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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 도시로 숨 쉬던 모던걸이 '스위트 홈'으로 돌아가기까지
김명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8월
평점 :
나만의 글쓰기 – 그 많던 신여성은 어디로 갔을까 (김명임 외, 한겨레출판, 2024, 개정판 1쇄)
1920년대부터 30년대 초반까지 발행된 잡지, ≪신여성≫. 교과서에서 보았던 표지 안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지 매우 궁금했다. 또한, 여고에서 여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정작 역사 교과서에는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시험에도 출제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매번 학생들에게 설명하면, 정작 학생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페미니즘에 대해, 여성 차별이나 유리천장에 대해 언급하면 그런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인 양 반응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왜 그럴까. 100년 전 당당히 번화가를 돌아다니던 신여성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도 이 책의 제목처럼 이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매우 궁금하기도 했다.
-남자의 여자 지우기-
이 책을 읽으니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었다. 모든 원인은 “남자”였다. 남자가 만든 질서 속에서 여자가 벗어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에 시작된 문제였다. 멍청한 남자들은 여자가 자신들을 넘어설까 두려웠던 것이 분명하다. 남자는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새로운 시대에 여성을 옭아맬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 내려고 몸부림쳤다. 그것이 잡지 신여성 속에 그대로 녹아 있었다. 여자의 정체성을 지우고 그들에게 죄의식을 덧씌움으로써 남성의 질서 속으로 순순히 들어오게끔 만들어내는 남자들의 모습에 나는 부끄러웠다. 그들은 조선 시대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을 테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을까.
“여성의 소비를 여성의 허영으로, 여성의 허영을 여성의 본능으로 만들어, 새롭게 등장한 모던걸을 구제불능의 정신적 미성숙자로 만들고 싶어 한 남성의 욕망과……”(62쪽, 1장 모던걸이 온다.)
그런데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여성들이 남성의 질서를 내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이 스스로 정체성을 형성하고 존재하며 남성과 동등하게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여성 대부분은 순응했다. 적당한 수긍 정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복종했다. 여자는 스스로 복종하고 있다는 생각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동의하지 못한다. 내 삶이 각박한데 여성의 억압된 삶이 들여다보이겠느냐는 핑계를 대면서 나는 그들의 주장에 공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보고나니 오히려 페미니즘에 공감하게 되었다. 현재를 살아가는 내 몸뚱아리 때문에 들여다볼 수 없었던 여성에 대한 억압과 폭력이 100년 전 지질한 남성들의 목소리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남자 선조들 덕분에 내 부족한 생각과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
“신여성들은 관찰을 통해 재현됨으로써 존재한다. 어떻게 보일 것인가,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가 여성의 존재 조건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때 시선은 마땅히 남성 주체에게 속해 있다. 설령 그것이 여성 자신의 시선인 듯 보일지라도 그 안에는 내면화된 남성적 기준이 분명하게 존재한다.”(97쪽, 2장. 신여성 수난사)
가장 많이 화가 나는 것은 그 지질한 남성의 목소리가 당대 천재라 불렸고,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던 이광수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일제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자치를 누리고, 일제처럼 강대국이 되기 위해 민족 개조를 외쳤던 그 사내 말이다. 그 민족 개조 타령이 단순히 허상이었다는 것보다도 민족 개조를 위해선 여성이 아이를 바르게 키워야 하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더 큰 문제였다. 결국, 민족 개조는 남자들이 할 수 없고, 여자들에게 떠넘겨야 할 일이었다. 일제에 빌붙어 자치를 허락받았으면서, 결국 민족 개조의 책임은 여자에게 떠넘기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 그들이 더욱 경멸스러웠다.
“여자들이 모성 중심의 교육을 받지 않고 남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의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남의 병을 고치겠다는 것과 같이 위태롭고 어리석은 일이다.”-이광수, 모성 중심의 여자교육-(115쪽, 3장. 문제적 기호, ‘여학생’)
-여자의 신여성 되기-
“수백 년 동안 집 안의 존재로서 목소리조차 울타리 밖으로 넘지 말아야 했던 여성들이 밖에, 거리에 등장하자 하나의 사건이 된다. ‘신여성’이라 불린 이 여성들은 책보를 끼고 학교에 다니고 쇼핑하러 진고개에 가는 등 욕망의 흐름에 따라 사회 곳곳을 누볐다. …… 학교를 마치고도 집 밖에 남으려고 했다. 그뿐 아니라 학교 교육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익힌 여성들은 기존 조선 사회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 거칠고 위협적인 목소리를 공공연히 내기도 했다.”(7쪽, 머리말)
100년 전, ‘신여성’이 등장했다. ‘구여성’과 대비되는 존재. 근대 문물과 함께 등장한 존재. 그들은 시대 변화에 맞추어 새로운 여성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고자 노력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렇게 등장한 신여성들은 존재 자체가 엄청난 관심거리였다고 한다. 지금 유명한 연예인보다도 더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관심이 그녀들에게 마땅히 감당해야 할 왕관의 무게였을까, 가혹한 폭력이었을까 하는(71쪽) 질문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여성이 처해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N번방 사건, 인하대 사건 등으로 미루어볼 때, 여자에 대한 남자의 시선은 아직도 100년 전 관음증 수준에 그대로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9세기 말부터 여성들은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가고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사람다운 여자’로 자기 개성껏 사는 삶은 순탄치 않았다. …… 그러나 한번 거리로 나선 여성들은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여성들은 살아남는다. 여성들은 당신들이 불태우지 못한 마녀의 후손들이기 때문이다.”(135쪽, 3장. 문제적 기호, ‘여학생’)
힘들지만 나는 여자가 남자와 동등한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할 거라 믿는다. 100년 전 그 신여성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우리가 알게 된다면 말이다. 남자는 선조의 지질한 면과 여성의 가혹했던 삶을 통해 반성할 수 있을 것이고, 여자는 선조의 당당하고 멋진 노력을 본받아 지금 계승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면 될 것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82년생 김지영을 본 사람들이라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 전에도 신여성이 살았고, 그들의 삶과 82년생 김지영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1차 사료를 읽어야 하는 이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1차 사료를 읽을 수 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나 같은 사람은 기본적인 언어 능력이 부족하므로 사료를 찾아 읽는다는 것은 꿈도 꾸기 어렵다. 그래서 이 책과 같이 1차 사료를 풍부하게 읽고 제공해주는 책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역사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채 100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이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일제 강점기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유관순을 보며 민족주의를 떠올리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그녀는 당당한 신여성, 여학생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유관순’이나 ‘민족=조선’을 상기시키는 ‘흰 저고리 검정 통치마’가 당시에는 오히려 ‘근대’나 ‘서구’에 가까운 함의를 띠고 있었던 것이다. 1920년대가 되면 이 스타일은 여학생 즉 신여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코드로 자리를 잡는다.”(25~26쪽, 1장 모던걸이 온다.)
그리고 당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말투나 문구를 보면, 지금과 다른 점이 뚜렷하게 보인다. 그런 점이 재미있기도 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관 상영 중간 휴식 시간이 있었다는 점이나 변사가 나와 영화를 설명하는 장면 등, 지금과 달라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들도 다양한 활용이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고민해보면 다양한 학생활동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 같다.
“아-슯흐다! …… ‘십분 휴식’이다. 또 변사가 나와 다음 영화 예고를 하느라 시끄럽다.”(183쪽)
‘슯흐다’이 표현 참 재미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