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사랑 이야기
마르탱 파주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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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주인공 비르질이 후레쉬가 달린 모자를 쓰고 에펠탑을 안고 등장하는 표지의 엉뚱한 포즈는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어떤 사랑이야기인지 궁금증을 유발하기 된다. 아들 녀석이랑 얼마전에는 본 애니메이션 '라따 뚜이'에 나오는 프랑스 식당의 견습생 '링귀니'와도 많이 닮아 있다. 비르질은 기억에서 사라진 클라라의 이별통보로 인해 현재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자신과 과거의 행적을 되짚어보는 계기를 가진다. 나의 기억은 없으나 친구들도 알고있고 그녀도 이별을 고하는 상황!
정녕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어떨까?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현명하고 기분 나쁘지 않게 예전의 나로 돌아올 것인가?

 싱글인 한 남자의 고독한 연애담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동시대인들의 모습이 아닐까 한다.
프랑스라는 문화와 그 속에 속하는 젊은 청춘의 모습을 엿보는 것은 동양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점들이 눈길을 끈다. 와인의 주산지답게 즐겨마시는 와인의 이름이나 음식, 그가 사랑하는 빠리거리의 모습. 허나 현실을 살아가며 겪어야 하는 젊은 청춘의 흔들리는 모습은 우리와 별반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약간의 이질감이 든 것은, 광고회사에서 승진을 하고 연봉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구지 마다하고 억지를 부리며 승진을 하지 않겠다고 회사와 갈등을 빚는 부분은 조금 억지스러운 면이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을 명확한 이유제시도 부족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본인에게 어떤 장점으로 작용하는지도 이렇다 할 설명이 부족했다.

20~30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상의 모든 젊은이들은 경제적 능력을 추구하는데 비상이 걸렸다. 부를 과다하게 축적하는 대기업들은 새로운 곳에 인재를 등용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조해야 할 의무를 상실했고 그로인해 야기되는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일해야 하는 젊은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아르바이트인생에 급급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은 이 소설에서도 고스란히 들여다 볼 수 있다. 돈을 벌어 공부를 해야 하는 현실에 원하지 않는 직업을 구해야 하거나 그러다 자신이 원하는 길을 돌아서 가야만 하는 경우가 그랬고 좀 비약이긴 하지만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일이 그렇다.

결국 비르짙은 클라라와 재회를 앞두고 그녀를 만나기를 포기한다.
2주동안 그녀의 그림자를 쫓으며 자신을 되돌아 보고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살피게 된 것에 만족하고 된다. 그가 마지막에 던지는 한마디는 이 소설의 제목과 일맥상통하기도 하고 그 기억되지 않는 것들은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이다. 그게 인생이고 지친일상을 피해가는 힘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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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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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훈 지음
  • 학고재

 

'김훈'다운 소설이라 실망은 덜 했다. 언제나처럼 매정하리만치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들. 나같이 그 작가다움을 원하는 사람들은 기대치에 부흥해서 좋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때때로 기분이 변하는 뜨내기 독자인 면도 갖고 있기에 이런 사실적 묘사와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매마른 문장들을 접할때면 씁쓸하고 마음이 스산해진다.

 

 '정약용'의 형제들이 천주에 눈을 뜸과 동시에 천주교 박해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중에서도 정가 형제들 중 '흑산'으로유배되어 갔던 '정약전'의 시선이 주를 이루며 그와 동시에 천주를 믿음으로 인해 박해받는 이들의 숨가쁜 상황을 번갈아가며 제시하고 있다. 소제목마다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 인물들의 등장은 결국 하나의 사건과 연결되거나 혹은 사람과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이런 구조의 소설은 뒤에 언떤 연결식일지 빤히 보이는 듯 해 사실 싱겁긴 하지만 작가 그만이 가지는 독특한 문체와 스토리 전개방식이 지루함을 조금은 덜어준다.

 

 조정에서 천주교의 핵심인 '황사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돼 있고 그를 숨기기 위해 애쓰는 천인 신분의 '육손이'나 '김개동'을 보면 글을 알지 못하고 이 땅에 존재하는 유교사상을 알지는 못하지만 하늘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인간의 근본적 자질을 들여다 보는데 종교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신분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했으므로 천민이나 서민층들이 천주에 더 심취했을 것이다. 작가도 얘기하듯이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살을 붙이고 실존지 않는 인물을 더해서 온전한 실제인물들이 아니고 허구속 인물들이라 밝힌다.

이른바 천주교 최고의 신봉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듣기만 해도 오금이 저린 '능지처참'이니 '군문효수'니 하는 형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카사위인 황사영을 닮은 아이를 흑산에서 만난 정약전은 갈 수 없는 바다끝 어딘가를 그리워하기를 멈추고 고기의 생김새를 보고 특이점을 살피며 글을 쓰는데 그렇게 탄생한 것이 <자산어보>이다.

