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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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어릴적 소설책을 볼 때면 어차피 작가가 상상해서 만들어낸 이야기니 아무리 이상하고 끔찍한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이런건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라고 치부해버렸다. 그래서 별다른 감정의 진폭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점점 시간이 흐르며 소설 속에 나오는 내용들이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아무리 가공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그는 어디선가 내가 만난적 있거나 앞으로 만나게 될, 그리고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 있다는 생각에 깊이 몰입한 이후에 한동안 후유증이 남게 된다. 특히나 이번 작품처럼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경우에는 어떤 유희나 여가의 수단 중 하나로 간주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책 뒷표지에서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 곁의 소설가 '나'는 생사의 경계 혹은 그 너머에 도달하고서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만한 고통만이 진실에 이를 자격을 준다는 듯이, 고통에 도달하는 길은 고통뿐이라는 듯이. 재현의 윤리에 대한 가장 결연한 답변이 여기에 있다. 언젠가부터 그의 새 소설 앞에서는 숙연한 마음이 된다.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에 대한 내용이 이어질 때 누구라도 숙연한 마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전작 [소년이 온다]에서도 광주 민주항쟁에 대한 내용을 성경에 나온 "당신의 영혼이 칼에 궤찔리는 가운데"라는 표현처럼 폐부 깊숙이 다가왔다. 그리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광복 이후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된 제주도민 민간인 학살을 실종된 외삼촌의 조카인 인선과 그의 작업동료이자 친구인 작가 경하를 주인공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야기의 초입에 작가 경하는 극심한 위경련과 더불어 생의 의지를 놓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선과의 작업을 구상하며 소설을 쓰려고 하지만 도저히 그 사건이 불러올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렇게 서서히 슬픔의 나락으로 빠지려는 찰나 한동안 연락을 끊고 지냈던 인선에게서 당장 자신에게 와줄 것을 부탁받는다. 

제주 중산간 지대에서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홀로 목공일을 하며 지내던 인선이 손가락이 잘려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다. 오랫만에 마주한 인선은 봉합수술 이후 신경을 살리기 위해 3분마다 바늘로 수술부위를 찔러 피를 내야 하는 고통을 담담히 인내하며 경하에게 지금 당장 제주 자신의 집으로 가서 앵무새 아마를 살펴줄 것을 부탁한다. 눈발이 거세지며 어둑해지는 찰나 마지막 비행기와 마지막 버스를 타고 조난의 위험을 거쳐 경하는 구사일생으로 인선의 집에 도착한다. 위경련에 몸부림치며 앵무새 아마를 마주하지만 이미 숨길이 멈춰 고이고이 감싸 아마를 묻어준다. 이후 경하는 단전, 단수된 인선의 고립된 집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하며 오래전 인선이 이 알려준, 인선의 어머니가 남긴 기록들을 살핀다. 

작년 제주에서 연수를 받으며 4.3 사건에 대한 진상을 공부하게 되었다. 어느 정도 개괄적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섯알 오름과 같은 참상의 현상을 방문하고 그 사건을 겪은 이들의 증언이 담긴 내용을 보며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잔악함이 도대체 어디까지인지 몸서리치게 되었다. 그렇게 제주 초등학교에서, 백사장에서 수만명이 학살된 이후 실종자들은 내륙의 감옥으로 이송된다.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는 그렇게 학살된 이들과 동굴 속에 암매장된 이들이 있다는 것만 알았는데, 내륙이로 이송되어 감옥이 옮겨지며 실종된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몰랐다. 그들은 이곳 저곳으로 옮겨지며 결국 폐쇄된 탄광 앞에서 총살되어 갱도 속으로 파묻히게 되고 그 앞에 시멘트로 매워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야 조금씩 유해가 발굴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도 수천구의 유해가 깊은 갱도 안에 그대로 묻혀 있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학살의 진상은 언제쯤 다 밝혀질 수 있을까? 그때 그들을 총살했던 군인들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다 죽었을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낮에는 공방에서 나무를 깎고, 밤이면 안채로 돌아와 구술 증언자료들을 읽었어. 자료마다 다른 사망자들의 데이터를 대조해 확정했어. 오십 년 봉인이 해제된 후 접근 가능해진 미군 기록물들과 당시 언론 보도, 1948년과 1949년에 재판 없이 수감된 제주 수형인 명부와 보도연맹 학살 사이에서 사건들을 복기했어.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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