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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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 (p. 13)

 

어느 날, 해안가에 노인이 떠밀려 올라온다. 그 노인은 몇 년 전, 난민 아이와 겹쳐지며 소설이 앞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인 영국을 살아가는 엘리자베스는 브렉시트 이후에 벌어진 사회의 문제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경제뿐만이 아니라 거리에는 타국에서 온 사람들을 멸시하는 고성이 오가고 이웃을 경계하는 시민들의 모습이 자주 묘사된다. 찬성과 반대 어느 쪽도 확실히 우세하지 않았던 영국의 선언은 속았다는 떨떠름한 기분을 국민들에게 얹어줬다.

 

매일 아침 그녀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다. 그러면 어느 쪽에 투표했든 속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온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p. 256)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해 지나며 엘리자베스와 대니얼의 관계를 보여준다. 이웃을 인터뷰하라는 숙제를 받고 엘리자베스는 근처에 사는 노인 대니얼을 떠올린다. 하지만 그는 늙은 호모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그녀의 엄마 웬디는 둘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에 굴하지 않고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을 만나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차 예술과 삶, 가치관을 형성해 나간다. 장차 그녀가 미술강사로 자라게 된 건 대니얼의 영향이다. 그는 어린 소녀에게 다채로운 이야기보따리를 푼다. 정신적 교감을 나누어서일까. 엘리자베스는 그가 요양원에서 잠만 자도 매번 찾아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제 세상이 이미 있으니까요. 그냥 세상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진실이 있어요.

네 말은 그러니까 진실이 있고 그것의 가짜 버전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가짜를 듣고 산다는 거로구나. 대니얼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실재해요.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진실인 건 아니지. 대니얼이 말했다.

그건 초강도 헛소리에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낸단다. 대니얼이 말했다. 그러니까 늘 네 이야기의 집에 사람들을 반겨 맞으려고 해 보렴. 그게 내 제안이다. (p. 158)

 

어린 엘리자베스가 타인과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할 때, 그는 사람을 반기라는 말을 해준다. 엘리자베스가 누군가를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품게 해준 건, 대니얼의 힘이었다. 오히려 혐오와 분노가 주가 돼버린 차가운 세상 속에서 그래도 엘리자베스가 버티며 살아간 건, 그와의 우정 때문이다. 대니얼의 하루가 행복한 꿈만 꾸는 수면기였을 때도 그를 찾아가 매일 책을 읽어주고 병원 직원과 꽉 막힌 대화를 반복한 건, 이런 사회이기에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야.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조금 아는 이들이 우리를 제대로 보았기를 바라야 해. 다른 건 결국 별로 중요치 않아. 대니얼이 말했다. (p. 210)

 

엘리자베스 주변은 답답하다. 우체국에선 여권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다고 계속 반려하고, 이웃들은 늘 분노에 가득 차 있다. 성소수자와 여성을 혐오하고 난민 문제로 자국민이 아니면 "꺼져!"라고 길거리에서 냉혹하게 소리친다. 나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너도 나도 모두 인간이기에 고정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녀의 엄마가 대니얼을 호모라고 기피했지만 자신의 동성 연인이 생겨 사랑을 나눈 것처럼. ,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해 건너온 청년들의 재정 지원을 삭감한다는 발표가 나자 기압계를 울타리에 던진 것처럼. 전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변했으니까.

 

영국만이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을까? 난민 문제는 제주도에서 이미 현실이다. 여성 혐오는 강력한 목소리가 시작됐다. 성소수자들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람들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관료주의를 답답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서 조직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최악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불안한 현실에서 봇물 터지듯 공동체는 변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친애하는 대니 오빠, 문제는 결국 우리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보고, 할 수 있다면 또렷하게 볼 수 있을 때 절망하지 않고 가장 적절하게 대처하기로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야. 희망은 바로 그거야.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타인에게 하는 부정적인 행위들을 우리가 어떻게 다루느냐. 그것뿐이야. 그들도 우리처럼 모두 인간이라는 것을, 사악한 것이든 정당한 것이든 인간의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세상에 눈 깜짝할 순간만 머물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런데 그 눈 깜짝할 순간은 다정한 윙크일 수도 있고 자발적인 무지일 수도 있는데 자신이 두 가지다 가능한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해. 그리고 악이 턱까지 차 있다 해도 그 너머를 볼 준비를 해야 해.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친애하는 오빠의 따뜻하고 매혹적이고 쓸쓸한 영혼을 향해 직접 말하려고 해.) 시간, 우리의 시간이 아직 남아 있는 동안 그것을 허비하지 않는 거야." (p. 247)

