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인류
이상희 지음 / 김영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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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사소한 인류 (이상희, 김영사, 2025, 11)

 

제목‘OO한 인류에서 ‘OO’에 어떤 말을 넣어야 어울릴까. 이 책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제목 맞추기 이벤트였다. 한국인 최초 고인류학을 전공한 저자는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썼을지 상상해 댓글을 달았다. 사실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상희 교수가 사소라는 말을 넣은 이유가 무엇일지 대강 상상해볼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저자가사소(些少_작디 작다.)’ 또는, 사소(辭疏_말로 소통하다)’의 뜻을 담고자 한 것으로 생각했다. 화석을 통해 알아낼 수 있는 고인류의 모습은 아주 적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저자가 미국에서 연구자로 살아가면서 말로 소통했던 결과물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 둘을 연결하는 것은 저자의 사사로운 이야기(6, 프롤로그). 저자는 현재 인류의 모습을 통해 고인류의 삶을 비판적으로 복원한다. 그 과정에서 저자가 언급한 그 사소함이 우리의 편견과 지적 한계를 극복하는 디딤돌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사소(些少)한 고인류-

 

화석으로 남은 우리의 옛 조상은 그들의 작은 파편 중의 파편 중의 파편이다. 누구의 성에도 안 차는 이 극소량의 파편이 말해주지 않는 나머지는 상상과 복원으로 메꿔진다.”(56, 선사시대의 사내들)

 

저자는 본인이 수십 년을 연구한 고인류학을 성장 중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고인류학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고, 자신이 그 한계를 극복해 나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저자의 마음이 참 좋았다. 자신의 평생 연구를 절대적 진리라 내세워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학자이면서 자신의 성과를 겸손하게 평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저자는 그런 겸손함이 오히려 손해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유교 문화권에 사는 나로서는 그 마음이 저자를 더욱 위대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사소(些少)’한 제목이 더욱 마음에 크게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극소량의 파편으로 만들어낸 기존의 고인류학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온갖 상상과 추측과 욕망이 투영된 결과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특히 루시화석에 대해 우리가 가진 여성 편견이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고, ‘몽골이라는 인류학 용어가 우리에게 어떤 착각을 불러일으키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베이징인은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선전이 고인류에게 투영될 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사냥이라는 말에 현대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되면서 고인류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1부 배우는 인류에서는 우리가 지금껏 상식처럼 통용되던 고인류학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사람은 올바르게 배워야 한다는 저자의 생각이 잘 정리된 부분이었다. 기초 과학 소양이나 탐구 방법조차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저자가 고인류학을 전공하면서 느꼈던 어려움을 우리에게 쉽고 편하게 정리해준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가장 압축적으로 강의할 수 있는 탁월한 교수법(한국에서 주로 통용되는, 저자처럼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적합한)을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사소(辭疏)한 저자-

 

엄마가 된 뒤 딸아이 또래 아이들을 보면서 부모의 성격을 가늠해 보곤 했는데, 반려견도 다르지 않은 듯 하다.”(172, 어르신이 되는 길)

 

2부 살아있는 인류에서는 정말 저자의 생생한 삶이 펼쳐진다. 결혼과 유산, 부모님의 죽음, 반려견 기르기까지 그녀가 실제 살아있는 인류로서 경험한 생각들이 나열되어 있다. 결혼과 출산을 경험한 여성이라면, 부모님의 죽음을 경험한 중년이라면, 반려견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저자의 일상에도 고인류학적 깨달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후각이 깊은 기억을 관장한다는 점(104), 후각이 시간이 흐르면 무감해져서 우리가 막강한 적응력을 갖게 되었다는 점(119)이 재미있다. 그녀는 단순히 살아있는 인류의 특징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삶을 바꿔나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함께 제시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한 후각의 막강한 적응력을 확인한 저자는 그 적응력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음식물 쓰레기에 대해 둔감해지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 자체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반려견의 행동 교정 과정에서 칭찬하는 교수법(224)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강의실에서도 실천하고자 노력한다.

