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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 육아 번역기
임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연애, 결혼, 육아, 그리고 가정. 이 모든 것에 한 톨의 관심도 없던 내가 이 책을 읽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해 공감은커녕, 내가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조금이라도 상상해 볼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노파심을 미리 내비친다는 것은, 결국 그 걱정이 기우에 불과했음을 의미한다.
저자인 임현주 아나운서와 남편 다니엘은 한국과 영국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삼아, 자신들만의 새로운 가정을 일구어 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들은 한국을 무조건 비난하지도, 영국을 맹목적으로 찬양하지도 않는다. 과거 자신을 키워준 부모의 양육 방식이나 복잡한 가족사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두 사람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문화의 형성 과정에 집중할 뿐이다. 양육이라는 거대한 범주를 논하기에 앞서, 두 개인이 어떻게 삶을 대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서로를 인정하며 각자의 문화를 공존시키는지 그 과정을 산뜻하게 펼쳐 보인다.
누구나 집에 그레이존이 존재한다.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하루가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는 일들. 누군가는 알아차리고, 누군가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지나가는 영역.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이곳을 전쟁터가 아닌 평화의 지대로 만드는 건 서로를 향한 인정과 함께 하려는 몸짓이다. (p. 69)
흔히 육아는 전쟁에 비유되곤 한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처럼, 부모와 보조 양육자들이 쏟아붓는 노고는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무엇보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서서히 쇠락해가는 어른들이 뒤쫓기란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효율적으로 움직이려는 성인과 호기심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반응하는 아이. 이들이 마주하는 수많은 처음의 순간에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아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그 결이 올바르게 뻗어 나갈 수 있도록 이 부부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책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과거의 내가 더 좋았느냐 지금의 내가 더 좋느냐 한다면 그때는 그때라서 좋았고 지금은 지금이라서 좋다. 분명한 건 그때만 가능한 것들을 아쉬움 없이 해내고 지나가는 게 중요하단 사실이다. (p. 166)
나는 두 사람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서로의 면면을 인정하고 조율해 나가는 에피소드들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감정에만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좋았다. 기혼자들의 해묵은 조언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재정립해 나가는 모습에서, 관계의 문법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새삼 깨달았다.
결국 원하는 모양으로 관계를 지키는 힘은 이런 작은 선택들이 매일 쌓여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p. 54)
서로 다른 두 세계가 하나가 된다는 것. 단순히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문화를 해석하고 소통하는 방식에서 이들이 보여준 번역의 과정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지향점이 되었으면 한다. 이 기록이 관계 속에서 길을 잃은 이들에게 따뜻한 선례가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