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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점이 온다 -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
레이 커즈와일 지음, 김명남 외 옮김, 진대제 감수, 정재승 해제 / 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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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특이점이 온다 (레이 커즈와일, 김영사, 2025, 21)

 

20년 만에 다시 찍은 책이라기엔 너무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왜 이 책을 지금에야 알았을까. 세계적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기술이 인간을 초월하는 순간특이점이 곧 다가온다고 예측한다.

 

특이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미래에 기술 변화의 속도가 매우 빨라지고 그 영향이 매우 깊어서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시기를 뜻한다.”(41, 1장 여섯 시기)

 

나는 과연 특이점을 만날 수 있을까. 이 책에서 언급된 그 시점은 바로 2020년대에서 2030년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AI가 우리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바로 이 지점을 그는 20년 전에 예측했었다. 그래서 이 책은 출간 당시부터 앞으로 천 권의 SF를 탄생시킬 책이란 찬사를 받았다. 이 책에서 예측한 장면을 다룬 SF 소설들을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만큼 내가 아는 근미래의 모습들은 이 책에서 출발한 것들이 많았다.

 

다양한 분야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특이점을 예측하며, 이에 대한 논쟁까지 담고 있는 방대한 분량의 책이지만, 결론은 매우 간단하고도 분명하다. 바로 특이점이 온다.”이다. 저자는 특이점이 왜 올 수밖에 없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그것을 위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친절하게 안내한다. 다만, 그가 다루는 영역이 너무 방대하고 상세한 연구 성과를 담고 있어서 나 같은 평범한 지적 수준으로는 한 번에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예측이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엄격한 과학적 분석에 근거하여 나온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를 바탕으로 예측할 수 있고, 대비할 수 있고, 논쟁할 수 있다.

 

 

-미래 예측이 어려운 이유-

 

저자의 주장이 우리에게 매우 충격적인 이유는 우리가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이유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한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란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역사를 학습하기 때문에 갖게 되는 고정관념이다. , 역사 발전 과정처럼 미래도 선형적으로 증가할 것이라 기대한다는 점이다. 과거 인류 문명의 발전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래도 그처럼 빠르게 발전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기술 발전이 또 다른 기술 발전을 낳고, 그 기술들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더욱 빠른 속도로 기술 발전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수확 가속의 법칙이다. 그래서 저자는 가까운 시일에 모든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무한대의 발전이 나타날 것이지만, 우리는 그런 모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본다. 저자는 미래의 길을 찾는 사람이다. 우리는 현실에만 발을 딛고 살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교사인 내가 학교가 사라질 것이란 예측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학습은 일단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겠으나, 뇌 자체를 온라인에 접속할 수 있게 되면 거추장스러운 과정(학교 교육, 학습 등등) 없이 곧바로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다운로드 받게 될 것이다. ……노는 것 역시 지식을 창조하는 일이 될 테니, 사실상 일과 놀이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없어진다.”(422, 6장 어떤 영향들을 겪게 될 것인가.)

 

-G.N.R(유전학, 나노 기술, 로봇 공학)-

 

미래 예측이 집약된 부분이다. 저자는 인간의 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연구처럼 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이 인류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 나노 기술이 적용될 것이란 점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뇌에 있는 뉴런을 나노 기술로 만들어내서 생물 뉴런과 전자 뉴런이 서로 연결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뇌가 가진 생물학적 한계를 컴퓨터와의 연결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거기에 인체를 로봇으로 대체해나갈 수 있다면 뇌의 한계뿐 아니라 인간이 가진 한계 자체를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이른바 생명이 나노 기술의 도움을 받아 로봇으로 그 한계를 대체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예측을 가장 먼저 소설가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저자가 예측한 모습들을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은 쉽게 구체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소설가들이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근미래에 발생하게 될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그걸 읽기 쉬운 소설로 다양하게 그려낸다면, 그것들을 일반인들은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와 웹툰 같은 형태로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 도래할 것이다. 다음은 사회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다양한 매체 속에 묘사된 상상 속 모습들을 분석하여 어떤 문제들이 발생할 것인지 판단하고,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제 마지막은 법학자와 윤리학자들이 나서야 한다. 법적으로 발생할 문제를 미리 대비하고, 윤리적으로 세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모든 협력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면, 기술 발전이 우리 사회에 끼칠 중대한 위험을 줄여나갈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급변하는 기술을 인류의 소중한 가치들을 진작하는 데 사용하면서 한편으로 방어 능력을 키워가는 수밖에 없다.”(600, 8장 뗄 수 없게 얽힌 GNR의 희망과 위험)

