊은작가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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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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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 작가의 [말뚝들]을 읽었다.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다. 제목도 특이하거니와 표지마저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얼굴에는 파란 얼굴의 눈에서 사람모양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형상화하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표지에 담긴 그림의 의미가 눈에 더 들어온다.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주인공의 이름이 딱 한 번 언급되는데, 처음부터 줄기차게 '장'이라는 성으로 불리고 중간에 태이를 통해서 만나게 된 데보라가 프랑스어 발음처럼 '쟝'이라고 불린 것을 제외하고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 줄 알았다. 아마도 그렇게 마지막에 이름 석자를 밝힌 저자의 의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장은 행정고시를 준비하다가 3번 낙방한 후에 천재의 무리에 들지 않는다는 성급한 판단으로 은행권에 입사한다. 장이 은행의 선후배들과 겪는 인간 관계의 어려움이나 대출 승인을 위해 미비한 서류 확인을 하는 모습은 현실적인 세계를 잘 그려내고 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장은 납치를 당한다. 아니 이렇게 갑자기?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개연성이 없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장의 납치로 인해 소설의 속도감은 배가되고 도대체 누가 아니 왜 무엇 때문에 장을 납치한 것일까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된다. 더군다나 '트렁크에 넣어두었습니다'라는 차창에 꽂힌 종이를 봤을 때 누구나 다 트렁크를 열어보지 않을까? 그럴 찰나에 얼굴에 복면이 씌어지고 손발이 케이블타이로 묶여 장시간 옴싹달싹 못하게 트렁크에 갇히게 된다. 트렁크에 갇히 장이 묘사하는 고통의 순간은 마치 내가 그 안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결국 방광의 압박을 참지 못하고 누운 채 소변을 지리는 모습과 납치에 풀려난 후 운전석에 앉을 때 욕지기가 밀려올 만큼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똥까지 싼 모습에 대한 비참함의 표현은 너무나도 리얼해서 '아 누구라도 그렇게 장시간 갑자기 납치되어서 트렁크에 갇히게 된다면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이 무참히 파괴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납치에서 불현듯 풀려난 장은 경찰에 신고를 하지만 범인들은 단서를 남기지 않고 별다른 금전적 신체적 피해를 입지 않은 장은 경찰에게 응근히 조롱받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도 보통 사람이 그런 갑작스러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을 겪게 된다면 누구나 한동안은 일상으로 돌아오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장은 납치에서 풀려난 이후 헬맷을 쓴 배달원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화들짝 놀라며 소리를 지르게 된다. 사실 장의 납치 사건을 읽을 때만 해도 저자가 의도하는 바와 [말뚝들]이라는 제목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다. 이어지는 내용은 갑자기 또 뜬끔없는 것처럼 말뚝들이 여기 저기에서 갑자기 나타나고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엥 여기서 또 말뚝은 뭐지'라는 생각에 소설의 장르가 갑자기 판타지로 바뀌는 것인가란 의문이 드는데, 장의 납치사건과 말뚝들의 등장은 반드시 어떤 연결점을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의 향방이 말뚝을 마주한 이들이 이유없이 흘리는 눈물을 흘리는 군중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말뚝을 없애버리려는 이들과 말뚝을 감추고 지키려 부단히 애를 쓰는 장의 모습과 대비되며 장이 납치된 이유를 어렴풋이 나마 헤아리게 된다. 


말뚝들이 곳곳에서 나타나 사회에 혼란을 야기한다고 생각한 정부 요원이 첫 번째 말뚝을 조사하다가 말뚝의 입 안에서 장의 계좌번호가 적힌 명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명함을 갖고 있던 말뚝은 어느 제련소에서 일하던 동료 노동자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대출을 받으러 갔던 외국인이었다. 장은 그 말뚝의 원래 주인이었던 외국인 노동자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모험을 단행한다. 장은 어찌보면 그 첫 번째 말뚝인 노동자와 정반대에 위치한 대민그룹의 차남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제련소에서 사고당해 다치고 죽은 이들의 보고서가 담긴 파일을 낚아챈다. 이 얼마나 통쾌한 반전이고 복수인가? 말뚝을 지키고 보호하려 달리는 장의 모습에서 납치한 이들이 누구인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다. 그리고 장이 트렁크에 갇혀 나온 후 PTSD를 겪음으로서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진 재난으로 상해와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어떻게 마주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슬픔을 재단하고 멈추라고 이제 그만하면 되었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슬픔을 마음껏 드러내지 못하고, 애도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 곳에 언젠가는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소설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말뚝을 보고 사람들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저자가 바라는 우리 사회의 이상향이 아닐까 싶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졌을 때, 이태원에서 젊은이들이 떠나갔을 때 전국민이 그들을 향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기다려줬다면 유가족들에게 백만분의 일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저자는 말뚝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시간을 통해 그동안 외면했던 사회의 부조리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모른척 외면한다고 있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며,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또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재난에 완전한 대비와 준비를 할 수는 없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비참한 일을 마주했을 때 그들을 품을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이유가 있어 얼어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건 그냥 사고예요.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세사의 모든 일이고요. 왜 특별히 쟝에게만큼은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184)"