 

 조선 말 정치적으로 위태롭고 새로운 사상으로 새 세상을 열려던 지식인부터 많은 천주의 신봉자들은 그렇게 죽음과 맞서며 바다 밑에 혹은 강 바닥에, 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채로 사라져 갔다. 서양사에 등장하는 피의 전쟁 대부분은 종교에 의한 것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길 바라는 신을 앞세워 전쟁을 한다니.

참 아이러니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에 뿌리깊게 내린 종교사를 보면 맞서기 보다는 이해와 설득을 요했던 것 같다.

'이차돈의 순교'도 그랬고 많은 사람의 희생을 보고 자수한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그랬다. 씁쓸한 여운과 더불어 많은 이의 희생이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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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나를 물들이다 - 법정 스님과 행복한 동행을 한 사람들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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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님이 떠나신지 2년이 다 되어간다. 둘째를 낳기 위해 친정에 있을 당시 그때도 '마지막 마무리'를 읽고 있던 참이었는데 둘째 낳기 딱 십일전 3월 11일에 입적하셨다. 우둔한 독자인지라 '마지막 마무리' 를 볼 때야 스님이 편찮으시단 걸 알았고 아이 낳으면 꼭 찾아가기라 다짐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스님의 입적 소식에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모른다. 주위에선 부모가 죽은 것도 아닌데 왜그리 슬피 우냐 했지만, 뵙고 싶어도 더이상 뵐 수 없다는 사실과 내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 스님의 글을 볼 수 없음에 가슴이 푹 꺼지는 느낌을 받았드랬다.

종교를 떠나 스님은 내게 또 다른 스승이자 삶의 안식처요, 바른 길의 선구자셨다.

 

 사람마다 각자 누군가를 바라보는 시선은 틀리다. 내가 바라봤던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유한 부분이 있는 반면에 전혀 다른 모습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각자의 생각과 느낌을 모아 한데 묶으면 오롯한 한 사람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그게 실제 본인과 과연 얼마나 많이 일치할까?

스님과의 연이 닿은 분들의 글을 보면서 이렇게 한결 같으신 분이 있을까 싶어 놀랍기도하고 우리 곁에 진짜 부처가 왔다가신 것 같아 찌릿한 소름이 돋기도 한다. 작년에야 찾아갔던 '길상사'! 향냄새 그윽하고 목탁소리 요란한 일반 절과는 달리 뜨내기 손님들의 쉼터 같은 느낌이요, 과장하자면 관광지같은 느낌이었다.

근데 그게 또한 '길상사'만의 매력이 아닌가 싶기도 했고 짧게나마 스님의 뜻도 모든 이의 쉼터같은 도량을 생각하신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유래가 있는 절이라서 그런지 나무 하나하나, 조각 하나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고 눈안에 가득 담고 싶었다. 법당 앞에 서 있는 범상치 않은 '관세음보살'상!

이 책에 등장하는 교수이자 조각가이신 최종태님이 스님의 부탁을 받고 3일만에 조각한 조각상이란다. 천주교의 성모와도 닮아 있는 듯하지만 눈빛의 너그러움은 관세음보살상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무슨 종교가 됐건 간에 그 가르침엔 다름이 없다고 늘 말씀하신 스님.

그 길상사에도 스님의 흔적은 어디에도 남겨두시지 않고 스님의 짧은 글귀만이 나무와 어우러져 군데군데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생전에 강직하고 꼿꼿하셨던 스님은 속세를 등지고 산속에 운둔만 하고 계셨던 분은 아니었다. 말이 아닌 글을 다룰 줄 아셨던 분이기에 의식있는 정치와 사회로 나아갈 것을 요구했고 또 아닌 일에 일침을 가하기도 하셨다. 살림이 어려운 절이나 어렵게 공부하는 학생들에겐 운영비나 장학금을 지원해 주시기도 하셨다. 소리없이 실천 하신 이 모든 일들이 그분의 도움을 받았거나 또는 그 뜻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종교인으로서의 스님의 모습은 언제 강직하고 꼿꼿하셨기에 사가와의 인연은 어떠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사촌동생 박성직님이 스님의 노모를 20년 가까이 모셨다고 한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속세인이라 스님의 입장보다는 사가의 어머님 마음이 먼저 헤아려진다. 일찍 여읜 남편과 출가한 아들! 종교에 귀의했다고는 하나 그 강직함 뒤로 어찌 부모자식간의 끈끈한 정을 그리워하지 않았을까. 마음을 다 헤아리지는 못하나 사촌동생이 당신의 노모를 모셔야하는 미안함과 끊을 수 없는 속세의 인연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리다.

