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유럽 왕국사 -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 들끓는 민족들의 땅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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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중앙유럽 왕국사 (마틴 래디, 까치, 2025, 초판 1)

 

중앙유럽(Central Europe)’은 낯선 용어다. 대체로 서유럽, 동유럽으로 구분된 서양사에서는 서유럽이 중심이고, 동유럽은 주변에 불과했다. 기존의 동유럽은 로마의 미개척지이고, 야만인의 무대이며, 서유럽 도시의 세련된 문화를 찾을 수 없는 낙후된 농촌이었다. 하지만 중앙유럽 분야의 최고 전문가인 저자는 중앙유럽(동유럽)새로운 역사(A New History of Central Eutope)’를 이 책에 담아냈다. 저자는 서유럽에 종속된 동유럽이 아닌, 서유럽과 다른중앙유럽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2,000년 간 역사를 풀어낸다.

 

또한, 저자는 중앙유럽을 단순한 지리적 개념이 아닌 여러 민족이 뒤섞여 상호 작용한 복합적인 공간으로 본다. 그래서 저자가 그려내는 중앙유럽은 폴란드, 헝가리 등 몇몇 동유럽 국가를 넘어 스위스와 우크라이나까지 지리적으로 확대된다. 부제 그대로 서유럽과 러시아 사이에 펼쳐진 드넓은 지역을 모두 중앙유럽의 무대로 보고, 이곳에서 살았던, 또는 이곳으로 이주하거나 떠나간 사람들의 역동적인 관계를 들끓는모습으로 그려낸다. 서양사 수업에서 단편적으로 암기했던 중요한 사건들이 그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2022)󰡕에 이어 이번 󰡔중앙유럽 왕국사(2025)󰡕도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마틴 래디는 역시 믿고 읽을 수 있는 저자다.

 

 

-34개의 주요 장면으로 본 2,000년 중앙유럽-

 

저자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총 34개의 장으로 나눈다. 교과서처럼 주요 왕조나 사건, 시대를 기준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저자가 뽑은 ‘(역사적) 주요 장면으로 나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마치 34장의 아름다운 그림을 펼쳐놓고 그것의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재미난 이야기 같다. 34장의 그림을 상상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하나의 장이 순식간에 끝난다. 분량이 딱 지루하지 않고 좋다. 이런 식으로 34개의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한다. 그렇게 저자는 중앙유럽의 역사를 짤막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낸다.

 

서론에서 유럽인의 상상 속 존재인 개 인간이 나온다. 삽화가 실려있지 않아서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옛사람들은 개 인간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냈을까 궁금해하던 중이었는데, 그들이 상상에서 튀어나와 현실에서 중앙유럽을 휩쓸었다. 역사 속 유럽을 두려움에 떨게 한 훈족, 몽골-타타르족 같은 외부 침입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이 이런 그림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서유럽과 다른중앙유럽-

 

저자는 중앙유럽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종종 서유럽과 비교’, ‘대조하는 방법을 쓴다. 중앙유럽이 서유럽과 다른 모습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힐 때도 마찬가지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서유럽의 모습을 근간으로 중앙유럽에 조금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배려라고 생각했다.

 

중앙유럽의 역사적 경험은 서유럽과 다르다. 그 경험의 추세는 대체로 서유럽에서 벌어진 일의 상당 부분을 그대로 흉내 내는 듯 하지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서유럽의 경우보다 더 힘차게 고동치거나, 마치 뒤틀린 거울에 비치는 모습처럼 다른 특성을 띠고 있다.”(19, 서론)

 

중앙유럽을 서유럽에 빗대 설명하면서도 중앙유럽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서유럽에 의존하는 모습이 아닌, 중앙유럽이 독자적으로 역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친숙함과 낯섦이 뒤섞인 중앙유럽(19)’이라는 표현은 그런 저자의 생각을 잘 담고 있다.

