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겨울
아들린 디외도네 지음, 박경리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소녀와 소년이 성장해 나가며 자신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가슴 아픈 이야기다. 유년시절에 마주한 폭력은 어린아이를 어른아이로 만든다. 하지만 마음만 어른일 뿐, 여전히 아이라고 규정된 사회 속에서 이들은 보호자 없이 어떤 것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 또래보다 일찍 성숙하게 된 소녀는 예정된 삶의 무게를 자신의 동생만큼은 짊어지게 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동생의 사랑스럽고 순수한 영혼이 타락하지 않도록 집에 일이 터질 때마다 그를 끌어안고 좋은 이야기만을 들려주며 항상 이 모습 그대로 자라주길 바란다. 


나는 누군가가, 어른이, 내 손을 잡고 데려가 침대에 눕혀 주길 바랐다. 내 생의 방향을 바꾸어 주길 바랐다. 내일이 올 것이고, 이어서 또 그다음 날이 올 거라고, 그러면 결국 내 삶은 얼굴을 되찾을 거라고, 내게 말해 주길 바랐다. 피와 공포는 옅어질 것이라고. (p. 34)


하지만 2차 성징이 시작되고 '여자'와 '남자'라는 뚜렷한 태가 갖춰지기 시작하자 그들의 아버지는 점점 괴팍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동생을 사냥터에 데리고 다니며 총기 사용을 가르친다. 난폭하고 잔인하기 다를 바 없는 교육 속에 동생은 점차 맑은 미소를 잃어가고 아버지와 닮은 섬뜩한 미소를 띄며 동물을 죄책감없이 죽이기에 이른다. 아직 되돌릴 수 있다고 여긴 소녀는 소년의 시선을 예전처럼 끌어보지만 더 이상 그는 그녀의 말을 듣지 않고 무시한다. 급기야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사냥감으로 삼아 사냥하는 끔찍한 사태를 초래하기에 이르는데 여기에 동생 역시 누나를 그저 사냥감으로 여기는 무서운 태도를 보인다. 


삶이란 믹서에 담겨 출렁이는 수프와 같아서, 그 한가운데에서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칼날에 찢기지 않으려고 애써야만 하는 것이다. (p. 91)


과연, 이 모든 일이 단순 소설에만 있는 상상일 뿐일까? 사냥이라는 구체적인 상황으로 나타냈지만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총과 칼 대신 욕설과 손찌검이 휘둘러지고 반항은 굴복과 체념으로 바뀌며 이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도하게 된다. 이제 막 자신을 설계하는 소녀의 눈엔 가까운 미래가 있었다. 그녀의 엄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신 역시 엄마처럼 살 수 밖에 없음을 일찌감치 깨닫는다. 그래서 철저히 자신의 천재성을 감추며 때를 엿본다. 


한 번이라도 폭력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폭력에 노출되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상처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물고 옅어질 수는 있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이의 어머니 얼굴에서 상처가 눈으로, 입으로, 이마로 옮겨갔던 것처럼 폭력의 흔적은 몸 여기저기서 불숙 나타났다 사라지고 또 나타나길 반복한다. 안전하다고, 아픔은 이제 끝이라고 느끼게 해 줄 누군가가, 혹은 그 어딘가가 없다면 결국 텅 빈 베갯잇 혹은 의지도 욕망도 없는 아메바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 사이에서 노출되는 폭력은 더욱 잔인하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마땅할 사이에서 행해지는 폭력. 온 힘을 다해 미워할 수도, 도망갈 수도, 안심할 수도, 치유될 수도 없을 것만 같다. (p. 182)


결국 아버지는 자신이 저질렀던 방식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폭력의 주체가 사라졌지만 마냥 해피엔딩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건 계속해서 이들 무의식 속에 살아 숨 쉴 기억들 때문이다. 그렇게 살지 않으려 애쓰며 노력했던 소녀가 앞으로도 계속 폭력의 잔상과 싸워야 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과연 동생이 잃어버린 순수한 미소를 바람처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기적처럼, 당연하단 듯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샐리의 비밀스러운 밤 브라운앤프렌즈 스토리북 2
김아로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네이버 라인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담긴 '브라운 앤 프렌즈 스토리북'. 그 두 번째 주인공은 샐리다.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 귀여운 오리는 뻔뻔하며 무지막지해 보이지만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지켜낼 줄 아는 인생 법칙을 가진 친구다. 튼튼한 멘탈과 두둑한 자존감을 가진 샐리는 열심히 정해진 일상을 사는 직장인 친구들과 달리 비밀 작가 프리랜서로 살기에 친구들의 삶을 모두 이해하진 못한다. 하지만 친구들과의 에피소드를 자신의 작품에 녹여낼 만큼 은근슬쩍 자신의 애정을 티 내는 츤데레 면모를 보인다.


