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임지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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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임지은, 한겨레출판, 2024, 초판 1)

산문, 에세이를 읽은 것이 참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뭔가 허름한 노포 술자리에서 임지은이라는 사람과 진지한 대화를 하며 술 한잔을 진하게 기울인 듯한 느낌이 든달까. 그녀가 내 곁에 앉아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으며,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최근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매우 진솔하게 말해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세이란게 이런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것이 매우 신선했다.

 

선생님, 에세이는 도대체 뭘까요? …… 그러니까 에세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말하기는 어렵고 급기야는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야말로 에세이인가 싶기도 하고 …… 아직까지 제게는, ‘나 자신의 이럴 수밖에 없음에 대한 글이긴 한데요.”(221~222, 우정)

 

저자의 말 대로라면, 작가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쓴 이 글이야말로 에세이인가 싶다.

 

 

-좋아함과 싫어함-

 

작가의 깊은 통찰에 탄복했다. 좋아하는 마음과 싫어하는 마음은 필연적으로 한 쌍이라는 부분을 읽으며 내가 왜 그토록 밋밋한 삶을 사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좋아하는 것이 없는 만큼, 싫어하는 것도 별로 없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길수록 거기에는 모난 마음들이 불현듯 솟아나는 나에게 짙은 애정과 미움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이다.”(7, 작가의 말)

 

내가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게 될수록, 그것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어떤 친구를 매우 좋아한다면, 그 친구가 내게 소홀히 대하는 경우, 나는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듯이 말이다. 작가의 이 통찰 덕분에 마음을 들여다보는 비법(?)같은 것을 하나 얻을 수 있었는데, ‘이유 없이싫어하는 마음은 분명 어떤 좋아하는 마음과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균등하지 않은 사랑’(15)이다.

비단 이 진실은 내 마음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내가 싫어하는 만큼, 다른 누군가도 나를 싫어할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쉽게 알아챌 수 있지만, 그가 나를 왜 싫어하는 지는 사실 잘 알아내기 어렵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지 생각해 본다면, 나를 싫어하는 그는 바로 그것이 싫었던 것일테니까.

 

 

-타인으로 인한 그늘-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지만, 모두 다 의존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표현대로 우리 모두는 최선을 다해 살아온 것만큼이나 타인으로 인한 그늘’(33)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심지어 그것은 자라나기까지 한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나보다 훨씬 잘 알려진 사람이기에 분명 많은 사람으로부터 수많은 말을 들을 것이다. 나 또한 지금껏 살아오면서 타인에게 나에 대한 다양한 말들을 들었다. 오늘만 해도 어떤 말이 내 기분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이 나를 흔들고 불쾌하게 했다. 하지만 나는 꼭 부정적인 방향으로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말 덕분에 내 삶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불필요한 눈치를 보며 힘든 시간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다. 비유해 보자면, 나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다. 수많은 말(파도)이 나를 이리저리 흔들어 댄다. 나는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게 무거운 평형추(타인으로 인한 그늘)가 필요하다. 타인의 말을 들으며 자라난 그 평형추는 큰 파도가 몰아쳐도 나를 안정감 있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라나는 그 그늘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가진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자신의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존의 세상을 벗어나려 애썼다. 자신의 경계를 끊임없이 재설정하고 배반(54)하며 살았다. 안정감 있는 평형추가 있었기에 작가는 좁은 연안을 벗어나 더 넓고 거친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는 작가가 그 흔들림과 든든함을, 밝은 면과 어두운 그늘을 함께 가져가려고 한 점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내가 더 오래 세상을 살아왔지만, 작가는 마치 인생 선배인 양 내게 아주 훌륭한 조언을 건네고 있었다.

 

 

-묘한 기시감-

 

이 책을 읽으면서 든 그 기시감. 너무도 이상했다. 뭔가 작가의 모습 속에서 내 어릴 적 모습이 겹쳐 보인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봐야겠다.

