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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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화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베어 타운'. 과거 하키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지금은 쇠락한 숲속 마을일 뿐이다. 이 조그만 마을의 희망은 청소년 하키 팀이 승리를 거두어 주목을 받는 것이다. 어른들은 오로지 그 목표 하나만으로 하키를 숭배하고 즐기며 모든 노력과 부정부패를 일삼는다. 그저 스포츠일 뿐인데, 나이가 많아봐야 열일곱인데 부모에게 잘해야 한다 압박을 받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을 보고 배운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측면도 다분하다. (p. 528)

 

우린 얼마 전 평창 동계 올림픽을 통해 강한 희열과 감동을 맛보았다. 비인기 종목이었던 컬링과 썰매 종목이 뜻밖의 메달을 획득하면서 국민의 관심이 쏠렸고, 스피드 스케이팅에선 팀워크가 문제시되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단 몇 분간의 경기로 하나가 되었다. 때론 메달 색을 따져가며 아쉬워했고, 실망스러운 결과에는 비난과 격려가 공존했다. 이때 우리가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을 베어 타운으로 옮겨가면 왜 이들이 하키에 이만큼 목숨을 거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하키로 얻는 그 순간의 기쁨, 어른들이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성을 통해 스포츠가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스포츠를 통해 누릴 수 있는 게 이해가 안 될 만큼 사소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초월을 느끼는 몇 번의 순간들 밖에 없음을 알면서도 불사르고 피를 흘리고 울부짖는다. (p. 205)

 

이 스포츠 세계는 그만큼 냉혹하다. 우리는 인기 종목과 비인기 종목의 차별 대우에서 이미 느끼고 있다. 메달을 따지 못하면 쏟아지는 악성 댓글로 그들이 겪는 정신적 고통을 알고 있다. 재능 있고 백이 있는 선수 뒤에는 그를 지키기 위한 서포트 선수가 있고, 후원자의 유무로 어린아이들조차도 소위 줄을 바꾼다. 아이들도 돈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끼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를 더욱 부추기고 당연한 것으로 체감하게 한다.

베어 타운은 그 모든 게 응축되어 있다. 부와 재능을 동시에 가진 유망주 케빈, 그를 다치지 않게 온몸으로 서포트하는 벤 이, 재능이 있지만 돈이 없는 아맛 이들은 모두 팀워크를 강조하는 하키 세계에서 빈부격차로 생겨난 위계질서를 보여주고 있다. 코치도 모든 전략이 "이기자"인 사람, 올바른 선수로 자라나는 것이 우선인 사람, 무능한 사람 등으로 제각각의 성향을 보인다.

베어 타운을 보면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키가 아니어도 청소년들은 학업으로 압박을 받는다. 부와 재능을 둘 다 겸비한 아이는 늘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부모 역시 이를 반드시 유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루에 학원을 대여섯 개씩 옮겨 다니며 각종 스펙도 준비하여 서울대를 가야 한다. 친구지만 늘 경계해야 한다. 상위권을 받쳐주는 성적의 아이들이 존재한다. 교내에서 선생님들도 오로지 성적에 따른 차별 대우를 일삼는다. 매우 잘하는 애들은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나머지는 야생동물처럼 방치한다. 아예 가망도 없어 보이는 아이는 거들떠도 안 본다. 과연 이 마을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만 존재할 법한 이야기일까?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에 따라 윤리와 정의는 뒷전으로 물린 베어 타운의 모습은 하키라는 단어를 공부로 대체하면 지금 우리 사회와 섬뜩하리만치 닮은 구석이 많다. (p. 569)

 

소설의 후반부에서 케빈이 코치의 딸 마야를 성폭행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가해자인 케빈은 옹호 받는다. 오히려 팀 내 전력에 피해가 가자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은 피해자인 마야를 가해자로 만든다. 케빈은 후원자의 아들이다. 이들의 지원이 끊기면, 유망주인 케빈이 몰락하면 베어 타운의 미래는 보장받지 못한다. 그들은 그 어떤 윤리적 행위보다 이들의 안위가 더 중요하고 이들이 주장하는 것이 곧 진실이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미투가 생각난다. 마야가 신고를 해고 진술을 해도 사람들은 마야가 잘못했다고 손가락질한다. 여기에는 여성차별적 시각도 보인다. 그 시간에 여자애가 남자애 방으로 들어갔으면 동의한 것이 아니냐는 가장 뻔하면서도 죽지 않는 말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피해자는 증명을 통해서 계속 자신이 피해를 입증만 해야한다. 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는지, 왜 상처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놓지 않았는지, 왜 이제서야 신고를 했는지 취조를 통해 피해자가 오히려 내몰린다.