 

 

-크고 작은 보석의 모음, 중앙유럽-

 

책 옆에 메모지를 붙인다. 저자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중요한 사건, 흥미로운 장면, 주요 등장인물, 예술 작품을 옮겨 적는다. 메모한 내용을 보며 하나씩 작은 구슬과 큰 구슬을 꿰어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소한 이름이지만 저자가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작은 구슬과 역사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인 큰 구슬을 하나씩 번갈아 꿰어두면 뭔가 근사한 보석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중앙유럽의 지명, 인명이 모두 내게는 낯설다 보니 이것들을 차분하게 꿰어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노력이 모이고 나면 결국엔 뭔가 더 선명한 모습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하면서, 책에 있는 지도와 역사 지도와 구글 현재 지도를 펼쳐두고 지명들을 하나씩 표기해본다.

 

모자이크처럼 색색의 조각으로 구성된 중앙유럽의 모습을 지도나 그래픽으로 표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겠지만, 그것을 내가 정리해볼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지 상상해본다.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국가에서, 단일한 정체성을 공유한 민족의 후예로 살아온 내게는 이토록 역동적이고 다채로운 역사를 읽어본 경험이 없어서다. 한국사에서 신라의 삼국 통일을 강조하고, 동아시아사에서 중원 왕조의 중국 통일을 가르치기만 했기에, 중앙유럽의 혼란스러움이 오히려 나를 매료시켰다. 선명한 답이 없이 끊임없이 흔들리고 부서졌기에 중앙유럽은 오히려 서유럽과 다른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세계사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중앙유럽의 역사는 낯설었지만, 그 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의외로 익숙했다. 드라큘라나 프랑켄슈타인을 제외하더라도 중앙유럽의 역사를 움직였던 인물들은 웹툰이나 소설, 게임에서 자주 등장했다. 내가 가끔 하는 게임에 최근 새로운 캐릭터들이 많이 추가되었는데, 그들이 대부분 중앙유럽 인물들이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또한,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소재가 중앙유럽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인종, 민족, 종교와 정체성들이 공존하는 중앙유럽은 천재적 이야기꾼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만큼 중앙유럽의 역사는 우리 삶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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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인류
이상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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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사소한 인류 (이상희, 김영사, 2025, 11)

 

제목‘OO한 인류에서 ‘OO’에 어떤 말을 넣어야 어울릴까.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제목 맞추기 이벤트였다. 한국인 최초 고인류학을 전공한 저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을지 상상해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상희 교수가 사소라는 말을 넣은 이유가 무엇일지 대강 상상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사소(些少_작디 작다.)’ 또는, 사소(辭疏_말로 소통하다)’의 뜻을 담고자 한 것으로 생각했다. 화석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고인류의 모습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저자가 미국에서 연구자로 살아가면서 말로 소통했던 결과물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저자의 사사로운 이야기(6, 프롤로그). 저자는 현재 인류의 모습을 통해 고인류의 삶을 비판적으로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 사소함이 우리의 편견과 지적 한계를 극복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사소(些少)한 고인류-

 

화석으로 남은 우리의 옛 조상은 그들의 작은 파편 중의 파편 중의 파편이다. 누구의 성에도 안 차는 이 극소량의 파편이 말해주지 않는 나머지는 상상과 복원으로 메꿔진다.”(56, 선사시대의 사내들)

 

저자는 본인이 수십 년을 연구한 고인류학을 성장 중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고인류학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저자의 마음이 참 좋았다. 자신의 평생 연구를 절대적 진리라 내세워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학자이면서 자신의 성과를 겸손하게 평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그런 겸손함이 오히려 손해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유교 문화권에 사는 나로서는 그 마음이 저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소(些少)’한 제목이 더욱 마음에 크게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극소량의 파편으로 만들어낸 기존의 고인류학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온갖 상상과 추측과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특히 루시화석에 대해 우리가 가진 여성 편견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고, ‘몽골이라는 인류학 용어가 우리에게 어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베이징인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선전이 고인류에게 투영될 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사냥이라는 말에 현대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되면서 고인류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1부 배우는 인류에서는 우리가 지금껏 상식처럼 통용되던 고인류학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은 올바르게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잘 정리된 부분이었다. 기초 과학 소양이나 탐구 방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저자가 고인류학을 전공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을 우리에게 쉽고 편하게 정리해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가장 압축적으로 강의할 수 있는 탁월한 교수법(한국에서 주로 통용되는, 저자처럼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사소(辭疏)한 저자-