 

속는 기분이 든다면 이 때문이 아닐까. 잊지 말아야 할 자명한 사실, 그건 우리가 혐오하는 대상도 인간이란 것이니까. <가을>이란 제목이 붙은 건, 마치 대니얼의 모습처럼 우리도 곧 시들해져 겨울이 될 것이란 생각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기에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옳고 그름의 선을 잘 구축해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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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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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밤, <스페인 하숙>을 보는 재미로 지낸다. '순례길'을 테마로 했던 예능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관심을 받게 만든 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부엔 까미노' 격려 인사를 건네는 프로그램 뒤엔 '왜 걷는가?'란 물음이 감춰져있다. 스페인 건축 전문가 김희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건축'이란 테마로 걷는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프랑스 길을 택해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까지는 황량한 대지 위에 세워진 건축물들의 유구한 역사적, 종교적 가치가 새겨져있다.

 

오늘날 파리가 매력적인 것은 순례길의 제로 포인트여서도 아니고,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중세와 근대의 아픈 역사를 사랑으로 감싸고 미래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파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게 좋다. (p. 51)

 

순례길은 여러 곳이 있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하는 길이 가장 유명하다. 파리하면 생각나는 에펠탑의 묵직함은 지난 시대를 묵묵히 견뎌온 역사의 실물이며,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역사를 말한다. 얼마 전, 불타버린 노트르담 대성당의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웅장하고 아름답던 풍채를 사진으로 나마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에게도 숭례문 화재라는 비슷한 아픔이 있었기에 시대를 대표하던 건축물의 소실은 상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축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쉬운 발길을 성벽 끝에 폐허로 남은 산 페드로 성당으로 옮겼다 (p. 97)

 

중세 시대 순례자들은 목숨을 걸고 길을 걸었다고 한다. 성당마다 그들을 위로하던 성모마리아는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보호자였다. 순례란 무엇일까? 소중한 것을 걸어 얻고자 했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평소에 걷지 않던 험준한 길을 걸어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간신히 몸을 뉘어 보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당은 그런 존재였던 것인가 생각해본다.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은 길이란 목적지로 현대인을 위로한다. 나는 걸을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지만 책으로나마 생생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어 그간의 기분이 환기된 듯하다. 순례길은 엄청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애초에 길을 걷는다고 나 자신이 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배운 건 걸으면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그 이외의 불필요한 생각을 잠재우는 일이다. 걸을 땐 걷는 것만이 중요하다. 내일의 숙제나 과제를 여기서 할 수도 없을뿐더러 당장 다음 알베르게에 도착하려면 바삐 내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박물관'이란 띠지 문구는 이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끝이 있지만 당장은 보이지 않는 길에는 오로지 '걷는 나' 그리고 지난 이들이 세운 영혼의 건축만이 남아있으니까. 소원을 빌며 돌탑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이들도 부족한 연장으로 돌을 깎아 자신의 영혼을 새겨 넣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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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흐려도 모든 것이 진했던
박정언 지음 / 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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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초년생, 취준생이라면 '나에게 잘 맞는 자리'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막상 꿈꾸던 자리에 있어도 생각했던 곳이 맞는지 자주 헷갈린다. 그녀는 기자 생활이 맞지 않아 10개월 만에 이직을 한다. 그런데 이직한 방송사는 얼마 가지 않아 파업을 한다. 마음을 좀 풀어도 될 것 같은 라디오국에서도 아날로그 매체인 라디오가 설자리를 고민한다.