소설에는 하키 퍽을 치는 소리를 "탕탕탕"으로 표현한다. 이는 총소리와 유사하다. 마야가 케빈에서 총구를 겨눈 건 케빈이란 아이로 표현된 사회의 부정함에 총을 겨눈 것일 테다. 하키 퍽을 치는 소리가 자주 등장한다. 어쩌면 "탕탕탕"은 작가가 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함에 겨누는 경고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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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노보노의 인생상담 (20만부 판매기념 특별판)
이가라시 미키오 지음, 김신회 옮김 / 놀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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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신세계가 열리는 줄 알았던 때가 있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보니 고민만 늘어갔다. 하고 싶은 걸 다할 수 없어서 매일 갈등을 하고, 선택에 따른 책임을 지기 위해서 늘 신중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기 시작했고,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삶의 전반적인 고민들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다들 나이 드는 게 처음이니까 그래서 불안한 거야."

 

모든 걸 다 아는 것 같은 어른도 계속 처음인 순간을 산다. 처음이니까, 나라는 존재가 2명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걱정과 고민만 늘어간다. 그 안에는 '잘하고 싶다'라는 의지가 숨겨져 있다. 잘하고 싶으니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별거 아닌 일에도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우리는 늘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보노보노와 친구들이 수많은 고민들에 대해 내리는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우리가 꼭 해야 한다고 하는 일들에 '왜?'라는 질문을 끼얹는다. 예로,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는 "사과를 꼭 할 필요가 있는지?"로, "취미를 어떤 것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는 "억지로 하는 게 취미인지?"로 반문하는 것이다.

 

[동성 친구를 좋아하게 됐어요] p.127


보노보노: 결정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힘든 일이지
포로리: 다들 힘든 일에서 도망치려고 하기 때문에 더 힘들어져.
보노보노: 도망치지 않으면 돼?
포로리: 응. 만약 상대가 눈치채면 어떻게 할 건지를 지금부터 정해놓는 거야.
보노보노: 그렇구나. 미리부터 정해두면 좋은 거구나.
포로리: 그래도 힘들겠지만.
보노보노: 역시 힘들구나 ······.
포로리:
보노보노, 사는 건 힘든 거야. 힘들지 않게 사는 법 따윈 없어.

 

때론 고민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다가도 납득이 안 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처럼 저들끼리 토론을 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깊은 성찰이 돋보이는 말이라 생각될 때가 있다. 이 밖에도 왜 보편적으로 정해놓은 평균에 우리가 맞추어야 하는지, 반대하는 사랑에 대해서는 왜 잘 안돼서 슬퍼할 걱정을 먼저 하는지,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건데 왜 꼭 해결해야 하는지 등 그들의 입장에서 우리의 고민을 바라봤을 때 비치는 모순점을 보여주며 생각해 보게 한다.

수많은 고민들이 보노보노와 친구들을 거쳐갔지만 해답은 없다. 오히려 '이게 답인가?' 싶다. 그건 모든 고민은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하기 때문일 거다. 보통 고민의 해답은 자신에게 있다는 말을 많이 한다. 고민을 하든 하지 않든 너무 깊게 들어가 생각하다 보면 배배꼬여 머리만 아파진다. 때론 고민은 고민인 채로, 저 멀리 내버려 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 건 어떨까 싶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모든 고민에 대해 "그게 어때서?"라고 말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설령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준다. 우리가 고민을 안고 보노보노를 찾아가게 된 까닭은 이렇게 '그 자체'를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처음인 인생을 틀렸다고 생각하기 보다 내가 발견하고 개척해 나간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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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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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잘 견디면 자양분이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슬픔을 느끼면서 이건 나의 미래의 자양분이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 슬픔을 느끼게 되면 그저 슬플 뿐이지만 점차 외로움, 고독함, 수많은 걱정들이 파생되어 더 감정을 증폭시킨다. 감정은 몇 단어로 정해져 있는데 깊이와 폭, 종류는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공통점은 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다는 정도다. 나는 슬플 때마다 늘 상황에 지고 만다. 탓을 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지나고 나서 보면 "내가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싶을 때도 있지만 늘 시간이 지나야만 무뎌진 감정으로 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늘 슬픔에 대해 궁금했다. 어차피 계속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이 슬픔이란 감정을 이해하여 나의 괴로움이 조금이나마 덜고 싶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는 슬픔을 이해하기 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자인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25편의 이야기에서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같이 생각해보며 슬픔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슬픔이란 평소 잊고 있었던 내면의 소리이며 우리가 말을 하려는 것은 전하는 뭔가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 가슴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p.9)라고 말한다.