 

엄마가 된 뒤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의 성격을 가늠해 보곤 했는데, 반려견도 다르지 않은 듯 하다.”(172, 어르신이 되는 길)

 

2부 살아있는 인류에서는 정말 저자의 생생한 삶이 펼쳐진다. 결혼과 유산, 부모님의 죽음, 반려견 기르기까지 그녀가 실제 살아있는 인류로서 경험한 생각들이 나열되어 있다.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이라면, 부모님의 죽음을 경험한 중년이라면,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저자의 일상에도 고인류학적 깨달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후각이 깊은 기억을 관장한다는 점(104), 후각이 시간이 흐르면 무감해져서 우리가 막강한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119)이 재미있다. 그녀는 단순히 살아있는 인류의 특징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바꿔나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후각의 막강한 적응력을 확인한 저자는 그 적응력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해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자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반려견의 행동 교정 과정에서 칭찬하는 교수법(224)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강의실에서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요즘은 거리낌 없이 생리대를 들고 다니고 생리 휴가나 생리통으로 인한 결석 통보도 일상적이다. 완경(폐경)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244, 완경과 할머니 가설)

 

3부 여자라는 인류에는 특히 저자가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얻게 된 성찰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소수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공론화)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안일 전쟁(191)’이다. 저자와 남편은 집안일 분담 문제로 다퉜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 다툼 이후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두 사람이 통계학을 전공해서 일지 모르지만, 집안일을 수치화해서 분담률을 확인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부싸움마저도 학자처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 그것을 부부가 공론화해서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 그 결과를 수긍하고 최종적인 합의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총천연색의 다양성-

 

저자는 고인류학이, 현대 우리 삶이 많은 편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배들의 노력이 자신의 기반이 되었듯, 자신의 노력이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전략적이고 복잡한 본능의 총천연색 다양성을 지우고 흑백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61, 본능이 부르는 소리)

 

여자다움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중 가부장제가 원하는 몇 얼굴만 여자다움으로 포장되어 왔을 뿐이다.”(183, 여자답다는 말)

 

목욕탕에서 마주한 몸들은 천차만별이었다. 피부색도 생김새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속옷 광고에서나 보던 몸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팔다리의 길이에서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까지 서로 비슷한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246, 목욕탕의 비너스)

 

 

저자는 현대 인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고인류학도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녀가 만난 세라 넬슨의 사례를 통해 젠더 관점도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이 누구일지를 추론하는 과정에서도 더 크고 화려한 무덤의 주인이 꼭 남자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도 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매년 가졌던 의문 중 하나였다. 여성은 왜 교과서에서 주목받지 못할까. 여성은 왜 학력평가나 수능에서 출제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왜 여학생이 아닌 나만(나는 남자 교사다)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저자의 연구 활동을 통해 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인류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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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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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유전자와 유전력, 돌연변이에 대한 잘못된 일반 상식을 바로 잡는 책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펼친다.

 

유전학에 관한 도킨스의 책을 읽다보면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운명을 결정할 것처럼 느껴지고, 행동 심리학과 교육학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환경이 얼마든지 인간의 본성(유전)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주요 생각은 그 중간 즈음에 자리한다.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선천적인 영역도 있지만, 환경에 영향을 받아 변화할 수 있는 뇌 가소성의 영역도 분명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두 입장의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거나 두 입장을 모두 옹호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유전 정보가 단백질로, 세포로 발현되는 과정에서 우연한 선택이 작용하고, 그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서 유전 정보에 저장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세포 분열 과정이 유전 정보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그 돌연변이는 생명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한 인체 내에 축적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유전적 변이와 발달 변이가 매우 무작위적으로,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우리의 '선천적'인 성격 특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어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지라도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 환경적 측면보다는 선천적인 발달 과정이 인간의 성향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다. 특히 그는 뇌의 가소성을 가지고 이를 설명하는데, 뇌 시냅스가 인간의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발달하거나 퇴화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인간의 주관적 성향이라 주장한다. , 환경의 영향보다는 선천적으로 형성된, 고정적인 성향이 뇌 가소성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유전자냐 환경이냐'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유전학의 발달이 가져올 미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저자는 특정 유전 정보가 인간의 형질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고차원적인 뇌 작용(심리적, 정신적 작용)1:1 대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 특정 유전자를 추가하거나 제거한다고 해서 인간의 지능이 더 높아진다거나, 유전 질환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의 유전 형질을 선택하는 문제나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미래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유전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유전자 편집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데 저자의 주장은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저자는 우리의 뇌가 고차원적인 수준의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 만큼, 발달 과정이나 복제 과정에서 오류(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돌연변이를 줄이거나 방지하는 안전 장치가 생물학적으로 큰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설명한다. , 인간의 일정 비율에서 돌연변이에 의한 자폐, 뇌전증, ADHD가 발생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정밀한 기계일수록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그러니 인간의 사고가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돌연변이의 축적에 의한 질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돌연변이에 의한 사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유전적 질환을 치료와 예방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할 것이다.

