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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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말을 하고 싶지만 정작 말할 수 없다. 황정은 작가님의 작품은 이런 여운을 갖게 만든다. 『 d 』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두 소설은 우리를 도사리는 것들을 이야기한다. 큰 줄기엔 지난 몇 년간 있었던 가슴 아픈 사건, 정치적 이슈가 있다. 우린 저항했고, 한자리에서 기도하며 큰 소리로 외쳤지만 온전히 한마음이진 않았다. 한자리에서 겪은 건, 우리와 사회의 시차와 온도는 분명하게 달랐다는 것이고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버린 현실에 느끼는 환멸이었다. 작가님은 이를 어쩌면 남루하고 초라한 주인공들(어쩌면 가장 평범한 사람들)을 내세워 일상 속에서 굵직한 이야기를 풍경처럼 비춰준다.

 

『 d 』

애인인 dd가 죽고 홀로 남은 d는 쇠퇴한 상가에서 배달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간다. 그에게 일이란 그저 일과에 일부분일 뿐, 여기에 어떠한 의미 부여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있기에 살아낸다. 그러다 여소녀를 만나 그는 앰프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세운다. dd가 사라지고 삭막해진 삶에서 그는 dd의 유품 중 lp를 들고 나와 좁은 고시원에 자신만의 공간을 만든다. dd의 흔적이 흘러나오는 소리에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랑한 사람의 부재로 체감한 하찮은 내 존재를 어루만지는 건, 결국 다른 이가 내민 우산이다.

 

d는 다시 세종대로 사거리에서 느꼈던 진공을 생각하고, 문득 흐름이 사라진 그 공간과 그 너머, 거기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했다. 그들과 d에게는 같은 것이 거의 없었다. 다른 장소, 다른 삶, 다른 죽음을 겪은 사람들. 그들은 애인을 잃었고 나도 애인을 잃었다. 그들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d는 생각했다. 그 사람들은 무엇에 저항하고 있나. 하찮음에 하찮음에. (p. 144)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화자인 '나'가 서수경을 만나며 탄압으로 얼룩졌던 대학시절 운동권을 생각한다. 인권이란 단어가 무색할 만큼 폭행이 자행했던 시대, 누군가는 이를 혁명이라 부르며 환호하고 용감하다 칭했을지 몰라도 그 전선에 있던 사람들은 큰 상처를 입었다. 소설은 이들의 삶과 함께 기차 밖 지나가는 풍경처럼 세월호 침몰부터 박근혜 탄핵까지 긴 시간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그건 먼 미래의, 지나간 과거의 것들이 아닌 밥을 먹으며 들리는 뉴스의 조각이고 밖에서 들린 시위의 목소리고 여전히 낮은 곳에 사는 우리를 직시하게 만든다.

 

너희들이 계속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하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가 말했다지만 그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나. 그의 용서가…… 우리에겐 그의 용서가 이미 필요하지 않다. 그가 그것을 모른다는 것과, 알아도 인정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지 이렇게 앉아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할 때, 김소리나 나는 화가 나기보다는 종종 서글프다. (p. 225)

 

'나'의 가까운 현실에는 앞마당을 쓸라고 명령하는 아버지가 있다. 노쇠한 자신을 자식들이 무시한다며, 어머니가 자신의 밥상을 제대로 안 차려준다며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광화문에서 빛이 나던 목소리는 여기서 무력하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은 결코 변하지 않았으며, 혁명의 성공에 도취해 있기엔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들이 지천에 널렸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다. 설렘과 비극이 공존하고 위선자들이 벌인 잔혹한 횡포 앞에서 무력하다. 하지만 온 국민이 촛불을 들고 광화문 거리로 나선 날, 그 촛불이 콧대 높은 위인들에게 흠집을 내어 혁명이 성공으로 끝난 날 우린 보았다. 아직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하지만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몇 십 년, 몇 백 년째 반복되는 악순환은 변하지 않았다. 작가님은 혁명이 일어나는 도중에 보여준다. 부패를 청결로 바꾸는 와중에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과정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여기까지 걷는 데 사 년하고도 반년이 걸렸는데 세상은 변한 것처럼도 보이고 변하지 않은 것처럼도 보인다. (p.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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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와 책만 있다면 - 인생의 중반, 나는 다시 책장을 펼쳤다
임성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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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인생의 전환점으로 마흔을 떠올린다. 인생 곡선을 그려봤을 때, 삶의 중간지점이면서 사회적, 가정적으로 안정된 시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랜 직장생활이 가져온 염증, 사춘기 자녀와의 갈등, 미혼에겐 결혼 압박 등 변화를 강요하고 또는 갈구하기도 한다. 과연 마흔만이 흔들릴까? 나는 마흔과 동떨어진 나임에도 이 책에 녹아들 수 있었다. 기본교양처럼 탑재된 불안감과 인간관계, 이별 등의 키워드는 나도 겪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 임성미는 자신의 삶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낯섦과 불안함의 연속이었다 고백한다. 교사의 삶이 좌절되었을 때, 가장 힘들었지만 우연한 기회로 돌고 돌아 독서교육전문가로 활동하면서 내가 포기했던 일이 어느 순간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말한다. 그녀는 그 간의 혹독한 흔들림 속에서 자신을 지탱할 수 있게 도와준 책들을 소개한다. 그녀가 소개한 책들은 인문, 심리학 분야가 많았다. 이 책들은 '힘내세요', '나도 그래요' 등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그치지 않고 깊게 자신을 사유할 수 있도록 문제의 근원에 집중하게 만든다.