"날씨 좀 봐. 어쩜 휴가가 끝날 때까지 우리가 계획한 것들을 하나도 못하고 그냥 돌아와야 할지도 모른다고."

"내일 날씨는……."

샐리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일 알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미리 걱정을 해?"

코니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샐리의 말처럼 내일의 진짜 날씨는 내일이 돼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0퍼센트의 강수확률을 예측했던 기상청의 슈퍼컴퓨터도 오늘의 날씨를 오늘에서야 알게 된 것처럼. (p. 133)


샐리의 친구들은 고민과 걱정이 많다. 정해진 일과를 살아내는 일반적인 우리의 삶처럼 정해진 시간에 회사나 학교에 가야 하고, 고생한 것에 비해 짧은 주말을 아쉬워하며, 기다리던 휴가를 완벽하게 보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다른 생활을 하는 샐리는 친구들의 삶이 어떻게 힘든지 잘 몰라 초치는 말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샐리의 장점이 있는데 바로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는 점! 코니가 휴가의 날씨를 걱정하지만 사실 기상청조차 자주 오보를 낼 만큼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이다. 그래서일까. 위의 말처럼 샐리식 위로는 시원하게 긁어주는 부분이었다.


샐리는 그런 친구들을 보며 말하고 싶었다. 재미로 시작한 일이 열심히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을 때 무언가 잃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는 걸. 그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좋아하는 친구들과 별일 없이 노닥일 수 있는 여유를, 아무 때나 자고 아무 때나 일어나도 상관없는 무계획을, 한적한 오후에 즐기는 나른한 산책의 온도를 잃고 싶지 않았다. (p. 214)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유명 작가의 정체는 샐리다. 친구들은 작가의 천재성과 자유로운 일상을 부러워하지만 당사자인 샐리는 우연히 시작했던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혼란을 느낀다. 창작하기 위해서 견뎌야 하는 수많은 밤과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기 어려운 점은 샐리가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샐리는 자신의 본성을 긍정하며 이겨낸다. 대책 없어 보여도 자신이 즐거워하지 않으면 '좋아했던 일'을 과감히 관둔다. 애써 견디지 않는, 일직선이 아닌 사선의 길을 걷는, 적당히 열심히 하고 잘 포기하는 샐리를 보며 노력과 열정의 과대포장에 지친 우리가 필요한 건 이런 마인드가 아닐지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헤르만 헤세 외 지음, 강명희 외 옮김 / 꼼지락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세상에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보다 더 명확한 것은, 이런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어느 누구도 평안하게 살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이지. 하지만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니콜라이 레스코프, 낮도둑 中)

 

헤르만 헤세, 모파상, 괴테, 안드레센 등 14명의 대문호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가 수록된 <크리스마스, 당신 눈에만 보이는 기적>. 어렸을 때 한 번쯤은 읽어봤던 동화 <성냥팔이 소녀>부터 몰랐던 소설까지 그 안에서 크리스마스는 누군가의 행복임과 동시에 불행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주는 환희와 기쁨은 따뜻한 집안에서 트리를 꾸미고 음식을  차리며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가정에만 있고, 집 밖에는 불씨 하나가 없어 애타게 불을 찾는 사람부터, 전쟁, 고아, 폭력으로 얼룩진 사람들이 존재한다.

 

유감스럽게도 삶은 너무도 짧은데 겉보기에 중요한 불가피한 의무들과 과제들로 가득 차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아침마다 감히 침대를 떠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상은 처리되지 않은 서류들로 가득 차 있고, 온종일 우편물들이 두 배로 쌓여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두 아이들의 동화로 즐거운 사색 놀이를 더 할 수 있을 텐데. (헤르만 헤세, 두 개의 동화가 있는 크리스마스 中)

 

<전나무 이야기>는 숲속을 떠나간 다른 나무를 부러워하던 전나무가 잘려나가 트리에서 다락방에 처박혀 늙어 불쏘시개가 될 때까지를 그린다. <성냥팔이 소녀>에서 소녀는 성냥을 팔지 못하면 자신을 때릴 아버지가 있고, 거리에는 자신 같은 불쌍한 아이에게 손 내밀어 주지 않을 무심한 사람들만이 가득하다.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는 아기 예수를 찾는 대열을 이탈한 네 번째 동방박사가 가난과 폭력으로 얼룩진 사람들의 삶을 도와주고자 자신의 보석을 기꺼이 내어주며 자신이 병들고 나약한 노인이 되어서야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를 발견한다.

