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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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나를 위한 책을 고르는 일은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입은 책들이 일렬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보면 나도 이런 서가를 갖고 싶다는 로망이 생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사서 들여놓을 수는 없는 법! 이 중 단 몇 권의 책만이 선택된다. 면접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책과의 첫인상도 중요한 선택 조건이다.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건, 책 표지다. 책의 얼굴인 표지는 각양각색으로 겹치는 느낌이 없다. 그 해의 유행에 따라 몇몇 익숙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이 있긴 하지만 다수의 책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책의 얼굴을 만드는 사람을 우린 '북 디자이너'라 부른다. 그들은 책의 내용, 분위기와 느낌을 독자에게 와닿게 하기 위해 파주 어딘가에서 종이를 고르고, 시안을 만들고, 글자를 써본다. 그럼 이들은 어떤 일을 주로 하고, 디자인이란 예술적인 일을 어떻게 삶에 불어넣고 있을까? 책을 좋아하면서 저절로 출판에 관심이 많아진 터라 디자인이 세계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환상과 꿈을 안고 시작한 독서는 완독 후, 와장창 깨진 현실을 마주했다. 현직 디자이너가 말해주는 북 디자인의 현실은 '좋아하는 일이 생계가 된다면'이란 생각에 미쳤다. 완성도 높은 작업물을 위해 감수를 밤낮없이 하고, 편집자와 작가와 의견이 일치되는 디자인을 생각해야 한다. 때론 고생한 결과물이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의사처럼 고유의 영역에 아무나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게 진정한 전문직일 텐데, 북 디자인의 영역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개입한다. (p. 91)

 

 

디자이너마다 가치관과 색깔이 다르지만, 결국 책을 어떤 마음으로 책을 대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p. 215)

 

 

북 디자인은 개인의 개성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다. 책이 빛이라면 디자이너는 그림자다. 이들은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빛이 더 빛나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업물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수정사항이 오가고, 위축되는 출판시장에서 예산 문제에 직면한다. 디자인과 편집자, 마케터, 작가 각각은 고유한 영역을 지닌 전문직인데 서로가 손쉽게 개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조건에 부합하게끔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북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아쉬운 점이 있다. 북 디자인은 프로세스 자체가 폐쇄적이다. 때문에 디자이너 간의 소통이 많지 않다. 또래 디자이너나 선배들과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했지만, 우리가 만들고 있는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다. (p. 33)

 

 

다시 말해 완성도라는 것은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성취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에 부합하는 일련의 방법들을 찾아내고, 선택의 과정들이 지시하는 최선의 완결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다. (p. 47~48)

 

 

책에서 인터뷰 한 북디자이너들은 한 사람인 듯, 프로세스의 폐쇄성, 예산 및 소통 등의 문제를 똑같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책이란 매체에 어떻게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왔던 시행착오들과 B 컷들은 서랍 속에서 나 자신이 나태해졌을 때 또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때 다시 일으키는 마스터키였다.

 

내게 위기가 찾아온 시기는 작업의 한계를 느꼈을 때가 아니었다.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매일 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북 디자인은 나의 생계를 꾸리는 일이기도 했다. 매일 즐거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를 상대해야 했고, 때로 스스로를 구박하거나 자책하는 일을 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지치는 건 당연했다. (p. 340)

 

 

일이 그렇듯 경험을 하면서 겹겹이 쌓인 시간들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곧바로 빛을 발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나만의 무기가 되어 상상하고 펼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거기에 근성을 더한다면 진정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근성이라는 놈이 꼭 필요하다. 우리가 모두 천재는 아니므로. (p. 279)

 

내가 깨진 환상과 꿈은 처음 마주한 떨림과 기대, 설렘 같은 말랑말랑한 것들이다. 어느 일이든 말랑말랑한 감정이 깨져버리면 방황을 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일인지, 적성이란 무엇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디자이너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직업을 가져 몇 년간 일해본 선배가 건네는 직장생활지침서 같았다. 지금 포기하고 싶고, 버텨야 하나 싶고, 설령 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그건 앞으로 가치있게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환상을 가진 일도 생계를 꾸리는 일이다. 자책하며 울고 싶은 순간들이 그들도 있었을 것이다. 매일의 일이 재미있으면 그건 일이 아니란 말이 있다. 진부하고, 재미없고, 답답한 게 정말 일하고 있다는 순간이다. 내가 나를 영위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꿋꿋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우린 모두 천재가 아니기에 근성이란 놈이 꼭 필요하다는 마지막 말이 와닿는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억지로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다가 우왕좌왕하는 것보다는 지금 자신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해내가는 것이 마음을 소진시키지 않는 방법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좀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p. 342)