마지막 스님을 찾은 병실에서 스님이 손을 꼭 잡아주셨다는 부분에서는 눈물을 아니 흘릴수가 없었다.

 

 스님은 가셨지만 그분의 글과 그분의 행동과 업적은 영원할 것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무소유'의 진짜 의미는 '가지지 않는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가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이들이 기억하는 스님의 모습은 남들과 소통하고 자연과 소통하고 글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면서 무소유를 실천 하신 분이다.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우리를 알아야 한다. 스님은 가시고 없지만 그분의 글은 대대손손 남을 것이며 언제나 그 누군가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줄 것이다.

 

'달 같은 해, 해 같은 달'

 

산너머로 넘어가는 불그스름한 해를 보고 하신 말씀이란다.

"스님! 정말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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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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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나 역사소설, 역사비평서를 읽으면 왜 이렇게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을까?

고등학교 역사시간에 늘 듣고 외우던 사실 말고도 그 속에 숨어있는 진실과 왜곡!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흥미로움과 더불어 왕도정치를 했던 그 옛날 정치와 문화, 사회 전반에 걸친 생활상을 들여다보고 아울러 한발 물러나 그 정치적 격변기를 들여다 보고 오늘날과 비교해 봄도 좋은 '역사 바로보기'가 아닌가 싶다.

 

 이 책 저자가 '선비'에 대한 대학생들의 일반적인 생각을 설문조사한 내용이 실려있지만, 나도 마찬가지로 선비에 대한 생각은 부정적이라기보단 긍정적인 면에 가까웠다. 이 책을 읽기전까지는. 선비라 하면 우선은 '안빈낙도'와 '청렴결백'이 떠오르고 또한 지식인의로서의 이미지가 강해서 정치에 관여했다기보단 끊임없이 상소하고 백성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다는 이미지가 어렴풋이 들었었던 같다.

그러나 실상 조선 사회를 들여다보면, 유학을 중시하면서 형성된 유교사상은 조선의 지배계층으로 떠오른 선비들에겐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기반 계층을 공고히 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후기에 들어서는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이나 심지어는 왕까지도 좌지우지하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고 그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점이지만 뼛속깊이 박혀있는 유교사상은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유행,번성 했을까? 고려시대까지의 시대상만 보더라도 조선시대 최대의 차별계층이던 여성은 남성과 재산분배에 있어서도 거의 동등한 입장이었다. 뿐만아니라 모계사회의 반영으로'장가간다'는 혼례의식이 당연했고 처가에 살다가 독립하거나 혹은 경제적 도움을 받을시 처가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사의식도 물론 참여하는게 일반화되었다.

지금도 '시집간다'는 말보다 '장가간다'는 말이 남아 있는 유래나 신혼 여행후 처가에서 하루 지내는 것도 그 시대의 풍습에 기인한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것은 유교를 앞세운 무차별적 차별속에서도 그 풍습이 살아남았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중국과의 관계를 무시하지 못하는 외교적 상황에서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유학은 명나라와 우리나라의 우열을 확실히 가려주었고 그것을 토대로 정치를 행했던 엘리트 선비계층은 명나라가 주도하는 중화질서라는 틀에서만 이해하려 했다. 자신들의 세력이 확장되고 도전하는 세력이 미약하자 금변하는 격동기에 밖으로 돌렸어야 되는 외교적 시선은 엉뚱하게도 자신의 재산과 부를 축적하기에 급급했고 그 기반을 견고히 하는데 주력했다.

 

 역사서적을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역사적 사실에 대한 명확한 답도 없고 내가 알고 있는 역사속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들도 국제 정세와 국가를 위해 주어진 의무에 충실도로 평가한다면 낙제점을 받는 위인들도 많다. 어디까지가 진실로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어디까지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것인지, 전문가도 아니고 관심이 있는 독자로서 참 무력하게 느낄때가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이 되는 사상이나 국제적 정세를 파악하는 일은 여러 책을 통해 봐야 할 것이고 어느 한 쪽에 치우친 논리의 역사서는 자칫 지나친 민족주의로 흐르거나 혹은 비평 일색의 반민족주의자로 전락하기 쉽상이다. 이분적으로 정의내리긴 무리가 있지만 이런 일련의 일들도 독자의 몫이 아닌가 싶다.