 

융이 말하는 자기실현의 과정, 즉 개성화는 자아가 무의식의 여러 측면을 발견하고 통합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지려면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의식을 발달시켰고,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가면(페르소나)을 쓰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p. 52)

 

융은 중년기를 강조한 심리학자다. 이 책에서 융이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중년기의 문제는 모두 '개성화' 즉, 자아와 무의식의 통합하는 과정에서 발생되기 때문이다. 중년은 그동안 쌓인 경험을 통해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자칫 이 점은 명쾌하기보단 자기 답습이 되기 쉽다. 그녀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말해준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나란 인간은 불완전하고, 이기적이고, 편협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러셀은 말합니다. 우리의 동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반드시 이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요. 또 '스스로 자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생각'에 빠져 있지 말아야 한다고 말이죠. 이는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놓고 싶어서 나는 옳고 정당하다, 타인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자기의 행동이 이타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자각을 하게 되면 타인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집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위해서 자신을 일부러 낮추는 건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떤 동기를 갖고 행동을 했는지 스스로 알고 있다면 그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p. 196)

 

'기분이 태도가 되게 하지 말자'라는 명언처럼 감정에 휩쓸리게 되면 해소는커녕 감정에 매여 끌려다니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흔들리며 힘든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적정선에서 컷! 할 수 있는 단호함은 반드시 필요하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위해서인 결정은 감정이 일상 전반에서 뛰놀지 않도록 도와준다. 감정을 표출하며 해소하는 건, 중요하지만 '저 사람은 왜 저래?', '쟤 때문에 되는 일 없어' 등의 남 탓은 설사 그 사람이 잘못을 했을지라도 나를 위한 감정이 아니다.

 

자연히 자기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을 만나면 불편하고 그를 비난하고 싶어집니다. 그로 인해 나의 내적 평화가 무너집니다. 그러면 이렇게 불평이 시작되지요. '저 인간 때문에 출근하기 싫어'라고요. 하지만 그런 태도는 내 일상의 기분이나 감정의 원인을 외부의 '그 인간'에게 내맡기는 꼴이 됩니다. 이건 너무 억울한 일이지요. 내 일상의 행복이 '그 인간의 행동'에 달려 있다니요. 그러므로 내적 평화를 이루려면 외부의 그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 외부의 사건을 이해하는 내 방식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외부의 사건이나 사람이 내게 영향을 주고 내 감정을 건들 수는 있지만 그것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에 온전히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습니다. (p. 294~295)

 

 

 

이 책을 읽으면서 작년이 힘들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감정에 매여 버렸고(비록 그 사람들이 잘못했지만) 해결은 누가 대신해주지 않는단 걸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혼자 아파하고, 분노하면서 곪아가는 건 나뿐이었다. 결국 나를 망가뜨렸다. 에너지가 잘 흐를 수 있는 물꼬를 트는 일은 나만이 할 수 있다. 상황에 흔들려도 나를 부정하고 의심하며 감정에 흔들리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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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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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은 후, 미련을 풀 수 있는 추가시간이 주어지면 나는 무엇을 가장 먼저 할까? 이 책은 사자(죽은 자)를 도와 저세상으로 안전하게 보내주는 사신의 이야기다. 사쿠라는 히나모리의 제안으로 시급 300엔 밖에 되지 않는 사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추가 수당도 복리후생도 잔업과 스케줄 조정도 안되는 사상 최악의 아르바이트! 사쿠라는 이상한 꾀임에 이끌려 일을 시작하지만 점차 사자의 사연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후회 없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이 돼간다.

