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여름 2020 소설 보다
강화길.서이제.임솔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 보다: 여름 2020]을 읽었다. 수록작으로는 강화길 작가의 [가원], 서이제 작가의 [0%를 향하여], 임솔아 작가의 [희고 둥근 부분] 이렇게 세 단편이다. [가원]에는 주인공 연정의 할아버지 박윤보에 대한 소개로 시작한다. 치과 개업을 앞둔 연정은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고 그 바탕에는 악착같은 할머니의 지독한 참견과 혹독한 관리가 있었다. 그에 반해 할아버지 박윤보는 그야말로 한량에 가까운 일생 제대로 된 일이 없이 연정에게 너그러운 모습만 보이다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연정은 자신의 유년 시절에 한없는 자유의 공간을 열어준 할아버지를 사랑하며 동시에 이렇게 사회적 성공을 이룰 수 있도록 조력한 매정한 할머니에 대한 애정도 있다. 연정은 무책임하고 자신밖에 몰랐던 할아버지가 그렇게 자상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사실 박윤보는 나의 인생, 나의 삶, 나의 미래를 자신의 무엇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래서 나의 웃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었던 거라는 것.(39)”
누군가를 정말로 아끼고 사랑해서 그가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의 자유를 제한할 수 밖에 없다는 것. 그래서 오히려 미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뒤늦게 깨닫게 된다. 자유를 제한하고 규칙을 종용하는 교육이 창의성을 헤친다는 새로운 가설을 따르게 되면 때로는 방종과 자유의 책임을 혼동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도 한다. 

[0%를 향하여]는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업적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의 뜻이 담긴 독립영화들은 상영관을 찾지 못하거나 관람객들이 없어 상영작에 올랐다가도 금방 내려지는 현실. 언제부터인지 더 이상의 관객을 유치할 수 없는 한계점에 다다르게 되었고, 그나마 독립영화제에서 수상한 감독은 상업영화 감독으로 투자받을 수 있다는 공식 또한 깨져버린 현실임에도 영화를 놓지 않고 영화에 삶을 건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저자는 아마도 그 이유를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는 듯하다. 
“고등학생 때, 아빠가 나중에 어떤 영화 만들고 싶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이 병렬식으로 조합되어 하나의 테마를 이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의 저는 사건이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삶이 전개된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아요. 파편적인 사건들 속에서 갑자기 깨닫는 순간이 있었거든요.(119)”
결과론적인 삶을 지향한다면 분명 실패가 뻔한 확률이 낮은 일에 결코 배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뻔해보이는 결과를 예측하면서도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에, 백만분의 일의 확률에 내 모든걸 걸기도 한다. 중요한 건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을 이루어가는 ‘나’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말이다.  

[희고 둥근 부분]에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 진영, 민채, 이모, 인숙이 등장한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작스런 사고로 넘어지면서 밑에 깔린 사람 위에 업어지게 된 민채는 맨 아래에 있는 사람이 눈을 감게 되는 모습을 보며 죄책감에 사로잡혀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리고 진영은 민채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그 또한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는 증상을 경험한다. 
“민채야말로 자신의 회복을 간절히 바랐을지 모른다고, 진영은 이제야 민채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민채는 망각이 아닌 처벌을 통해서만 자신이 회복할 수 있다고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처벌할 리 없었으므로. 자해를 통해 해결하려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자신의 죄책감을 짊어질 타인이 필요해졌고 처벌 가능한 타자를 만들어내기에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144)”

고등학생 때, 아빠가 나중에 어떤 영화 만들고 싶으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당시 저는 아무런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이 병렬식으로 조합되어하나의 테마를 이루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의 저는 사건이 다른 사건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삶이 전개된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아요. 파편적인 사건들 속에서 갑자기 깨닫는 순간이 있었거든요. 그때는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가뭔지,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대학 졸업할 무렵, 시인이 꿈이었다는 영화과 선배가 저에게 어떤 소설을 쓸 거냐고 질문한적이었는데, 그때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아요.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 없다는 생각이들기도 하고요.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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