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업(生業) - 그 징하고도 찡한 노동의 표정들
은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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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소득만으로 자산을 형성하기 어려운 시대다. 사람들의 관심은 가만히 있어도 돈을 버는 '금융 소득'으로 쏠리고 있고, AI의 발달로 실직 위협이 일상이 되었다. 양질의 일자리는 갈수록 줄어드는 취업난 속에서도 우리는 생계를 위해 최소한의 일을 필요로 한다. 이 모든 건 여전히 '먹고살기 위해서'다.


일터의 현실은 그리 숭고하지 못하다. 산업재해와 인명 피해, 직장 내 괴롭힘 등 안팎에서 들려오는 부당한 소식은 우리를 멈춰 세운다. 저마다 삶의 무게가 다르다지만, 나만 유독 버티지 못하는 것 같아 괴로울 때 '노동'이 아닌 '현장'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다. 


노동절을 앞두고 출간된 <생업>은 밥심을 믿고 밥정을 나누며 밥의 혁명을 수행하는 17명의 목소리다. 급식 노동자부터 청년 농부, 산재 피해 가족, 청소 노동자까지. 이들은 일터에서 권리를 박탈당했거나 현실적으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빛의 이면에 그림자가 있듯, 이들은 누군가의 빛나는 삶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일한다. 누군가의 노동은 타인의 희생 위에 세워지기도 한다고 이 책은 일깨워 준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분투한 사람들은 따가운 눈초리를 견디면서 모른 척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 어려운 길을 자처한다.


부도덕하거나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모든 노동은 존중받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직업의 귀천을 따지고,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소위 '인정받는' 직업만 쫓는다. 멋지고 빛나는 일의 기준이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향할 날이 오긴 할까. 정당한 대가를 받고 다치지 않고 일하며 서로의 고된 노동을 응원할 수 있는 사회. 고단하지만 따뜻한 한 끼를 기꺼이 대접할 수 있는 호의가 피어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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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맞춤법 때문에 전화했습니다 - 국립국어원 상담실 연구원의 365일 노동기
이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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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에도 상담원이 있다니. 생각지 못한 곳에서 우리말을 지키는 다정한 언어 수호자의 이야기는 지난 언행들을 돌아보게 했다. 상담이라는 고된 감정 노동 속에서도 힘든 기색보다는, 문맥의 흐름과 변화하는 언어의 쓰임 사이에서 수호와 변화의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저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질지를 계속 주시하여 예외 상황들을 수용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 두려는 노력이다. - p. 83


이미지로 그려지는 일의 형태가 있다. 누군가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현장을 누비고, 누군가는 변화하는 그래프 사이에서 날카로운 지점을 잡아내며, 또 누군가는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갈증을 채워준다. 상담사라고 하면 흔히 헤드셋과 마이크, 그리고 무례한 민원인이 떠오른다. 대개 거칠고 빠른 말투로 자신의 불편함과 궁금증을 해결하는 데만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이들을 상대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언어라는 특수한 영역에서 화자의 의도와 맥락, 문법의 용례와 규범을 하나씩 짚어가며 ‘정확한 답’을 건네야 하는 입장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언어의 세계를 사랑하는 나조차도 그 막중한 무게감 앞에서는 마음이 아득해진다. 


말은 늘 변하지만, 우리는 그 변화를 늘 한발 늦게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늦됨 속에서 성장하고, 갱신한다. - p. 51


저자를 포함한 국립국어원 상담연구원들은 상담 업무에 그치지 않고,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의문들을 풀기 위해 정기적인 회의와 토론을 이어가며 연구에 매진한다. ‘상담’ 뒤에 ‘연구’라는 두 글자가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띄어쓰기 하나에도 사용자들의 편의와 국어 규범의 올바른 쓰임을 살피고, 구체적인 사례와 언어의 온도를 논리적으로 갈고닦으며 매일의 언어를 정비하는 그들의 뒷모습은 참으로 정성스럽다.


