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은모든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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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영화 『미 비포 유』를 다시 봤다. 존엄사를 다루는 두 작품은 죽음을 결심한 당사자와 가족의 심경을 대변한다. 어느 한 쪽이 맞고, 틀리다가 아니라 두 입장 모두 존중할 필요가 있고, '생명'이란 테두리 내에서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기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안락은 10년 후, 한국에서 존엄사가 합법화된 상황이라는 가정하에 진행된다. 지혜의 할머니는 5년 후 죽겠다는 선언을 가족들에게 하신 후, 천천히 자신의 삶을 정리해 나간다. 하지만 가족들 내에서도 찬반의 양상은 뚜렷하고 특히, 지혜의 어머니는 이를 결코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직 정정한 엄마가 몇 년 후에 죽겠다니 딸의 입장은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인 거다.

 

할머니라고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마감하는 결정이 쉬운 결정이었을까? 아니다.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노인이 되었고 몸은 여기저기서 삐거덕 소리를 낸다. 이제 자신의 몸은 병원을 다니며 생명을 연장시키는 방법밖에 없기에 허탈함과 지난날의 무상함이 겹쳐 오셨을 테다. 자신을 간호하며 병수발을 들 자식들의 미래가 뻔히 내다보이기에, 그 꼴은 절대로 보기 싫어서 하루라도 건강할 때, 삶을 돌아보며 마지막 인생계획을 세운다.

 

할머니의 죽음이 어떤 느낌일지 처음으로 실감해본 순간은 지혜가 수면내시경을 받는 장면이었다. 지혜는 할머니의 입장을 존중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수면내시경을 했던 단 몇 분간의 기억이 삭제되어 기억나지 않자, 할머니의 죽음도 이런 것일까 실감한다. 주삿바늘을 뽑으며 난동 부렸던 순간조차도 전혀 머릿속에 없는데, 할머니의 마지막 기억도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일까 봐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끼며 눈물을 보인다.

 

내가 뭘 잘한 게 있다고 여전히 저토록 깍듯한 어투로 얘기해주는지, 간호사의 변함없는 친절에 나는 감탄했다. 또한 그가 말한 일들이 전혀 기억이 없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내 몸속으로, 내장 기관 안쪽 깊숙한 곳까지 카메라를 단 호스가 들어간 일도, 그게 겁난다고 혈관에 꽂은 주삿바늘을 뽑아내며 사방에 핏방울이 튀도록 한 만행까지도 깨끗하게 기억이 없다니.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조금도 기억하지 못할까. 할머니가 맞이하는 죽음이란 이렇게 고통도 기억도 일순간에 지워지는 과정인 것일까. 그럼 그다음은 어떤 게 기다리고 있을까. 몽롱한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 건물을 빠져나오는데 찔끔 눈물이 났다. (p. 98)

 

소중한 사람을 잃는 고통을 알면, 쉽게 웃을 수 없다. 『미 비포 유』에서 윌은 사지가 마비되어 어느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자신은 진짜 내가 아니라서 불행하기에, 불행한 자신을 보는 사람도 불행해질 걸 알기 때문에 선택을 한다. 사람은 몸이 아프면 저절로 최악을 생각한다. 숨만 쉰다고 살아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하나라도 스스로 할 수 있고, 그걸 바탕으로 삶을 일궈나갈 수 있을 때, 그게 사는 게 되어 희망을 찾아볼 수 있는 원동력을 부여한다. 할머니가 이와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은 독한 약들과 싸우다 지쳐 간신히 숨만 붙어 있기보단, 마지막 가는 길은 내가 할 수 있을 때 충분히 삶을 돌아보고 정진하고 즐기다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후회 없이 살다 가기 위해 노력하셨으니 마지막 가는 길에 미소를 지으시지 않았을까.

