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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해변에서 -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
캐럴라인 도즈 페넉 지음, 김희순 옮김 / 까치 / 2025년 4월
평점 :
※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 야만의 해변에서 (캐럴라인 도즈 페턱, 까치, 2025, 초판 1쇄)
익숙한 유럽인의‘대항해 시대’에 살았던 낯선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저너스’를 만나다.
이 책의 부제 “아메리카 원주민, 대항해 시대의 또다른 주인공”에도 잘 드러나 있듯,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옮기는” 행위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는 일방적으로 유럽인에 의해 만들어진 아메리카 원주민의 정체성을 ‘인디저너스’라는 호칭으로 되살리고, 그들이 ‘대항해 시대’로 명명된 유럽인의 역사에 어떻게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세심하게 살폈다. 특히 첫 부분부터 저자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영역이 표시된 지도와 그들의 역사를 담은 연대기는 시공간적인 배경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으며, ‘호칭이 중요한 이유’에서는 왜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저너스’라고 지칭해야 하는지를 설명한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저자는 불친절하고 일방적인 유럽인의 기록 속에서 의도적으로 지워지고, 야만이라 폄훼된 ‘인디저너스’를 찾아낸다. 그리고 그들에게 무한한 생명력을 부여하면서 대항해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저자는 인디저너스야말로 대항해 시대의 광대한 연결망을 만든 주체였고, 오늘날 우리가 사는 현대 세계의 씨앗이었다고 주장한다. 인디저너스가 있었기에 유럽인의 대항해 시대가 가능했다는 저자의 주장을 우리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충분히 고민해볼 만한 내용이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이 한국인의 활약 덕분에 가능했다는 주장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의 메이플라워 호가 플리머스 바위에 처음 발을 내딛던 순간보다 무려 한 세기 이전, 인디저너스들이 조성하고 향유했던 광대한 연결망, 즉 그들이 무역하고 약탈하고 협상하고 결혼하고 어울리고 싸웠던 그 광대한 연결망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범세계주의적인 현대의 씨앗이 되었다.”(25쪽, 들어가며)
-인디저너스, 대서양 양안의 정체성-
이 책의 1장부터 3장까지는 주로 인디저너스의 삶을 조망하고 있다. (1장은 노예, 2장은 중재자들, 3장은 가족과 친척이다.) 인디저너스가 유럽과 조우한 이후 대서양 양안에서 만든 새로운 정체성이 광대한 연결망으로 작동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많은 사람이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관계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극도로 혼란스럽고 파괴적인 시대를 살아남은 인디저너스들은 매우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대체로 우리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에만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대항해 시대 초기 유럽에 노예로 끌려온 인디저너스의 삶에 주목한다. 16세기 이베리아반도는 인디저너스를 포함해 포르투갈인, 무어인, 아프리카인 등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살아가는 다채로운 사회였다. 그래서 노예 인디저너스의 삶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었다.
“이는 당시 인디저너스들의 상황이 얼마나 변화무쌍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103쪽, 1장 노예)
다채로웠던 인디저너스 노예의 삶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 노예도 법을 통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인디저너스 노예를 통해 부를 축적하려는 무리도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을 막고자 했던 힘도 유럽 사회에 있었다. 물론 그것이 시혜적인 성격이거나, 포르투갈, 스페인 왕실이 인디저너스를 신민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디저너스들이 소송을 통해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과 아메리카로 귀환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 우리에게 낯선 역사다. 기록은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분명 인디저너스도 다른 사람들처럼 유럽에서 어울려 살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둘째, 인디저너스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거나, 개종을 강요하거나, 노예로 만들려는 사람들은 모두 “합법적” 수단에 집착했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절대로 정상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합법을 운운했다는 것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마도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상세하게 소개함으로써 현대 문명의 ‘합법적 폭력’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법치주의는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지만, 동시에 우리 사회에는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한다. 법은 상류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도구이면서도 동시에 하층민의 권리를 최소한으로 보장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재자로서 인디저너스의 삶도 매우 독특했다. 