일단 어린 시절 가정환경으로 반지하. 맞벌이로 귀가가 늦은 부모님. 나를 위해 사주신 비싼 전집, 대백과사전. 그리고 그걸 열심히 읽는 나. 그 덕에 부모님보다 더 좋은 학력을 갖게 되었고, 인생을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술을 마셔도 절대 취할 때까지 마시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 취한 모습을 다른 이에게 보일 바엔 위험하더라도 그냥 집에 혼자 가버리는 나. 외로움에 사무쳐 친구보다는 연애에만 집중했던 대학 생활. 미친 듯이 이 세상의 모든 술을 다 마셔버리겠다는 호기로 매일 술을 마셨지만, 지금은 술을 거의 입에 대지도 않는 모습. 결정적으로! 작가의 동거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내 이름과 같다. 뭔가 이 부분에서는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작가의 마음과 생각을 따라가며 예전의 내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 보았다. 무엇이 달라졌고,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작가가 언급한 그 리셋 버튼’(177)도 지금의 내가 거의 매일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껏 내 인생에 후회할 일들이 너무도 많다.

 

작가는 화실에서 강사로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다. 이 부분 또한 내게 뭔가 깊은 울림을 주었다.

 

내가 도망가지 않으면 아이들도 도망가지 않는다. 내가 진지하게 대하면 아이들도 진지해진다. …… 아이들은 어른보다 심장도 빠르게 뛰고 체온도 높아서 그 열기로 뭐든 익힐 수 있다.”(192, 쓰잘데기 없는 예체능)

 

가르치는 사람으로서의 당당함, 진지함, 아이들을 존중하고 믿는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가르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내 아이들을 충분히 믿고 있는지를 반성해 본다. 작가는 내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사람, 뭔가 멋짐이 뿜뿜 느껴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과는 친구가 되어보고 싶다. 간절히 이런 친구를 사귀고 싶다. 어쩌면 작가는 내가 학생들 때문에 열을 뿜어내고 화를 토해낼 때,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사다 줄 것(208)만 같은 그런 친구다.

 

 

작가는 이미 충분히 든든한 어른이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 행복할 것이다. 나도 그처럼 행복한 사람이고 싶다.

 

어른들처럼 힘 있는 인간은 힘없고 연약한 인간을 사랑하고 지켜줄 수 있었다.”(227, 나의 쪼그라든 개구리)

 

같이, 많이 웃고 살아!”(247, 죽은 할머니 안심시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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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탐정 사무소 2 - 울음은 금이 될 것이다, 제10회 브런치북 특별상 수상작 연작
이락 지음 / 안녕로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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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시 탐정 사무소 (이락, 안녕로빈, 2024, 11)

글이 유독 매끄럽고 편안하다. 를 억지로 추리소설 속에 억지로 끼워 넣었지만, 그 설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저자의 친필 사인이 담긴 책을 받았다. 매력적인 전편만큼 후속편에서도 색다른 즐거움을 기대하면서. 역시나 이번에도 그 기대를 충분히 충족할 수 있었다. 읽기 전 느꼈던 아쉬운 점은 오직 책이 전편보다 얇아졌다는 것뿐이었다. (전체 쪽수는 줄었지만, 오히려 에피소드는 늘었다. 그 점은 매우 마음에 들었다.)

 

감사하게도 많은 독자가 소설적 설정(시를 읽고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탐정)을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8, 작가의 말)

 

나만 유독 이 소설적 설정에 매력을 느낀 것이 아니란 것을 작가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의 매력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본래의 의도를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듯하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에서 사건을 해결할 실마리가 되는 단서가 로 대체된 점만 뺀다면, 이 책은 명탐정 셜록과 왓슨의 활약으로 해결되는 흥미진진한 사건들로 가득하다.

 

 

-‘로 마음을 전하다. -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은 속마음을 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말을 못 하는 문제만은 아니다. 내 마음을 적절한 단어로 바꾸어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한다는 사실 자체가 어려운 것이다. 성격상의 문제로 볼 수도 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속마음을 더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다른 이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만 끙끙 앓는 상태를 어른스러움이라 표현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소통의 어려움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말할 수 있지만 말하지 못하는 상황, 마음을 전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시 탐정 설록과 그의 조수 왓슨이 모두에게 필요하다.