 

아무래도 내가 저자와 달리 인문학적 가치를 더 중요하나 보다. 저자는 기술 발전이 가져올 위험은 기술 발전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우고 있는데, 사실 나는 그런 기술적 균형이 쉽게 깨질 수 있고, 미래에 균형이 깨진 순간은 지금보다 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당연히 지금보다 기술 수준이 매우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에 대한 논란-

 

특이점에 도달한다면, 기술(기계)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다면 과연 인간은 존재할 수 있을까. 쉽게 예를 들자면 신체 대부분을 기계로 대체한 인간은 인간이라고 볼 수 있을까. 뇌에 나노 기술로 만든 인공 뉴런을 넣어 인터넷에 실시간으로 접속이 가능한 인간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시험볼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이 가장 논쟁을 불러일으킬 내용이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를 인간으로 볼 것인가.” 앞으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겠지만, 사실 나는 보수적인 평범한 사람이다 보니, 인간 고유의 영역이 남아 있길 기대했는가 보다. 그런데 저자는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의 신체가 모두 기계로 대체된다고 하더라도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계와 융합해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고 더 빠르게 발전할 수 있다고 본다. 심지어 생물로서 인간이 모두 사라지고, 이 지구상에 기계만 남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기계가 곧 한계를 극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매우 놀라운 생각이다.

 

특이점 이후에는 인간과 기계 사이에, 또는 물리적 현실과 가상현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질 것이다. 그때에도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인간성이란 게 있을까? 물론이다. 늘 현재의 한계를 넘어 물질적, 정신적 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인간의 고유의 속성은 여전할 것이다.”(45, 1장 여섯 시기)

 

인간 복제는 잠깐은 논란의 대상이 되겠으나 곧 급속히 널리 받아들여질 것이다. 이제껏 등장한 모든 생식 기술이 그랬다.”(317, 5GNR)

 

 

-발상의 전환-

 

저자는 아주 쉽게 시공간을 넘나든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설명이 이 방대한 분량과 난해한 용어들을 아주 재미있게 만든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20억 년 전 박테리아가 20억 년 후 인간 존재에 대해 상상하는 장면이다.

 

나는 우리(박테리아)들이 사회를 이루게 될 거라고 생각해. 우리들이 하나의 세포로 뭉치고, 그 세포는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유기체(인간)처럼 행동하는 거지. 물론 능력이 훨씬 뛰어난 유기체가 되겠지.”(418, GNR)

 

박테리아가 생물학적 진화를 바탕으로 인간과 같은 유기체로 변화했음에도 그들의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기계적 진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존재(포스트 휴먼?)가 되더라도 그들의 의미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간단한 전환만으로도 쉽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면서 동시에 저자의 주장에 설득력을 높인다.

 

레이 커즈와일은 자기 이름을 딴 발명품과 회사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건강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이 있어 수많은 처방을 받고 있으며 다양한 책을 쓰기도 했다. 공자의 말씀이 생각난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 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 하다.” 저자는 분명 이 모든 것들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토록 방대하고 세세한 예측을 할 수 없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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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가 AI 시대를 산다면 - 2500년을 초월하는 논어 속 빛나는 가르침
김준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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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공자가 AI 시대를 산다면 (김준태,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논어를 다룬 책은 이번이 세 번째 읽는다. 저자와 출판사는 모두 다르지만. 그들 중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논어의 내용을 세세하게 분해하여 범주화 시켰다는 점이다. 각각의 구절을 하나씩 나열하여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해하기 쉽게 비슷한 것들끼리 묶어 둔 것이다. 전후 맥락을 이해하기엔 조금 어렵지만, 이런 식으로 그 의미를 강조하는 것도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주자의 주석서보다 이런 형태가 더 공부하기에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더 쉽게 다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 더더욱 사람이 먼저다.

