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 나와 세상을 마주하기 위한 365개의 물음
다나카 미치 지음, 배윤지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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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았다. 묵은 상념은 과거에 던져두고 새 마음으로 갈아입는다. 방 정리도 해본다. 이렇게 청소를 하다 보면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을 담아두며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읽지도 않는 책들, 쓰지도 않고 방치된 다이어리, 각종 명함과 엽서들은 '나두면 쓰겠지' 하며 놔두었던 답답함의 원인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펼쳐보지도 않을 것들에 자리를 내주었다.

 

여기 있는 질문들은 어떨까? 365개의 질문들은 쓸모없어 보인다. '여기서 가장 먼 장소는 어디인가요?' 란 질문이 내 미래를 답해주진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엔 골똘히 생각해볼 마음들이 있다. 커피와 차 중에 무엇을 마시는지, 잠들면 불안을 잊을 수 있는지, 걸을 때 어떤 발부터 내딛는지. 이런 질문들은 '나'에 관한 물음이고, 묻지 않아도 관성처럼 하고 있는 행동이며 말이다.

 

몇 가지 질문들을 신중히 골라봤다. 이 질문들은 앞으로의 1년 동안 틈틈이 물어볼 생각이다.

 

 

Q. 당신을 제한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이 가장 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신중한 면이라지만 신중함이 지나치면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들다. 작년 한 해가 그랬고, 두려움에 많이 잡아먹혔다. 막상 신중했던 선택들도 좋은 결과를 보이지 못해서 올해는 두려움과 싸워 이기는 게 목표다. 해서 후회하는 것과 안 해서 후회하는 건 결이 다르니까.


 

Q. 인생은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요?

 

가치라... 가성비가 현저히 떨어지는 가치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있고,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사람도 있고, 죽고 싶은데 바람처럼 잘 안돼서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는 두 번 태어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의미 부여할만한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흘러가는 대로 손목에 묶인 매듭이 자연스레 풀릴 때까지만 살고 싶다.

 

Q. 가장 고독한 장소는 어디일까요?

 

회사. 공장의 톱니바퀴처럼 사는 곳이다. 깊은 관계로 이어지기 힘들고, 마음을 털어놓으면 약하다는 소리 듣기 십상인 곳. 외로움과 고독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장소다. 벗어나도 삶을 영위하기 위해선 다시 들어가 견뎌야 한다. "왜 이렇게 사는 것일까?" 생각을 가장 많이 하는 곳이다.


 

Q. 죽을 때까지 책만 읽는다면, 몇 권의 책을 읽을 수 있을까요?

 

해보고 싶다. 돈만 준다면? ㅎㅎ 이 세상 책을 다 읽고 싶지만 신간은 계속 쏟아지니 불가능할 테다. 1~2억 권은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만 약 2000권은 되는 것 같은데.

 

Q. 오후에 듣는 음악을 한 곡만 고른다면 어떤 곡일까요?

 

요즘은 위너의 'MILLIONS'와 송민호의 '오로라'를 듣는다. 통통 튀고 청량한 느낌이 오후와 어울리는 것 같다. 살짝 잠을 깨우는 정도의 흥이 딱 좋다.


 

Q. 세상에서 가장 큰 쓰레기는 무엇일까요?

 

인간이다. 인간만 없으면 사라질 문제들이 태반이다. 플라스틱도 일회용품도 모두 자신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고 이제 와 줄이라고 말한다. 지구에서 발생되는 각종 환경문제 중 인간이 관여 안된 게 없다. 결국 자초한 결과다.

 

 

Q. 당신은 20년 후 오늘 무얼 하고 있을까요?

나도 알고 싶다.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으면 답을 못하겠다. 하고 싶나요?라고 묻는다면 조그마한 작업실 겸 가게를 내어 살고 싶다. 도시가 아닌 온 사방이 밭이고, 조금 걸어나가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읽고, 쓰며 살고 싶다. 오래전부터 프리랜서의 삶을 꿈꿨다. 나 정도만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만 벌면 괜찮은 삶일 듯하다. 억지로 빠른 흐름에 맞춰 살아가는 게 어긋나기만 해서 힘들다.