슬픔의 근원이 말로 다 할 수 없어 표현하기 힘든 감정의 응어리라면 왜 표현할 수 없는 것일까? 슬픔은 저마다 다르게 겪는 '나만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생의 기로라고 부를 만한 사건은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강렬했다 하더라도 타인과 공유할 수는 없는 것(p.19)이라 한다. 당연히 내가 겪은 일은 타인도 똑같이 겪기가 어렵기 때문에 내 주변에, 내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나만의 사건이다. 특히, 내 이야기를 타인에게 속 시원히 털어놓기 힘들어하는 한국인의 특성상 슬픈 상황이 생겼을 때 타인 앞에서 목놓아 울어 본 적은 드물 것이다. 우리가 여기는 슬픔은 사회 분위기상 암묵적으로 절제해야 하는 감정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울부짖고 싶지만 소리 죽여 우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p.37)

소리 죽여 울지 않으려면 슬픔을 대하는 태도부터 달리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기대려 하고, 받으려 하고, 공유하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내 진짜 마음이란 것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나는 혼자다'라는 명제가 깔려있다. 혼자이기 때문에 친구나 가족, 동료 등 다른 누군가가 생각난다.

이 두 가지를 받아들인 후에는 읽고 쓰는 행위가 이루어져야 한다. 책을 읽을 때에는 읽고 나서가 아니라 읽으면서 드는 생각들이 촘촘히 엮어 후기를 만든다. 쓰는 일도 나조차도 잘 모르겠는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들을 흐르는 대로 쓰다 보면 알게 모르게 풀려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런 과정이 조금 반복되면 내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지 눈에 보인다.

생각을 글로 옮기는 게 아니다. 반대로 글을 쓰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발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쓴다는 것은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글자로 옮기는 행위라기 보다 쓰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인생의 참뜻'을 인식하게 되는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p.165)

알게 모르게 풀린다는 건 내가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지각하게 되어서 일 것이다. 저자는 환희와 비애는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보이지도 만질 수도 대화를 나눌 수도 없지만 글로 표현하다 보면 두 단어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존재란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내가 가진 표현을 끌어내기 어렵다면 필사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 한다. 공감이 갔던 문장들을 종이에 차곡차곡 적으면 뚜렷해지는 무언가가 생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고독을 느끼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고독을 느낄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신을 느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생의 비밀과 조우한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타인과 만나는 것도 고독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 중의 하나이다. 고독의 경험은 우리를 고립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타인과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p.118~119)

슬픔은 군중 속에서도 찾아오지만 고독 속에서 찾아올 때마다 많다. 군중 속에 있으면서 억눌린 감정들이 혼자 있게 되면 폭발적으로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무시하고 그냥 슬프다고 나 좀 알아봐달라고 하면 토닥여주지 않는다. 스스로 마주하여 이겨내려는 용기도 필요하다. 힘든 일이지만 한 번은 거치고 나아가야 긴 인생 속에서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될 것이다. 나 자신을 아는 것은 살아가면서 주어질 선택의 기로에 주체가 될 수 있는 강점이 된다. 우리는 짧든 길든 그 간의 인생을 경험해보면서 시간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졌는지를 느끼고 있다. 끔찍이 아팠던 순간도 조금은 무뎌졌거나 잊혔거나 잠재되어 있다.