오늘의 낯섦이 다음에 있을 질문에 대한 답변의 초석이 된다는 것 말이다. 그렇기에 당황스러움 앞에서 해야 할 일은 새로 알게 된 것을 마음속에 잘 새겨 두는 일이다. - p. 25


알쏭달쏭한 맞춤법과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상대에게 건네는 말이 정확하게 닿기를, 진심이 왜곡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상담창구를 이용한다는 것도 새로웠다. 모국어를 홀대하지 않고, 화자와 청자 모두를 배려하는 이타심이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내심 뿌듯해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언어 규범은 명확하지만, 인간의 감정은 여전히 규범 바깥에서 흔들린다. 누군가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문법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온도, 그 미묘한 결의 문제다. - p. 63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르듯, 같은 문장이라도 억양과 어조, 크기와 감정에 따라 실리는 무게가 달라진다. 스쳐갔던 나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지금 적어 내려가는 이 글자 하나하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써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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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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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결혼, 육아, 그리고 가정. 이 모든 것에 한 톨의 관심도 없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해 공감은커녕, 내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파심을 미리 내비친다는 것은, 결국 그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의미한다.


저자인 임현주 아나운서와 남편 다니엘은 한국과 영국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자신들만의 새로운 가정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들은 한국을 무조건 비난하지도, 영국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도 않는다. 과거 자신을 키워준 부모의 양육 방식이나 복잡한 가족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문화의 형성 과정에 집중할 뿐이다. 양육이라는 거대한 범주를 논하기에 앞서, 두 개인이 어떻게 삶을 대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각자의 문화를 공존시키는지 그 과정을 산뜻하게 펼쳐 보인다.


누구나 집에 그레이존이 존재한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하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들. 누군가는 알아차리고, 누군가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가는 영역.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이곳을 전쟁터가 아닌 평화의 지대로 만드는 건 서로를 향한 인정과 함께 하려는 몸짓이다. (p. 69)


흔히 육아는 전쟁에 비유되곤 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처럼, 부모와 보조 양육자들이 쏟아붓는 노고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서서히 쇠락해가는 어른들이 뒤쫓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는 성인과 호기심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아이. 이들이 마주하는 수많은 처음의 순간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 결이 올바르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이 부부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더 좋았느냐 지금의 내가 더 좋느냐 한다면 그때는 그때라서 좋았고 지금은 지금이라서 좋다. 분명한 건 그때만 가능한 것들을 아쉬움 없이 해내고 지나가는 게 중요하단 사실이다. (p. 166)


나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면면을 인정하고 조율해 나가는 에피소드들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좋았다. 기혼자들의 해묵은 조언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정립해 나가는 모습에서, 관계의 문법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결국 원하는 모양으로 관계를 지키는 힘은 이런 작은 선택들이 매일 쌓여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p. 54)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 단순히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화를 해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 이들이 보여준 번역의 과정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지향점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록이 관계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따뜻한 선례가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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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으로 출근합니다 - 식물과 함께 쓰는 나무의사 다이어리
황금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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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주히 보내는 나날 속에 벚꽃 구경은 그저 남의 일인 줄 알았다. 마침맞게 떠난 서울 나들이에서 석촌호수를 돌기 전까지는. 호수를 둘러싼 풍성한 분홍빛 행렬이 이다지 아름다울 줄 누가 알았을까. 저자가 근무하는 천리포수목원의 계절 역시 색색의 향연이겠구나 짐작하며, 시간의 흐름을 색과 향기로 기억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산책을 통해 실감했다.

🌳 세상에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들이 있다. 인간의 개념으로는 가늠하기 힘든 오랜 시간을 지나온 자연의 역사를 지키는 일도 마찬가지다. (p. 24)

천리포수목원 식물들의 생애 주기를 따라가다 보면, 삶의 자잘한 근심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 안도감이 든다. 움트고 익어가는 생명의 본질을 마주하며,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은 가장 멋진 일이 아닌가 새삼 감탄했다.