 

 얼마전 영화를 보고 일본이 다 나쁜 건 아니지 않냐로 시작했다가 결국은 매국노로 낙인찍히고 토론은 끝이 났다. 어설픈 역사서를 읽어서 민족성을 논한다고 매도까지 당하면서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했나'를 생각해 봤지만 이런 여러 종류의 역사서를 혼자만 본다고 되는 건 아니지 싶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국민으로서 우매한 과거의 백성이 되지 않기위해선 역사속에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트라우마를 물리치기 위해선 한 발 앞선 의식개조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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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아이 사탕이 - 문광부우수교양도서 글로연 그림책 1
강밀아 지음, 최덕규 그림 / 글로연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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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짧은 동화를 어른의 시각에서 어떻게 풀어 갈까?? 책을 받는 순간부터 몇 페이지 안되는 책을 읽고 덮는 순간까지 어떤 입장을 가지고 보고 쓸 것인가?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제일 서평 쓰기 어려운 책이었다. 나도 아이였고 이 나이 또래의 아이를 기르고 있으면서도 내가 알고 있는 '아동 심리에 대한 배경지식'은 얼마나 될까?

거창한 질문일지 모르나 나의 어린 시절을 성찰해 봄과 동시에 그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 봄으로써 지금의 내 아이와의 합일점을 찾고 어른으로 살아가는 틀에 박힌 사고를 조금은 돌려서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딸 4명 가운데 셋째로 자랐다. 언니들과 나이 차이가 있었기에 그다지 부딪힐 일이 없었지만 성향은 내성적인 아이였다. 부모님은 이미 두 아이를 키워 보신 터라 틀에 박힌 형식을 크게 염두에 두시진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은 언니들과 생활하고 학교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렇게 서서히 묻혀졌다. 사회인이 되어서는 자유로운 의사를 존중해준 부모님 덕분에 마음껏 여행도 했던 것 같다. 문제는 질풍 노도의 시기인 고등학교 때 내 자존감의 결여와 공부에 대한 동기부여가 제대로 되지 못한 그 시점이 최대 혼란기였고 지금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여기까지 왔지만 '그 시기를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이 때 간직했던 내성적인 성향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도 안되고 맹목적인 대한민국 공교육 아래 허수아비처럼 시간만 흘려 보냈다. 그 모든 것들은 훨씬 후에 여행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존감이 생기고 나아가 외향적인 성격도 함께 겸비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탕이'는 요즘 하나, 둘인 아이들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형의 아이다.

엄마들은 바르고 얌전하고 사람들 많은 곳에서 떼 쓰지 않는 그야말로 인형다운 아이를 원한다. 그렇게 '착한 아이 증후군'은 엄친 딸, 엄친 아들 등 새로운 신조어를 등장하게끔 만들었고 우리들은 아이들이 말귀를 알아 들으면서부터 끊임없이 비교하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동생이 따라하쟎아! 하지마! 너 또 왜 그러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그치고 몰아 세운다.

예전의 부모들처럼 다자녀를 다 돌 봐줄 수 없고 자유 방임형으로 키우던 시대와는 물론 비교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방임이 필요함에도 엄마의 레이더는 항상 아이들에게 꽂혀 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과 부모들이 아이가 했으면 하는 행동 사이의 괴리감은 어느 한 쪽이 이해해 주지 않으면 결코 교차점이 생기지 않을 것이며 언제나 평행선일 뿐이다.

누가 이해하고 도와 주어야 할까? 물어보나 마나 뻔한 대답이지만 어른이라고 다 성숙하고 참아 낼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뻔한 얘기를 하고 있는 엄마인 나도 이제사 어린 나를 생각해 보고 지금의 내 아이와 교차점을 시도해 본다.

예전보다 높은 삶의 질과 다양한 정보 속에 살고 있지만 부모의 마음은 영원불멸,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솟아나는 자식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예전과 똑같은 답습의 연속이다.

 

아이는 아이다운게 가장 이쁘고 사랑스럽다고 한다. 아이다운 게 뭘까? 떼 쓰고, 고집피우고, 동생과 싸우고 늘 하는 그 나이 또래의 행위들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앞으로를 준비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바로 볼 줄 아는 어른들의 역활이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나또한 엄청 반성하고 또 마음을 다잡는다. 4살배기랑 아침이면 일어나는 문제로 실랑이하고 밥먹는 걸로 싸우고, 첫째라는 이유로 '이러지 마라, 저러지 마라'를 달고 사는 요즘의 내 모습이 쥐구멍에 딱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어렸을 때의 멍울을 아이들 가슴 속에 심어 두어서는 안된다. 그 멍울이 언제 독으로 변해 내 아이의 앞길에 독화살을 들이댈지 모른다.

아이들의 책을 보면서 혹은 심리를 알고자 하는 노력에서 부터 아이들은 자라고 성숙할 것이다.

우리 큰 아이 인태가 돌아오면 아침에 소리지르면서 보낸 엄마의 입장을 얘기하고 아이의 소리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여 볼 것이다.

일등도 좋고 세상을 이끄는 1%도 좋지만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는 사회를 이끄는 평범한 계층에 속해주기를 이 엄마는 그저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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