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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전설
안필령 지음 / 어문학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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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필령 지음
  • 어문학사

  책 표지에 '자녀와 함께 읽는 우화 소설'이라는 간단한 소개글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는 책이 그림책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직 어린 우리집 아이들에게 읽기는 어렵더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기에는 충분히 좋은 책이었다. 인간이 만든 재앙을 이야기하지만 그 속에는 아름다운 우리말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요즘은 아이들 책에서조차 이쁘고 순한 우리말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작가님이 자연을 벗하고 사시는 분이라 그런지 다양한 꽃들의 이름이나 생소한 들풀들의 이름까지 친절하게 알려주시니 산속에 놀러온 등산객이 된 느낌이 들었다.

  주인공 '꼬까선'과 '별까랑'! 이름도 참 이쁘다.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하고 개발하는 통에 동물들은 살 터전을 잃고 돈이 되는 동물들은 보호종이라도 잡아가고 죽이는 참혹한 현실에 수봉산 동물들은 봉기를 들었다. 여러가지 인간들이 등장하는데 소설이지만 현실과 별 차이없는 그대로의 인물들이다. 돈, 명예에 급급한 부조리한 탐관오리, 그들을 따르는 추종자들. 돈이 목적이 되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이고 싸우고 깨부순다.

꼬까선은 결국 가족의 죽음을 보면서 선봉에 나선다. 동물들을 연합하고 단결하는데 한 몫을 한다.

 인간들과 동물들 간의 전쟁으로 치닫는 상황속에서도 간간히 옛 풍경을 묘사하는 부분은 숲 한 가운데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감꽃을 본 적도 없는 도시인들에게 감꽃의 종류(고종시 감꽃, 둥시 감꽃, 고욤나무 꽃)를 이야기하는 부분은 신기하게 읽혀지기도 했다. 식물채집, 곤충채집에 관련된 부분에서도 조사만 한 것이 아니라 작가가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적어놓은 듯 하여 충분히 흥미로웠다.

 사리사욕에 눈이 먼 '현중만'같은 인간은 요즘 우리 사회에 널리고 널렸다. 친일의 후손이 정치를 좌지우지하고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지 못해 생기는 경제사범들, 돈이면 경찰들도 눈감아주는 희대의 사기꾼들. 우리는 그들을 처단할 힘도 잃어가고 있다. 소설 속의 힘없는 동물들이 바로 우리 서민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미래에서 온 전설>은 아마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우리의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매말라 피폐해지고 살 길이 급급하니 서로의 안부도 모른 채 살아가고 그 속에 동물들은 더 비참하게 버려지게 되는 건 아닐런지.

동물들의 필사를 건 사투는 누구의 승리도 거두지 못한 채 최악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일들을 겪게 된다. 겪지 말았으면 하는 일들도 있지만 꼭 한 번은 거치고 가야한다. 그게 바로 인생이고 그 속에 인내와 인고의 결실을 맺게 된다. 보편적인 인생은 감당할 만한 고통이 주어지고 해결한 힘도 함께 주어진다고 한다. 요즘을 사는 우리는 감당할 힘도 고진감래의 단 맛도 어디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언제나 '상생'을 부르짖는다. 허나 그건 그들만의 '상생'일 뿐 어느 누구도 동의하지 않는다. 정말 진정한 '상생'이 뭔지 지금 우리 모두가 생각해 봐야할 화두다.

자연과 사람, 사람과 동물, 사람과 사람. 우리는 우리의 본질도 잊고 살아가는 듯 하다. 관계를 중요시 한다면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무시할 것은 하나 없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해야 아는 그런 어리석은 인간들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개개인이 스스로 관계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고 소소한 주변을 살피는 노력을 시발점으로 하나의 큰 노력으로 결실을 맺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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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죽음
제임스 에이지 지음, 문희경 옮김 / 테오리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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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봐도 무슨 내용인지 짐작케 한다. 우선 구성 자체도 독특하다. 소제목이 사건이 일어난 날을 중심으로 그 전과 그 후로 나뉜다.

제목의 느낌으로 어떤 이야기일지 감을 잡았음에도 군더더기 없는 구성으로 읽기 전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자전소설이기도 하지만 작가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기에 안타까움으로 들여다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나'에 비추어 죽음을 들여다 보는 경향이 있다. 어린 나이였다면 할머니, 할아버지의 죽음, 나이가 들어감에 부모님, 형제.자매, 남편의 죽음을 생각해 보지 않을까? 나같은 경우는 책을 보는 순간 딱 부모님의 죽음에 생각이 미쳤다. 가장 가깝고 내가 나이가 먹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 부모님의 죽음!