 

물어봤더랬죠. 하지만 도무지 말을 하지 않습니다.”(15, 명태)

 

왜들 그럴까. 왜 말을 하지 못하는 걸까 질책할 필요가 없다. 누군가에겐 입을 떼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것보다도 어려운 일일 수 있으니. 대신 그 털어놓을 수 없는 심정을 로 공감해줄 수 있으면 어떨까.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대신해줄 수 있는 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는용기가 되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전한다는 것은 매우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내 마음에 와닿은 ’-

 

이번 책에서 내 마음에 와닿은 시는 김종길의 성탄제. 특히 다음 구절이 내 마음에 꽂혔다.

 

어느새 나도 / 그때의 아버지만큼 나이를 먹었다.”(52, 똑같은 부자(父子))

 

나는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다. 사실 아버지를 증오한 시간이 더 많았다. 아버지의 말과 행동이 내 어린 기억 속에 좋지 않게 박혀 있는 뺄 수 없는 가시같은 상처가 된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젠 나도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세 아이 모두 나보다 엄마를 더 좋아한다. 그럴 땐 좀 서운하기도 하다.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가 되어보니, 아버지의 감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아들의 마음이 어떨지도 생각해볼 수 있다. 내가 아들일 때, 내 아버지가 했던 말과 행동을 떠올리며 아들에게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는 내 거울일 것이다. 아버지 덕에 나는 아들과 잘 지낼 수 있길 바란다.

 

저자는 자신에게 맞는 시를 만나면 자연스럽게 끌리게(108)’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사실 좋아하는 음식에 끌리는 것만큼 시가 끌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음식이 없다. 배만 부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완승의 시 낭독이 내게도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낭독은 나같이 시에 몰입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가슴으로 읽지 않는 낭독이 이 친구의 장점이죠. 듣는 이로 하여금 작품 자체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낭독이랄까요.”(110, 해바라기 살인 사건)

 

그리고 비록 는 아니지만, 시를 이용한 관계 회복 프로그램이 참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프로그램은 정부가 예산을 들여 지원해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면 나도 적극 참여해보고 싶었다.

 

신청자는 관계 회복을 원하느 사람과 관련된 시 한 편을 짤막한 사연과 함께 프로그램 주최 부서로 보낸다. 담당자는 사연의 진정성이나 초청에 응할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하여 선별한 사연을 설록에게 보낸다. 그러면 설록은 신청자가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사무소로 초청하여 대화를 나누며 둘의 관계 회복을 돕는다.”(83, 금이 될 테지)

 

 

-시 탐정이 된 이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탐정보다 형사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사설탐정은 불법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일본이나 영국만큼 탐정 관련 유명한 작품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시 탐정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처음에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를 약간 변형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형사가 아니라네. 내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도 있고, 진실을 밝힐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자유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야.”(76, 과거를 묻고)

 

자유.” 나는 저자가 그 자유로움을 위해 탐정을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를 비롯한 문학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법과 다르다.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정의로운가를 판가름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법보다 더 정의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법은 최소한의 정의이지만, 자유는 우리를 가장 정의로 이끌어줄 수 있다. 그래서 시 탐정 설록은 진상을 밝히는 것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저자에게 는 무엇일까. 시는 보통의 이야기(128).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란다. 그러니 수업 시간에 배우는 천편일률적인 해석은 사람의 다양한 감정을 무시하는 행위(136)가 되는 것이다. 저자와 마찬가지로 학교에 근무하는 나로서는 가장 공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한국사 수업은 우리 현실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사실 나는 시험에 무엇이 나오는지를 가르쳐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낀다.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길러야 하는 것보다 문제를 풀 때 필요한 함정을 기억해야 하는 그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오늘도 갈등을 느꼈다. 과연 학생에게는 시험이 중요한가, 현실이 중요한가.