 

막상 질문과 마주하니 적절한 답변을 하기 위해 고심했다. 이렇게 적어나갈 답변을 미래의 내가 다시 본다면 그 답은 바뀌어 있을까 궁금해진다. 성숙한 사람으로 변해있으면 좋겠다. 영원히 질문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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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진실 - 우리는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
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 / 흐름출판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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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악마의 편집이 당연한 듯 돌아다닌다. 우리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핸드폰으로 손쉽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편리함은 진실로 가는 길을 어렵게 만들었다. 굳이 어려운 길을 걷지 않으려는 심리는 권력에 휘둘릴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었다. 때론, 옹호자가 되었다가 오보자가 되고 오도자가 되어 짜집기된 편파적인 자료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만큼 짜임새 있는 정보들이 신념을 어지럽힌다. 적당히 편집해서 내보인 소식은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사실이며, 그것이 설령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더라도 없던 일이 되지 않는다.

 

"우리 의견에 담긴 내용은 내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공간과 긴 시간, 수많은 대상에 걸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의견은 '남들이 알려준 내용'과 내가 상상하는 내용을 끼워 맞춘 것일 수밖에 없다." (p. 26)

 

안다고 말할 수 있는 내용 중 '한 치의 오차도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몇 개나 될까? 넓어진 세상만큼이나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은 줄어들었고, 간접 경험으로 얻을 수 있는 건 한계가 생겼다. 인간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마녀사냥으로 특정 집단을 매도해 버릴 수 있는 힘을 대중들이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권력을 휘두르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며 극한으로 상황을 몰아 넣는다. 사실을 편집해서 그럴싸한 인과관계를 만들고, 감성을 자극할 요소를 집어넣은 그럴듯한 진실이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스토리의 힘은 대단하다. 때로는 정당화될 수 없을 때조차 손쉽게 사람들을 설득해낸다. 스토리에 이런 힘이 생기는 것은 스토리가 우리로 하여금 복잡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태곳적부터 내려오는 인간 심리의 패턴을 활용한 구조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토리를 무조건 '진실'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때로는 그 스토리가 '여러 진실 중 하나'에 불과할 때조차 말이다. (p. 177)

 

스토리는 유도하는 미끼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정부기관, 기업, 기사들은 대중들이 그렇게 믿을 수 있게 간교하게 조작한다. '여러 진실 중 하나'가 위험하게 사용된다. 그래서 저자는 '제대로 된 스토리'를 얘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궁무진한 스토리만큼 듣는 이가 도출할 수 있는 결론도 여러 가지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 이건 내가 속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법이다.

 

무언가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진실은 보통 한 가지 이상이다. 경합하는 진실을 건설적으로 사용하면 좋은 방향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행동을 이끌 수 있다. 그러나 경합하는 진실을 가지고 우리를 오도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p. 395)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만큼 진실도 한두 개로 정의 내릴 수 없다. 스토리를 엮어내는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쥐락펴락할 수 있다. 스스로가 방관자가 되지 않기 위해선, 오보로 나타난 진실 앞에 "미안, 그게 아니었네." 하고 말뿐인 사과는 힘이 없다. 의심하는 태도와 비꼬는 시선이 시류에 편승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자고 일어나면 논란이 불거지는 시대 속에서 각자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고 존중할 수 있는 길은 "어떻게 팩트를 편집하고 소비하는가"에 달려있다. 편집을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법칙을 살펴보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내가 오도자가 돼있겠단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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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츠드렁크 - 행복 지수 1위 핀란드 사람들이 행복한 진짜 이유
미스카 란타넨 지음, 김경영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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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공간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술을 즐기는 것.

그게 바로 '팬츠드렁크'입니다. 당신은 충분히 휴식을 즐길 자격이 있습니다.

