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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숨 - 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유경수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 흙의 숨 (유경수, 김영사, 2025, 1판 1쇄)
생태학자의 시선에 과학과 사회학의 접점을 찾아 나선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토양(흙)’을 20년 넘게 연구한 학자다. ‘토양학’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다. 나의 어린 시절 가장 친숙한 놀잇감은 집 앞의 흙이나 모래였다. 하지만 그 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다. 아마 저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도 우리나라가 토양학에 관심이 부족한 것이 한몫했을 것이다.
저자는 하와이부터 북극권까지 지구 곳곳을 탐험하며 흙을 연구했다. 흙은 지구 표면에 얇게 분포하며, 아주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또한, 흙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자연권이지만 문명권과 뗄 수 없다고도 한다. 이 책은 자연권보다는 문명권으로, 인간 삶의 토대가 된 흙으로서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 특히 인간이 오랜 세월 어떻게 흙에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는지, 그것이 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 덕에 나는 역사를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바로 역사 발전의 주인공이 다수의 이름 없는 ‘농부’였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발명품이 ‘쟁기’였다는 관점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는 흙이 태어난 수백만 년 전부터 미래 우리가 맞이하게 될 흙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그가 직접 파내고 측정하며, 심지어 그 구덩이 안에 누워보기까지 하면서 발견한 생생한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저자도 학문과 연구보다 이야기로부터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소포리 땅 구석구석의 역사와 자연, 사람들의 부엌살림에서 상장문화와 말까지 꿰뚫고 있던 김병철 이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문보다 크고 깊은 것이 이야기라고 믿게 되었다.”(363쪽, 10장 땅)
-삶의 근원인 흙-
저자는 흙이 삶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전근대 농부들에게 흙은 공기만큼이나 소중하고 또 당연한 대상이었을 것이다.(물론 지금 도시 사람은 흙을 밟을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출퇴근할 때 밟는 숲속 흙이 전부다.) 그래서 흙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자는 잘 보여준다.
1장에서는 전근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던 ‘똥’을 다룬다. 제목을 보고는 우리 막내 아이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똥은 절대적인 웃음 버튼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실물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잇감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농사를 위한 절대적인 자원이어서 삶의 모습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자면 똥을 돈 주고 사가야 하는 모습을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집 밖에 멀리 나갔다가도 대소변을 집으로 돌아와 누는 행위가 농사와 가족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또한, 동양이 인분(人糞) 문명권이었고, 서양이 가축 분뇨 문명권이었다는 설명은 동서양의 삶의 모습이 왜 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쉽게 설명해주는 틀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저자가 1장에서 ‘똥’을 살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균형’이었다. 전근대 똥은 탄소와 질소의 균형을 통한 자원 순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오염원으로 전락하고, 농지에는 인공 질소 비료만 남게 되었다. 탄소(유기물) 없는 질소는 농작물에 전량 흡수되지 않았고, 흙과 함께 빗물에 쉽게 쓸려나갔다.
