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조금씩 너만의 시간을 살아가
유지별이 지음 / 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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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폴리오에 자신의 학창시절을 그려나간 '유지별이'의 이야기는 교복을 입었던 그 시절을 회상하게 만든다. 아무것도 없는 흰 도화지에 나와 어울리는 색을 고르고 칠해야 했던 아마추어 화가와 같았던 열아홉과 스물. 이젠 교복과 멀어진지 햇수로 6년이 돼가고 성인이 되는 12시를 기다리던 순수함은 까마득해졌지만, 막 성인이 되어 푸르른 나날을 보내는 그녀의 글과 그림을 보니 '그래 우린 모두 저렇게나 설익었구나' 싶다.

 

 

'열아홉의 꿈과 스무 살의 낭만'은 오직 그 당시에만 느낄 수 있다. 당장 눈앞의 시험과 대학이, 하루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잠과 싸우며 공부했던 나날들은 어린 나에게 벅차기만 해서 무너지기만 했다. 학교는 답답했고 노력만큼 결과가 뒤따라오지 못해 눈물을 자주 흘리고 감상에 쉬이 젖는 만큼 우울해지던 폭풍우 같은 시절이 그리워질 줄이야.

 

 

"자, 일어나자."

잠을 깨우는 선생님의 목소리와

나른한 봄기운에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

또박또박, 시 한 구절을 적어나가는 칠판 위 분필 소리가

책상 위로 흐르는 구름 조각에 덧씌워지자,

괜스레 푸른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선생님,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엔 나가게 해주세요.


p. 56 '마음은 창밖에' 中

 

삐걱거리던 의자와 큰 몸집에 비해 너무 작기만 했던 책상, 다닥다닥 붙어있는 책상 사이를 오가며 떠들고 웃고 했던 10분간의 휴식시간,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짐을 챙겨 튀어 나가던 그 와중에 밥 친구들을 만나 같이 줄을 서고 일주일치 메뉴를 암기하는 게 가장 중요했던 하루하루. 그녀의 일상을 보니 누구보다 이 순간이 빛났구나 하는 걸 깨닫는다. 정말 사소하고 고리타분하기만 했는데, 결국 추억하는 작은 조각으로 남아 그리워하게 될 줄 알았겠는가.

 

 

 

 

 

 

 

아침에 영어 단어 외우며 한 모금.

점심에 밀려오는 잠 깨려고 한 모금.

저녁에 틀린 문제 복습하며 한 모금.

그리고 온몸에 남은 커피 향기

p. 138 '커피로 이겨낸 하루' 中


 

그때는 자도 자도 피곤하고 눈꺼풀이 무거워서 커피를 달고 살았다. 가장 기억에 남은 건, 사물함에 책이 아닌 믹스커피 한 박스와 각종 봉지 커피를 채워두고 등교해서 한 잔, 졸린 친구를 위해 한 잔, 내가 졸려서 한잔 이렇게 물 마시듯 먹었던 것.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카페 차렸다고 했을 정도로 고3에게 커피는 글자 하나라도 보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이런 사소하지만 만연했던 생활습관을 그린 일기가 2013년도로 나를 데려간다.

 

 

예를 들면, 점심 급식을 먹고 잠시 햇살에 몸을 맡겨 친구들과 운동장 트랙을 한 바퀴 걷고, 빵과 주먹밥을 먹겠다고 담을 넘어 코앞에 마트를 가고,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독서실에 있던 친구들과 함께 야자를 땡땡이치다 걸려 선생님에 잡히지 않으려 미친 듯이 달리던 구체적인 상황으로 말이다.

 

 

 

늘 듣던 노래들이 지겨워질 때쯤,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어느새 도착한 익숙한 길을 따라

조용히 바닥을 보며 걸었다.

평소엔 잊고 살던 고요 속에는

저녁이 밤으로 짙어지는 소리와

나의 무력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저 멀리-

남색 수채화 물감이 떨어진 듯

어둠이 퍼져가는 밤하늘 언저리에

별똥별 하나가 아쉬움을 남기고 사라졌다.

있지, 난 네가 부러워.

이곳에 닿기 위해 스스로를 태울 만큼 그렇게 열정을 쏟는 게.

p. 38 '별똥별이 부러워' 中

 

이때만큼 열심히 하던 때는 없는 것 같다. 공부도 꿈도 열정도 미래도 다 열심히였다. 그러다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이 붙자 열정의 총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간절하지 않은지 되묻는 횟수가 늘어간다. 이 글과 그림을 보면서 야자가 끝나고 걸어가던 밤거리가 생각났다. 어둑한 골목길에서 내뱉던 한숨, 우연히 올려다 본 새까만 하늘이 얼마나 나 같던지..... .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모든 게 내려다보일 때.

고요한 바다의 반짝임처럼

세상이 빛나 보일 때.

그 순간의 알 수 없는 감정은 바람이 되어

반복되는 일상 속으로 흘러들어

주변을 수채화로 물들였다.

p.81 '수채화처럼' 中

 

유지별이의 그림을 보며 관찰하는 힘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고민하고 힘들 때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고 하는데 힘들어도 기록해두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다는 게 보였다. 감상하면서 영화 <너의 이름은>이 떠올랐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 만나던 하늘 배경이 그림에서 보였다. 하늘은 항상 파랗지 않다. 분홍색, 보라색, 노란색, 주황색, 흰색 등등 시간대마다 다른 빛과 색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걸 계속 보았다. 바빠도 주변의 색을 눈에 가득 담으려 했을 것이다. 봄을 기다리며, 졸업과 입학을 기다리며, 기다려야 볼 수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었을 것이다.

 

 

나는 가장 외롭고 우울하고 견디기 힘든 열아홉, 스물이었다. 그리워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돌아보니 찬란했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느끼지 못했으니까 힘들었다. 확실하지 않아서 그게 당연한 것임을 인정하지 못했던 때다. 그럼에도 이렇게 담아둔 곳곳의 나날은 아마 후에 나를 위한 선물이 될 것이다. 그녀가 그린 글과 그림이 누군가에게 활력소가 될 테다. 그녀의 그림에서 그런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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