"제련소에서 유독 물질에 중독되어 죽은 외국인 노동자, 나흘째 잠을 못 잔 상태로 인도를 덮친 택배 노동자, 그 택배차에 받혀 숨진 아이, 그들이 모두 말뚝들이 되어 나타난 순간 이 죽음이 사회적 죽음이라는 사실은 명백해진다. 그리고 말뚝들 앞에서 자기도 모르게 우는 사람들의 눈물 역시 아마도 사회적 슬픔일 것이다. [말뚝들]은 아 사회적 죽음과 사회적 슬픔을 추적하고 반추하며 기록한다. 사회적 죽음을 은폐하고 그 파급을 차단하려는 시스템에 대한 풍자는 주저 없이 단호하고, 자신의눈물이 사회적 슬픔임을 인지하고 그거승ㄹ 감당하려는 장의 이야기는 조심스럽고 섬세하다.- 서영인 추천의 말 중에서(307)"


"제대로 겪지 못한 슬픔은 모두 어디로 가나. [말뚝들]은 우리 사회가 그간의 무수한 사회적 재난을 충분히 애도하고 통찰하는 대신 은폐하고 소거하기에 급급해왔음을 겨냥한다. 겪어야 할 슬픔은 억누르거나 외면하지 말고 진심으로 애도함으로써 통과해야만 한다. 슬픔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고 웅크렸다 우리 곁으로 되돌아오게 마련이니까. 어느 날 느닷없이 말뚝으로 시립화된 슬픔이 우리 집 거실로 진군해 들어오거나 광화문 광장을 에워싸는 방식으로, 바라보기만 해도 가없는 슬픔에 빠져들게 하는 '말뚝'은 슬픔은 슬픔의 방식으로 겪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가닿은 애도와 연대의 윤리는 근래에 보기 드문 서사적 활력과 함께 찾아와 굳건한 말뚝처럼 독자에게 내리꽂힐 것이다. -편혜영 추천의 말 중에서(310-311)"


#김홍 #말뚝들 #한겨레출판사 #제30회한겨레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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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틈새 ㅣ 여성 디아스포라 3부작
이금이 지음 / 사계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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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이 작가의 [슬픔의 틈새]를 읽었다. '광복 80주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한 조각'이라 수식된 띠지의 문구가 너무나 걸맞는 역사 소설이다. 이상하게도 일제강점기와 연관된 소설에 유독 관심이 더 쏠린다. 특히나 어릴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일제강점기 시기에 강제 징용으로 먼 타지에서의 삶을 시작한 이들의 이야기에 마음이 자꾸 쓰인다.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이야기가 그랬고, 저자의 전작인 하와이의 사진 신부 이야기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사할린에도 이렇게 많은 한인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사실 지명의 이름만 익숙할 뿐 지도화면을 열고 자세히 살펴보니 일본의 최북단인 홋카이도 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꽤나 큰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이야 비행기로 3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이지만, 단옥이 엄마 덕춘과 어린 동생과 함께 징용된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했을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충청도의 다래울에서 일본 북해도의 최북단 항구에서 배를 타고 화태라는 오래전 이름의 낯선 곳에 도착한 이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더군다나 기후적으로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추운 지역이기에 한 여름의 서늘한 몇 달을 제외하고는 기나긴 추위에 적응하는 것이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에 해외여행을 가면 잠자리가 추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숙소의 퀄리티를 떠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온이 너무 잘된 곳에서 자기 때문이다. 침대 생활이 보편화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집은 어디든 온돌이 깔려 있다. 방바닥이 따뜻하기 때문에 단열이 잘 안된 집을 제외하고는 우풍도 별로 없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라디에이터나 온풍기로 보온을 하는 지역의 숙소에서는 당연히 춥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일본의 전통 숙소인 료칸은 다다미가 깔린 방으로 저녁식사인 카이세키를 먹고 나서 온천을 하고 오면 직원들이 두터운 이불을 깔아놓는다. 온천으로 데워진 몸을 질식시킬 것처럼 두터운 이불 속에 쏘옥 넣고 보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숙박비는 꽤나 비싼데 난방은 영 시원치 않다. 