2장에서는 화전(火田)을 다룬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약탈 화전이고, 보존 화전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예전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이지만, 우리가 산불을 조심해야 하고, 화재 진압을 위해 임도(林道)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산에 주기적으로 불이 나야만 오히려 대형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저자가 본 보존 화전이 이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기대했다. 저자는 보존 화전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존 전략으로 오래된 인류의 지혜라고 평가한다. 역시 여기서도 자원 순환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경작할 때는 식량을, 숲으로 돌아가는 묵밭(묵히는 밭)의 시간 동안에는 물, 버섯, 과일, 약재, 목재, 땔감을 제공하며, 야생 동식물에게는 먹이와 삶의 터전을 선물하는 화전은 단순한 농업 생산기지가 아닌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잡은 공존 전략이기도 하다.”(74쪽, 2장 화전)
3장에서는 쟁기를, 4장에서는 무논(물을 채우는 논)을 소개한다. 둘 다 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인류의 소중한 지혜를 담고 있다. 특히 3장에서 쟁기의 혁신이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 북유럽의 도시 성장, 그리고 미국의 농업 발달 등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 농법이나 무논의 마법과도 같은 기술을 통해 균형을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현대 농업이 토양을 약탈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방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흙을 만드는 존재, 물, 강, 그리고 지렁이-
오랜 세월 삶의 근원이 되어준 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흙을 만드는 요소로 5장에서 물을 소개한다. 물은 얼음에서부터 수증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데, 그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흙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
“빙하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얼음과 물 사이의 변용만이 아니었다. 물, 얼음, 수증기 사이를 건너며 광물과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흙 속의 미로를 타고 이동하는 물. 대기와 흙과 몸을 비비면서 지구의 기후를 조절하는 물. …… 똑같은 극지이지만 이끼와 관목 사이에선 습지를 만들고 매머드 스텝에선 생산성 높은 풀의 광합성을 따라 얼른 증발해버렸던 물.”(207~8쪽, 5장 물)
물의 다양한 역할을 살펴보는 과정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수만 년 전 빙하가 몰로 내려온 흙. 엄청난 양의 매머드가 밟고 지나갔던 흙.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엄청난 과정을 저자는 과학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
6장 강에서는 물줄기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한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동네, 물과 물이 만나는 신성한 강물 주변, 폭포 주변에 자리를 잡은 산업 도시 등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였다.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강과 주변, 인간의 활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는 강과 하천의 복원이 쉽게 결정할 수도, 실행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7장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지렁이다. 우리가 지렁이에 대해 가진 편견이 어떻게 극지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 부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렁이가 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설명한다.
“세상의 흙을 둘로 나누라면, 난 먼저 지렁이가 있는 흙과 지렁이가 없는 흙으로 나누겠다. 지렁이가 있는 흙을 바탕으로 하는 온대와 열대 지중해의 숲과 초지에서는,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10년마다 모든 흙 알갱이가 지렁이의 내장을 통과한다.”(255쪽, 7장 지렁이)
인간이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지역에서 지렁이는 인간에게 이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지렁이가 정반대로 생태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들이 무심코 가지고 간 지렁이가 캐나다에서, 알래스카에서 생태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잘 보여준다. 저자는 경고한다. 지렁이와 사람이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렁이의 침투가 끼칠 영향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인간의 숨 그리고 흙의 숨-
저자는 8장에서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흙도 몸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하와이에서 새로운 흙이 생성되는 모습을, 그것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을 설명한다. 9장에서는 인간이 숨을 쉬듯, 흙도 숨을 쉰다고 설명한다. 흙 속에 살아가는 박테리아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고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에너지원으로 산소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는 토양이 호흡으로 배출하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다.
“행성 지구의 이산화탄소 토양 호흡량은 연간 3400억 톤 정도다. 인간으로 환산하면 1조 3500억 명의 인간이 내쉬는 숨과 같다. 현존 인구의 무려 170여 배다.”(338쪽, 9장 흙의 숨)
그렇다면 혹시 토양 호흡량을 줄여서 탄소 중립을 이루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아예 그런 가정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 탄소 중립인 것처럼, 토양 호흡도 탄소 중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리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때문이다. 화석 연료를 태워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가 그것이다. 저자는 탄소 중립을 위해 인간의 몸이 아닌 활동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양 호흡에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땅을 소개하면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흙을 연구하고,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을 만나면서 ‘땅은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인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도와 남해의 사례를 통해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 간절한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다. 간절함이, 절실함이 있어야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온 가족이 매달려 갯벌을 논으로 바꿔냈던 힘은 그 간절함 덕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논을 다시 갯벌로 되돌리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상황이다. 지구라는 한정된 흙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슬아슬하게 지구 표면에 붙어 있는 흙을 지키기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을 모아 우리의 행동을 바꿔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