 

나는 제9장 그와 그녀에서 정자와 난자에 대한 설명을 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물론 X, Y 염색체로 생식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생명과학에서 이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하지만 다음 설명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만 같다.(이 부분은 저자의 주장이 가장 잘 응축된 부분이기도 하다.) 난자는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돌연변이가 적지만, 정자는 남자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롭게 분열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자 나이 45세 이상이 되면 돌연변이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지금껏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건강, 나이가 더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분명 이는 전통적인 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하지만 유전학에 대한 기본 상식이 늘어날수록, 저자의 책을 읽었으므로 나는 남자의 건강, 나이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유전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분자유전학, 신경유전학 전공자라 관련 영역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기초와 사례들을 제시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내가 유전학에 대한 문외한이다 보니 저자가 사용한 개념어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유전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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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가파도에 가다 - 비움과 낮춤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 철학 소설 사계절 지식소설 18
김경윤 지음 / 사계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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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노자, 가파도에 가다 (김경윤, 사계절, 2025, 11)

 

참 신기하다. 어릴 적 아까워 먹지 못하고 감춰두던 사탕 같은 책이다. 남은 부분이 줄어들수록 이야기가 끝나버릴까 봐 찬찬히 책장을 넘기며 읽었다. 주인공 이백양을 응원하면서, 또 그처럼 은퇴 후 살아갈 내 미래를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이 위로받는 느낌이다. 은퇴는 끝이 아님을, 지금 내 삶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어서다.

 

학교는 디지털화하고, 도서관은 사라진다는 가정. 결코, 상상이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한 현실이다.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더라도 아이들로부터 외면당할 것만 같다. 이미 도서관은 책을 읽기보다 공부하는 공간이 되었고, 동네 서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서점에 들어가면 문제 풀이집만 가득하다. 도서관장인 주인공 이백양은 자기 은퇴를 종이책의 소멸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도 비슷한 걱정거리가 있다.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걱정이 쉽게 가슴에 와 닿았다.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9, 프롤로그)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다. 노자의 이름이 이백양이라는 것을. 저자는 도덕경 속의 노자를 현실에 불러내려 했다. ‘노자 철학 소설로 소개된 이 책은 2500년 전 노자의 목소리를 지금 이 시대에 직접 소환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고, 주인공을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은퇴자의 모습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2500년 전 그 성현(聖賢)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평범한 은퇴자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그의 생각과 고민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와 그날을 정리하는 일기 형식으로 그의 생각 흐름을 잘 보여준다. 노자의 현신(現身)이지만 이번 생은 처음인 이백양은 처절하게 흔들리며, 고민한다. 저자는 그의 모습을 통해 삶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생각했다. 마치 말 없는 가르침(36)’같았다.

 

노자라고 처음부터 존재와 변화의 이치를 깨달았겠는가? 아니, 흔들리지 않고 존재와 변화의 이채를 깨달을 수가 있는가? 노자도 평생을 흔들리며 살았을 것이다. 흔들리며 살았기에 말년에 담담히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91~2, 5. 고양이 청년을 만나다.)