 

행위는 지속될 때 빛을 발한다. 이 명제에는 '보통의 존재'들뿐 아니라, 보통을 넘어선 특별한 존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다. 오로지 지속될 때만이, 행위는 그 자신도 모르게 모습을 바꾸어가며 진화한다. 그러니 작은 가능성이라도 기대한다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다. 오늘도 내일도 계속해서 한다. 계속한다. (p. 29)

 

즐거운 일이 가득했을 때 우린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반면, 슬프고 힘들 때는 토로하고 싶은 곳이 없어 기록한다. 그녀에겐 스무 살부터 써온 일기가 있다. 이 책은 수년간 써온 그녀의 일기이고, 생의 기록이고 쓸모를 고민했던 사람의 고백이다. 그 안에는 권리를 되찾기 위해 길거리로 출근하는 방송국 사람들의 모습과 휑해진 방송국을 늘 깨끗이 청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식을 잃은 슬픔에 눈앞이 깜깜한 사람들을 취재해야 하는 기자가 있다. 나에게 좀 더 맞는 자리, 내가 필요한 자리라고 생각한 곳에서 삶의 균형이 흔들려버린 연출자가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과정은 나라는 자아와의 저울질이기도 했다. 때론 나를 내놓아야 하고, 몸을 사려야 했던 사람이 있다.

 

이상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선은 어디에 그어져 있을까. 경계선이 있다 해도 아마 몹시 흐릿해 알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든 자칫하면 밟을 수 있는, 흐리고 또 흔한 선, 삶이 우리를 살짝이라도 떠밀면 속절없이 넘어가게 되는. (p. 166)

 

삶에는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이상한 이분법이 존재한다. 마치 외줄 타기 장인처럼 한발 한발 맨바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곧두세워야 하는 순간이 끼어든다. 어색한 정장을 입고 출근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버텨야 할 이유가 있는지 생(生)과 자아실현이 고민이란 전쟁을 선포한다. 다들 잘만 일상을 보내는 것 같은데 나란 요란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어 내뱉는 한숨 속엔 매듭이 꽈악 묶여있다.

 

선택은 미래를 바꾸기도 하지만 과거를 새로 기억하게 합니다. 미래를 바꾼 대신 과거를 다시 쓸 수밖에 없는 것, 이것도 선택의 대가 중 하나인 걸까요. (p. 114)

 

다시 돌아가서 그녀가 사회 초년생 때 했던 고민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대신 삶의 목소리를 포착하고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은 어색함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익숙함으로 덮여졌다. 쓸모를 찾아 떠난 자잘한 기록들이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는 많은 파도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내 자리를 찾는 길라잡이가 되었다.

 

소리의 세계에 귀를 열고나니, 그건 세상을 얼마나 시각 중심으로 살아왔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소음이라고만 여겼던 소리 안에도 이야기가 숨어 있었고, 눈을 감고 소리만 들었을 때 더 잘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관계 같은 것들이 그랬다. 대부분 어떻게 '보이는지'에 신경을 쓰다보니 어떻게 '들리는지'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때로는 소리야말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양상, 그리고 또 원하는 세상의 모습을 가장 원초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p. 17)

 

여러 자리에 있었기에 볼 수 있던 풍경은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평온하기만 하면 아무도 뒤돌아 보지 않을까 봐 이리도 소란스러운가 보다. 나는 여전히 내 쓸모를 증명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언젠가 알아서 알아봐 주고 믿고 맡길 수 있는, 내가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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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조금씩 너만의 시간을 살아가
유지별이 지음 / 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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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폴리오에 자신의 학창시절을 그려나간 '유지별이'의 이야기는 교복을 입었던 그 시절을 회상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없는 흰 도화지에 나와 어울리는 색을 고르고 칠해야 했던 아마추어 화가와 같았던 열아홉과 스물. 이젠 교복과 멀어진지 햇수로 6년이 돼가고 성인이 되는 12시를 기다리던 순수함은 까마득해졌지만, 막 성인이 되어 푸르른 나날을 보내는 그녀의 글과 그림을 보니 '그래 우린 모두 저렇게나 설익었구나' 싶다.