계속 그 실체가 무엇인지조차 모른 채 아픔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가야만 한다.(p.41)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맛있다!'고 밖에 표현 할 수 없는 것처럼 계속 슬프면 슬프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었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내가 책을 통해서 느끼고 공감하고 생각했으니 잠재된 슬픔이 희석되지 않았을까 싶다. 계속 달려왔으면 앉아서 쉬어야 할 때도 있는 것처럼 이 책은 그런 쉼을 스스로 가져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스스로를 계속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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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콩밭에 가 있습니다
최명기 지음 / 놀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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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짓 좀 해도 인생은 잘 돌아갑니다


책 표지띠에 쓰인 저 문장을 보고 호기심을 느끼고 제목에 마음을 빼겨 읽기 시작한 책이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습니다> 이 제목 하나만으로 현재 나의 모습을 표현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현재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바람이 들어 다른 곳만 바라보는 상태.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오늘 하루를 허무하게 소비해버린 것 같고 그 결말은 잠들기 전 자책과 변명, 다짐으로 귀결된다. 이 책은 좀 딴짓을 많이 한다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잘못되지 않았다며 대변한다. 대변을 받기 전, 왜 우리는 이렇게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할까?

어려서부터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 모든 주변 사물과 사람에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해보고 쉽게 싫증 내는 사람들은 흔히 ADHD로 의심받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외향적인 사람들을 위한 책인가 싶었다. 하지만 내향적인 사람도 밖으로 표현하지 않을 뿐 그 안에서 끊임없이 산만하고 호기심을 분출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성향의 차이인 것이다. 곧 죽어도 남이 시키는 일은 못하겠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누가 시켜서 해야 하는 일은 지루해서 못 견뎌 하는 성향의 사람들도 자기 좋아서 하는 일에는 지치지 않고 빠져드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자신의 내면에 분출하지 못한 에너지가 가득한 것이다. 정신과 용어 중 '마치 모터가 달린 듯이 돌아다닌다는'라는 표현이 꼭 알맞다. 이들은 꽂히는 일을 할 때는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생겨도 금세 잊어버리고 다시 몰두한다. (p.39)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기쁨은 말할 수 없다. 계속 생산적인 활동을 해도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는다. 더 표현해보고 싶고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마음이 가는 일과 아닌 일의 차이가 여기서 극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생산성 역시 차이가 날 것이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관심이 가는 분야에는 언제고 적극적인 자세로 귀를 활짝 열어둘 이라는 답을 내놓는다. 매일이 지옥 같고 지루하면 사는 재미가 없으니 돌파구를 마련하라는 소리다. 하지만 안정적인 일에 양다리를 살짝 걸쳐두는 현실과 타협한 답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작한 일은 시간이 지나면서 안정적인 일만큼이나 전문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그 시기에 우리의 콩밭은 콩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농작물들이 한데 모여 자라는 대농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일만큼이나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내가 가진 열등감이 합리적인지, 좌절과 우울감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면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지, 성격이 자라면서 정반대로 바뀌었다면 왜인지 등에 대해서 고민을 해봐야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우리가 애꿎은 적극성을 탓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나서지 않았다면', '괜히 일을 벌여서'라며 적극적으로 살았던 자신이 문제였다고 쓸데없이 욕심을 부렸다며 자책한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문제인데 애꿎게 자신의 적극성이 문제였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시키는 일만 하면서 조용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이 가진 적극적인 성향을 억지로 소극적으로 바꾸려 할수록 당신의 자존감은 낮아지고 자격지심이 비대해진다. 점점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p.55)


'적극성'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벌어진 후의 일이라 결과가 안 좋게 나오면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과정 자체는 좋았지만 때에 따라 안 좋게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인데 그때의 과정을 '안 그랬어야 했어'라고 단정 지어버리면 우리는 그 간의 노력을 스스로 부정하며 애써 내 탓, 남탓을 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태도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지만 합리적인 부정과 비관이 있어야 자존감이 다치지 않는다.