 

흥미진진한 이 추리소설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또 다른 후속작을 예고했다. 마치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터미네이터의 엄지처럼. 언젠가 다시 돌아올 후속편에서 시 탐정 설록(셜록)과 그의 조수 완승(왓슨), 그리고 괴도 류반(루팡)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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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 편이 되지 못할까 - 타인을 신경 쓰느라 내 감정을 외면해온 당신에게
정우열 지음 / 김영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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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나는 왜 내 편이 되지 못할까 (정우열, 김영사, 2024, 11)


최근 여러 방송에 출연한 정신과 의사 정우열이 썼다.(자신의 이름 자체가 브랜드가 되는 이분의 삶은 내 목표다.) 책은 마치 누군가의 사연을 차분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읽어주는 어떤 라디오 진행자의 목소리 같다. 먼저 저자는 신청자의 사연을 정성스럽게 읽는다. 주인공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그리고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담담한 목소리로, 하지만 따뜻한 애정을 담아 소개한다. 주인공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진심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나선 따끔하게 신청자에게 조언을 던진다. 여기부터 마치 솔로몬의 판결을 보는 듯한 분위기로 바뀐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라는 그의 공식 직함이 힘을 발휘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지금 주인공이 왜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되었는지, 주변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런 행동들을 하는지 속 시원하게 분석하고 풀이해준다. 한참을 고민해도 답이 보이지 않았던 그 답답한 문제가 단숨에 간단해진다. 그리고 해결책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네 마음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모든 사연에 대한 저자의 해결책은 이 문장으로 귀결된다. 결국엔 모든 답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이다. 내 마음을 알아차려야 내가 건강한 상태를 만들 수 있고, 내가 건강해야 주변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은 그 건강한 관계를 토대로 절대로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그 지옥같은 상황도 조금씩 바꿔나갈 수 있게 된다. 모든 변화는 결국 내 안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연을 읽어주는 의사-

 

이 책에는 정말 많은 사연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매우 익숙하다. 마치 내 이야기 같거나, 아니면 바로 옆집에서 있는 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저자는 이 사연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전하고자 했을까.

 

각 사연에 공감하고 나에게 해당되는 솔루션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가 가장 원하는 것은 따로 있습니다. 상황은 다 달라도 , 사람의 마음은 이렇구나하는 깨달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8, 작가의 말)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의도를 잘 읽어낼 수가 없었다. 솔직히 각 사연에 공감하는 것도 어려웠다. 그만큼 내가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감정의 무감각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도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사연들 속 누군가의 모습과 비슷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상황에 부닥친 사연을 읽으면서 공감하기 어렵지만, 일정 부분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고,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사람이 이런 마음을 당연히 느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만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는 점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감정 표현에 매우 서툴렀다. 대인관계에도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어서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 사람이 많지 않은 편이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도 어려워하고,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라고 스스로 느낀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읽어주는 사연은 이렇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해결책을 제안하는 동시에 내가 느끼는 감정적 어려움이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 마음과 친해지게 도와드릴게요-

 

저자는 유튜브 메인 화면에 내 마음과 친해지게 도와드릴게요라는 문장을 써 두었다고 한다. 사실 내가 가장 서툴고 어려워하는 것이 바로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다. 왜 그리도 어렵고 힘들었는지를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해, 그리고 타인에 대해 지나치게 대단한 위치에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막상 내면을 바라보면 생각이든 감정이든 기대에 비해 형편없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죠.”(7, 작가의 말)

 

결론은 내가 너무 형편없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거다. 나 스스로 내가 형편없음을 무의식적으로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별로인 자신을 감추기 위해 나와 마주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하며 살아왔다. 생각해보니 그 허무맹랑한 자신감은 나만 우선 생각하는 이기심이었다.