 

 

이들은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버티고 좋은 결과물을 내보이려 한다. 그렇게 꾸준한 성과를 내다보면 이 분야는 견고하게 자리 잡을 테니까. 그러니 후배인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면 된다. 자연스럽게 실수도 하고, 꾸중도 듣고, 눈물도 흘리면서. 북디자이너의 B컷이 자만했던 과거이며, 발전하고 수정해야 할 선명한 가르침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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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 나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한 365개의 물음
다나카 미치 지음, 배윤지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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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묵은 상념은 과거에 던져두고 새 마음으로 갈아입는다. 방 정리도 해본다. 이렇게 청소를 하다 보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아두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읽지도 않는 책들, 쓰지도 않고 방치된 다이어리, 각종 명함과 엽서들은 '나두면 쓰겠지' 하며 놔두었던 답답함의 원인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펼쳐보지도 않을 것들에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있는 질문들은 어떨까? 365개의 질문들은 쓸모없어 보인다. '여기서 가장 먼 장소는 어디인가요?' 란 질문이 내 미래를 답해주진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엔 골똘히 생각해볼 마음들이 있다. 커피와 차 중에 무엇을 마시는지, 잠들면 불안을 잊을 수 있는지, 걸을 때 어떤 발부터 내딛는지. 이런 질문들은 '나'에 관한 물음이고, 묻지 않아도 관성처럼 하고 있는 행동이며 말이다.

 

몇 가지 질문들을 신중히 골라봤다. 이 질문들은 앞으로의 1년 동안 틈틈이 물어볼 생각이다.

 

 

Q. 당신을 제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이 가장 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신중한 면이라지만 신중함이 지나치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작년 한 해가 그랬고, 두려움에 많이 잡아먹혔다. 막상 신중했던 선택들도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해서 올해는 두려움과 싸워 이기는 게 목표다. 해서 후회하는 것과 안 해서 후회하는 건 결이 다르니까.


 

Q. 인생은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가치라... 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지는 가치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고,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사람도 있고, 죽고 싶은데 바람처럼 잘 안돼서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는 두 번 태어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의미 부여할만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손목에 묶인 매듭이 자연스레 풀릴 때까지만 살고 싶다.

 

Q. 가장 고독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회사.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사는 곳이다. 깊은 관계로 이어지기 힘들고, 마음을 털어놓으면 약하다는 소리 듣기 십상인 곳. 외로움과 고독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장소다. 벗어나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다시 들어가 견뎌야 한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다.


 

Q. 죽을 때까지 책만 읽는다면,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해보고 싶다. 돈만 준다면? ㅎㅎ 이 세상 책을 다 읽고 싶지만 신간은 계속 쏟아지니 불가능할 테다. 1~2억 권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만 약 2000권은 되는 것 같은데.

 

Q. 오후에 듣는 음악을 한 곡만 고른다면 어떤 곡일까요?

 

요즘은 위너의 'MILLIONS'와 송민호의 '오로라'를 듣는다. 통통 튀고 청량한 느낌이 오후와 어울리는 것 같다. 살짝 잠을 깨우는 정도의 흥이 딱 좋다.


 

Q.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는 무엇일까요?

 

인간이다. 인간만 없으면 사라질 문제들이 태반이다. 플라스틱도 일회용품도 모두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고 이제 와 줄이라고 말한다. 지구에서 발생되는 각종 환경문제 중 인간이 관여 안된 게 없다. 결국 자초한 결과다.

 

 

Q. 당신은 20년 후 오늘 무얼 하고 있을까요?

나도 알고 싶다.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으면 답을 못하겠다. 하고 싶나요?라고 묻는다면 조그마한 작업실 겸 가게를 내어 살고 싶다. 도시가 아닌 온 사방이 밭이고, 조금 걸어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읽고, 쓰며 살고 싶다. 오래전부터 프리랜서의 삶을 꿈꿨다. 나 정도만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만 벌면 괜찮은 삶일 듯하다. 억지로 빠른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게 어긋나기만 해서 힘들다.