이 책에 등장하는 어린 아이의 입장에선 아빠의 죽음이고 아내의 입장에선 남편의 죽음이다.

장면의 묘사가 아주 섬세하다. 자칫 지루할 정도로 영화의 한 장면(찰리 채플린의 영화)까지 세세하게 보는듯이 묘사해 놓았다. 인물의 성격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주변인물들을 통해서 등장인물들의 셩격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장면의 묘사는 지루할지라도 적절했다고 본다. 그렇기에 한 가정의 아빠이자 남편이 갑자기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 장면도 더하거나 덜한 것도 없이 촉촉히 가슴에 와 닿았다. 사건이 있던 '그 날 저녁' 부분은 읽으며 내내 눈물이 나왔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아내와 겹치기도 하고 내 아이들과 딱 또래인 책속의 아이들이 겪을 심적 고통을 생각하니 더없이 우울했다.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남편의 죽음! 사는게 급급하고 그런 일상을 살다보니 매일매일은 소중할 것도 없는 그냥 하루.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늘 새로울거 없이 대면대면하게 굴던 남편이 아침에 나갔다 갑자기 죽었다는 비보를 듣는다면? 상상이 그리 쉽게 되진 않는다. 이런 일은 한 발짝 물러서서 내 일이 아닌 것처럼 보고 싶은게 사실이다. 울고 싶어도 맘껏 소리내어 울지 못하는 아내의 흐느낌은 내 가슴을 절절하게 만들었다. 아이들이 기억하는 아빠는 아침 식사 시간에 똑같은 자리에 앉아 자기들을 보살펴주던 아빠만을 기억하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없어진 아빠. 돌아오지 못하는 아빠. 대여섯살난 아이와 더 어린 동생은 죽음이란 걸 어떻게 받아들일까.

'루퍼스'라는 소년은 작가의 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그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고 심리적 묘사를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안가도 되는 학교, 집 공기가 뭔가 생일날처럼 붕 떠있는 분위기, 많은 사람들의 방문, 엄마의 어둡고 슬퍼보이는 얼굴. 엄마를 통해서 죽음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아빠의 마지막 얼굴을 대면하는 순간, 서양 영화에서 보듯이 관 뚜껑이 열려있고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자리. 낯선 아빠의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죽음과 직면한다. 이 장면을 읽는 순간 남편이 퇴근해 들어왔고 순간 이날 만큼은 대면대면하게 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에겐 언제나 같은 일상이리니. 아이들에게도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얼굴도 똑바로 보고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자고! 그게 그렇게 오래 가지 않는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일까. 죽음에 직면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다방면으로 그려져서 좋았다. 원망과 울음만이 가득하기 보다는 각자 나름대로 헤쳐나가고자 하는 죽음을 대하는 방식. 그것은 누굴 위로하고 위로 받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극복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요즘 들어 죽음은 우리 사회 큰 화두다. 죽음의 이유는 자연사보다 사고사, 돌연사 등이 훨씬 많다. 들여다보면 자살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죽음'을 대처하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다. 각자가 고통을 감수하면서 그 해법을 찾을 수 밖에는.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있거나 그 언제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돌연이나 사고나 예고되지 않은 죽음이 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특히 사회적 문제로 고통받다가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없기를 요즘은 간절히 기도하고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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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향한 눈 - 세계를 뒤흔든 최고의 만평들
장크리스토프 빅토르 지음, 조홍식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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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신문을 구독해서 보던 시절엔 신문 한 모퉁이에 만화를 찾아보는 재미가 솔찬히 있있다. 빼곡히 들어찬 글과 흑백들 사진 사이에서 쉬이 읽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만평이었다. 촌철살인의 뜻이 그림과 한 줄의 글에 담겨있다는 것은 전혀 모른 채 읽어가다가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나름 의미있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신문이라는 매체가 스마트폰에 급속하게 자리를 뺏앗기면서 이런 만평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에 외국 신문들은 줄기차게 만평을 실었고 그 독자들은 흥미롭게 때론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는 것 같다. 장문으로 싣는 기사보다 때론 만평이 주는 팩트는 독자로 하여금 진한 여운과 그 만평의 소재가 된 사람이나 사건들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리라.