 

 

-내 감정을 마주하기-

 

저자는 지속적으로 나 자신과 마주하라고 주문한다. 게다가 저자는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일기를 써보길 추천한다. 이미 감정이 완전히 메말라버린 내겐 너무도 어려운 주문이다. 그래서 고민했다. 일기랍시고 매일 기록을 블로그에 남기고 있지만, 저자가 주문한대로 감정을 느끼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약간 색다르게 접근해보고 싶었다.


이 책에 소개된 사연이 매우 다양하다 보니 내 상황에 거의 딱 들어맞는 것들이 많았다. 이 사연 속 주인공들이 느끼는 감정을 내 상황에 이입해보는 것이다. 게다가 그 상황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해결책도 함께 나와 있으니 더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내 상황에 대한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선택한 사연은 청소년기 자녀가 있는 부모’, ‘인생 첫 좌절을 경험한 사람’, ‘부모(처가 포함)와 갈등을 빚고 있는 중년의 자녀그리고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이다. 이 사연 속 주인공의 상황을 자세히 읽어보고, 나와 비슷한 점, 다른 점을 찾아 그들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정리해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 감정을 발견한다기보다 이 사연의 주인공이 경험한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는 연습이 되었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파악하거나 공감해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깊이 있는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매우 큰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연 속 주인공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는 연습을 하는 것도 내겐 꼭 필요한 노력이라고 판단했다. 비록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결국, 모든 것은 내면의 문제다. 내 마음이 건강해야 주변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나는 지금 주변과 관계 맺는 것을 어려워한다. 분명 내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신호다. 이것을 알아차리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인식한 것 자체가 매우 큰 성과라 생각한다. 나도 저자의 조언대로 감정 일기를 써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 책을 읽고 그것에서 느낀 생각을 솔직하게 옮기는 서평을 더 열심히 한다. 뭔가 나와 다른 생각과 시선을 가진 사람이 색다른 주장을 하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나와 다른 사람이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대해 써 내려간 책이 가장 매력적이다. 어찌보면 이 서평 작업도 저자가 말한 감정 일기의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지 않을까 스스로 위안을 삼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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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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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김명임 외, 한겨레출판, 2024, 개정판 1)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발행된 잡지, 신여성. 교과서에서 보았던 표지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매우 궁금했다. 또한, 여고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정작 역사 교과서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매번 학생들에게 설명하면, 정작 학생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 차별이나 유리천장에 대해 언급하면 그런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인 양 반응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왜 그럴까. 100년 전 당당히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도 이 책의 제목처럼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남자의 여자 지우기-

 

이 책을 읽으니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모든 원인은 남자였다. 남자가 만든 질서 속에서 여자가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시작된 문제였다. 멍청한 남자들은 여자가 자신들을 넘어설까 두려웠던 것이 분명하다. 남자는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여성을 옭아맬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려고 몸부림쳤다. 그것이 잡지 신여성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여자의 정체성을 지우고 그들에게 죄의식을 덧씌움으로써 남성의 질서 속으로 순순히 들어오게끔 만들어내는 남자들의 모습에 나는 부끄러웠다. 그들은 조선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을 테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여성의 소비를 여성의 허영으로, 여성의 허영을 여성의 본능으로 만들어, 새롭게 등장한 모던걸을 구제불능의 정신적 미성숙자로 만들고 싶어 한 남성의 욕망과……”(62, 1장 모던걸이 온다.)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성들이 남성의 질서를 내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존재하며 남성과 동등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여성 대부분은 순응했다. 적당한 수긍 정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복종했다. 여자는 스스로 복종하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 내 삶이 각박한데 여성의 억압된 삶이 들여다보이겠느냐는 핑계를 대면서 나는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나니 오히려 페미니즘에 공감하게 되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몸뚱아리 때문에 들여다볼 수 없었던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100년 전 지질한 남성들의 목소리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남자 선조들 덕분에 내 부족한 생각과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

 

신여성들은 관찰을 통해 재현됨으로써 존재한다. 어떻게 보일 것인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가 여성의 존재 조건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때 시선은 마땅히 남성 주체에게 속해 있다. 설령 그것이 여성 자신의 시선인 듯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내면화된 남성적 기준이 분명하게 존재한다.”(97, 2. 신여성 수난사)