 

요즘은 거리낌 없이 생리대를 들고 다니고 생리 휴가나 생리통으로 인한 결석 통보도 일상적이다. 완경(폐경)도 그렇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244, 완경과 할머니 가설)

 

3부 여자라는 인류에는 특히 저자가 주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얻게 된 성찰을 담고 있다. 저자가 여자이기 때문에, 소수 유색인종이기 때문에 소통 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공론화)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집안일 전쟁(191)’이다. 저자와 남편은 집안일 분담 문제로 다퉜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그 다툼 이후의 모습이 흥미로웠다. 두 사람이 통계학을 전공해서 일지 모르지만, 집안일을 수치화해서 분담률을 확인하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부부싸움마저도 학자처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 그것을 부부가 공론화해서 적절한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 그 결과를 수긍하고 최종적인 합의했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총천연색의 다양성-

 

저자는 고인류학이, 현대 우리 삶이 많은 편견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배들의 노력이 자신의 기반이 되었듯, 자신의 노력이 후배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줄 수 있는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전략적이고 복잡한 본능의 총천연색 다양성을 지우고 흑백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61, 본능이 부르는 소리)

 

여자다움은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중 가부장제가 원하는 몇 얼굴만 여자다움으로 포장되어 왔을 뿐이다.”(183, 여자답다는 말)

 

목욕탕에서 마주한 몸들은 천차만별이었다. 피부색도 생김새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속옷 광고에서나 보던 몸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대개는 팔다리의 길이에서부터 가슴, 허리, 엉덩이까지 서로 비슷한 부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했다.”(246, 목욕탕의 비너스)

 

 

저자는 현대 인류가 다양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고인류학도 다양한 관점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그녀가 만난 세라 넬슨의 사례를 통해 젠더 관점도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경주 황남대총의 주인이 누구일지를 추론하는 과정에서도 더 크고 화려한 무덤의 주인이 꼭 남자여야만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나도 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매년 가졌던 의문 중 하나였다. 여성은 왜 교과서에서 주목받지 못할까. 여성은 왜 학력평가나 수능에서 출제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왜 여학생이 아닌 나만(나는 남자 교사다) 하고 있을까 생각했다. 저자의 연구 활동을 통해 더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인류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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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타고나는가 - 유전과 환경, 그리고 경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케빈 J. 미첼 지음, 이현숙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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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유전자와 유전력, 돌연변이에 대한 잘못된 일반 상식을 바로 잡는 책이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주장을 펼친다.

 

유전학에 관한 도킨스의 책을 읽다보면 유전자가 인간의 모든 운명을 결정할 것처럼 느껴지고, 행동 심리학과 교육학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환경이 얼마든지 인간의 본성(유전)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의 주요 생각은 그 중간 즈음에 자리한다.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 선천적인 영역도 있지만, 환경에 영향을 받아 변화할 수 있는 뇌 가소성의 영역도 분명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두 입장의 가운데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거나 두 입장을 모두 옹호하는 그런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유전 정보가 단백질로, 세포로 발현되는 과정에서 우연한 선택이 작용하고, 그 선택들이 쌓이고 쌓여서 유전 정보에 저장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세포 분열 과정이 유전 정보에 따라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고, 그 돌연변이는 생명체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한 인체 내에 축적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유전적 변이와 발달 변이가 매우 무작위적으로, 우연히 발생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우리의 '선천적'인 성격 특성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주어 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라고 할 지라도 전혀 다른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고 한다. , 환경적 측면보다는 선천적인 발달 과정이 인간의 성향에 더 큰 영향을 준다는 입장이다. 특히 그는 뇌의 가소성을 가지고 이를 설명하는데, 뇌 시냅스가 인간의 경험에 의해 얼마든지 발달하거나 퇴화할 수 있지만, 그 경험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그 인간의 주관적 성향이라 주장한다. , 환경의 영향보다는 선천적으로 형성된, 고정적인 성향이 뇌 가소성의 한계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다.

 

저자의 주장은 '유전자냐 환경이냐'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는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유전학의 발달이 가져올 미래 문제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낼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저자는 특정 유전 정보가 인간의 형질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맞지만, 고차원적인 뇌 작용(심리적, 정신적 작용)1:1 대응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 특정 유전자를 추가하거나 제거한다고 해서 인간의 지능이 더 높아진다거나, 유전 질환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의 유전 형질을 선택하는 문제나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미래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부모에게는 자녀의 유전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유전자 편집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데 저자의 주장은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저자는 우리의 뇌가 고차원적인 수준의 발달된 체계를 갖추게 된 만큼, 발달 과정이나 복제 과정에서 오류(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는 돌연변이를 줄이거나 방지하는 안전 장치가 생물학적으로 큰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설명한다. , 인간의 일정 비율에서 돌연변이에 의한 자폐, 뇌전증, ADHD가 발생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정밀한 기계일수록 고장이 잦을 수밖에 없다"는 말로 이를 표현한다. 그러니 인간의 사고가 발달하면 할수록 그만큼 돌연변이의 축적에 의한 질병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또한, 인간의 수명이 늘어날수록 돌연변이에 의한 사망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유전적 질환을 치료와 예방의 대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어야할 것이다.