책 표지에 실린 그림만 봐도 강렬한 인상을 준다.

 

 만평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불운한 사건이 있었던 '샤를리 에브도 테러사건'일 것이다. 꾸준히 비판과 풍자로 만평을 실었던 '샤를리 에브도' 잡지사는 이슬람 무장 단체의 공격을 받아 많은 만평가와 기자들이 학살을 당했다. 왜 그들은 그깟 만평에 예의주시하며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테러를 저질렀을까? 장문의 기사와 실제 테러 현장의 사진이 담긴 기사를 실은 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도시 한복판에 있는 사무실을 습격해 그같은 만행을 저질렀을까?

이 책에 실린 그림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며 거기에 실린 간단한 문장을 한 눈에 보게 되면 사건의 기승전결을 다 보는 것과 동시에 결과물이 아주 간결하게 뇌리에 박힌다. 만평에 실리는 그림들은 대부분 그 사회나 세계의 이슈가 실리는 경우가 많다. 사건이나 인물에 관련된 문제는 알고 있으나 정확하고 간결한 기사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허나 만평은 그 모든 것을 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만평가의 시선으로 사건을 간단, 명료하게 비판화된 시선으로 들여다 볼 수 있다. 반면에 그만의 시선이므로 비평하는 것이므로 자칫 그 비판이 옳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을 수도 있다.  이 많은 만평들을 보면서 세계의 문제와 지금까지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었는지 시대별로 구분되어 나름 역사 공부를 한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개인적으로 몇가지 흥미로웠던 만평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1991년 12.25.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두고 여러 만평이 실렸는데 포루투갈, 안토니오의 만평이 눈길을 끌었다. 고르바초프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머리에 도드라져 보였던 지도 얼룩 점. 일부는 그의 그 얼룩 점이 '소련의 지도와 흡사하기도 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얼룩 점에서 자유의 물결을 타고 시작된 시위대와 소수민족 공화국들이 밀려나오는 모습을 아주 재밌게 형상화했다. 잊고 있던 고르바초프의 얼굴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던 만평이다.

1997.12.11. '교토의정서' UN 기후변화협약에 서명한 국가들이 개최한 세번째 연례회의에서 체결한 협약이다. 미국 올리판트의 만평을 보면 일부 선진국들은 자국의 환경을 중요시하고 신생 개발 도상국들은 선진국과 같은 기준으로 온실가스 배출을 억제할 수 없다고 대립을 했다. 여기서 보여주듯이 선진국에서 보여지는 시선과 아시아나 일부 개도국에서 느끼는 비판의 시선은 충분히 갈릴 수 있다고 본다.

2001.9.11. '9.11 테러 사건' 쌍둥이 빌딩의 테러 사건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거짓말이었으면 영화였으면 했던 그 순간. 그 경악했던 순간을 역으로 보여주는 프랑스 '에를리 샤브도' 카뮈의 만평.( 테러 사건 때 목숨을 잃었음) 비행기가 자기들에게 향하는 순간에도 모두 컴퓨터에 앉아 업무에 열중하는 모습. 원자재의 가격을 결정하는 뉴욕상업거래소의 한 사무실을 표현하면서 한 사람은 자신에게 오는 비행기를 쳐다보고 놀라며 전화로는 "팔아!"를 외치고 있다. 이 만평은 처음으로 무역센터 안의 내부,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볼 수 있게 해준 만평이라고 한다.

 

 이런 만평을 보며 독자가 '아~'하고 찰나의 깨달음을 외치는 소리는 사건을 보는 만평가들의 허를 찌르는 능력 때문이리라. 이 책을 보면서 세계의 사건과 흐름, 서양인들의 의식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아쉬운 점은 대부분의 만평은 유럽과 아메리카에 속한 나라들이 실은 만평이라 그들의 시선만 볼 수 있었다는게 아쉽다면 아쉬었던 점. 하기사 싣고 싶었어도 아시아에선 이런 만평을 찾아볼 수 없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촌철살인의 묘미를 느낄 수 있는 이런 만평 전문 잡지가 생길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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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 온 더 트레인
폴라 호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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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두께에 흠칫 놀랐다. 요근래에 보기 드물게 두꺼운 책이고 나 또한 이런 두께의 소설책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쪼개서 두 권의 책으로 만드는 것보다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보는 것을 나 또한 더 선호하는 편이다. 대하소설도 아닌데 무조건 권 수를 늘리는 요즘 세태에 비하면 이 책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스릴을 가미한 소설이고 후텁지근한 요즘 날씨를 이기기에 조금은 도움이 된다고나 할까. 부산 친정집을 내려왔으니 망정이지 아이들 방학으로 책보기가 쉽지 않은데 하루 만에 후딱 읽어내는 호사를 누렸다. 이런 것이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싶은데 스토리가 끊어질까 어느 한 부분에서 그만 읽기가 쉽지 않다. 조금만조금만 하다가 후딱 읽어 버렸다.