2, 사람다움을 지키는 기준.

3,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들(관계)

4,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

5. 그리고, .(위 범주에는 들지 않지만 중요한 다양한 개념들)

 

 

저자가 정한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친근감이 생긴다. 논어가 어려운 철학 서적이 아니라 일종의 실용서 또는 자기계발서 같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됨을 강조하고, 어떻게 해야만 사람됨을 지킬 수 있는지 방법을 제시하는 것 등은 결국 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일종의 지침서가 되어 주기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 각 나라의 지배층은 부와 이익, 영토라는 철기 사용의 결과물에만 매혹되었을 뿐, 문명의 전환을 아우르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 새 시대에 어울리는 가치관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국강병을 강조하고 물질적인 이익을 우선하다 보니 사회는 혼란에 빠져들었습니다."(5, 프롤로그)

 

 

저자는 지금 우리도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혼란을 겪는 문명의 전환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500년의 시간을 건너 논어를 다시 지금 소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도 그 의견에 동의한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얼마 전 동아시아사 수업을 하면서 이 책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조금 더 소개해주었다면 좋았겠다는. 사실 주자가 강조한 사서가 왜 오경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를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주자도 저자처럼 송 대 현실을 문명의 전환기라고 판단했던 것이고, 사회적 혼란을 바로잡을 방향을 제시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래서 논어를 근본을 세우는 데 필요한 책이라고 평가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의 각 챕터는 딱 필사하기 좋은 분량이다. 각각의 내용이 우리 삶에 지침이 될 정도로 충분히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각 챕터 중에서, 내게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 필사하면서 되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읽는 중에 많은 것이 마음에 와 닿았지만, 그 중에서 나도 세 가지를 꼽아 적어보면서 내 삶을 되새겨보고 싶었다.

 

 

", 잘못했으면 감싸지 말고 일깨워 주라는 거죠. 설령 상대가 언짢아하고 노여워할지라도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길이고, 진정으로 그 사람에게 충성하는 방법입니다."(124, 3부 관계)

 

 

은 아랫 사람이 맹목적으로 윗 사람을 추종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색다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으로 이것을 사랑으로 본 것이다. 아랫 사람이 윗 사람을 사랑한다면 어렵겠지만 직언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마찬가지로 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진심어린 가르침을 줄 수 있어야 하는 개념이라고 받아들였다. 사실 내가 잘 못하는 부분이 이것이다. 상대방의 잘못을 보면, 나는 그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편이다. 내가 직설적으로 상대에게 말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기회를 주는 척 하지만, 사실 나는 적극적으로 상대를 위해 을 실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흔히 '배움'하면 지식을 쌓는 것만 생각하지만 수양도 배움입니다. ... 화가 날 때는 내가 화를 냄으로써 생겨날 어려움을 생각하라고 말했습니다. ... 잘못해도 되고 실수해도 됩니다. 다만 그 원인을 분명히 인지하고 개선하여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말라는 겁니다."(225~6, 4부 배움)

 

 

지식을 쌓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수양이다. 알고 있지만 실천하지 못한다면 배우지 못한 것과 같다. 특히 공자가 중요하게 여긴 배움의 자세로 화가 날 때 실수하지 않는 것과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은 항상 밑바닥에 도달할 때 그 근본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노로 감정이 고조되었을 때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지가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는 중요한 지표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실수나 잘못을 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면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실수로부터 배워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는지, 잘못을 감추기 급급하거나 핑계를 대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공자의 말씀처럼 나도 이 두 가지를 잘 염두에 두었다가 내 행동을 성찰하는 기준으로 활용해야 겠다.