 

 

사자들은 죽기 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간다. 하지만 사자로 보낸 추가시간이 종료되면 그때의 기억과 추억은 사라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에 사자는 추가시간이 생겨 자신의 한을 제대로 풀고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자신이 원하던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연명하는 삶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자신이 내가 이렇게 보낸 시간들을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거란 상실감이 찾아오기 때문에.

 

 

사자들의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아픈 동생에게 제대로 해준 게 없어 아쉬워하는 사람, 엄마로부터 학대를 받은 아이, 수십 년 전에 잃어버린 편지를 찾는 남자, 바람피운 남편을 증오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걱정하는 여자 그리고 히나모리. 모두 잃어버린 것들을 채워가려 하지만 결국 지나가버린 것들은 죽어서 손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신은 '사라짐'이 전제된 시간을 왜 주었을까? 아마 나 자신을 직시하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미련은 아직 후회하고 아쉬운 점이 남았다는 뜻이다. 복수를 위해, 정의를 위해, 욕심을 위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간절하게 가졌던 마음이 미련임을 알아보라고 준 시간이다. 답은 모두 사자 자신에게 있었다. 히나모리와 사쿠라는 좀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도록 인도하는 역할일 뿐이었다. 사신인 그들조차도 일련의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결국 잃는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 웃으며 지낼 수 있다면, 그것도 분명 아주 의미 있는 일이겠지. 슬픔을 없앨 수는 없어. 하지만 슬픔을 능가할 행복을 찾아낸다면 분명히 세상에 태어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거야.아사쓰키한테 배웠는데, 과거에 괴로워하기보다 내일에 희망을 품어야 행복해질 수 있나 보더라고. 우리도 마지막으로 그런 기적 같은 시간을 보내자." (p. 294~295)

 

 

내일의 희망을 품어야 행복하다는 말처럼 내게 주어진 시간들에 숨을 불어넣지 않으면 그게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내가 누군가를 이해할 용기를 베푸는 것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혹시 아나? 내가 용기를 내었다면 그 사람이 살아있을지도. 사쿠라가 사신 아르바이트를 통해 얻은 소원지를 다른 사자를 위해 사용했던 것처럼, 그 사자가 행복해졌던 것처럼 우린 서로에게 행복을 건네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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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어떻게 나에게 왔니 - 500days in Ireland
김민수 지음 / 달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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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밭이 날리던 오후,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읽은 이 책은 감동을 주었다. 민수와 올리버의 500일의 우정 이야기는 진심으로 가득 차서 눈물샘을 자극했다. 아일랜드와 한국까지의 거리만큼 멀었던 둘의 관계가 조금씩 가까워졌던 건, 같이의 가치가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도와준다는 생각이 지배했던 머릿속은 이제 네가 아니면 내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없을 거라고 말하고 있다.

 

한 번 외국에 나가 보고 싶다는 마음에 아일랜드의 한 ‘장애인 공동체’에서 생활을 시작한 민수. 그의 첫 시작은 외국 생활에 대한 동경이었지만, 올리버를 만나고서부터 주고받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는 결과로 이어진다. 뇌성마비 장애를 가져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된 올리버는 간혹 간질발작도 일으켜 잠잘 때 숨 쉬는 소리조차 주의해야 하는 친구다. 그가 위험한 일이 생기면 지체 없이 달려가야 하고, 응급처치를 하고, 그의 일상을 나의 일상처럼 소중히 다뤄야 한다.

 

이 과정이 순탄치 않았음은 올리버가 민수를 처음 마주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일부러 못되게 굴고, 틱틱되며 민수를 난감하게 만든 올리버의 행동은 그동안 떠나간 봉사자들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올리버에겐 역시 예정된 이별을 꼬리표처럼 달고 온 민수에게 마음을 내어줄 자신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가 민수에게 마음을 연 것은 한 번 더 빤히 보이는 결말을 받아들이겠단 표시였다.

 

 

내 곁을 지켜주는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이 들면, 다시 속아보자는 생각에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할 테지만 쉽게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을 거예요. 어떻게 할까요. 이 상황을. 언젠가 이별이 다가오는 상황을 알면서도 나의 곁을 지켜주는 새로운 봉사자와 새로운 사랑에 빠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겐 얼마나 힘들었을지 저는 다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p. 103)

 

 

친해진 후로, 둘은 티격태격 형제처럼 생활한다. 서로의 마음을 여전히 모르겠는 하루도, 잘 해준 것 같은데 알아봐 주지 않는 것 같아 느끼는 서운한 감정도, 나의 실수로 위험한 상황에 빠트린 것 같아 눈물이 나는 미안한 마음은 벽을 허물게 만들었다. 나를 네가, 내가 너를 치유하는 마법을 본다. 올리버가 배를 쓰다듬어 줄 때, 민수가 느꼈던 어지러운 심경을 나도 알 것만 같아 눈시울이 붉어졌다.