 

나는 제9장 그와 그녀에서 정자와 난자에 대한 설명을 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어서 기억에 남는다. 물론 X, Y 염색체로 생식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난 생명과학에서 이 부분이 제일 어려웠다.) 하지만 다음 설명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만 같다.(이 부분은 저자의 주장이 가장 잘 응축된 부분이기도 하다.) 난자는 여성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기에 돌연변이가 적지만, 정자는 남자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롭게 분열하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돌연변이가 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자 나이 45세 이상이 되면 돌연변이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지금껏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남성보다는 여성의 건강, 나이가 더 중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분명 이는 전통적인 관념의 영향을 받은 것이리라. 하지만 유전학에 대한 기본 상식이 늘어날수록, 저자의 책을 읽었으므로 나는 남자의 건강, 나이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남성이 여성보다 유전적으로 더 열악한 상황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저자가 분자유전학, 신경유전학 전공자라 관련 영역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기초와 사례들을 제시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내가 유전학에 대한 문외한이다 보니 저자가 사용한 개념어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은 단점이다. 유전학에 대한 기본적 소양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매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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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가파도에 가다 - 비움과 낮춤의 지혜를 배우는 노자 철학 소설 사계절 지식소설 18
김경윤 지음 / 사계절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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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노자, 가파도에 가다 (김경윤, 사계절, 2025, 11)

 

참 신기하다. 어릴 적 아까워 먹지 못하고 감춰두던 사탕 같은 책이다. 남은 부분이 줄어들수록 이야기가 끝나버릴까 봐 찬찬히 책장을 넘기며 읽었다. 주인공 이백양을 응원하면서, 또 그처럼 은퇴 후 살아갈 내 미래를 생각하면서 읽다 보면 어느새 내 삶이 위로받는 느낌이다. 은퇴는 끝이 아님을, 지금 내 삶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어서다.

 

학교는 디지털화하고, 도서관은 사라진다는 가정. 결코, 상상이 아니라 얼마든지 가능한 현실이다.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더라도 아이들로부터 외면당할 것만 같다. 이미 도서관은 책을 읽기보다 공부하는 공간이 되었고, 동네 서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그나마 남아 있는 서점에 들어가면 문제 풀이집만 가득하다. 도서관장인 주인공 이백양은 자기 은퇴를 종이책의 소멸과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나도 비슷한 걱정거리가 있다.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으려 하고, 스스로 배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걱정이 쉽게 가슴에 와 닿았다.

 

 

-말 없는 가르침(不言之敎)-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9, 프롤로그)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았다. 노자의 이름이 이백양이라는 것을. 저자는 도덕경 속의 노자를 현실에 불러내려 했다. ‘노자 철학 소설로 소개된 이 책은 2500년 전 노자의 목소리를 지금 이 시대에 직접 소환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고, 주인공을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은퇴자의 모습으로 설정했다. 그런데 주인공이 2500년 전 그 성현(聖賢)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그저 평범한 은퇴자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게다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그의 생각과 고민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와 그날을 정리하는 일기 형식으로 그의 생각 흐름을 잘 보여준다. 노자의 현신(現身)이지만 이번 생은 처음인 이백양은 처절하게 흔들리며, 고민한다. 저자는 그의 모습을 통해 삶에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정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고 생각했다. 마치 말 없는 가르침(36)’같았다.

 

노자라고 처음부터 존재와 변화의 이치를 깨달았겠는가? 아니, 흔들리지 않고 존재와 변화의 이채를 깨달을 수가 있는가? 노자도 평생을 흔들리며 살았을 것이다. 흔들리며 살았기에 말년에 담담히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91~2, 5. 고양이 청년을 만나다.)

 

그래서 주인공의 삶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삶의 방향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주인공 이백양이 살아간 방향은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내 삶의 방향은 내가 찾아야 한다는 그 간단한 진리를 깨닫게만 해 주었다. 저자는 이백양을 통해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보여주었다. 이백양은 도시에서만 살아왔지만, 농촌에서, 섬에서도 만족스런 삶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은퇴 이후에도 얼마든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을 수 있으며, 그것이 생기있는 삶을 가져올 것이라는 희망도 보여주었다.