 

 

"나이가 마흔이 되었는데도 미움을 받으면 거기서 끝난 것이다."(260, 5부 그리고 삶)

 

 

나이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있다. 불혹, 마흔이 되면 스스로 판단할 능력을 갖추게 되지만, 이미 형성된 습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고 하니, 마흔이 되기 전에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나는 20, 30대에 수양을 통해 완성된 인격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스스로 성찰하고, 행동을 조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젊은 사람들이 더 불편해하고 어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나이를 빌미로 젊은 사람들에게 강요하기보다, 그들의 의견을 더 경청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이 마흔은 인격을 완성시켜야 하는 나이라기보다 인격을 계속해서 수양해가야할 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논어가 고전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 늘 궁금했다. 저자에 따르면, 공자의 가르침은 거창하지 않다. 게다가 실천하기 어렵지도 않다. 한마디로 쉽고, 누구나 지키고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위대하다는 것이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쉬워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논어는 곁에 두고 자주 읽을수록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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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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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호랑골동품점 (범유진,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산의 주인 호랑이가 인간에게 신령스러운 기운을 준다. 흰 눈썹으로.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저자가 범씨라서 범(호랑이)이 주인공일거라고 혼자 생각하곤 큭큭 웃기도 했다. 물론 이 책에 호랑이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여우, , 토끼까지 친근한 동물들이 나와서 그런지 우리 전래 동화를 읽은 느낌들 정도다. 익숙한 듯 낯선 물건으로 가득한 골동품점이 배경이 된 것은 물건에 깃든 인연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이 이야기의 주된 소재다.

 

물건에는 기억이 깃듭니다.”(261, 작가의 말)

 

물건에 기억이 깃든 경우는 많다. 완전히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어떤 물건을 보는 순간 떠오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특히 그 기억이 다른 어떤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른다. 이미 오래전 헤어진 인연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우연히 짐 정리 중에 발견된 물건에서 잊힌 옛 인연이 떠오르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매일 애지중지 사용하던 물건이라면, 어떤 간절한 바람이나 원한이 담긴 물건이라면 어떨까. 그 물건이 마치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요정이 되어, 귀신이 되어 어떤 작용을 하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이 소설은 매력적이다. 우리의 마음이 담긴 물건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고, 그 물건이 우리의 마음을 표현해주는 것도 그렇다. 게다가 이 책에는 외로움이 가득하다. 절친한 친구가, 소중한 가족이 내 곁에 없어서 느끼는 외로움은 너무나도 절절하다.

 

 

-물건이 곧 그 사람-

 

골동품점에 진열된 수많은 물건 중 소설의 소재는 여섯 가지다. 이 물건들은 곧 그 사람을 상징한다. 그래서 그 물건과 인연이 닿은 사람은 모두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인물 대부분이 호랑골동품점에 우연히 방문하고, 또 강한 충동으로 그 물건들을 훔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이 때문이지 않을까. 물건이 마치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다. 물건에 담긴 마음이, 원한이 그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다.

첫 번째 물건 성냥, 성냥은 노동자를 상징했다. 그 표현이 너무도 절절해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미선은 타 죽었다. 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가 소진되어 죽었다.”(37)

 

노동자를 착취하는 구조는 19세기 성냥 공장이나 현실의 콜센터나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동자들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성냥 한 개비로 켜는 불은 금세 꺼질 수밖에 없지만, 수많은 성냥이 모인다면 그 불은 삽시간에 전체로 번져나갈 수 있었다. 19세기 성냥 공장의 소녀들처럼, 현재의 콜센터 직원들도 그런 불을 켤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세 번째 물건 공중전화를 다룬 이야기가 나는 가장 마음에 와닿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공중전화는 외로움을 가장 잘 드러내 주었고, 그 외로움을 가장 잘 달래주어서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전화는 일방적이다. 일방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폭력적이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전화는 절대 만날 수 없는 존재와 연결해주는 도구다. 그것은 심지어 죽음까지도 삶으로 극복해낼 수 있는 극적인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마도 나는 이 부분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음이었다.”(134)