 

크리스마스라고 불을 켜서 환호하는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대문호라 불리는 작가들의 그려낸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각박하고 추운 결핍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기가 느껴졌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려낸 인물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자 했고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냥 따스하게 읽을 수 없었지만 따뜻했다면 이 때문인 듯 싶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은 나이가 들수록 생생해지고, 그래서 지금 아이들이 맞는 크리스마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얼음 절벽 中)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는 슬프고 아름답고 불쌍한 감정만이 있었다. 동화를 잘 읽지 않는 어른이 되어서야 동화는 삶이란 무거움을 이고지는 현재진행형의 발걸음이었단 사실을 깨닫는다. 방금 사랑의 온도계에 모인 성금이 작년에 비해 줄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삶이 팍팍해지며 이웃을 향한 온기는 줄었지만 빨간 온도계가 차 있다는 사실은 아직 온기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에는 모두가 온기로 가득한 하루였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게 맛있는 철학이라니 - 일상 속 음식에서 발견한 철학 이야기
오수민 지음 / 넥서스BOOKS / 201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붕어빵을 먹다가 칸트가 생각나고, 버터 성분을 보다가 데카르트가 떠오른다.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철학이 친근하게 느껴지게 된 건, 취향을 저격하는 음식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거의 나처럼 철학에 대해 오해하며 재미를 모른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공유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과거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손을 놓아버린 경험이 있었지만 다시 관심이 생긴 건, 쳇바퀴처럼 질문 지옥에 던져놓는 기존 방식이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소재에 철학을 살짝 가미했기 때문이다.

 

브런치에서 <철학 한 끼>라는 매거진으로 한차례 연재가 되었던 글은 저자가 일상 속에서 좋아했던 음식들 속에서 철학자를 연결하며 진행된다. 붕어빵을 먹다 떠오른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을 술술 읽어내려가게 만들지는 않아도 그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왜 이런 주장 펼쳤는지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있다. 철학과가 아닌 이상 철학 책을 펼쳐보는 일은 드물기 때문에 이건 마치 철학 주변을 맴도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배가 고프다고 느낀 것, 그래서 붕어빵을 사 먹으려고 생각한 것, 다 먹은 후 천 원어치만 더 살 걸 하고 후회한 것.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경험뿐만 아니라 나의 내면에서 일어난 생각이나 느낌 또한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 또한 붕어빵이라는 물체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일정한 부피를 가지고 특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에게 인식된다. (p. 48)

 

칸트는 초콜릿을 먹다가 불쑥 등장한다. 일반 녹차 킷캣과 킷캣 프리미엄을 이야기하며 녹차 함유량의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 키캣을 먹었다고 손해 본 느낌이 들진 않는다는 생각을 펼치며 이성적인 판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적당히 "아~ 이런 맛이겠구나" 생각이 들었다면 "완전 손해는 아니었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평가는 헤겔과 칸트의 논쟁으로 이어지는데 재미있다.

 

로아커, 레돈도, 킷캣으로부터 그것들을 모두 아울러서 설명할 수 있는 상위의 개념을 만들어냈다면 그것은 세 과자의 공통점만 쏙 골라서 만든 개념이라기보다, 길쭉한 웨이퍼, 막대 형식으로 돌돌 말아진 웨이퍼, 겉에 초콜릿을 코팅한 웨이퍼 등등 다양한 웨이퍼들을 모두 함께 포섭하는 개념이라는 것이 헤겔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보편 개념이란 현실 세계의 사물들과는 동떨어져 완전 불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 세계의 불완전함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 모두를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p. 95)

 

버터에 대해서도 데카르트와 연결한다. 녹아버린 버터를 보며 우리는 '아까 그 버터'라고 인식하는 모습을 보며 버터도 모양이 변할 수 있도, 변해도 버터라는 인식을 하게 되는 그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를 버터의 연장성이라 부르며 데카르트가 물체를 파악할 때 연장성에 근거하여 판단한다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사실, 우리가 쉽게 파악하는 건, 감각기관을 통한 인식이 아니라 나의 정신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보다 파악하기 쉬울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오해'라고 데카르트는 말한다. 우리가 감각기관을 통해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실제로는 나의 정신을 통해서 인식되고 있는 것이며, 결국 나에게 있어 가장 쉽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은 물체가 아니라 나의 정신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신에 의지해 판단한 나'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므로, 외부의 물체들을 판단함으로써 나 자신의 존재는 더더욱 분명해지게 된다. (p. 174)

 

철학은 '존재'에 대해 탐구한다.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의문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논리적으로 본질을 탐구한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데 이런 게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우린 먹고 살 걱정만큼이나 내가 왜 이러고 살까에 대한 고민을 한다. 먹고사는 것이나 사는 이유나 결국 인간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다.