 

백양은 가파도에 도서관을 만들려고 이런저런 일을 준비하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자기가 의미 있어 하는 게 무엇인지 새삼 느꼈다.”(118, 7장 고양이 도서관을 만들다)

 

 

-()한 위로-

 

1장에서부터 주인공 이백양은 지인의 죽음을 겪는다. 그리고 곧바로 길고양이의 죽음도 마주한다. 그런데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참 나한테는 낯설었다. 사실 나는 죽음을 꺼리고 두려워해서 아주 가까운 사람의 죽음조차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이백양은, 가파도의 노자는 좀 달랐다. 죽음을 데면데면(37)’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른바 고양이가 집사에게 보여주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그 적당한 거리감이 묘하게 날 위로했다. 격하게 슬퍼하지 않아도 되고, 그렇다고 전혀 모른척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적당한 거리를 두는 긴장 관계가 있다는 것을 나는 처음 깨닫게 되었다.

 

외면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개입하지 않는 삶, 홀로 지내고 싶을 때 마음 편히 혼자가 되는 상태가 지금 나에게 어울리는 삶의 방식인 것 같다.”(37, 2장 고양이의 가르침)

 

위의 관계처럼 이백양이 가파도에서 살아가면서 배운 그 모든 모습이 내겐 위로였다. 그가 건네는 말이 내가 가진 강박과 두려움, 고민 같은 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았다. 직접 살아볼 수는 없지만, 이렇게 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존재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 삶도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얻을 수도 있었다.

 

애써 마음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 무심한 노동, 무심한 친절, 무심한 생활!”(47)

 

이백양은 매표소 직원의 삶을 통해 애쓰지 않아도 노동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내가 너무 애쓰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그리고 무심하게 살아가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파도 사람의 인심은 이렇게 은근하다. 오래도록 관찰하다가 필요한 것을 슬쩍 주는 것이 섬사람의 인심이다.”(48, 3장 천천히 살다)

 

가파도 사람의 모습을 통해 무엇이 친절인지를 깨닫는다. 두드러지는 행동보다 은근한 것이 더 큰 친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렇듯 이 책에는 참으로 묘한 위로들이 가득하다. 덕분에 내 삶을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고양이를 키우지 않지만 위로를 받는다.

 

 

-교사를 위한 도덕경-

 

주인공 이백양은 교사들을 위한 인문학 강의 교재를 쓴다. 이른바 교사들을 위한 도덕경이다. 이 책에서는 주로 젊은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이 강의가 진행되었지만, 나같은 나이든 교사도 참여할 수 있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그리고 학생도 함께 있었다면 더 의미가 살아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가장 아쉬웠던 건 그 강의 교재 전체가 책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강의 교재를 얻을 수만 있다면 당장 나도 제주도로 내려가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심정이다. 책 말미에 보면 수강생 중 누군가가 출간을 하시던데.. 실제로 저자가 다음 작품으로 이 내용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간절히 바란다.

 

노자가 교육자였다면 어떻게 썼을까 생각했더니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됐다. 교사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구나.”(133, 8장 노자를 강의하다.)

 

인간에게는 소통 능력이 있다. 이 소통 능력 안에는 지식과 정보뿐 아니라, 감정에 대한 소통 능력도 있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공감하면서, 서로 기대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가운데 행복이 찾아온다. 교육의 목표는 단순히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바로 이 공감의 소통으로까지 나아가는 것, 그래서 진정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자족하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이 아닐까?”(142, 8장 노자를 강의하다.)

 

주인공의 일기를 통해 대강 그 내용을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구상했을까. 교육자로서의 노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통을 통해 공감하는 능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으면 좋을까. 지식의 전달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이백양을, 아니 노자를 만난다면 이런 질문들을 무차별적으로 마구 쏟아낼 것만 같다.

 

 

이 책이 딱 내 책이라는 느낌을 준 구절이 있다. 바로 주인공 이백양이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날이 바로 88일이라는 점이다. 그날은 내 생일이다.

 

고양이도서관의 개관일은 88일로 정했다. …… 세계적으로 고양이를 위한 행사가 열리는 날에 고양이도서관을 개관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었다.”(126, 8장 노자를 강의하다.)

 

주인공 이백양에게도, 내게도 큰 의미가 있는 날이다. 내 삶의 의미를 그렇게 쉽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거창한 목표와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갈 용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백양처럼 티베트로 떠날 수도, 1년 간 가파도에서 살 수도 없지만, 나도 내 삶을 조금은 바꿔나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볼 용기를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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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뚱 2025-09-1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입니다. 우리교육에서 <가르침과 배움의 관점에서 새로 쓴 노자 도덕경>이라는 책을 이미 출간했습니다. 복시면 좋을 것 같네요. 좋은 서평 고맙습니다.
 