 

배를 쓰다듬는 건 미안하다는 우리끼리의 수화이거든요.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서 나도 미안해, 하며 안아주고는 불을 끄고 방을 급하게 나와 문 앞에 서서 엉엉 울어버렸어요. 나를 알아주던 친구가 참 고마웠고 감정을 들켜버린 제가 부끄러웠어요. 당신을 도와주려 애쓰는 사람은 나인데 정작 언제나 치유받고 돌아서는 사람은 저였던 거예요. 너는 내게 기적 같은 매일을 선물해주고 살아가는 원동력을 가질 수 있게 만들어주는 사람이구나. 너는 나를 그렇게나 이해할 수 있었구나. 그래서 우리는 만날 수밖에 없었구나. 그날 밤은 쉽게 잠들지 못했던 것 같아요. 미안하다는 올리버의 손짓이 눈에 아른거려 오던 잠도 달아나버린 그런 날이었어요. (p. 91)

 

아일랜드에서의 생활은 마음에 관대해지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생활해도 강요하는 이도, 명령하는 이도 없는 자유 속에서 스스로 선을 지키고, 사람을 대한다. 스트레스가 있어도 부정적인 발화로 이어지지 않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건네는 위로의 말과 끊임없는 소통으로 해결된다. 새 언어를 배우면서 부정 표현이 없었다는 건, 행복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생각해보면 그 행복의 증거는 내게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새로운 언어를 익혀야 했던 나는 주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는데, 끝내 ‘원망’ ‘절망’ ‘이기’ ‘복수’ ‘질타’ 같은 단어들을 들은 기억은 없다. (p. 47)

 

갑작스레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민수가 걱정했던 건 올리버의 감정이었다.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할 사랑하는 친구의 모습을 볼 수가 없어서, 사랑하는 만큼 아픔을 줄 수 없어서 빠른 시일 내에 돌아오겠다고 다짐한다. 실제로 그는 다시 아일랜드로 향하는 비행기를 끊어 올리버에게 간다. 올리버가 그를 알아보고 안아줄 때 나도 모르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내가 여전히 너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세상은 늘 정직함이 최선인데 그것이 쉽지는 않아서 그럴 때면 주변에서 도움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나에게 마을 사람들은 그런 존재가 되어주었고, 나의 오기들은 그렇게 용기로 변해갔다.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누군가의 용기라는 것이 특별히 대담하거나 성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조금 덜 생각하고 옳은 것에 대해 실천으로 옮기는 하나의 움직임일 뿐 사실 모두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p. 190)

 

 

그는 평범한 사람에서 수많은 사람을 품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했다.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만이 대담함이 아니라 결심한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 용기이며, 하나씩 다짐을 깨 나갈수록 겁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달려갈 수 있는 용기 속엔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있었고, 국경과 나이, 거리를 초월한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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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컷 : 북디자이너의 세번째 서랍
김태형 외 지음 / 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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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나를 위한 책을 고르는 일은 소소한 행복 중 하나다.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입은 책들이 일렬로 서가에 꽂혀 있는 걸 보면 나도 이런 서가를 갖고 싶다는 로망이 생긴다. 하지만 모든 책을 사서 들여놓을 수는 없는 법! 이 중 단 몇 권의 책만이 선택된다. 면접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책과의 첫인상도 중요한 선택 조건이다. 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건, 책 표지다. 책의 얼굴인 표지는 각양각색으로 겹치는 느낌이 없다. 그 해의 유행에 따라 몇몇 익숙한 일러스트가 그려진 책이 있긴 하지만 다수의 책들은 저마다의 개성을 뽐낸다.

 

 

책의 얼굴을 만드는 사람을 우린 '북 디자이너'라 부른다. 그들은 책의 내용, 분위기와 느낌을 독자에게 와닿게 하기 위해 파주 어딘가에서 종이를 고르고, 시안을 만들고, 글자를 써본다. 그럼 이들은 어떤 일을 주로 하고, 디자인이란 예술적인 일을 어떻게 삶에 불어넣고 있을까? 책을 좋아하면서 저절로 출판에 관심이 많아진 터라 디자인이 세계는 어떤 곳일까 궁금해졌다.