 

내가 지금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철학인데, 내 삶에서 이보다 유용한 것이 또 있을지를. 아, 물론 여기에 대한 답을 '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규명한 후에야 가능해질 것이다. 그야말로 철학이 다룰 만한 질문이다. 역시, 오늘도 삶에는 철학이 필요하다. (p. 246)

 

책을 읽고 공자가 조선이란 꼰대 같은 나라를 만든 게 아니란 걸 알았다. 쾌락주의가 단순히 원초적이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어쩌면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는 편견처럼 철학은 '어려운 학문'이란 잣대로 진입장벽을 높게 설정하지 않았을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철학은 가장 실용적인 학문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월에 만나요
용윤선 지음 / 달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전작인 <울기 좋은 방>은 내가 읽은 책 중 가장 슬프고 힘든 책으로 꼽힌다. 책을 읽으면서 몇 번을 덮었는지 모를 만큼 작가님의 심정이, 정서가 가슴 깊이 와닿아 좋아하면서도 함부로 꺼내읽지 못하는 책이 되었다. < 13월의 만나요>도 혹시나 그럴까봐 걱정이 되었다. 13월이란 존재하지 않는 계절처럼 기약 없이 책장에 꽂혀질까 봐 조심스레 한 문장씩 읽어내려 갔다. 그녀를 스쳐간 인연들과 커피를 향한 애증 섞인 시선, 복잡하게 얽힌 마음의 실타래를 푸는 과정은 소복이 쌓인 눈밭에 내 발자국을 새기는 과정 같았다.


 

건조한 영혼 틈으로 스며드는 생각,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란 말 자체만을 생각해보면 살기 싫어진다. 사는 일이 너덜너덜해진다. 폐허가 될 때마다 사람에게 기대려고 해본 적 없었더도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 와 있는 듯, 기댈 사람이 누구라도 관계없다. (p. 19~20)



 

사람에 대한 감정으로부터 사람은 보호되어야 한다.(p.15)는 말처럼 그녀는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여 섣불리 다가서거나 다가오는 관계를 지양한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긴다. 매 장마다 주인공이 되는 인연과 장소는 경계하면서 기대었던 자신의 마음이 놓여있다. 너덜너덜 떨어질 듯 애처로운 심장을 꿰매주던 사람과 무심히 건넸던 질문들, 정확한 마음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시간과 놓지 못한 미련들을 정갈하게 정리한다.



 

이제는 그 소망조차 놓았으나 이것이 내 꿈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고 그 시절 슬픔도 깊어서 더 깊은 슬픔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슬픔은 또 오더라. 슬픔은 왜 끝없이 오는가. 꿈을 꾼다는 것은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겪은 것을 겪지 않기 위해 단단히 경계하고 살았는데 내 앞에 깊은 강과 험난한 바다가 있다. (p. 87)


 


나는 나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내가 아직도 소중한가 보다. 나와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이 깊어 멈출 줄을 모르는(p.38) 모습은 곧 나였따. 타인에게 상처도 주고 정말 무결한 사람처럼 구는 못된 사람과 티 나게 심술부리며 관심을 표현하기도 하는 보통 사람은 사랑을 만나며 특별해진다. 어쩌면 만남과 헤어짐, 태어남과 죽음처럼 알면서도 끌려가는 시간 속에서 사람이란 자산을 기억이란 생동감으로 바꾸었는지도 모르겠다.



 

태어나는 순간, 헤어지는 일은 만나는 일의 기약처럼 다가온다. 우리 모두 헤어지고 우리 모두 죽는다. 나도 헤어질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헤어지고 죽는다고 모두 헤어지고 죽는 것이 아니었다. 잘 헤어지지 못하고 잘 죽지 못하면, 이루지 못한 사랑은 이룰 때까지 사랑하는 수밖에 없듯 헤어지지 못하고 죽지 못한다. (p. 292)


 

단단했던 다짐과 철저했던 계획이 무용했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12월은 멜랑꼴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삶이 기록한 기억이 때론 독처럼 괴롭게도 만들고 새로운 기억에 지난 기억이 지워지기도 하는 시기는 아멜리가 그녀가 적어준 '지금부터 행복해지겠습니다'같다. 쓰지만 말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언어. 13월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이야기가 그리워진다(p.165)는 문장처럼 보고 싶은 사람, 보기 싫은 사람 모두 그리워하게 되는 묘한 계절의 신기루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