 

그래서 주인공의 삶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삶의 방향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주인공 이백양이 살아간 방향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내 삶의 방향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그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만 해 주었다. 저자는 이백양을 통해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보여주었다. 이백양은 도시에서만 살아왔지만, 농촌에서, 섬에서도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은퇴 이후에도 얼마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생기있는 삶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도 보여주었다.

 

백양은 가파도에 도서관을 만들려고 이런저런 일을 준비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자기가 의미 있어 하는 게 무엇인지 새삼 느꼈다.”(118, 7장 고양이 도서관을 만들다)

 

 

-()한 위로-

 

1장에서부터 주인공 이백양은 지인의 죽음을 겪는다. 그리고 곧바로 길고양이의 죽음도 마주한다. 그런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참 나한테는 낯설었다. 사실 나는 죽음을 꺼리고 두려워해서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백양은, 가파도의 노자는 좀 달랐다. 죽음을 데면데면(37)’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른바 고양이가 집사에게 보여주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그 적당한 거리감이 묘하게 날 위로했다. 격하게 슬퍼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전혀 모른척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긴장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깨닫게 되었다.

 

외면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는 삶, 홀로 지내고 싶을 때 마음 편히 혼자가 되는 상태가 지금 나에게 어울리는 삶의 방식인 것 같다.”(37, 2장 고양이의 가르침)

 

위의 관계처럼 이백양이 가파도에서 살아가면서 배운 그 모든 모습이 내겐 위로였다. 그가 건네는 말이 내가 가진 강박과 두려움, 고민 같은 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직접 살아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삶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얻을 수도 있었다.

 

애써 마음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무심한 노동, 무심한 친절, 무심한 생활!”(47)

 

이백양은 매표소 직원의 삶을 통해 애쓰지 않아도 노동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너무 애쓰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무심하게 살아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파도 사람의 인심은 이렇게 은근하다. 오래도록 관찰하다가 필요한 것을 슬쩍 주는 것이 섬사람의 인심이다.”(48, 3장 천천히 살다)

 

가파도 사람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 친절인지를 깨닫는다. 두드러지는 행동보다 은근한 것이 더 큰 친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이 책에는 참으로 묘한 위로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내 삶을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지만 위로를 받는다.

 

 

-교사를 위한 도덕경-

 

주인공 이백양은 교사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 교재를 쓴다. 이른바 교사들을 위한 도덕경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젊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이 강의가 진행되었지만, 나같은 나이든 교사도 참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그리고 학생도 함께 있었다면 더 의미가 살아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가장 아쉬웠던 건 그 강의 교재 전체가 책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강의 교재를 얻을 수만 있다면 당장 나도 제주도로 내려가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이다. 책 말미에 보면 수강생 중 누군가가 출간을 하시던데.. 실제로 저자가 다음 작품으로 이 내용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바란다.

 

노자가 교육자였다면 어떻게 썼을까 생각했더니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됐다. 교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구나.”(133, 8장 노자를 강의하다.)

 

인간에게는 소통 능력이 있다. 이 소통 능력 안에는 지식과 정보뿐 아니라, 감정에 대한 소통 능력도 있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공감하면서, 서로 기대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이 찾아온다. 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바로 이 공감의 소통으로까지 나아가는 것, 그래서 진정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자족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142, 8장 노자를 강의하다.)

 

주인공의 일기를 통해 대강 그 내용을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구상했을까. 교육자로서의 노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통을 통해 공감하는 능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으면 좋을까. 지식의 전달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이백양을, 아니 노자를 만난다면 이런 질문들을 무차별적으로 마구 쏟아낼 것만 같다.

 

 

이 책이 딱 내 책이라는 느낌을 준 구절이 있다. 바로 주인공 이백양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날이 바로 88일이라는 점이다. 그날은 내 생일이다.

 

고양이도서관의 개관일은 88일로 정했다. …… 세계적으로 고양이를 위한 행사가 열리는 날에 고양이도서관을 개관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126, 8장 노자를 강의하다.)