 

나의 할머니 이금래 씨. 할머니는 오 남매 중 셋째로 태어나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집안일을 도왔고, 유년시절 내내 동생들을 건사하느라 분주했다. 열아홉에 가정을 이룬 뒤에는 세 자매를 키우면서 시어머니의 식당 일을 돕느라,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는 시가의 식당에서 독립해 차린 밥집을 운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또한 여든을 넘기고 가게 일에서 물러난 뒤에는 곳곳에 탈이 나는 자신의 몸을 돌보느라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순간, 할머니의 표정은 편안했다. '개운하게 가겠다'라던 결심이 그대로 이루어진 듯 모든 짐을 내려놓고 떠나는 할머니의 입 끝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p. 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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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너라는 계절 - 한가람 에세이
한가람 지음 / 북로그컴퍼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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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면 못해도 사계절은 같이 지지고 볶아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들었다. 과연 한 해를 그 사람과 지냈다고 해서 모든 것을 서로 알 수 있는 막역한 사이일까? 주변에 오랜 사랑을 하는 친구들이 많지만 하나같이 여전히 모르겠고, 사랑이 식어간다고 말한다. 결국 시간이란 사랑의 단물을 빼먹는 괴물인가 싶다.

한가람 작가님은 매일 같이 사랑을 했다. 짝사랑, 어긋난 사랑, 썸, 차인 사랑, 찬 사랑 등 온갖 종류의 사랑이 그녀를 스쳐갔다. 바람처럼 휙, 가버린 마음은 태풍처럼 커지고 나서야 사랑이라고 말했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능숙해지긴커녕 더욱 바보 같아지는 것만 같아서 이렇게 글로 적어내려간다. '넌 그런 내 맘 알기는 했니?'라고.

 

너는 나의 여름이었지. 너무 덥고 짜증이 났었는데 도무지 잊히지 않는. 내 생애 그런 여름은 오직 너뿐이었어. 더 이상 내 계절에 여름은 없어. 없어졌어. 네가 나의 유일한 여름. 헤어지는 것밖에 방법이 없던 나의 유일한 여름. 괜찮아. 난 뜨거운 건 너뿐이면 족하니까. 참, 나, 인생의 책이 바뀌었어. 좋아하는 색깔도, 음식도. 여름이 그렇지 뭐. 이리 지나가버리면 그만인걸. (p. 109)

 

이상기후가 종종 생기면서 여름에 눈이 오기도 하고 겨울에 한여름의 무더위가 찾아오기도 했던 2018년의 어느 날처럼 기억되는 계절의 한 조각, 그건 바로 너란 사람 때문이었다. 서로의 마음이 작열하는 하는 태양이었는데 냉수를 확 끼얹은 상태가 돼버렸다. 긴 연애도, 짧은 연애도 결국 이별 앞에선 주저앉게 된다. 덜 하고, 더 한 고통은 없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진다는 걸 알면서도 이리 지나가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었던 남이 돼버릴 테니까.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랑받고 싶은 간절함은 구석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엄마에게 칭얼대던 어린아이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사랑은 금방 잊는다. 쉽게 지워졌다가 사랑 같은 유치한 짓 다신 안 한다고 큰소리칠 때 다가온다.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시작하는 건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라 못난 내가 괜찮아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은 용기 있는 자들이다. 글을 읽다 보니 계속해서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무한한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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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단어들
에피톤 프로젝트 (Epitone Project) 지음 / 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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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톤 프로젝트의 <새벽녘>이란 곡을 좋아한다.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라 함께 했던 시간의 눈물들은 어느샌가 너의 모습이 되어 잘 지냈었나고 물어보네'라는 가사가 놓쳐버린 것들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노래 속엔 노랫말이 살아 숨 쉰다. 음악을 만드는 입장은 잘 모르나, 그의 생각들이 나열된 책을 읽으니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어하는 한 사람의 간절한 열망이 느껴진다.

바쁘게 살다 보니 '나'를 잊은 것 같았다는 그는 힘들어 지친 사람들에게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간 가사를 목소리로 말한다. 완성도 높은 음악을 위한 고민, 끝없는 여행을 통해 돌아보는 자신의 마음, 무대에 올라갈 때마다 드는 생각들이 돋보기를 댄 듯 훤히 보인다. 그 속엔 가사의 탄생이 있고, 멜로디의 느낌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음악이 아니라 연구하면서 얻어낸 진심이다.

 

음악가는 진심을 전해야 한다. 나는 음악가이고, 그러므로 나는 진심을 전해야 한다.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나의 명제. 오늘도 나는 노래를 만든다.
그리고 진심을 담는다. (p. 194)

 

목소리로 말하는 사람에겐 청중들이 모르는 고충이 있었다. 프로 세계에서 아마추어가 되지 않기 위한 끝없는 고뇌, 좋아하는 일이 괴로운 일이 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이 그러하다. '내가 좋아하던 노래가 이런 비화가 있었구나', '그의 마음속의 단어들은 이랬구나' 알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도 마음을 무시하지 말고 이렇게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쓰다만 일기 같아도 타인이 보여주면 일상이 특별해지니까.

