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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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디케르의 [우리 아버지들의 마지막 나날]을 읽었다. 우리가 일하느라 정신없이 너무 바쁜 날을 보내거나 견디기 힘든 일을 지속해야만 할 때, 비유처럼 전쟁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쉽게 말한다. 어쩌면 전쟁이라는 단어를 중간에 넣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전쟁을 겪지 않는 이들이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극도의 공포를 경험하고 나면 그 공포를 경험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기 어렵다. 마치 공포로 인해 인간의 머리와 마음 속 어딘가의 균형을 이루며 살아가도록 만드는 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처럼 이상한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어릴 때만 해도 역사 시간에 배운 세계대전과 한국 전쟁이 다시는 반복될 수 없는 인류의 가장 큰 실수와 잘못이라고 생각했었다. 앞으로 또 다시 유사한 형태의 전쟁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이전과 같은 행복을 절대로 누릴 수 없을 것이기에 그 누구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 쉽게 단정지었었다. 


하지만 우리가 한국 전쟁 이후 경제 발전을 위해서 부단히 허리띠를 졸라 매고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에도 지구상의 어딘가에서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전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리고 팬데믹이 끝나가려는 시기에 설마 했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되었고, 벌써 2년 째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이 길게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우려가 되는 상황에 팔레스티나와 이스라엘의 전쟁까지 시작이 되었다. 뉴스에서는 폭격을 맞아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린 사람들과 피를 흘리며 병원에 후송되는 사람들의 장면들이 지속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너무 잔인한 장면들은 분명 방송으로 보여주지 않겠지만, 아마도 그곳은 아비규환이라는 말이 맞아떨어지는 지옥과도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전쟁이 아니라도 해도 생전에 만나거나 엮일 일이 전무한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라서 그런지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참상을 보면서도 그들의 아픔을 헤아려야 하는 공감의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것만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가자 지구에서는 3분 마다 어린이들이 죽어나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여전히 맛집이 나오는 정보 프로그램을 보고 친구나 동료에게 내일은 무엇을 먹을까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고 있다. 하긴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로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들이 단식 투쟁을 할 때, 그 옆에서 먹방을 선보인 무뢰배들도 있었으니, 그 먼 나라의 고통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은 언감생심일 것이다. 


사람이 인간이고 인격을 가진 존재일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가장 부각시킬 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마치 베터리가 다해 더 이상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덤덤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더는 그런 공감 능력을 회생시킬 수 없는 인두겁을 뒤짚어 쓴 몸뚱아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타인의 극심한 고통의 순간을 외면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이미 벌어진 일을, 지나간 과거를 뒤짚어 본다 하더라도 결코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내가 편히 먹고 자고 쉬는 동안에 누군가가 지나왔을 지옥같은 시간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면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가 생긴다. 혹시나 저 사람도 그런 극심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중은 아닐까란 염려와 배려의 마음. 누군가 나에게 그런 마음의 흔적을 보여준다면 우리는 엄청난 위로를 받게 되고 그 염려와 배려의 마음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영국의 모처에 모여 몇 달 동안 특수 군사 훈련을 받으며 첩보원으로 거듭다는 내용을 그린 이 소설은 단순히 전쟁으로 인해 발생된 국가간의 반목이나 드라마틱한 작전 성공을 영화처럼 그려내지 않는다. SOE 비밀 정보원이 된 폴에밀 곧 팔은 어린 나이에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아 마침내 프랑스에서 여러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유능한 첩보원이 된 팔은 함께 훈련받은 가족같은 전우들과 사랑하는 연인 로라까지 얻게 되지만, 몇년 간 연락하지 못한 홀로 지낼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에 몸서리친다.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긴장감 속에 지속된 이야기는 팔이 자신의 신분으로는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며 정점에 달하게 된다. 자신을 애타게 기다릴 아버지를 위해서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 레지스탕스 마리를 이용해 아버지에게 자신의 안위를 전하는 엽서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팔과 같은 이들이 영국에서 훈련되어 독일군을 염탐하고 작전 방해를 위해 프랑스로 보내진 것처럼 독일군 방첩대에서도 영국 비밀요원들과 레지스탕스를 잡아내기 위한 이들이 있었다. 쿤처라는 독일군 소속의 장교는 결국 마리의 꼬리를 잡아 염탐하던 중 팔이 아버지를 만나러 간 순간에 맞딱뜨려 팔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아버지를 수용소로 보내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할 것인지, 아니면 파롱과 로라가 머물고 있는 안가의 주소를 말하던지 말이다. 결국 팔은 동료와 사랑하는 연인을 쿤처에게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구하게 된다. 팔은 독일군 수용소에 끌려가 참수형을 당하게 되고, 쿤처는 팔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팔의 아버지를 지켜보며 그가 살아갈 수 있도록 가짜로 만든 팔의 엽서를 지속적으로 보내게 된다. 


소설 속에서 어이없는 우연의 연속은 쿤처가 팔의 끄나풀이었던 마리가 치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이다. 마리가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사랑하는 연인을 닮지 않았다면, 파롱이 마리에게 추근덕거리다가 권총을 선물로 주지 않았다면, 쿤처가 마리를 유심히 지켜보며 팔의 아버지에게 엽서를 전달하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쿤처는 팔을 잡아내어 독일군의 근거지를 폭파하려던 작전을 저지시켰음에도 팔에게 아버지를 선택하도록 종용한 자신의 상황을 몹시도 증오스러워 한다. 프랑스를 비롯한 연합군에게 독일군은 악마와도 같은 이들이었겠지만, 반대로 쿤처의 연인처럼 연합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다. 결국 전쟁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하는 이들을 강제로 빼앗이 복수심을 불타오르게 하여 고통만을 가중시키는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다. 


가자 지구의 무너진 건물 잔해의 먼지를 뒤짚어쓰고 피를 흘리는 어린 아이를 안아 들고 울부짓는 팔레스티나인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을 향해 복수심을 불태운다. 갑작스러운 하마스의 포격으로 콘서트 장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납치를 당한 이들의 부모들은 팔레스티나인들을 하마스와 같은 테러집단으로 단정지으며 그들을 몰살시키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를 잃은 채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한 채 복수심에 불타는 유년기를 보내야만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전장에 나간 자녀의 전사 소식을 듣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하루를 보내야만 이 비극의 나날을 멈출 수 있을까? 소설 속에 등장한 인물들은 허구에 불과할 지 모르지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제2의 팔과 제2의 쿤처가 생겨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마음이 든다. 


“그들은 이제 어떻게 될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악마가 분명 또다시 나타날 것임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인류는 쉽게 잊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기억하기 위해 기념비와 동상을 세운다. 기억을 돌에 맡기는 것이다. 물론 돌은 잊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돌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된다. 그렇게 악마는 또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그때도 여전히 어딘가에 진정한 인간이 있지 않겠는가.(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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