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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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작가의 [호수의 일]을 읽었다. 엄마와 아빠와 나이차가 꽤 나는 어린 동생과 함께 얼어붙은 호수에 썰매를 타러왔다. 꽤나 다정한 한 가족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같지만 주인공 호정은 썰매를 탄다고 신이난 동생 진주와는 다르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엄마와 아빠의 권유에도 호수에 발을 들이지 않는다. 헤드폰을 쓴 호정은 사춘기가 한창인 예민한 언니의 모습만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인해 썰매를 타느라 신난 가족과는 보이지 않는 벽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빠가 말한대로 꽝꽝 얼어붙은 호수도 결국 계절의 변화에 따라 녹아버리고 마는 것처럼 저항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호정은 두려운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난다고 과거의 상처가 그냥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시간이 이렇게 한참 흐른뒤에 갑작스럽게 과거의 그 일 때문에 나는 아직도 분노의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고 말하 수 도 없다. 헤드폰을 쓰고 가족과 철벽을 치는 호정의 마음은 호정의 것임에도 왜 이렇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일까? 마음이 내 맘대로 정리가 된다면 우리는 좀 더 편히 살 수 있을까? 


읽는 내내 꽤나 오래된 호정 나이 때의 시절이 떠올랐다. 궁금하던 차에 출신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익숙한 이름의 선생님의 이름을 발견하고 그분은 지금 몇살일까 헤아려봤다. 그리고 호정이의 절친 나래와 지후처럼 그때 나의 친구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그들처럼 애틋하고 가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나의 기억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까? 급식이 아니라 도시락을 싸서 다니던 때라 점심 시간이 되면 각자의 반찬통을 열때 집중이 되곤 했다. 조금이라도 맛있는 반찬을 싸가지고 온 날이면 젓가락과 포크의 집중포화를 받으며 순식간에 반찬통은 바닥이 보이고 때로는 혈기왕성한 녀석들이 힘조절을 못해서 먹어보지도 못하고 반찬통을 뒤엎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급식을 먹으며 커플 데이트를 하는 나래와 보람, 호정과 은기의 모습과 스타벅스에서 인강을 듣는 호정의 모습은 나의 학창시절과는 너무나도 달라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이지만, 시대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호정이 엄마와 아빠의 부재 기간 동안 느껴던 외로움과 은기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감정은 여전히 나와 같아 호정의 독백이 서린 많은 장면에서 마음이 흔들렸다. 


입시지옥을 살아가는 여느 청소년들과 마찬가지로 호정과 나래는 수업과 야자와 학원을 오가는 틈바구니에서도 연애세포의 재생을 멈추지 않는다. 나래와는 다르게 어딘가 시크해 보이는 호정은 전학생 은기에게 서서히 호감을 갖게 되고 버스를 타지 않고 자전거로 통학하는 은기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아주 오래전 엄마, 아빠가 아닌 할머니네 집에서 자전거를 배웠다는 기억을 떠올리며 몇 년 동안 호정이 엄마와 아빠와 떨어져 지낸 이유가 밝혀진다. 그리고 7년 후에 태어난 진주는 호정이 누리지 못했던 엄마와 아빠와의 친밀감을 보이며 사춘기에 들어선 호정에게 우울감을 안겨준다. 이유없이 까칠해보이던 호정은 은기와 사이가 가까워지며 드디어 '오늘부터 1일' 비슷한 연애를 시작하려고 하는 찰나 중학교 시절 호정을 어이없는 상황에 빠뜨렸던 모범생 곽근을 비롯한 무리로부터 은기의 숨겨진 과거가 드러난다.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은기의 슬프고 아픈 과거는 호정과 은기의 만남을 가로막게 된다. 호정이 은기의 상처에 몰입하며 자전거라는 매개체를 통해 학교를 떠난 은기를 찾아나서 추위속에 지쳐 잠들어버리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오랜시간 자신도 모른채 텅빈 마음을 견뎌내며 살아왔는지 보여준다. 슬픔을 느낄 새도 없이 눈물이 후두둑 떨어진다는 말은 스스로에게 '어머 나 미쳤나봐'라는 황망함을 내뱉게 만들지만, 그 눈물을 보이게끔 만든 이는 얼어붙은 호수의 일을 알아채고 호정의 마음을 쓰다듬어준다. 아무리 견디려 해도 호수의 얼음을 녹이는 계절이 찾아오듯 우리의 상처와 눈물도 더 이상 나를 아프게 하지 않고 그저 내 삶의 한 장면이었음을 기억하는 시간이 오리라 믿는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136)"


"그때 할머니의 눈길이 내게 머물러 있음을 안다. 미안한, 안타까운, 애처로운, 딱한, 가여운, 짠한, 안쓰러운. 결국 그 모두는 사랑이라는 것도 안다.(144)"


"서운하다는 건, 누군가를 위해 마련해 둔 자리에만 생겨 나는 마음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서운해지기도 하는 일인 모양이다.(181)"


"사람은 어째서 자신의 마음을 모를까. 그 무엇보다 온전한 제 것인데.(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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