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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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나를 위한 책을 고르는 일은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입은 책들이 일렬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보면 나도 이런 서가를 갖고 싶다는 로망이 생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사서 들여놓을 수는 없는 법! 이 중 단 몇 권의 책만이 선택된다. 면접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책과의 첫인상도 중요한 선택 조건이다.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건, 책 표지다. 책의 얼굴인 표지는 각양각색으로 겹치는 느낌이 없다. 그 해의 유행에 따라 몇몇 익숙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이 있긴 하지만 다수의 책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책의 얼굴을 만드는 사람을 우린 '북 디자이너'라 부른다. 그들은 책의 내용, 분위기와 느낌을 독자에게 와닿게 하기 위해 파주 어딘가에서 종이를 고르고, 시안을 만들고, 글자를 써본다. 그럼 이들은 어떤 일을 주로 하고, 디자인이란 예술적인 일을 어떻게 삶에 불어넣고 있을까? 책을 좋아하면서 저절로 출판에 관심이 많아진 터라 디자인이 세계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환상과 꿈을 안고 시작한 독서는 완독 후, 와장창 깨진 현실을 마주했다. 현직 디자이너가 말해주는 북 디자인의 현실은 '좋아하는 일이 생계가 된다면'이란 생각에 미쳤다. 완성도 높은 작업물을 위해 감수를 밤낮없이 하고, 편집자와 작가와 의견이 일치되는 디자인을 생각해야 한다. 때론 고생한 결과물이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의사처럼 고유의 영역에 아무나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게 진정한 전문직일 텐데, 북 디자인의 영역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개입한다. (p. 91)

 

 

디자이너마다 가치관과 색깔이 다르지만, 결국 책을 어떤 마음으로 책을 대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p. 215)

 

 

북 디자인은 개인의 개성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다. 책이 빛이라면 디자이너는 그림자다. 이들은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빛이 더 빛나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업물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수정사항이 오가고, 위축되는 출판시장에서 예산 문제에 직면한다. 디자인과 편집자, 마케터, 작가 각각은 고유한 영역을 지닌 전문직인데 서로가 손쉽게 개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조건에 부합하게끔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북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아쉬운 점이 있다. 북 디자인은 프로세스 자체가 폐쇄적이다. 때문에 디자이너 간의 소통이 많지 않다. 또래 디자이너나 선배들과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했지만, 우리가 만들고 있는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다. (p. 33)

 

 

다시 말해 완성도라는 것은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성취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에 부합하는 일련의 방법들을 찾아내고, 선택의 과정들이 지시하는 최선의 완결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다. (p. 47~48)

 

 

책에서 인터뷰 한 북디자이너들은 한 사람인 듯, 프로세스의 폐쇄성, 예산 및 소통 등의 문제를 똑같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책이란 매체에 어떻게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왔던 시행착오들과 B 컷들은 서랍 속에서 나 자신이 나태해졌을 때 또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때 다시 일으키는 마스터키였다.

 

내게 위기가 찾아온 시기는 작업의 한계를 느꼈을 때가 아니었다.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매일 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북 디자인은 나의 생계를 꾸리는 일이기도 했다. 매일 즐거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를 상대해야 했고, 때로 스스로를 구박하거나 자책하는 일을 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지치는 건 당연했다. (p. 340)

 

 

일이 그렇듯 경험을 하면서 겹겹이 쌓인 시간들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곧바로 빛을 발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나만의 무기가 되어 상상하고 펼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거기에 근성을 더한다면 진정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근성이라는 놈이 꼭 필요하다. 우리가 모두 천재는 아니므로. (p. 279)

 

내가 깨진 환상과 꿈은 처음 마주한 떨림과 기대, 설렘 같은 말랑말랑한 것들이다. 어느 일이든 말랑말랑한 감정이 깨져버리면 방황을 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일인지, 적성이란 무엇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디자이너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직업을 가져 몇 년간 일해본 선배가 건네는 직장생활지침서 같았다. 지금 포기하고 싶고, 버텨야 하나 싶고, 설령 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그건 앞으로 가치있게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환상을 가진 일도 생계를 꾸리는 일이다. 자책하며 울고 싶은 순간들이 그들도 있었을 것이다. 매일의 일이 재미있으면 그건 일이 아니란 말이 있다. 진부하고, 재미없고, 답답한 게 정말 일하고 있다는 순간이다. 내가 나를 영위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꿋꿋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우린 모두 천재가 아니기에 근성이란 놈이 꼭 필요하다는 마지막 말이 와닿는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억지로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다가 우왕좌왕하는 것보다는 지금 자신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해내가는 것이 마음을 소진시키지 않는 방법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좀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p. 342)

 

 

이들은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버티고 좋은 결과물을 내보이려 한다. 그렇게 꾸준한 성과를 내다보면 이 분야는 견고하게 자리 잡을 테니까. 그러니 후배인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면 된다. 자연스럽게 실수도 하고, 꾸중도 듣고, 눈물도 흘리면서. 북디자이너의 B컷이 자만했던 과거이며, 발전하고 수정해야 할 선명한 가르침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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