정해진 하루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중간중간 딴짓을 해야 한다. 24시간 내내 할당량만 하기에는 너무 빡빡하고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핸드폰도 보고, 게임도 하고, 수다도 떠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당신의 하루하루는 딴짓, 딴생각이 있기에 보다 빨리 흘러갈 수 있는 것이다.(p. 179)


당신의 내면에는 무수히 많은 성향이 잠재되어 있다. 적극적이면서 내성적이기도 하고, 호기심이 많지만 관심이 없는 일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다양한 측면을 가진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바라는 요소들이 모여 빛을 낼 것이다. 앞으로도 어떤 일에든 당신의 기준을 버리지 말자. 그게 딴짓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딴짓 좀 하면서 살아도 인생은 충분히 잘 돌아가게 되어 있다. (P. 183)


모순된 두 자아가 보이면 '이게 내가 맞나?' 싶을 때가 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그건 이상한 점이 아니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 안의 다양한 성향이 있어 오늘은 A가 보이고 내일은 B가 보이는 것뿐이었다. 이미 우리 안에 A부터 Z까지 있는데 말이다. 성격이 바뀐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이 모든 성향들이 균형을 맞춰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중간중간 딴짓은 이음새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나 하나로 세상이 변하지 않듯, 나 하나 딴짓을 해도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세상의 중심부에 우리를 놓는 짓은 그만해야겠다. 쉴 새 없는 생각들이 빛을 발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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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 2017 제17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박상순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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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가벼운 시집 한 권을 들고 다니는 것이 일상이다. 적당한 크기의 짧지만 강한 여운을 남기는 글은 언제 어디서나 읽기가 참 좋다. 학생 때만 해도 시는 매일 형광펜과 빨간 줄을 그으며 숨은 뜻을 찾아 메모하고 은유를 해석하는 글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재미없게 시를 읽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시는 내가 그 뜻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시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떤 때는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난감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 그 이유는 비휘발적 가치를 시가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읽고 덮어두기엔 우리가 아직 보고 느낀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 도 마찬가지다. 박상순 시인 외에 9명의 시인들이 쓴 시가 실려있다. 10명의 시인 중 유독 잘 읽히는 시인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분도 있었다. 하지만 읽히지 못한 시는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10인의 개성이 제각각이듯이 노래하는 주제도 다양하다. 사랑, 고독, 자유, 분노, 저항, 젠더, 정치, 여성 등 각각의 관심분야에 대한 통찰을 함축된 언어로 표현한다.

'미당 문학상' 수상작인 '무궁무진한 떨림, 무궁무진한 포옹'은 '무궁무진하다'라는 반복되는 리듬감이 주는 벅찬 느낌이 운율과 감정을 동시에 표출할 수 있도록 한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감출 수 없는 설렘, 다 주고 싶은 한 사람의 마음, 죽음에 대한 비참함이 모두 이 표현에 잘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현재를 꿈꾸다가도 혹시나 잘못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을 가진 인간의 양면적인 마음이 보인다.


공기를 찢는 소리.
그런 것은 없습니다.


이 시는 이제니 시인의 '하얗게 탄 숲' 한 구절이다. '공기'라는 무형의 존재를 '찢는다'라고 시각화한다. 내가 숨쉬기 위해 필요한 그런 공기를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그런 것은 애초에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 고통을 이해해달라는 말을 무시해버린 것 같아 마음에 와닿았다. 서로의 말과 말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모르게 상처받는 인간을 표현하려 한 것 같았다.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 어둠 속에 눈빛이 영혼같이 빛났다. 책 속엔 정말로 그런 게 존재해서
사람을 사람이 구해주고 있었다. 자유와 시간이 무한히 남았구나 싶었다.


이 시는 김상혁 시인의 '밤이 얼마나 깊었냐 하면'의 일부이다. 책을 읽는 화자가 책을 통해 치유받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구절이었다. 사람은 사람에게 상처받는데 책에서는 사람을 통해 치유받는 주인공이 있었나 보다. 깜깜한 밤에 빛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 또 이 이야기를 쓰고 읽는 사람들이 보내는 시간은 유한하면서도 무한하다. 아직 읽을거리가 있고 쓸 거리가 있는 사람들, 여전히 자유를 꿈꾸는 사람들, 또 그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들이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었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 상처받은 사람, 위로받은 사람.....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시는 쓰는 자도, 읽는 자도, 영감받는 소재도 모두 사람의 손과 마음, 입김이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아마 내가 해석한 뜻이 시인의 의도와 다를 수도 있다. 다른 건 틀린 것이 아니다. 여러 해석이 모여 다른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생기는 것이고, 뜻밖의 위로와 인연도 그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교실에서 배우던 시를 잊고 이젠 자신만의 시 해석을 만들어 나가야겠다. 그러면 조금 더 재미있는 시를 발견할 수도 있고 풍부한 독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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