 

 

환상과 꿈을 안고 시작한 독서는 완독 후, 와장창 깨진 현실을 마주했다. 현직 디자이너가 말해주는 북 디자인의 현실은 '좋아하는 일이 생계가 된다면'이란 생각에 미쳤다. 완성도 높은 작업물을 위해 감수를 밤낮없이 하고, 편집자와 작가와 의견이 일치되는 디자인을 생각해야 한다. 때론 고생한 결과물이 반응이 없을 때도 있다.

 

의사처럼 고유의 영역에 아무나 접근할 수 없고 그들의 판단을 믿고 따르는 게 진정한 전문직일 텐데, 북 디자인의 영역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개입한다. (p. 91)

 

 

디자이너마다 가치관과 색깔이 다르지만, 결국 책을 어떤 마음으로 책을 대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p. 215)

 

 

북 디자인은 개인의 개성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다. 책이 빛이라면 디자이너는 그림자다. 이들은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빛이 더 빛나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작업물에는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의 수정사항이 오가고, 위축되는 출판시장에서 예산 문제에 직면한다. 디자인과 편집자, 마케터, 작가 각각은 고유한 영역을 지닌 전문직인데 서로가 손쉽게 개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조건에 부합하게끔 만들어 가는 과정을 거쳐야 진정한 북디자이너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아쉬운 점이 있다. 북 디자인은 프로세스 자체가 폐쇄적이다. 때문에 디자이너 간의 소통이 많지 않다. 또래 디자이너나 선배들과 디자인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프로세스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했지만, 우리가 만들고 있는 '책'에 대한 생각을 나눌 기회는 많지 않았다. (p. 33)

 

 

다시 말해 완성도라는 것은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것으로 성취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에 부합하는 일련의 방법들을 찾아내고, 선택의 과정들이 지시하는 최선의 완결점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다. (p. 47~48)

 

 

책에서 인터뷰 한 북디자이너들은 한 사람인 듯, 프로세스의 폐쇄성, 예산 및 소통 등의 문제를 똑같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자신의 능력을 책이란 매체에 어떻게 매력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동안 겪어왔던 시행착오들과 B 컷들은 서랍 속에서 나 자신이 나태해졌을 때 또는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을 때 다시 일으키는 마스터키였다.

 

내게 위기가 찾아온 시기는 작업의 한계를 느꼈을 때가 아니었다.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었다. 매일 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북 디자인은 나의 생계를 꾸리는 일이기도 했다. 매일 즐거울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누군가를 상대해야 했고, 때로 스스로를 구박하거나 자책하는 일을 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지치는 건 당연했다. (p. 340)

 

 

일이 그렇듯 경험을 하면서 겹겹이 쌓인 시간들은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지금 곧바로 빛을 발하지 않아도 어느 순간 나만의 무기가 되어 상상하고 펼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거기에 근성을 더한다면 진정 훌륭한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 경험을 통해 얻은 것들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근성이라는 놈이 꼭 필요하다. 우리가 모두 천재는 아니므로. (p. 279)

 

내가 깨진 환상과 꿈은 처음 마주한 떨림과 기대, 설렘 같은 말랑말랑한 것들이다. 어느 일이든 말랑말랑한 감정이 깨져버리면 방황을 한다.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일인지, 적성이란 무엇인지, 정말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디자이너분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직업을 가져 몇 년간 일해본 선배가 건네는 직장생활지침서 같았다. 지금 포기하고 싶고, 버텨야 하나 싶고, 설령 다른 길에 들어섰다고 해도 그건 앞으로 가치있게 빛날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내가 환상을 가진 일도 생계를 꾸리는 일이다. 자책하며 울고 싶은 순간들이 그들도 있었을 것이다. 매일의 일이 재미있으면 그건 일이 아니란 말이 있다. 진부하고, 재미없고, 답답한 게 정말 일하고 있다는 순간이다. 내가 나를 영위하고 지켜내기 위해서 꿋꿋하게 나아가고 있다는 소리다. 그래서 우린 모두 천재가 아니기에 근성이란 놈이 꼭 필요하다는 마지막 말이 와닿는다.

 

무엇이든 자연스러운 모습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억지로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애쓰다가 우왕좌왕하는 것보다는 지금 자신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조금씩 해내가는 것이 마음을 소진시키지 않는 방법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좀 더 성장한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p. 342)

 

 

이들은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버티고 좋은 결과물을 내보이려 한다. 그렇게 꾸준한 성과를 내다보면 이 분야는 견고하게 자리 잡을 테니까. 그러니 후배인 우리는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해나가면 된다. 자연스럽게 실수도 하고, 꾸중도 듣고, 눈물도 흘리면서. 북디자이너의 B컷이 자만했던 과거이며, 발전하고 수정해야 할 선명한 가르침이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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