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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조형근, 한겨레출판, 2024, 초판 1쇄)
사회학자가 역사 속에 살다간 다양한 사람들에 애정을 가지고 써 내려간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깊이 있게 추적한 18개의 이야기와 그 속에 살다간 사람들이 살아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지금껏 내가 공부한 역사는 무엇이었을까 고민해보게 된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 선명한 선과 악의 세상에 대해서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저자는 현재를 만들어낸 사람 중에서도 특히 ‘경계’를 살아간 삶에 주목했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딱 중간에 걸친 사람들. 나는 그들의 삶을 보며 인간의 삶이 참으로 다채롭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좋고 나쁨, 옳고 그름의 경계가 매우 불분명하며, 나와 타인을 나누는 기준도 역시 불명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자의 주장처럼 우리는 모두 기억으로‘연루(連累)’되어 있다. 홀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재의 뿌리, 역사-
현재에 뿌리내리지 않은 역사는 모든 공허하다. 모든 역사는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배웠다.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나 사건의 집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순히 기억해야 한다는 호소나 무조건 암기하게 만드는 당위(수능 한국사 필수 응시)는 사실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없다. 역사를 통해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서 있는지, 어떻게 주변 사람들과 연계되어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면 역사는 그저 쓸모없는 도구가 될 뿐이다.
저자는 현재를 말하기 위해 역사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그리고 역사는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연루된 역사다. 우리는 서로 얽혀 있고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 (인물들은) 사랑하고 실수하는 인간, 꿈과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 이해하려 애썼다. 그들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 역사가 그들에게 져야 할 책임을 함께 보려 했다.”(11쪽, 서문)
그러니 저자에게 역사 연구는 교훈과 정답을 찾는 행위가 아니다.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이다. 왜 우리가 이런 모습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이런 저자의 태도가 학생의 역사 수업에도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 학습은 과거 사실에 대한 암기가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자기 정체성 확립이어야 한다. 나 자신과 연계되지 않은 사실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다. 지구에 살지 않는 외계인의 마음이 우리에게 중요한가. 식민 지배와 착취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려는 일본 집권자들의 마음을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가.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연루(連累)와 경계(境界)-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추적한다. 마치 사건 현장에서 단서를 찾는 형사와도 같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무엇을 기억에서 지우는지, 어떻게 기억을 조작하고 새로 만들어내는지를 밝힌다. 그 부분이 내겐 가장 큰 충격이었다. 또한, 역사적 상황이 단편적이지 않고, 놀랍도록 아이러니할 수 있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모두 ‘연루’된 장면이고, ‘경계’를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복잡하고 다채로운 인간이 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내리는 결정이 모여 역사의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로 연결되고, 기억되었으며, 현재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는 저자가 말한 그대로 놀랍도록 재미있었다.
“어쩌다가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가담하게 됐을까? ……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한 일본군 일부가 그렇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참가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27쪽, 1. 역사의 후퇴 앞에 리샹란을 생각하다.)
연루(連累). 사실 이 단어가 주는 느낌은 그리 좋지 않다. 경계(境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두 단어는 단편적으로 정리된 정답들 속에서 볼 수 없었던 실제 상황을 보게 한다. 삶과 삶이 연루된 경계 속에서 더 풍성한 역사상을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금 우리 현실을 이해하는 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 현실에는 눈에 보이는 명확한 구분선이 없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경계를 넘어서면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 이분법에 갇혀 있는 사람보다는 혼란스럽겠지만, 경계를 넘나드는 삶은 더 큰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남한에 사는 나는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경주라는 공간에 국한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일본의 고등학생은 일본에서 한반도로, 다시 만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식민지 조선인은 일본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핍박받는 2등 시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들은 일본의 팽창과 함께 상상할 수 있는 지평도 넓어졌다. 사상과 이념, 지리 속에 갇힌 지금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고 살아왔다는 것을 우리는 여태껏 생각해볼 수 없다.
-별 없이 걷는 법-
저자의 역사 인식과 도구는 현실을 이해하는데 놀라운 혜안을 제공한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껏 우리가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현실이 혼란스럽다고 해서 그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무언가 불안하다. 정답을 맞히는 것만이 전부인 삶을 살아온 나는 사실 이런 방법이 매우 두렵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기준 없이 혼란스러움을 참아내는 것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깜깜한 밤길을 홀로 걸어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자는 그런 나의 마음을 미리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마지막 이야기에 상하이 밀정의 이야기를 실었다. 일본군보다도 더 독립운동가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밀정. 누가 밀정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떻게 밀정을 찾아내야 할지 아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서로를 의심하고 상처 내고 파괴하는 것 말고는. 그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저자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것이 내게 전하는 마지막 조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깜깜한 밤. 앞으로 나아갈 방법에 대한 조언이다.
“사방이 캄캄한데 어쨌든 나아가야 했다. 싸우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반성하는 수밖에 없었다. 별 없이 걷는 법을 배워야 했다. 상처 입은 채 서로 연루될 수밖에 없었다.”(302쪽, 18. 별 없이 걸었다 캄캄한 식민의 밤을)
결국은 ‘연루’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이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일본군이 연합군 포로를 강제 동원해 지은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서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캄캄하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 계속 앞으로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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