 

막상 질문과 마주하니 적절한 답변을 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렇게 적어나갈 답변을 미래의 내가 다시 본다면 그 답은 바뀌어 있을까 궁금해진다.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있으면 좋겠다. 영원히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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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실 - 우리는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
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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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악마의 편집이 당연한 듯 돌아다닌다. 우리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핸드폰으로 손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편리함은 진실로 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 굳이 어려운 길을 걷지 않으려는 심리는 권력에 휘둘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때론, 옹호자가 되었다가 오보자가 되고 오도자가 되어 짜집기된 편파적인 자료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만큼 짜임새 있는 정보들이 신념을 어지럽힌다. 적당히 편집해서 내보인 소식은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이 설령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더라도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우리 의견에 담긴 내용은 내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공간과 긴 시간, 수많은 대상에 걸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견은 '남들이 알려준 내용'과 내가 상상하는 내용을 끼워 맞춘 것일 수밖에 없다." (p. 26)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 중 '한 치의 오차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몇 개나 될까? 넓어진 세상만큼이나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은 줄어들었고, 간접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생겼다.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마녀사냥으로 특정 집단을 매도해 버릴 수 있는 힘을 대중들이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권력을 휘두르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며 극한으로 상황을 몰아 넣는다. 사실을 편집해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감성을 자극할 요소를 집어넣은 그럴듯한 진실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스토리의 힘은 대단하다. 때로는 정당화될 수 없을 때조차 손쉽게 사람들을 설득해낸다. 스토리에 이런 힘이 생기는 것은 스토리가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인간 심리의 패턴을 활용한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토리를 무조건 '진실'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그 스토리가 '여러 진실 중 하나'에 불과할 때조차 말이다. (p. 177)

 

스토리는 유도하는 미끼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기관, 기업, 기사들은 대중들이 그렇게 믿을 수 있게 간교하게 조작한다. '여러 진실 중 하나'가 위험하게 사용된다. 그래서 저자는 '제대로 된 스토리'를 얘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궁무진한 스토리만큼 듣는 이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도 여러 가지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이건 내가 속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무언가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진실은 보통 한 가지 이상이다. 경합하는 진실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좋은 방향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경합하는 진실을 가지고 우리를 오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 395)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만큼 진실도 한두 개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스토리를 엮어내는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쥐락펴락할 수 있다. 스스로가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오보로 나타난 진실 앞에 "미안, 그게 아니었네." 하고 말뿐인 사과는 힘이 없다. 의심하는 태도와 비꼬는 시선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자고 일어나면 논란이 불거지는 시대 속에서 각자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길은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에 달려있다. 편집을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법칙을 살펴보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내가 오도자가 돼있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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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츠드렁크 - 행복 지수 1위 핀란드 사람들이 행복한 진짜 이유
미스카 란타넨 지음, 김경영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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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술을 즐기는 것.

그게 바로 '팬츠드렁크'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휴식을 즐길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밤, 팬츠드렁크하며 행복해지세요! (p. 11)


'휘게', '라곰'에 이어 또 다른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이 나타났다. 바로 모든 억압을 벗어던지고 집에서 술 한잔 마시며 빈둥거리는 '팬츠드렁크'. 핀란드에서 유행이라는 이 라이프스타일은 한국의 혼술 문화와도 유사하다. 사실, 쉴 때는 어떤 간섭도 받기 싫다. 꽉 조이는 정장 바지도, 속옷도 숨 막히고,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억압 요소다. 그런데 팬츠드렁크는 이 모든 걸 벗으라고 한다. 집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추레하게 맥주 한 잔과 티비 또는 스마트폰, 책등을 행동반경 가장 가까이에 두고 함께 즐기라고 한다. 이처럼 쉽고 간편한 휴식이 어디 있을까?