 

주인공 이백양에게도, 내게도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내 삶의 의미를 그렇게 쉽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거창한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갈 용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백양처럼 티베트로 떠날 수도, 1년 간 가파도에서 살 수도 없지만, 나도 내 삶을 조금은 바꿔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볼 용기를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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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뚱 2025-09-1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입니다. 우리교육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관점에서 새로 쓴 노자 도덕경>이라는 책을 이미 출간했습니다. 복시면 좋을 것 같네요. 좋은 서평 고맙습니다.
 
흙의 숨 - 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유경수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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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흙의 숨 (유경수, 김영사, 2025, 11)

 

생태학자의 시선에 과학과 사회학의 접점을 찾아 나선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토양()’20년 넘게 연구한 학자다. ‘토양학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다. 나의 어린 시절 가장 친숙한 놀잇감은 집 앞의 흙이나 모래였다. 하지만 그 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다. 아마 저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도 우리나라가 토양학에 관심이 부족한 것이 한몫했을 것이다.

 

저자는 하와이부터 북극권까지 지구 곳곳을 탐험하며 흙을 연구했다. 흙은 지구 표면에 얇게 분포하며, 아주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또한, 흙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자연권이지만 문명권과 뗄 수 없다고도 한다. 이 책은 자연권보다는 문명권으로, 인간 삶의 토대가 된 흙으로서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 특히 인간이 오랜 세월 어떻게 흙에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는지, 그것이 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 덕에 나는 역사를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바로 역사 발전의 주인공이 다수의 이름 없는 농부였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발명품이 쟁기였다는 관점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는 흙이 태어난 수백만 년 전부터 미래 우리가 맞이하게 될 흙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그가 직접 파내고 측정하며, 심지어 그 구덩이 안에 누워보기까지 하면서 발견한 생생한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저자도 학문과 연구보다 이야기로부터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소포리 땅 구석구석의 역사와 자연, 사람들의 부엌살림에서 상장문화와 말까지 꿰뚫고 있던 김병철 이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문보다 크고 깊은 것이 이야기라고 믿게 되었다.”(363, 10장 땅)

 

 

-삶의 근원인 흙-

 

저자는 흙이 삶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전근대 농부들에게 흙은 공기만큼이나 소중하고 또 당연한 대상이었을 것이다.(물론 지금 도시 사람은 흙을 밟을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출퇴근할 때 밟는 숲속 흙이 전부다.) 그래서 흙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자는 잘 보여준다.

 

1장에서는 전근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던 을 다룬다. 제목을 보고는 우리 막내 아이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똥은 절대적인 웃음 버튼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실물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잇감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농사를 위한 절대적인 자원이어서 삶의 모습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자면 똥을 돈 주고 사가야 하는 모습을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집 밖에 멀리 나갔다가도 대소변을 집으로 돌아와 누는 행위가 농사와 가족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또한, 동양이 인분(人糞) 문명권이었고, 서양이 가축 분뇨 문명권이었다는 설명은 동서양의 삶의 모습이 왜 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쉽게 설명해주는 틀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저자가 1장에서 을 살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균형이었다. 전근대 똥은 탄소와 질소의 균형을 통한 자원 순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오염원으로 전락하고, 농지에는 인공 질소 비료만 남게 되었다. 탄소(유기물) 없는 질소는 농작물에 전량 흡수되지 않았고, 흙과 함께 빗물에 쉽게 쓸려나갔다.

 

2장에서는 화전(火田)을 다룬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약탈 화전이고, 보존 화전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예전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이지만, 우리가 산불을 조심해야 하고, 화재 진압을 위해 임도(林道)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산에 주기적으로 불이 나야만 오히려 대형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저자가 본 보존 화전이 이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기대했다. 저자는 보존 화전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존 전략으로 오래된 인류의 지혜라고 평가한다. 역시 여기서도 자원 순환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경작할 때는 식량을, 숲으로 돌아가는 묵밭(묵히는 밭)의 시간 동안에는 물, 버섯, 과일, 약재, 목재, 땔감을 제공하며, 야생 동식물에게는 먹이와 삶의 터전을 선물하는 화전은 단순한 농업 생산기지가 아닌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잡은 공존 전략이기도 하다.”(74, 2장 화전)

 

