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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순례길이다 - 지친 영혼의 위로,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김희곤 지음 / 오브제 / 2019년 4월
평점 :
매주 금요일 밤, <스페인 하숙>을 보는 재미로 지낸다. '순례길'을 테마로 했던 예능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가장 많은 관심을 받게 만든 건 처음이 아닐까 싶다. 알베르게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부엔 까미노' 격려 인사를 건네는 프로그램 뒤엔 '왜 걷는가?'란 물음이 감춰져있다. 스페인 건축 전문가 김희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건축'이란 테마로 걷는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걷는 프랑스 길을 택해 최종 목적지인 산티아고 대성당까지는 황량한 대지 위에 세워진 건축물들의 유구한 역사적, 종교적 가치가 새겨져있다.
오늘날 파리가 매력적인 것은 순례길의 제로 포인트여서도 아니고, 단순히 아름답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중세와 근대의 아픈 역사를 사랑으로 감싸고 미래로 묵묵히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파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는 게 좋다. (p. 51)
순례길은 여러 곳이 있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하는 길이 가장 유명하다. 파리하면 생각나는 에펠탑의 묵직함은 지난 시대를 묵묵히 견뎌온 역사의 실물이며, 앞으로 지켜나가야 할 역사를 말한다. 얼마 전, 불타버린 노트르담 대성당의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웅장하고 아름답던 풍채를 사진으로 나마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에게도 숭례문 화재라는 비슷한 아픔이 있었기에 시대를 대표하던 건축물의 소실은 상실임을 알 수 있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축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아쉬운 발길을 성벽 끝에 폐허로 남은 산 페드로 성당으로 옮겼다 (p. 97)
중세 시대 순례자들은 목숨을 걸고 길을 걸었다고 한다. 성당마다 그들을 위로하던 성모마리아는 지친 심신을 어루만지는 보호자였다. 순례란 무엇일까? 소중한 것을 걸어 얻고자 했던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평소에 걷지 않던 험준한 길을 걸어 도착한 알베르게에서 간신히 몸을 뉘어 보는 것처럼 그들에게도 성당은 그런 존재였던 것인가 생각해본다.
대성당에서 대성당까지, 인간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 세워진 건축물은 길이란 목적지로 현대인을 위로한다. 나는 걸을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지만 책으로나마 생생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어 그간의 기분이 환기된 듯하다. 순례길은 엄청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고 들었다. 애초에 길을 걷는다고 나 자신이 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 다만, 그들이 배운 건 걸으면서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그 이외의 불필요한 생각을 잠재우는 일이다. 걸을 땐 걷는 것만이 중요하다. 내일의 숙제나 과제를 여기서 할 수도 없을뿐더러 당장 다음 알베르게에 도착하려면 바삐 내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가장 길고 아름다운 박물관'이란 띠지 문구는 이래서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끝이 있지만 당장은 보이지 않는 길에는 오로지 '걷는 나' 그리고 지난 이들이 세운 영혼의 건축만이 남아있으니까. 소원을 빌며 돌탑을 차곡차곡 쌓는 것처럼 이들도 부족한 연장으로 돌을 깎아 자신의 영혼을 새겨 넣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