박서현의 극본을 무대에 올릴 것이다. 이야기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영원히 함께일 수 있다.”(142)

 

죽어버린 이야기를 끊어지지 않도록 이어주는 것. 나는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이 이야기만큼은 이 소설로 끝나지 않고 다른 어느 매체에서 살아남아 더 생명력을 넓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미(虎眉), 호랑이 눈썹으로 이어진 인연-

 

호랑이 눈썹을 가진 청년은 인간계로 내려와 살아가다가 안개 속에서 헤매는 아이를 구해 후계자로 삼는다. 아이는 호미를 사부라 부르며 함께 살아간다. 그렇게 몇 대의 호미와 사부가 이 인간계를 거쳐 갔는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호랑이 눈썹으로 이어지는 인연이다. 그 인연은 외로운 아이에게 가족을 만들어 주는 동시에 그 인연을 반드시 빼앗아 간다. 홀연히 사라져버린 이유요의 사부와 같이 말이다. 이유요도 마찬가지로 안개 속에서 헤매는(가족을 모두 잃은) 소하연을 구해 골동품점으로 데려온다. 그녀를 후계자로 삼으면 이유요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다. 이유요는 자신을 홀로 두고 떠난 사부를 기다리면서도 그를 원망한다. 인연이라는 것은 참 그래서 가혹한 것일지 모른다.

 

왜인가요. 왜 데려왔나요. …… 사라질 걸 알았을 텐데. 혼자 남겨질 것을 알았을 텐데.”(236)

 

하지만 나는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던 이유요가 소하연을 구하면서 어느 정도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사부의 흔적이 알지 못한 곳에 남아 있었다.”(257~8)

 

나는 이유요가 결국 외로움을 이겨냈을거라 믿는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사부의 흔적이 곧 자신에게, 소하연에게, 주변 사람들에게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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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실력, 장자 - 내면의 두께를 갖춘 자유로운 생산자
최진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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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삶의 실력, 장자 (최진석, 위즈덤하우스, 2025, 초판 1)

 

오래전 건명원에서 최진석 교수의 강의를 방송으로 본 적이 있었다. ‘. 이 사람의 강의는 참 매력적이다.’ 생각했었다. 이분의 책을 읽고 싶었던 것은 그때 내가 느꼈던 그 매력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 그 감정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내가 이분의 강의를 왜 좋아했는지, 어떤 점이 매력적이었는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고전의 내용은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저자의 해석이다. 나는 이런 총체적 해석을 매우 좋아한다. (1장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가장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다.) 아주 극소수의 기록만 남아 있는 상황. 저자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행동, 삶을 살았는지 생생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그 설명이 지금 우리네 삶과 매우 닮아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사례를 들어가면서 인과적으로, 논리적으로 그럴듯하게 풀어내는 저자의 능력은 매우 탁월하다. 그래서 이 책은 장자를 다루고 있지만, 우리 삶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깨달음을 담고 있다. 이 지점이 바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장치다. 우리가 과거를 생생하게 배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도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해서 학생들이 역사를 생생하게 배우길 희망한다. 하지만 나는 저자만큼의 내공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안다. 잘못 따라 했다가는 약장수나 사기꾼이 될 수준에 불과하다.

 

 

-도가, 자기 함량, 두께를 키우는 공부-

 

저자는 철학자이면서 과학적 사유를 먼저 공부할 것을 권한다. 그것은 우리가 도가 사상에 대해 오해하는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위자연처럼 모든 것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도가 최고의 가르침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자연 그대로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려면, 결국 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은 자연 그대로를 보는 결과적인 모습이 아니라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정이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황가람, 나는 반딧불)

 

우리는 정답을 배우면서 살아간다. 나보다 먼저 살아본 사람들, , 선생(先生)과 선배(先輩)의 길을 뒤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고, ‘질문할 수 없게 되면서, ‘반성, 성찰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저 정답에만 매몰되어 살면서 의대에 진학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 위 노랫말처럼 나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장자는 말한다.

 

장자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성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생각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는 것 모두가 편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철저한 공부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자기 함량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세상 보통 일들과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빛낼 수 있다고 한다.