인간 세계와 달리 식물의 세계는 명확한 답이 있다. 훼손하지 않고, 그들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것.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인간의 욕심을 덜어내는 일이야말로 자연을 보호하는 데에 가장 필요한 태도임을 깨닫는다.

🌳 나에게 식물의 세계는 당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지극히 합리적인, 꼭 맞는 답을 찾을 수 있는 세계관이다. (p. 50)

비단 수목원에서만 필요한 덕목은 아닐 테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성장의 소리를, 성급히 눈으로 확인하려 든다. 상승 곡선만을 쫓는 인간사의 피로감 속에서도 자연이 변함없이 사랑받는 이유는, 결국 우리 모두 자연에서 와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 잎이 햇빛을 가득 받으며 제 몸의 면적을 늘릴 때마다 부산한 소리가 났다면 여름의 수목원은 더욱 시끄럽고 요란스러웠을 것이다. 초록색으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계절이 천천히 작별을 고하고 있다. (p. 137)

무성한 나무들을 바라보며 거니는 걸 좋아하는 소심한 관찰자이지만, 근래에 수목원을 자주 찾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여름의 싱그러운 녹음을 담으려 나무 그늘 안으로 성큼 걸어갔던 기억. 그 발걸음이 결국 무한한 계절의 순환 속으로 입장하는 일이었음을 더는 잊지 않길 바라며, 애정 어린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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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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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다르게 깊은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소모적인 에너지를 줄이려는 본능 때문인지 조금만 결이 틀어져도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데 예소연 작가는 자꾸만 이름 모를 타인에게 다가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건네려 한다. 사소하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작은 이야기를, 마치 대단한 것처럼 속삭이고 그 속삭임의 효과로 누군가는 은둔하던 방을 치우며 사라진 소음 속에서 전환의 기점을 마련한다.


단편 <소란한 속삭임>을 대표로 책의 분위기를 말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다. 할머니, 고모, 친구 등 어쩌면 가장 친밀했지만 나를 위해 멀어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옷자락을 다시금 잡아본다. 이 과정에서 현실 속의 비현실적인 극적 장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것이 현실로 돌아올 때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서 있는 곳이 꿈 속인 양, 먼지와 함께 부유하는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먼지를 굳이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 "나로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조금씩 미워했고, 그건 지독하고 우스운 일이었다(p. 34)"는 고백처럼, 어쩌면 나 또는 그 부유하는 마음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책은 어떤 말을 간절히 듣고 싶은 사람들, 그런 말의 결핍을 지닌 자들의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소설 속 인물들은 경청을 참 잘한다. 제멋대로의 필터가 만연한 시대에서 이상한 이야기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내 것처럼 들어주고, 그에 감사하며 응답하는 인물들의 케미스트리가 내가 잃어버린 온기의 위안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이 극대화된 작품이 <아무 사이>였다. '아줌마'나 '도우미'처럼 뭉뚱그려진 이름이 아닌, 온전한 내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한 할머니에게 굳이 전화번호를 외웠는지, 그 노인의 기억력을 살아있게 해주려고 애쓰는 부분에서 감정이 터졌다. 이름을 불러주는 온기에 감응하는 발화가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위로가 아닌가 생각하며.


그럼에도 모아가 시내와의 만남을 지속했던 건 시내의 마음이 좋았고, 자신 또한 병들어 있었고, 더불어 지금이 세상에는 어디 하나 병들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p. 156


서로의 병듦을 알아채고 손을 맞잡는 공동선의 무리. 이 소설집은 그렇게 먼지처럼 부유하는 우리들이 서로의 옷자락을 찔끔 붙잡아보는, 그 연약하고도 나직한 연결의 가치를 일깨워 준다. 마법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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