붙잡혀 통역사가 된 ‘네판틀레라스(132쪽)’라 지칭된 인디저너스의 삶도 인상적이었지만, 아메리카 해변에서 조난당한 유럽인 ‘비치코머(132쪽)’의 삶도 매우 독특했다. 중재자라는 표현에도 내포된 의미이지만, 이들은 대서양 양안에서 정체성을 형성한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인디저너스와 유럽인 간 상호작용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에 대한 이중적 평가다. 이들은 유럽의 침략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배신자’인가, 아니면 폭력 앞에 어쩔 수 없이 억압받은 ‘노예’들인가. 백인 영국인으로서 저자는 이에 관한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피압박민족의 후예인 나는 이를 보며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 역사에서 친일파는 어떤 평가를 받는지, 그리고 그들에 대한 평가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어떤 부작용을 낳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능력 있는 인디저너스가 유럽 고위층의 가족이 되거나, 고위층 인디저너스가 유럽인과 친척이 되거나 하는 사례도 매우 흥미로웠다. 목테수마(아즈텍 제국 마지막 황제 몬테수마)의 후손이 스페인에서 지금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어렸을 적 보았던 디즈니 영화 “포카혼타스”가 유럽인에 의해 만들어진 왜곡된 정체성을 유포했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점은 노예나 중재자들로 유럽 압제자에게 복역했던 사람들에게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유럽 고위층의 가족이나 고위층 인디저너스들은 현재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 종교적, 문화적 상징이나 영웅으로 숭앙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정체성이 현재 인디저너스 후예들에 의해 전통으로 받아들여지는 이 상황은 분명 슬픈 일이다. 역사적 실제가 중요한지, 현재 만들어진 전통이 중요한지는 우리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저자는 이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이방인으로서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인디저너스 후예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이 논란을 피하는 가장 중립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대서양을 건넌 물건들-
저자는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건너온 물건들에 대해서도 주목한다. 그는 인디저너스와 유럽인의 가치 체계의 차이점을 강조하면서 이 물건들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발견한 모든 것들을 ‘상품’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것을 약탈해 부를 축적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인디저너스들은 자연을 삶의 일부로 인식했다. 마치 동양 철학의 한 단면을 보는 것과 같이 자연은 인간의 삶을 포함하는 우주적 질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유럽인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었다.
서로 다른 두 세계의 만남에서 사람과 물건이 서로 교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물건들을 상품으로만 보는 유럽의 인식에서 벗어나 인디저너스의 의식과 문화가 끼친 영향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예가 케찰 새 깃털이나 카카오 열매다. 이와 관련된 인디저너스의 문화가 현재 우리가 쓰는 언어에 녹아들어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저자가 소개한 단어는 생각보다 많다. 초콜릿, 바비큐, 허리케인, 해먹, 카누 등은 우리에게도 매우 익숙한 인디저너스의 단어들이다.
다만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 부분은 바로 인디저너스의 ‘선물’문화다. 작년에 읽었던 벽돌 책, “불평등의 창조(2015)”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다르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 책에는 아메리카에서 있었던 사례들을 바탕으로 불평등의 기원을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참고가 필요하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불평등으로 나아가려는 개인의 야망과 평등을 유지하려는 공공선 사이에서는 항상 긴장 관계가 형성된다고 본다. 그래서 개인의 야망이 공공선을 무너뜨리면 불평등이 심화되고, 그것이 제국의 질서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인디저너스의 ‘선물’문화가 아메리카 전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럽인들도 마찬가지다.
-단조로운 Vs 다채로운 역사-
오늘도 한국사 수업을 하면서 단조로움을 느꼈다. 교과서에는 다양한 굵은 글씨의 개념어들이 ‘정답’으로만 존재한다. 다른 예외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이번 중간고사에서 선택형 문제로 출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교과서에 실릴 수 없는 다채로운 사실들이 분명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교과서에서 정답이라고 주장하는 내용 정도는 손쉽게 반박할 수 있는 다채로운 사실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살필 여유와 능력이 부족하다. 왜 우리는 저자처럼 “시선을 조금만 옆으로 옮길” 수 없을까. 왜 우리는 이토록 다채롭고 아름다운 역사를 배울 수 없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백인 영국인으로서 역사에서 강제로 지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발굴해낸 점이 매우 고맙다. 하지만 조금 아쉬운 점은 이토록 논쟁적일 수밖에 없는 내용을 다루면서 한발짝 물러나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 부분이다. 아마도 이 아쉬움은 내가 유럽인보다는 인디저너스의 삶에 더 깊이 공감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