 

 

'열아홉의 꿈과 스무 살의 낭만'은 오직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다. 당장 눈앞의 시험과 대학이,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잠과 싸우며 공부했던 나날들은 어린 나에게 벅차기만 해서 무너지기만 했다. 학교는 답답했고 노력만큼 결과가 뒤따라오지 못해 눈물을 자주 흘리고 감상에 쉬이 젖는 만큼 우울해지던 폭풍우 같은 시절이 그리워질 줄이야.

 

 

"자, 일어나자."

잠을 깨우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나른한 봄기운에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

또박또박, 시 한 구절을 적어나가는 칠판 위 분필 소리가

책상 위로 흐르는 구름 조각에 덧씌워지자,

괜스레 푸른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선생님,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엔 나가게 해주세요.


p. 56 '마음은 창밖에' 中

 

삐걱거리던 의자와 큰 몸집에 비해 너무 작기만 했던 책상,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 사이를 오가며 떠들고 웃고 했던 10분간의 휴식시간,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짐을 챙겨 튀어 나가던 그 와중에 밥 친구들을 만나 같이 줄을 서고 일주일치 메뉴를 암기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하루하루. 그녀의 일상을 보니 누구보다 이 순간이 빛났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정말 사소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했는데, 결국 추억하는 작은 조각으로 남아 그리워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아침에 영어 단어 외우며 한 모금.

점심에 밀려오는 잠 깨려고 한 모금.

저녁에 틀린 문제 복습하며 한 모금.

그리고 온몸에 남은 커피 향기

p. 138 '커피로 이겨낸 하루' 中


 

그때는 자도 자도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서 커피를 달고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사물함에 책이 아닌 믹스커피 한 박스와 각종 봉지 커피를 채워두고 등교해서 한 잔, 졸린 친구를 위해 한 잔, 내가 졸려서 한잔 이렇게 물 마시듯 먹었던 것.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카페 차렸다고 했을 정도로 고3에게 커피는 글자 하나라도 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이런 사소하지만 만연했던 생활습관을 그린 일기가 2013년도로 나를 데려간다.

 

 

예를 들면, 점심 급식을 먹고 잠시 햇살에 몸을 맡겨 친구들과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걷고, 빵과 주먹밥을 먹겠다고 담을 넘어 코앞에 마트를 가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독서실에 있던 친구들과 함께 야자를 땡땡이치다 걸려 선생님에 잡히지 않으려 미친 듯이 달리던 구체적인 상황으로 말이다.

 

 

 

늘 듣던 노래들이 지겨워질 때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어느새 도착한 익숙한 길을 따라

조용히 바닥을 보며 걸었다.

평소엔 잊고 살던 고요 속에는

저녁이 밤으로 짙어지는 소리와

나의 무력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남색 수채화 물감이 떨어진 듯

어둠이 퍼져가는 밤하늘 언저리에

별똥별 하나가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있지, 난 네가 부러워.

이곳에 닿기 위해 스스로를 태울 만큼 그렇게 열정을 쏟는 게.

p. 38 '별똥별이 부러워' 中

 

이때만큼 열심히 하던 때는 없는 것 같다. 공부도 꿈도 열정도 미래도 다 열심히였다. 그러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이 붙자 열정의 총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간절하지 않은지 되묻는 횟수가 늘어간다. 이 글과 그림을 보면서 야자가 끝나고 걸어가던 밤거리가 생각났다. 어둑한 골목길에서 내뱉던 한숨, 우연히 올려다 본 새까만 하늘이 얼마나 나 같던지..... .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모든 게 내려다보일 때.

고요한 바다의 반짝임처럼

세상이 빛나 보일 때.