오늘 밤, 팬츠드렁크하며 행복해지세요! (p. 11)


'휘게', '라곰'에 이어 또 다른 북유럽 라이프스타일이 나타났다. 바로 모든 억압을 벗어던지고 집에서 술 한잔 마시며 빈둥거리는 '팬츠드렁크'. 핀란드에서 유행이라는 이 라이프스타일은 한국의 혼술 문화와도 유사하다. 사실, 쉴 때는 어떤 간섭도 받기 싫다. 꽉 조이는 정장 바지도, 속옷도 숨 막히고,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억압 요소다. 그런데 팬츠드렁크는 이 모든 걸 벗으라고 한다. 집에서 가장 편안한 옷차림으로 추레하게 맥주 한 잔과 티비 또는 스마트폰, 책등을 행동반경 가장 가까이에 두고 함께 즐기라고 한다. 이처럼 쉽고 간편한 휴식이 어디 있을까?

 

팬츠드렁크의 휴식효과는 단순한 요소에서 나온다. 편한 옷차림, 적당량의 술, 그리고 가벼운 소일거리. 그리고 필요한 게 하나 더 있다. 팬츠드렁크를 제대로 즐기려면 마음을 열고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겨야 한다. 사실 팬츠드렁크는 정신, 감정적인 면에서 지금 이 순간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집중하는 명상법인 '마음챙김'과 닮은 구석이 있다. (p. 26~27)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격하게 안 하고 싶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팬츠 드렁크는 우리의 요구 조건을 충실하게 들어준다. 이를 다양한 통계자료로 정당화하며 행복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연구결과도 우릴 도와준다.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만큼 '쉼'에 적합한 것은 없다고! 휴일의 내 모습이 정당하고 올바른 형태라고 인정받는 느낌이 든다.

 

 

그럼 팬츠드렁크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북유럽의 기상현상과 사회 분위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백야 현상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복지가 너무나도 잘 되어 있는 곳. 하지만 주변 상점들이 일찍 문을 닫고, 높은 세금 징수로 인해 즐길 거리가 마땅치 않다. 스펙터클한 한국 사회와 비교해보면 따분하고 지루한 생활의 연속이다. 그래서 이 문화가 탄생했다.

 

 

그들의 문화는 '혼자'를 권한다. 가장 편안한 집안에서 느리게 흘러가 보라고 조언한다. 1년의 대부분을 '누군가'와 함께 보낸다는 점에서 이는 꼭 필요하다. 자기를 돌보는 건,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쉬면서 무언갈 하기보단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고,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직장 또는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일은 삶의 윤활유가 되어준다. 의미를 하나하나 넣다간 억지밖에 남지 않으니 이제 그만!이라고 손바닥을 내민다.

 

 

어찌 됐듯 수고했던 오늘이고, 한 해다. 후회는 잠깐,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멀었다. 현재를 충실히 하다 보면 해결되지 않던 것도 어느새 사라질 테다. 핀란드 사람들처럼 술 한잔 마시며 날려버리자! 즐기는 사람을 이길 자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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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의 말
켄 로런스 지음, 이승열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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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각인된 그룹 비틀스의 멤버이자 'Imagine'이란 명곡을 남긴 가수 '존 레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기도 하고, 음악도 비틀스의 1~2개 명곡밖에 모르는 나에게 이 책은 존 레논 입문서와 같았다. 각종 인터뷰나 공연장에서 뱉었던 수많은 말들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그를 두고 했던 말을 담은 이 책은 한 사람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자서전이다.

 

람들이 생각하는 존 레논은 내 안에 없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허상을 만들고 그것을 진짜라고 착각한다. 우리에게 와서 비틀스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원하는 비틀스의 허상에 대한 답이지, 진짜 우리에 대한 답은 아니다. 우리 네 사람이 일상적으로 서로를 대할 때는 사람들의 눈에 비친 비틀스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가끔 호텔 문을 나설 때면 이렇게 장난친다. "난 비틀스 1호 존! 그래! 비틀스 3호 조지. 자! 가자~!" 밖엔 비틀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그냥 장난삼아 그들이 원하는 비틀스로 변신해주는 거다. 코스프레를 하거나 가식을 떨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냥 우리인데, 사람들의 눈엔 비틀스만 보일 뿐이다. (p. 40)

 

거침없는 발언에 구설수에 여러 번 오르내렸던 그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몸을 사리는 타입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확신을 바탕으로 한 당당함이 '존 레논'이란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었고, 많은 팬과 후배 가수들이 그를 동경했다. 그가 가졌던 핵심 가치 중 하나는 평화다. 'Imagine'이 평화를 대표하는 곡으로 알려진 만큼, 그는 평화를 위해 평등과 자유를 주장했다. 직접적으로 나타낸 적은 없지만 여기 담긴 수많은 말들은 사람들이 '나다움'을 잃지 않길 바라고, 전쟁이 없는 세계를 꿈꾸었으면 한다.

