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과 다르게 깊은 관계를 이어가기 어렵다. 시대의 분위기 때문인지, 나이가 들수록 소모적인 에너지를 줄이려는 본능 때문인지 조금만 결이 틀어져도 사람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런데 예소연 작가는 자꾸만 이름 모를 타인에게 다가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건네려 한다. 사소하다고 표현하기도 어려운 작은 이야기를, 마치 대단한 것처럼 속삭이고 그 속삭임의 효과로 누군가는 은둔하던 방을 치우며 사라진 소음 속에서 전환의 기점을 마련한다.
단편 <소란한 속삭임>을 대표로 책의 분위기를 말했지만,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다. 할머니, 고모, 친구 등 어쩌면 가장 친밀했지만 나를 위해 멀어질 수밖에 없던 사람들의 옷자락을 다시금 잡아본다. 이 과정에서 현실 속의 비현실적인 극적 장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것이 현실로 돌아올 때 기시감이 느껴졌다. 마치 내가 서 있는 곳이 꿈 속인 양, 먼지와 함께 부유하는 느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먼지를 굳이 뚫어져라 쳐다보게 되는. "나로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을 조금씩 미워했고, 그건 지독하고 우스운 일이었다(p. 34)"는 고백처럼, 어쩌면 나 또는 그 부유하는 마음들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이 책은 어떤 말을 간절히 듣고 싶은 사람들, 그런 말의 결핍을 지닌 자들의 이야기다. 신기하게도 소설 속 인물들은 경청을 참 잘한다. 제멋대로의 필터가 만연한 시대에서 이상한 이야기도 '그럴 수 있지' 하며 내 것처럼 들어주고, 그에 감사하며 응답하는 인물들의 케미스트리가 내가 잃어버린 온기의 위안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이 극대화된 작품이 <아무 사이>였다. '아줌마'나 '도우미'처럼 뭉뚱그려진 이름이 아닌, 온전한 내 이름을 핸드폰에 저장한 할머니에게 굳이 전화번호를 외웠는지, 그 노인의 기억력을 살아있게 해주려고 애쓰는 부분에서 감정이 터졌다. 이름을 불러주는 온기에 감응하는 발화가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위로가 아닌가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