 

가장 많이 화가 나는 것은 그 지질한 남성의 목소리가 당대 천재라 불렸고,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던 이광수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자치를 누리고, 일제처럼 강대국이 되기 위해 민족 개조를 외쳤던 그 사내 말이다. 그 민족 개조 타령이 단순히 허상이었다는 것보다도 민족 개조를 위해선 여성이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결국, 민족 개조는 남자들이 할 수 없고, 여자들에게 떠넘겨야 할 일이었다. 일제에 빌붙어 자치를 허락받았으면서, 결국 민족 개조의 책임은 여자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 그들이 더욱 경멸스러웠다.

 

여자들이 모성 중심의 교육을 받지 않고 남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의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남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과 같이 위태롭고 어리석은 일이다.”-이광수, 모성 중심의 여자교육-(115, 3. 문제적 기호, ‘여학생’)

 

 

-여자의 신여성 되기-

 

수백 년 동안 집 안의 존재로서 목소리조차 울타리 밖으로 넘지 말아야 했던 여성들이 밖에, 거리에 등장하자 하나의 사건이 된다. ‘신여성이라 불린 이 여성들은 책보를 끼고 학교에 다니고 쇼핑하러 진고개에 가는 등 욕망의 흐름에 따라 사회 곳곳을 누볐다. …… 학교를 마치고도 집 밖에 남으려고 했다. 그뿐 아니라 학교 교육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익힌 여성들은 기존 조선 사회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 거칠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공공연히 내기도 했다.”(7, 머리말)

 

100년 전, ‘신여성이 등장했다. ‘구여성과 대비되는 존재. 근대 문물과 함께 등장한 존재. 그들은 시대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여성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자 노력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렇게 등장한 신여성들은 존재 자체가 엄청난 관심거리였다고 한다. 지금 유명한 연예인보다도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관심이 그녀들에게 마땅히 감당해야 할 왕관의 무게였을까, 가혹한 폭력이었을까 하는(71) 질문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처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N번방 사건, 인하대 사건 등으로 미루어볼 때, 여자에 대한 남자의 시선은 아직도 100년 전 관음증 수준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말부터 여성들은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가고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사람다운 여자로 자기 개성껏 사는 삶은 순탄치 않았다. …… 그러나 한번 거리로 나선 여성들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살아남는다. 여성들은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135, 3. 문제적 기호, ‘여학생’)

 

힘들지만 나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 거라 믿는다. 100년 전 그 신여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가 알게 된다면 말이다. 남자는 선조의 지질한 면과 여성의 가혹했던 삶을 통해 반성할 수 있을 것이고, 여자는 선조의 당당하고 멋진 노력을 본받아 지금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될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82년생 김지영을 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 전에도 신여성이 살았고, 그들의 삶과 82년생 김지영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1차 사료를 읽어야 하는 이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1차 사료를 읽을 수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은 기본적인 언어 능력이 부족하므로 사료를 찾아 읽는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과 같이 1차 사료를 풍부하게 읽고 제공해주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이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일제 강점기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관순을 보며 민족주의를 떠올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그녀는 당당한 신여성,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관순이나 민족=조선을 상기시키는 흰 저고리 검정 통치마가 당시에는 오히려 근대서구에 가까운 함의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가 되면 이 스타일은 여학생 즉 신여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코드로 자리를 잡는다.”(25~26, 1장 모던걸이 온다.)