 

뉴욕에서 존 레논을 만났다. 굉장한 대사건이었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존 레논 아닌가. 존과 요코를 촬영하던 날, 긴장한 풋내기 사진작가인 나를 그는 편안하게 대해주었고, 그냥 '나 자신'이 되라고 말했다. 어떤 가식도 없는 솔직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일하라고. 인생에 대한 너무나 멋진 조언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늘 '자신이 되는'법을 따라 살아왔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p. 229)

 

존 레논의 팬 사랑도 느낄 수 있었다. 끝없이 이어진 무대 앞 관중들을 보며 가장 열정적인 팬은 "제일 앞줄에 있는 저분들이죠!"라고 말해주는데서 느낄 수 있다. 나도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가수가 팬들에게 해주는 말이 고맙다는 뭉클한 표현인 것을 알기에 그때 저 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천상 음악가 같다. 안타깝게도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이며 아버지이진 못했지만 '음악'이란 하나의 카테고리 안에서 그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녔단 사실은 분명하다. 자신을 믿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나도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싶단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번역한 이승열이 그를 '안티 히어로'라 부르고 싶단 마음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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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내셔널의 밤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
박솔뫼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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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하지 못해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이 있다. 비행기에서 이 책을 읽으니 이방인의 마음을 절로 느낀다. 성전환 수술을 통해 남자가 된 한솔과 사이비 교단에서 도망친 나미가 기차에서 만나 부산까지 동행하는 이야기는 집단에 속하지 못한 인간의 쓸쓸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한솔의 주민번호는 여전히 숫자 2로 시작된다. 친구 영우의 결혼식에 참석학 위해 여권을 만들 때, 그는 보통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지옥 같은 꿈을 꾼다. 아직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 설명해야 하는 한솔은 주민등록이란 제도에서 벗어나는 방법에 대해 상상한다. 주민번호는 신분증이면서 옭아매는 족쇄,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된다. 일본에서 입국심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우다 악몽을 꾸는 것 역시 '정체성'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난 자신이 이방인임을 에둘어 표현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어떻게 모르는 사람으로 사라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은 매일 밤 잠자리에서, 물론 매일 밤은 아니지만 자주 반복되는 생각이었다. 사라질 생각은 없지만, 큰 잘못을 아직 저지르지 않았지만 어떻게 한국에서 사라질 수 있을까 어떻게 숨을 수 있을까 혹은 한국을 빠져나가 외국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p. 37)

 

나미는 사이비 교단에서 도망쳐 부산으로 향한다. 누군가 자길 쫓아올 거란 알 수 없는 불안에 집 밖을 나서는 것조차 용기를 내야하는 그녀는 믿음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한다.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한솔에서 말을 건 것은 가장 최악으로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는 절차인 듯 보인다. 한솔과 같은 호텔에 묵으면서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다가 마음을 열었던 건 '옆자리 사람'에서 '동행자'로 둘의 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서 있고 가끔 벼랑 끝에 서 있고 지금도 혼자 있다. 외롭거나 고독한 것, 처참하고 우울한 것과 무관하게 모든 개인처럼 혼자 서 있다. 혼자 서 있는 사람으로 서 있다. 나는 모든 혼자 서 있는 사람처럼 서 있나? 아니면 나는 다른 사람으로 모든 사람들과 다르게 혼자 서 있나? 아니 나는 혼자 서 있고 멀리 다른 혼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p. 92)

 

둘이 같이 타러 갔던 배는 일본과 부산을 오가는 사람들, 갈 곳 없는 사람들이 잠시 머무는 이동 수단이었다. 국가를 넘나들며 머무는 '잠시'의 개념은 '스쳐감'을 뜻한다. 마치 한솔과 나미의 관계처럼, 입국심사에서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나갈 것임을 암시한다. 결코 한 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이들처럼, 이방인으로 살아갈 우리 존재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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