 

-작은 삶의 지침, ‘어른이 되는 법’-

 

사실 장자의 사상은 무엇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저자는 장자의 사상이 매우 높은 수준이고, 그 수준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야기 형식을 활용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가 오히려 구체성, 명확성을 드러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저자도 그런 비판을 책의 끝에서 하고 있다.

 

“(장자가 명확히 하지 해명하거나 정의하지 않은 것)이렇게 되면 일상적인 생각과 철학적인 사유가 분명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 이런 태도 때문에 과학적 사유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그러다가 기술적 문명에서 과학적 문명으로 도약하는 과정에서 뒤처져, 결국 아편 전쟁으로 상징되는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었습니다.”(340, 13, 미끄러지는 빛으로 나아가며)

 

솔직히 나와 같은 수준에서는 장자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뭔가 깨달음은 있지만, 그 깨달음을 설명하기 어려워 입안에서 무언가 맴도는 느낌만 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여러 해설이 마음에 들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른이 되는 법이 최고였다.

 

장자는 어른이 어른으로 대접받으려면 젊은 사람들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젊은 사람들보다 공공질서를 더 잘 지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독서를 더 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신용을 지키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보다 더 예의를 지키는 것이지요. 행동거지에서 젊은 사람들보다 더 나아야 합니다. 더 단정하고 더 의연해야 합니다. 왜냐면 더 많이 반성하고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이 살았으니까요.”(111, 5, 관념에 갇히지 않은 사고)

 

나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본다. 공공질서를 잘 지키는지, 책을 더 읽는지, 예의를 지키는지 항상 스스로 반성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이가 많다고 어른 행세를 하는 사람은 앞에선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에선 뒷담화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앞에서도, 뒤에서도 어른으로 대접을 받고 싶다. 아니 스스로 어른이고 싶다. 장자가 말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만, 이런 작은 목표들이 제시되어 있기에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유용하다. 특히 정치적으로 편향되어 상대방을 적대시하는 사람, 자녀를 어떻게 교육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부모 등 우리 사회 많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지침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깨달음과 궁극적 질문-

 

질문하는 사람이 대답하는 사람보다 함량(자기 그릇, 도량, )이 크죠. 같은 맥락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논쟁하는 사람보다 함량이 큽니다.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시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이 함량이 더 큽니다. 시를 읊는 사람보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이 함량이 더 큽니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보다 몸을 다루어서 춤을 추는 사람이 더 함량이 큽니다.”(123~4, 6, 우물 안 개구리임을 깨닫는 함량)

 

질문하는 사람이 정답을 찾는 사람보다 더 높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은 약간 놀라웠다. 이야기, , 소리(노래), 춤으로 점차 더 함량이 높아진다는 설명은 약간 의외였다. 사실 나는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높은 수준의 덕이 있다고 느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설명을 보면서 얼마 전 다시 보았던 영화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2009)’이 떠올랐다. 오의 주유와 제갈량이 금(악기)을 켜면서 음색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서로 연주만 하고 헤어졌을 뿐인데, 그 뒤 제갈량은 주유의 심중을 이해했고, 주유의 아내도 그것을 알아챘다. 사실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중국식 허풍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이것이 가능할 정도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마도 저자는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을 언급한 것이 아닐까.

 

 

내가 나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의 삶을 사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209, 8, 근원을 살피고 다음으로 건너가는 주체)

 

나는 위와 같은 질문을 깊이 생각해본 경험이 없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저 주변 환경에서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그것으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을 연습하느라 시간을 모두 보냈던 것 같다. 나는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이 질문에 답해보려고 애쓰지 않았고, 그래서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없었는가 보다.