 

그리고 당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투나 문구를 보면, 지금과 다른 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런 점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관 상영 중간 휴식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나 변사가 나와 영화를 설명하는 장면 등, 지금과 달라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도 다양한 활용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고민해보면 다양한 학생활동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슯흐다! …… 십분 휴식이다. 또 변사가 나와 다음 영화 예고를 하느라 시끄럽다.”(183)

 

슯흐다이 표현 참 재미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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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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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조형근, 한겨레출판, 2024, 초판 1)

사회학자가 역사 속에 살다간 다양한 사람들에 애정을 가지고 써 내려간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깊이 있게 추적한 18개의 이야기와 그 속에 살다간 사람들이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껏 내가 공부한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 선명한 선과 악의 세상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현재를 만들어낸 사람 중에서도 특히 경계를 살아간 삶에 주목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딱 중간에 걸친 사람들. 나는 그들의 삶을 보며 인간의 삶이 참으로 다채롭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며, 나와 타인을 나누는 기준도 역시 불명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모두 기억으로연루(連累)’되어 있다. 홀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뿌리, 역사-

 

현재에 뿌리내리지 않은 역사는 모든 공허하다. 모든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나 사건의 집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기억해야 한다는 호소나 무조건 암기하게 만드는 당위(수능 한국사 필수 응시)는 사실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없다. 역사를 통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어떻게 주변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역사는 그저 쓸모없는 도구가 될 뿐이다.

저자는 현재를 말하기 위해 역사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리고 역사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연루된 역사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고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 (인물들은)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그들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을 함께 보려 했다.”(11, 서문)

 

그러니 저자에게 역사 연구는 교훈과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다. 왜 우리가 이런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이런 저자의 태도가 학생의 역사 수업에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 학습은 과거 사실에 대한 암기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자기 정체성 확립이어야 한다. 나 자신과 연계되지 않은 사실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지구에 살지 않는 외계인의 마음이 우리에게 중요한가. 식민 지배와 착취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는 일본 집권자들의 마음을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연루(連累)와 경계(境界)-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한다. 마치 사건 현장에서 단서를 찾는 형사와도 같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무엇을 기억에서 지우는지, 어떻게 기억을 조작하고 새로 만들어내는지를 밝힌다. 그 부분이 내겐 가장 큰 충격이었다. 또한, 역사적 상황이 단편적이지 않고, 놀랍도록 아이러니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두 연루된 장면이고, ‘경계를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이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내리는 결정이 모여 역사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로 연결되고, 기억되었으며, 현재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저자가 말한 그대로 놀랍도록 재미있었다.

 

어쩌다가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하게 됐을까? ……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본군 일부가 그렇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27, 1. 역사의 후퇴 앞에 리샹란을 생각하다.)

 

연루(連累). 사실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다. 경계(境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단편적으로 정리된 정답들 속에서 볼 수 없었던 실제 상황을 보게 한다. 삶과 삶이 연루된 경계 속에서 더 풍성한 역사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 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현실에는 눈에 보이는 명확한 구분선이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서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이분법에 갇혀 있는 사람보다는 혼란스럽겠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삶은 더 큰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남한에 사는 나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경주라는 공간에 국한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의 고등학생은 일본에서 한반도로, 다시 만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은 일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핍박받는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들은 일본의 팽창과 함께 상상할 수 있는 지평도 넓어졌다. 사상과 이념, 지리 속에 갇힌 지금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여태껏 생각해볼 수 없다.

 

 

-별 없이 걷는 법-

 

저자의 역사 인식과 도구는 현실을 이해하는데 놀라운 혜안을 제공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실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그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불안하다. 정답을 맞히는 것만이 전부인 삶을 살아온 나는 사실 이런 방법이 매우 두렵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준 없이 혼란스러움을 참아내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깜깜한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그런 나의 마음을 미리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마지막 이야기에 상하이 밀정의 이야기를 실었다. 일본군보다도 더 독립운동가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밀정. 누가 밀정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떻게 밀정을 찾아내야 할지 아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서로를 의심하고 상처 내고 파괴하는 것 말고는. 그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내게 전하는 마지막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깜깜한 밤. 앞으로 나아갈 방법에 대한 조언이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302, 18. 별 없이 걸었다 캄캄한 식민의 밤을)

 

결국은 연루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를 강제 동원해 지은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캄캄하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계속 앞으로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콰이강의다리위에조선인이있었네 #조형근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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