 

내 마음속의 어떤 단어들이 나를 즐겁게 하고, 슬프게 하고, 웃게 하고, 괴롭게 하는지 문득 내 마음의 모양이 궁금해졌다. 내가 더 즐겁고, 전보다 더 많이 웃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슬프지 않고, 괴롭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혹 나의 뾰족한 마음이 누군가를 슬프게 하거나 괴롭히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이제는 조금 무뎌진 건지·····.

꽤나 긴 꿈을 꾸었다. 그 안에서 많은 멜로디들은 찾고 듣고 적었다.
이제 나는 글을 쓴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지우고 고쳐 쓴 마음속의 단어들을.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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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가장 긴 밤
이석원 지음 / 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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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질문을 한 적 있다. "내가 너무 나약한 건가?" 나는 "아니 배우는 과정인데 그 길이 순탄치 않은 거뿐이야."라고 답했다. 그 친구의 질문은 올해 가장 내가 나에게 많이 한 질문이었고 내가 그녀에게 건넨 대답은 역시 나를 위해 해주고픈 말이었다. 삶을 가꾸어 나가면서 예쁜 꽃밭만 거닐기는 힘들다. 가시밭길이 더 잔혹하게 펼쳐져 있는 경우가 많다. 사회가 나에게만 가혹한 거 아니냐고 울고 싶을 정도로 힘들 날이 틈틈이 있다면 이석원 작가님은 유독 짙고 길게 이어지는 느낌이다.

『보통의 존재』, 『언제 들어도 좋은 말』까지 그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힘들다고 적어내려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든 살아내 보겠다고 밧줄을 단단히 잡는 힘이 느껴진다. 이번 책도 걸을 수 없는 몸 상태로 글을 썼다. 글을 써서 부모님께 용돈도 드리고, 자신의 생활도 영위해야 하니까. 그에게서 이제 담담함이 느껴진다.  

 

잡힐 듯 잡히지 않으며 내 뜻과는 상관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살면서 맞닥뜨리는 무수한 어긋남. 하지만 괜찮다고. 왜냐하면 삶이란 그럴 수 있는 거니까. 모두가 같은 걸 누리면서 사는 건 아니니까라고. (p. 26)

 

이번 책에서도 그의 주변 인물 간의 관계가 드러난다. 무례한 사람들, 뜻밖의 위로를 준 사람들, 오해였던 사이가 우정으로 변하는 기적까지 사람이란 국가를 여행하며 몸과 마음 곳곳에 체취란 도장을 꾹 찍었다. 이것이 다인가 싶은 관계들이 있다. 설마가 사실이 될 때만큼 공허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돈과 명예보다 주변에 어떤 사람이 모이고 영향을 주는지가 운을 좌지우지한다. 그래서 인복은 가장 큰 복이라고 하나보다.

 

어쩌면 삶 전체를 통틀어 좋게좋게 웃음과 예의로서만 대해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이 공허한 인간관계에서, 나로 하여금 솔직함을 이끌어 내줄 수 있는 사람,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는 이를 만난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이고 행운이지를. (p. 39)

 

이번에는 이기주 작가님의 느낌도 느껴졌었는데 아마 어머니에 대한 글이 많아서 그랬던 것 같다. 인간관계를 이야기하면서 가족과의 관계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에게 어머니는 손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챙겨드려야 할 것 같은 사람이다. 성인이 되고, 스스로 삶을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자꾸 기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그가 아플 때, 손발이 되어 그를 보살폈던 그녀는 자식이 낫자 그제서야 제대로 아파한다. 부모란 으레 그래야 한다는 듯 별거 아니란 듯이.

 

그래서 관계란, 특히나 가족이라는 이 떨쳐버리기 힘들고, 어디 비교할 곳 없이 특수한 사이는 노력이 계속 필요하다. 정말 계에속. (p. 124)

 

철륜으로 이어진 관계라지만 결국 독립된 하나하나의 사람이다. 그렇기에 서로 이해 못 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한다. 이는 '내가 당신을 잘 알고 있다'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시작되기에 가장 금해야 한다. 단정을 지으면 나는 좁은 시야로 당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직 철이 덜든 자식은 시야를 넓히기 어렵다. 그의 글을 읽으며 나도 계속 어머니를 생각했다. 자주 물건을 어디 두었는지 까먹으시고, 체력적으로 힘들어 잠이 많아지시고, 종종 먼 산을 바라보는 그녀가 눈에 밟힌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관계는 엇갈려 갈 테다. 보살핌의 대상이 뒤바뀔거다. 그때마다 이 문장을 되새길 것 같다. 조금이라도 이해한 단어가 가닿을 수 있도록.