근원을 고민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모래 위에 큰 집을 짓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고민해볼 시간도 없이 살게 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남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일명 명문대, 좋은 직장, 많은 돈, 집 구매와 같은 것들이다. 남이 원하는 것을 내 삶의 목표로 삼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돈이 많은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나 자신이 없는 채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이 책의 제목에서 을 언급했는지 모른다. 장자의 사상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일지 모른다. 최고 덕을 갖춘 경지에 도달하는 것보다도, 지금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힘을 기르는 것. 나는 그것이 장자가 하고 싶었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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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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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박현수, 한겨레출판, 2025, 초판 1)

 

한국 문학을 전공한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 등장한 새로운 음식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경성 맛집 산책󰡕, 󰡔식민지의 식탁󰡕 등을 썼다. 이번 책은 근대 문학에 묘사된 8가지 디저트를 담았다. 그래서 저자는 일종의 음식 문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디저트 문학자라고 해야 할까.

100년 전 식민지 조선에는 일본 문화가 강제로 이식되었다. 특히 저자가 선택한 8가지 디저트(커피, 만주, 멜론, 호떡, 라무네, 초콜릿, 군고구마, 빙수)는 근대 문명의 가면을 쓴 음식으로 지금 우리가 아는 그 모습과 사뭇 다른 의미를 지니고 이 땅에 들어온다. 저자는 일본을 통해 이식된 근대가 우리의 전통을 단절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옳고 그른가보다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는가의 문제로 보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 새롭게등장한 음식을 다루면서도 그 원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음식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었는지를 찾는 데 주목한다. 그래서 그의 논문이 재미있지 않다는 평을 들었던 것은 아닐까? (저자 소개에 이런 표현이 있다. ‘얘기나 강의를 하면 재밌는데, 논문은 안 그렇다는 말에 울컥해, 독자들에게 쉽고 재미있게 다가가는 글을 쓰려 노력 중이다.’) 아무래도 대중은 음식의 원조에 더 관심과 흥미를 보이지 않겠는가. 농이다.

 

 

-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

 

“100년 전 디저트를 다룬 이 책은 누가 더 많이 먹는지를 겨루거나 맛집 찾기에 몰두하는 데서 벗어나 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를 더듬어보려는 작업의 하나다.”(6, 들어가며)

 

저자는먹는다는 행위의 온전한 의미를 찾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넘나든다. 특히 이 책에서 선정된 8가지 디저트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밝히는데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그 과정이 짤막하면서도 매우 깊이 있는 순서로 배열되어 있어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가 먹는 디저트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확인하게 되면서 놀라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물론 이 모든 디저트의 역사를 알게 된다고 당장 그것을 많이 먹는다거나 아예 먹지 않을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지 않은가. 100년 전 이 땅의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 커피를 마셨을지. 커피를 마시면서 무엇을 떠올렸을지. 커피는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했을지 생각해보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100년 전과 지금-

 

지금은 곳곳에 카페가 널려 있다. 간단히 시간을 보내거나, 공부하거나, 차를 마시기 위해 주로 찾는 공간이다. 일터로 가기 전에 잠시 들러 사서 가기도 한다. 한국인의 카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카페보다 다방이 더 식민지 조선에서 주류였다는 점은 매우 놀라웠다.

 

술과 함께 여급들의 에로틱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되면서 가족 손님이 더 이상 카페를 찾지 않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51, 커피)

 

놀랍게도 100년 전 카페와 다방은 지금과 완전 정반대였다. 어쩌다 지금은 그 의미가 바뀌었는지는 나와 있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분위기가 달라진 계기가 있을 것이다. 커피라는 낯선 음료가 식민지 조선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음료의 맛보다는 그 음료를 파는 공간이 주는 의미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탄산음료와 물의 관계도 위와 유사했다. 일제 강점기 너무나도 익숙했던 자연의 물이 탄산음료의 출현으로 비위생적이고 전근대적인 표상을 얻게 된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가 공장에서 생산한 음료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다시 물이 그 순수함과 깨끗함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물론 100년 전과 다른 의미의 표상이지만 말이다. 100년 전에는 자연에서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었다면, 지금은 물조차도 공장에서 생산한 것을 사서 먹는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찾는 8가지 디저트는 이름만 닮았지, 그 실체는 100년 만에 많이 달라졌다. 그 의미조차 이제는 대부분 희미해졌다. 대부분 일본을 거쳐 우리에게 유입된 디저트는 신기하게도 모두 단맛을 낸다. 커피는 하얗게 정제된 설탕을 듬뿍 녹였고, 만주는 달콤한 팥 소를 품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이 이 단맛을 좋아해 이들을 찾는다. 그렇다면 이 단맛은 어쩌다 우리 곁으로 오게 된 것일까.