 

팬츠드렁크의 휴식효과는 단순한 요소에서 나온다. 편한 옷차림, 적당량의 술, 그리고 가벼운 소일거리. 그리고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팬츠드렁크를 제대로 즐기려면 마음을 열고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겨야 한다. 사실 팬츠드렁크는 정신, 감정적인 면에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하는 명상법인 '마음챙김'과 닮은 구석이 있다. (p. 26~27)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격하게 안 하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팬츠 드렁크는 우리의 요구 조건을 충실하게 들어준다. 이를 다양한 통계자료로 정당화하며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연구결과도 우릴 도와준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만큼 '쉼'에 적합한 것은 없다고! 휴일의 내 모습이 정당하고 올바른 형태라고 인정받는 느낌이 든다.

 

 

그럼 팬츠드렁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북유럽의 기상현상과 사회 분위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백야 현상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복지가 너무나도 잘 되어 있는 곳. 하지만 주변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고, 높은 세금 징수로 인해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다. 스펙터클한 한국 사회와 비교해보면 따분하고 지루한 생활의 연속이다. 그래서 이 문화가 탄생했다.

 

 

그들의 문화는 '혼자'를 권한다. 가장 편안한 집안에서 느리게 흘러가 보라고 조언한다. 1년의 대부분을 '누군가'와 함께 보낸다는 점에서 이는 꼭 필요하다. 자기를 돌보는 건,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쉬면서 무언갈 하기보단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고,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직장 또는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일은 삶의 윤활유가 되어준다. 의미를 하나하나 넣다간 억지밖에 남지 않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손바닥을 내민다.

 

 

어찌 됐듯 수고했던 오늘이고, 한 해다. 후회는 잠깐,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멀었다. 현재를 충실히 하다 보면 해결되지 않던 것도 어느새 사라질 테다. 핀란드 사람들처럼 술 한잔 마시며 날려버리자! 즐기는 사람을 이길 자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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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말
켄 로런스 지음, 이승열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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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각인된 그룹 비틀스의 멤버이자 'Imagine'이란 명곡을 남긴 가수 '존 레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고, 음악도 비틀스의 1~2개 명곡밖에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은 존 레논 입문서와 같았다. 각종 인터뷰나 공연장에서 뱉었던 수많은 말들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그를 두고 했던 말을 담은 이 책은 한 사람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자서전이다.

 

람들이 생각하는 존 레논은 내 안에 없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허상을 만들고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한다. 우리에게 와서 비틀스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비틀스의 허상에 대한 답이지, 진짜 우리에 대한 답은 아니다. 우리 네 사람이 일상적으로 서로를 대할 때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비틀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가끔 호텔 문을 나설 때면 이렇게 장난친다. "난 비틀스 1호 존! 그래! 비틀스 3호 조지. 자! 가자~!" 밖엔 비틀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그냥 장난삼아 그들이 원하는 비틀스로 변신해주는 거다. 코스프레를 하거나 가식을 떨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냥 우리인데, 사람들의 눈엔 비틀스만 보일 뿐이다. (p. 40)

 

거침없는 발언에 구설수에 여러 번 오르내렸던 그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한 당당함이 '존 레논'이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많은 팬과 후배 가수들이 그를 동경했다. 그가 가졌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평화다. 'Imagine'이 평화를 대표하는 곡으로 알려진 만큼, 그는 평화를 위해 평등과 자유를 주장했다. 직접적으로 나타낸 적은 없지만 여기 담긴 수많은 말들은 사람들이 '나다움'을 잃지 않길 바라고, 전쟁이 없는 세계를 꿈꾸었으면 한다.

 

뉴욕에서 존 레논을 만났다. 굉장한 대사건이었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논 아닌가. 존과 요코를 촬영하던 날, 긴장한 풋내기 사진작가인 나를 그는 편안하게 대해주었고, 그냥 '나 자신'이 되라고 말했다. 어떤 가식도 없는 솔직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일하라고. 인생에 대한 너무나 멋진 조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늘 '자신이 되는'법을 따라 살아왔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p. 229)

 

존 레논의 팬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무대 앞 관중들을 보며 가장 열정적인 팬은 "제일 앞줄에 있는 저분들이죠!"라고 말해주는데서 느낄 수 있다. 나도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가수가 팬들에게 해주는 말이 고맙다는 뭉클한 표현인 것을 알기에 그때 저 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천상 음악가 같다. 안타깝게도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이며 아버지이진 못했지만 '음악'이란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그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단 사실은 분명하다. 자신을 믿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싶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번역한 이승열이 그를 '안티 히어로'라 부르고 싶단 마음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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