이혼한 레이첼은 이혼의 상처를 달래며 술로 지새우게 되고 전 남편을 잊지 못하는 과정에서 그 주변 인물들과 얽히며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소제목을 인물들 이름으로 대체하며 그들의 입장에서 그 시간에 벌어지는 본인의 감정이나 사건을 나열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중심인물은 이혼녀 레이첼, 그녀의 전남편과 결혼한 애나, 옆 집에 사는 메건부부. 처음 문제의 발단이  되는 인물은 레이첼이지만 그녀가 믿는 것이 모두 진실일까?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정상일까?

우리는 사회속에서 혹은 가족끼리도 알면서고 속고, 모르고 속는 일들이 허다하다. 알면서도 속는 것은 내가 나를 컨트롤하고 상대를 제압할 구실을 만들 여지가 있다. 허나 작정하고 속이거나 모르고 당하는 속임은 속수무책이다. 내 잘못이 아니어도 어느순간 내 잘못이 되어 있고 내 의지로 이끌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보이스 피싱이나 자동차 보험 사기, 도박 등 인간의 지나친 괴욕과 재물욕에서 생기는 낭패도 있지만 남에 의해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우리 스스로 컨트롤하고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살고 있는 것일까? 문득 이런 의문이 생긴다. 내가 나를 컨트롤하는 방법! 구속과 자유를 적절히 이용하고 의무와 책임을 적절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 이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듯이 돌아가지 않으면 자유를 구속하는 숨어있는 검은 손은 그 순간을 비집고 들어와 어느순간 우리의 자유는 타인에 의해 구속당하고 압박당하게 된다. 레이첼은 술에 의지가 꺾이면서 삶은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내가 보는 것이 나자신조차 믿을 수 없는 현실. 어느 누가 믿어줄 수 있을까.

 잊지 못한 전남편 주변을 배회하던 레이첼은 그 주변 인물들과 얽히고 설키게 된다. 각 개인이 들려주는 자신의 상황은 제 3자의 시선을 조금은 자신의 편으로 이끌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하기도 한다. 사건의 범인이 예측 가능한 인물에서 다른 인물로 옮겨가는 시점이 되면 책에 더 깊이 빠져 책을 덮기엔 너무 늦어 버린 시점이 된다. 숨가쁘게 돌아가는 레이첼의 일거수 일투족은 독자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정점을 찍고 나면 결말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면 인물들이 흘려놓은 사건을 종합해 가며 하나의 정점으로 몰아간다. 이 소설도 같은 구조이고 범인이 윤곽이 서서히 들어난다.

 

  호기심으로 잠깐만 볼 요량이었지만 손을 놓지 못하는 관계로 밤 12시가 넘어 끝장을 보고야 말았다. 추리의 대가인 애거사 크리스티나 셜록 시리즈처럼 아귀가 딱딱 맞는 시원한 스토리는 아니었으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혹은 이웃에게 일어남직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두 눈을 뜨고 있어도 코 베어간다는 세상. 우리는 참으로 빠른 세상에 속전속결로 살고 있다.  이 책을 덮으며 느끼는 감정은 올바로 바른 정신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정말 투명하고 바른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가. 요즘은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잠시나마 더위를 잊고 송글송글 땀맺히며 읽은 책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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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그렇게 작아져간다 - 길고 느린 죽음의 여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
이상운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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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묻혀 살지만 부고가 오거나 누군가 병든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성큼 다가선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꼭 한 번 쯤은 생각해 봐야하고 시뮬레이션으로 그때의 일을 그려보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임에도 아직 나에겐 이르다는 핑계로 또는 닥치면 해결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부모님 연세가 들어가시면서 선뜻 무서운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생각만으로 끝낼 것인가! 이런 경험이야말로 직접 경험이 어려우므로 간접 경험이라도 많이 접해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책을 통해서나 혹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에게서 경험해 보지 못한 일들을 반복적으로 생각하고 구상해 보는 것이다. 내키지 않고 외면하고 싶지만 이런 일들은 꼭 한 번 씩은 겪게 되어 있다. 병환이든 노환이든 어떤 이유던간에 죽음 앞에서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방법등은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쳤을 때 약간은 의연하게 또는 정신척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작가가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담하게 때론 간호하는 이의 어려움과 고뇌를 상세하게 들려주고 있다.