광복 80주년이라 그런지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방송들이 많이 방영되고 있다. 어릴 적 반공교육을 받을 때는 아니 왜 하필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발발해서 같은 민족끼리 총과 칼을 겨누고 피를 흘리며 남과 북으로 갈라져 이산가족이 발생했는지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나라만 운이 나빠서 벌어진 일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주입식 반공교육은 일제강점기에서 비롯된 슬픈 역사의 희생자를 기억하는 것보다 무작정 북한공산당을 비난하고 적대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한국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이 수없이 많았기에 남과 북의 적대적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한 이들은 빨갱이 멸칭으로 권력을 빼앗길 위기를 모면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한국전쟁 이전의 역사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인 단옥의 아버지 만석을 비롯한 많은 한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을 당하게 된다. 일본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대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을 징용한 것인지 정확한 수를 알 수 있을까? 일본 본토를 제외하고도 당시에 태평양 전쟁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일본군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만주와 러시아 북단까지 아마도 섬나라 일본이 대륙을 제패할지도 모른다는 엄청난 착각에 빠져 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시 소련과의 전쟁으로 사할린 섬을 남과 북으로 나눠서 지배하고 있던 일본군은 사할린 남쪽에서 나무와 석탄을 채집할 인력을 강제로 조선에서 끌고 간 것이다. 


단옥의 아버지 만석이 탄광 숙속에서 벗어나 사택에서 가족들과 머물기 위해 다래울에 있을 아내와 자녀를 초청할 때처럼, 아마도 당시 징용된 수많은 이들이 언젠가는 이 지옥같은 시간이 끝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해도, 한국 전쟁이 끝나도 사할린에 머물던 한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고구마 백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함이 밀려오지만, 경제 개발에 눈이 먼 독재 정권은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떠난 이들의 귀환을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본과의 외교전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제대로 된 보상금도 받지 못했으며 자체적으로도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지 못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의 고르바초프가 실각하여 열 여섯 개의 나라로 독립하고 사할린 땅이 러시에 귀속되기 전까지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시대에는 오히려 경제적으로 나았던 때이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남한이 정말로 가난할 때 오히려 북한의 경제적 상황이 나은 때가 잠깐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사할린에 머물던 한인들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 소련과 북한 국적을 두고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무국적자로 온갖 불이익을 감내하는 것보다 차라리 소련 국적을 선택해서 제대로 된 배급을 받는 것이, 북한 국적을 얻어 북한 내의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유혹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안타까움을 갖게 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정보도 부족했고 남과 북이 이렇게 오랜 시간 대치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의 말미에 단옥이 할머니가 되고 나서 모인 가족들은 우리말, 일본말, 러시아말이 섞인 채 대화를 나누게 된다. 거기에 단옥의 남편 진수의 제주도 사투리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언어대통합이 아닐까 싶다. 언어가 이렇게 섞인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민족과 인종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피가 섞여 몇 대가 지나고 나면 이주된 첫 세대의 고유한 전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단옥도 남편 진수와의 이별을 감내하며 사할린을 떠나지 않은 것은 그곳에 가족과 자신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렇게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라 우리말을 전혀 못하는 이들도 자신의 뿌리를 찾고 알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뿌리의 역사를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태어나기까지 부모와 조부모가 세대가 얼마나 큰 고통을 이겨낸 것인지 서서히 깨달아가게 되고 존재의 이유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띠지에 언급된 것처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한 조각'이라는말은 너무나도 운이 좋게도 고국의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이들에게 진정 감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일깨우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슬픔의 틈새에서도 살아갈 힘을 찾아내고 견딘 화태의 조상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우리의 슬픈 역사가 단지 한숨짓고 마는 체념의 장이 아니라 어디서든 한국인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 노력한 위대한 흔적임을 항상 기억해야겠다. 


"사할린은 원래 러시아 땅이었다.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사할린의 남쪽을 넘겨받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선주민인 아이누족이 부르던 이름에서 따와 남사할린을 가라후토라고 명명했고, 조선 사람들은 한자의 음대로 화태라고 불렀다. 자작나무가 많은 섬이라는 뜻이었다.(20)"


"사할린 강제징용 1세대와 그 가족들의 삶을 처음 접했을 때는, 인간의 운명이 그토록 처절하고 기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안타까움이 앞섰다.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고통스러운 역사보다 그 틈을 헤치고 살아낸 끈질긴 삶 자체가 더 크게 느껴졌다.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니라 스스로를 지켜낸 삶에 대한 존중과 공감, 그리고 진심 어린 위로임도 깨달았다. 

사할린이라는 공간 역시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곳은 단지 비극의 무대가 아니었다. 사할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정과 이산, 디아스포라의 상처가 뒤섞인 채 켜켜이 쌓인 공간이었다. 한국, 일본, 러시아(구소련), 북한, 고려인, 그리고 선주민들이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채 얽히고설켜 살아온 장소였다. 상처와 기억,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을 품은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 깨달음은 나를 과거의 재현에 머물게 하는 대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었다.- 작가의 말 중에서(443)"


#이금이 #슬픔의틈새 #사계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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