 

어차피 당사자가 아닌 한 이해라는 행위에 한계는 있겠지만, 그렇다 해도 때로는 단정 짓지 말라는 사람들의 단정이, 누군가에겐 그 어떤 단정보다도 더한 단정으로 와닿을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일까. (p. 263)

 

이해라는 행위가 한계가 아닌 확장이 되길 빈다. 그가 쓴 이야기도 모두 이해하는 삶이길 바라서가 아닐까. 이해하고 이해받는 과정이 당연시되어 관계 때문에 험담하지 않는 시간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 삶은 누구에게나 외로운 싸움이기에 맞잡을 수 있는 손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렇게 좀 더 화사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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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여자의 사랑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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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알고 있어요. 공평해 보이지 않겠죠. 하지만 인생이란 게 원래 공평하지 않은 거니까
그쪽도 그 사실에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거예요."


최은영 작가님이 말한 것처럼 호감도, 감정 이입도 되지 않는 여주인공이란 말에 동의한다. 많은 단편 중 『자식들은 안 보내』 란 작품밖에 못 읽었지만 말이다. 불공평한 것을 알면서도, 힘들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바꾸려 노력하지 않는다. 폴린은 지금 칭얼대는 어린 소녀들을 신경 쓰기 바쁘고, 시부모님과 남편의 눈 밖에 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렇게 습관처럼 평범한 나날이라 느껴왔으니까.

그녀가 제프리와 바람을 피운 건, 처음으로 해본 능동적인 일이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수 있고, 심하면 자식들조차 그녀를 멀리할 수 있단 사실을 알면서도 찾아온 사랑에 직접 달려간다. 결국 브라이언에게 '자식들은 안 보내' 매정한 말을 듣고 그녀가 얻은 건, 자유였을까?

제프리와의 인연은 길지 않았음을 뒤에서 예측해 볼 수 있다. 성인이 된 딸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행이라 느껴졌던 것은 담담해진 폴린의 태도였다. 독박 육아를 감당하면서도, 시부모의 지적을 들으면서도 그저 주어진 일이니 행하는 무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지만 애써 붙잡지 않으려는 초연한 모습이 보기 좋았다.

평범함 속엔 익숙한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 찐득하게 달라붙은 껌처럼 쉽게 떼지지 않고 끈적함을 남긴다. 내가 폴린에게 느꼈던 찝찝함은 그런 종류였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느꼈던 감정이었다. 훅 치고 들어오는 말과 행동, 각종 사건들 앞에서 내가 '그런 식으로 대하지 마세요'라고 해본 적이 있었던가. 충격에 잠시 황당해서 입을 떼지 못했다.


이건 극심한 고통이다. 만성적인 고통이 될 것이다. 만성적이라는 말은 영원하긴 하지만 한결같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벗어날 수는 없어도, 그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매 순간 느끼지는 않겠지만, 고통 없는 상태가 여러 날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고통을 감내하면서까지 얻은 그것은 파국으로 몰아가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그 고통을 무디게 하거나 유배시키는 요령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이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순진무구하거나 미개하여, 이 세상에 이렇게 오래가는 고통이 있다는 걸 모른다. 혼자 되뇌어라. 어차피 아이들은 언젠가는 떠난다고. 아이들은 자란다고. 엄마라는 존재 앞에는 늘 이렇게 혼자 겪어야 하는 조금은 어리석은 고적감이 기다리고 있다고. 아이들은 이 시간을 잊을 테고, 어떤 식으로든 당신과 결별할 것이다. 아니면 뭘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모르는 순간까지 당신 주변에 머물 것이다. 브라이언이 그랬던 것처럼.


그럼에도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 그 일이 그저 가슴 아픈 과거로만 남고 더는 현재의 것이 될 수 없을 때까지 그걸 끌어안고 살면서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 (p. 61~62)


'착한 여자'란 프레임안에는 수동성이 내포되어 있다. 고통의 현실은 반복된다. 벗어나려 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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