  노환이라도 어느 날 문득 눈을 감게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아버지를 요양 병원으로 옮기려는 그 때의 일을 적은 부분이 있는데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노인 병원으로 모시거나 또는 집에서 가족의 손으로 돌보느냐. 이 일을 결정하는 것이 결단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요양 병원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살아 생전 너무나 깔끔하고 철두철미하셨으며 돌아다니기 좋아하셨던 할머니. 노환으로 자리에 누으시면서 할머니는 결혼 안한 삼촌의 몫으로 돌아갔다. 살아 있는 천사라고 불리는 삼촌은 열과 성의를 다해 모셨고 미안한 형제들은 돌아가며 방문하고 돌보기를 했다. 하지만 이 일이 만만치 않으며 어느 한 사람이 희생하기엔 가혹하고 힘에 부친다. 정신이 혼미하시기 시작하면서 결국 할머니는 요양 병원으로 옮기셨다. 작가의 아버지도 정신이 조금이라도 온전하실 때는 어른용 기저귀를 한사코 마다했다고 하는데 우리 할머니도 그러셨다. 처음 병원으로 가셨을 때도 약간의 정신이 있으면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 집이 있는 고향 땅으로...그런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울었던지. 요양병원이 자기들의 장점을 아무리 내세우고 가족화를 부르짖어도 획일화되고 삭막하고 일괄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 자기 편의대로 일하는 거니까. 그게 못마땅하면 가족들이 모시라고 하면 되는 것이겠지.

우리 사회는 이미 고령화 사회고 지금도 이런 일들로 혼란스럽고 힘들어하는 경우의 가정이 엄청나게 많다. 이들을 도울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은? 이 책에서도 나오지만 장기요양보험 서비스라는 국가에서 시행하는 제도가 있다고 한다. 살펴보니 사실 주먹구구식으로 형성된 시스템이고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겐 턱없이 모자란 수준의 제도다.

또 한 번 이런 제도에 실망을 느끼며 죽음을 향해가는 작가의 아버지를 들여다 본다. 이런 상황에 처해지면 나는 어찌할까? 우리 부모님을 어찌 하면 좋을까? 우선은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고 싶은 일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 일이라면 품에 끼고 절대 놓지 않을 테지만 그들의 피눈물을 먹고 산 우리들은 그들의 마지막을 힘들게 생각하고 있다. 자식들은 이렇게도 이기적인 인간들이다. 이 분도 노환이었음에도 3년 반이라는 세월을 병상에서 보내고 떠나가신다. 3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자식들이 인내하고 감당해야 하는 일은 어렵다고 감히 말해도 될까?

간호를 하면서 세월을 이기고 있는 몸과의 사투는 눈물겹다. 어르신들이 늘 하시는 말씀 "자는 듯이 가고 싶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새삼 이해가 가고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복이 있다면.

  언젠가는 이 길을 누구나 가야한다. 요즘 심심찮게 보이는 뉴스가 자식에게 폐끼치기 싫어서 동반 자살을 하시거나 치매를 앓는 분이 있으면 고통은 배가 되니 또한 자살을 선택한다는 안타까운 소식들. 이런 일들을 한 가족의 일이라고 스스로 해결하게 놔두는 정부는 국민을 등안시하고 고령화 사회를 제대로 바라보는 안목을 갖추지 못한 탁상 행정이다.

지금이라도 실태를 정확히 파악해 복지를 부르짖어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에 맞는 복지 사업도 제대로 갖추어야 할 것이다. 본인이 겪어보지 않은 것을 들은 것으로 해결하려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안일한 탁상 행정은 언젠가 화살이 되어 그들 가슴에 꽂힐 것임을 명심하고 앞으로 야기될 노인 문제들을 국가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작가가 시작과 동시에 끝에도 남겨 두었던 한 마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라는 뜻의 라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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