 

-일본과 조선, 서구 문물-

 

일본은 우리보다 빠른 속도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다. 음식과 디저트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이 책에 등장한 대부분 디저트는 모두 일본이 먼저 받아들여 크게 유행을 시켰고, 그것이 식민 지배와 함께 조선 땅으로 유입되었다. 물론 호떡만은 예외였지만, 그 호떡마저도 일본의 식민 지배로 인해 이주한 중국인들이 조선으로 가지고 들어온 디저트였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일본이 서양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소화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중국 만두를 일본 만주로, 단팥빵으로 만들어 내거나, 서양의 멜론을 도입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한 참외 품종을 개량하려고 시도했다는 점 등이다.

반면에 식민지 조선은 말 그대로 대부분 디저트가 이식되었다. 일본에 비하자면 매우 수동적인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식민지 조선이 주체적으로 문물을 수용할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일본이 만들어낸 새로운 형태의 근대를 식민지 조선은 너무도 쉽게 동경하는 모습을 보인다. 근대에 열광했던 이효석이 조선의 자연미를 발견하는 장면과 이상이 죽기 전 초고가의멜론을 먹고 싶어 했다는 장면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얼마나 일본으로부터 이식된 근대 문명에 매몰되어 있는지를 생생해 보여준다. 내게는 그것이 매우 충격이었다.

 

 

-익숙한 듯 낯선 역사적 사실-

 

한반도에 중국인이 대거 유입된 시기는 언제일까. 나는 그 시기를 임오군란(1882)이 발생한 이후라고 알고 있었다. 대규모 청군이 유입되면서 자연스럽게 중국 상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했을 것으로 추측한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그것과 조금 다른 이야기도 실려 있다. 청일전쟁 패배 이후 오히려 많은 중국인이 본토로 되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1920년대가 되면 식민지 조선에서 대규모 건축, 토목 공사가 시작되면서 값싼 쿨리(苦力)가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때 유입된 중국인은 청일전쟁 이전과 달리 하층 노동계급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호떡과 같은 값싼 음식을 파는 상인이 함께 등장했다고 한다. 한반도의 화교 역사에 대해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1898년 프랑스 신문에 실린 삽화(열강이 중국 영토를 분할해 빼앗으려는 모습)가 중국을 피자가 아닌 호떡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번에 새롭게 알았다. 삽화의 원래 제목이 중국 호떡 나눠 먹기라고 한다. 이렇게 잘 알려진 삽화조차도 내가 모르는 점이 있다는 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 책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알 수 없었을 사실들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에게 익숙한 디저트의 명칭이 어디에서 왔는지 그 연원을 밝힌다. 동시에 그것이 식민지 조선에서 유행하게 된 상황까지 상세하게 소개하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를 살핀다. 식민지 조선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일본이 가져온 근대에 열광하면서 자연스럽게 우리 전통을 잃어버렸다. 일본이 내세운 선전과 세계관에 동원되고 익숙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인을 타자화하고 멸시했다. 지금 우리는 100년 전 새롭게 도입된 디저트를 먹으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정제된 설탕과 초콜릿, 탄산음료가 건강에 좋고, 약으로도 사용된다는 근대 문명의 근거 없는 오만함은 이제 사라졌지만, 오히려 건강에 좋은 잃어버린 우리 전통 먹거리를 되살리려 노력하고 있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또한, 근대의 가면을 쓰고 우리에게 강제된 잘못된 세계관에서 좀 더 자유로워졌는지도 살필 필요가 있다. 일본은 서양 문물을 도입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문화를 그렇게 발전시켜 나갈 역량이 충분히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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