그 순간의 알 수 없는 감정은 바람이 되어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흘러들어

주변을 수채화로 물들였다.

p.81 '수채화처럼' 中

 

유지별이의 그림을 보며 관찰하는 힘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고민하고 힘들 때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힘들어도 기록해두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게 보였다. 감상하면서 영화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 만나던 하늘 배경이 그림에서 보였다. 하늘은 항상 파랗지 않다.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주황색, 흰색 등등 시간대마다 다른 빛과 색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걸 계속 보았다. 바빠도 주변의 색을 눈에 가득 담으려 했을 것이다. 봄을 기다리며, 졸업과 입학을 기다리며,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가장 외롭고 우울하고 견디기 힘든 열아홉, 스물이었다. 그리워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보니 찬란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니까 힘들었다. 확실하지 않아서 그게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지 못했던 때다. 그럼에도 이렇게 담아둔 곳곳의 나날은 아마 후에 나를 위한 선물이 될 것이다. 그녀가 그린 글과 그림이 누군가에게 활력소가 될 테다. 그녀의 그림에서 그런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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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집을 하시겠습니까 - 가고 싶은 카페에는 좋은 커피가 있다
구대회 지음 / 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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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창업하면 가장 선호하는 종류는 카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거리 곳곳마다 신상 카페가 보일 정도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김치 다음으로 많이 먹는 것이 커피라지만 이 정도로 커피에 대한 소비가 늘었나 싶을 때가 있다. 한 번쯤 낭만적인 상상으로 '카페에서 일하는 나'를 떠올릴 때가 있다. 그 안에는 '나만의 공간'이란 의미가 부여된다. 직접 경험해보는 것과 상상과는 괴리가 있듯 로망 있는 직업은 바리스타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구대회 바리스타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 세계로 커피 여행을 다녀온 후, 주택가에 작은 카페를 오픈한다. 로스팅을 직접 할 정도로 실력을 갖춘 그는 각종 강연과 심사위원, 커피에 관한 글 투고까지 아주 바쁘게 커피에 대한 애정을 쏟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은 '무조건 맛있는 커피'. 아무리 SNS로 이쁜 인테리어와 보기 좋은 음료 사진 흘러넘쳐도 결국 맛으로 판가름이 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번화가가 아닌 위치에 카페가 자리해 있단 점과 좁은 공간 때문에 생각처럼 사람이 모이지 않자 그는 품질은 그대로 유지한 채, 1000원 아메리카노라는 파격적인 가격 인하를 단행한다. 커피는 많이 팔면 이윤이 남기 때문에 사람들이 싼 가격에 맛있는 커피를 먹으면 이를 계속 찾는 충성고객이 될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가성비 좋은 커피는 먼 곳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인기를 끈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지만, 이 카페 안은 느리게 움직여요. 세상에서 상처받고 지친 사람들이 이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내 커피로 치유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손님이 있으면 마감 시간이 넘어도 손님이 떠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p. 87)

 

그가 이렇게 생각하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건, 일본에서 핸드드립을 시연하는 여행을 다닌 것이다. 위 말은 그렇게 방문했던 카페의 주인장이 한 말이다. 일을 하기 위해 마시고, 휴식 시간의 여유를 느끼기 위해 마시고, 맛을 음미하기 위해 마시는 커피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녹아있다. 카페를 가는 이유는 머무르기 위해서이다. 머무르며 대화를 하고, 책을 읽고, 창밖을 바라보기도 하며 지친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선다. 이러한 특성을 아는 주인이라면 손님들은 그 카페의 단골이 될 것이다.

 

카페 창업에 관심 있다면 커피를 좋아해서 바리스타를 꿈꾼다면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창업에 필요한 요소들도 잘 정리되어 있다. '설마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싶었던 부분도 있다. 상표권이 그 예였는데 나는 상표를 출원하는 비용이 몇십만 원이 드는 줄 몰랐다. 좋은 원두를 고르는 법과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 등도 아낌없이 풀어내니 나도 그동안 가려운 부분이 싸악 사라졌다. 좋은 커피를 만들고 마시고 싶은 마음이 이뤄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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