3장에서는 쟁기를, 4장에서는 무논(물을 채우는 논)을 소개한다. 둘 다 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인류의 소중한 지혜를 담고 있다. 특히 3장에서 쟁기의 혁신이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 북유럽의 도시 성장, 그리고 미국의 농업 발달 등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 농법이나 무논의 마법과도 같은 기술을 통해 균형을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현대 농업이 토양을 약탈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방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흙을 만드는 존재, , , 그리고 지렁이-

 

오랜 세월 삶의 근원이 되어준 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흙을 만드는 요소로 5장에서 물을 소개한다. 물은 얼음에서부터 수증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데, 그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흙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

 

빙하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얼음과 물 사이의 변용만이 아니었다. , 얼음, 수증기 사이를 건너며 광물과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흙 속의 미로를 타고 이동하는 물. 대기와 흙과 몸을 비비면서 지구의 기후를 조절하는 물. …… 똑같은 극지이지만 이끼와 관목 사이에선 습지를 만들고 매머드 스텝에선 생산성 높은 풀의 광합성을 따라 얼른 증발해버렸던 물.”(207~8, 5장 물)

 

물의 다양한 역할을 살펴보는 과정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수만 년 전 빙하가 몰로 내려온 흙. 엄청난 양의 매머드가 밟고 지나갔던 흙.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엄청난 과정을 저자는 과학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

6장 강에서는 물줄기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한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동네, 물과 물이 만나는 신성한 강물 주변, 폭포 주변에 자리를 잡은 산업 도시 등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였다.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강과 주변, 인간의 활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는 강과 하천의 복원이 쉽게 결정할 수도, 실행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7장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지렁이다. 우리가 지렁이에 대해 가진 편견이 어떻게 극지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 부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렁이가 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설명한다.

 

세상의 흙을 둘로 나누라면, 난 먼저 지렁이가 있는 흙과 지렁이가 없는 흙으로 나누겠다. 지렁이가 있는 흙을 바탕으로 하는 온대와 열대 지중해의 숲과 초지에서는,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10년마다 모든 흙 알갱이가 지렁이의 내장을 통과한다.”(255, 7장 지렁이)

 

인간이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지역에서 지렁이는 인간에게 이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지렁이가 정반대로 생태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들이 무심코 가지고 간 지렁이가 캐나다에서, 알래스카에서 생태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잘 보여준다. 저자는 경고한다. 지렁이와 사람이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렁이의 침투가 끼칠 영향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인간의 숨 그리고 흙의 숨-

 

저자는 8장에서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흙도 몸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하와이에서 새로운 흙이 생성되는 모습을, 그것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을 설명한다. 9장에서는 인간이 숨을 쉬듯, 흙도 숨을 쉰다고 설명한다. 흙 속에 살아가는 박테리아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고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에너지원으로 산소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는 토양이 호흡으로 배출하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다.

 

행성 지구의 이산화탄소 토양 호흡량은 연간 3400억 톤 정도다. 인간으로 환산하면 13500억 명의 인간이 내쉬는 숨과 같다. 현존 인구의 무려 170여 배다.”(338, 9장 흙의 숨)

 

그렇다면 혹시 토양 호흡량을 줄여서 탄소 중립을 이루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아예 그런 가정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 탄소 중립인 것처럼, 토양 호흡도 탄소 중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리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때문이다. 화석 연료를 태워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가 그것이다. 저자는 탄소 중립을 위해 인간의 몸이 아닌 활동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양 호흡에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땅을 소개하면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흙을 연구하고,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을 만나면서 땅은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인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도와 남해의 사례를 통해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 간절한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다. 간절함이, 절실함이 있어야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온 가족이 매달려 갯벌을 논으로 바꿔냈던 힘은 그 간절함 덕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논을 다시 갯벌로 되돌리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상황이다. 지구라는 한정된 흙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슬아슬하게 지구 표면에 붙어 있는 흙을 지키기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을 모아 우리의 행동을 바꿔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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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수 2025-09-0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꼼꼼한 리뷰에 감사드립니다. ˝흙의 숨˝ 한 장 한 장을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저 또한 ˝흙에 대한 과학˝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많이 놀랐답니다. 제 페북에도 링크했습니다. 고맙습니다.https://www.facebook.com/kyungsoo.yoo.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