흙의 숨 - 흙과 인간은 어떻게 서로를 만들어왔는가
유경수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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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글쓰기 흙의 숨 (유경수, 김영사, 2025, 11)

 

생태학자의 시선에 과학과 사회학의 접점을 찾아 나선 아주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는 토양()’20년 넘게 연구한 학자다. ‘토양학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하면서도 낯선 개념이다. 나의 어린 시절 가장 친숙한 놀잇감은 집 앞의 흙이나 모래였다. 하지만 그 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 있을 거라 생각조차 못 했다. 아마 저자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것도 우리나라가 토양학에 관심이 부족한 것이 한몫했을 것이다.

 

저자는 하와이부터 북극권까지 지구 곳곳을 탐험하며 흙을 연구했다. 흙은 지구 표면에 얇게 분포하며, 아주 아슬아슬하게 존재하는,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또한, 흙은 인간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자연권이지만 문명권과 뗄 수 없다고도 한다. 이 책은 자연권보다는 문명권으로, 인간 삶의 토대가 된 흙으로서의 모습을 중점적으로 살피고 있다. 특히 인간이 오랜 세월 어떻게 흙에 몸을 부대끼며 살아왔는지, 그것이 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잘 보여준다. 그 덕에 나는 역사를 다르게 해석할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바로 역사 발전의 주인공이 다수의 이름 없는 농부였으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발명품이 쟁기였다는 관점이다.

 

저자가 풀어내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는 흙이 태어난 수백만 년 전부터 미래 우리가 맞이하게 될 흙의 변화까지를 포함한다. 그가 직접 파내고 측정하며, 심지어 그 구덩이 안에 누워보기까지 하면서 발견한 생생한 이야기는 큰 울림을 준다. 저자도 학문과 연구보다 이야기로부터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있다고 스스로 인정한 바 있다.

 

소포리 땅 구석구석의 역사와 자연, 사람들의 부엌살림에서 상장문화와 말까지 꿰뚫고 있던 김병철 이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학문보다 크고 깊은 것이 이야기라고 믿게 되었다.”(363, 10장 땅)

 

 

-삶의 근원인 흙-

 

저자는 흙이 삶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전근대 농부들에게 흙은 공기만큼이나 소중하고 또 당연한 대상이었을 것이다.(물론 지금 도시 사람은 흙을 밟을 기회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도 출퇴근할 때 밟는 숲속 흙이 전부다.) 그래서 흙을 연구한다는 것은 그것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에 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저자는 잘 보여준다.

 

1장에서는 전근대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이었던 을 다룬다. 제목을 보고는 우리 막내 아이의 얼굴부터 떠올랐다. 아이들에게 똥은 절대적인 웃음 버튼이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 실물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그저 놀잇감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농사를 위한 절대적인 자원이어서 삶의 모습에 아주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자면 똥을 돈 주고 사가야 하는 모습을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집 밖에 멀리 나갔다가도 대소변을 집으로 돌아와 누는 행위가 농사와 가족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또한, 동양이 인분(人糞) 문명권이었고, 서양이 가축 분뇨 문명권이었다는 설명은 동서양의 삶의 모습이 왜 달라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쉽게 설명해주는 틀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저자가 1장에서 을 살핀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균형이었다. 전근대 똥은 탄소와 질소의 균형을 통한 자원 순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런 전통은 현대로 넘어오면서 오염원으로 전락하고, 농지에는 인공 질소 비료만 남게 되었다. 탄소(유기물) 없는 질소는 농작물에 전량 흡수되지 않았고, 흙과 함께 빗물에 쉽게 쓸려나갔다.

 

2장에서는 화전(火田)을 다룬다. 저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약탈 화전이고, 보존 화전은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고 설명한다. 예전에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이지만, 우리가 산불을 조심해야 하고, 화재 진압을 위해 임도(林道)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잘못되었다고 한다. 산에 주기적으로 불이 나야만 오히려 대형 산불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아마도 저자가 본 보존 화전이 이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을까 기대했다. 저자는 보존 화전이 인간과 자연 사이의 공존 전략으로 오래된 인류의 지혜라고 평가한다. 역시 여기서도 자원 순환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다.

 

경작할 때는 식량을, 숲으로 돌아가는 묵밭(묵히는 밭)의 시간 동안에는 물, 버섯, 과일, 약재, 목재, 땔감을 제공하며, 야생 동식물에게는 먹이와 삶의 터전을 선물하는 화전은 단순한 농업 생산기지가 아닌 인간과 자연 사이에 절묘하게 자리잡은 공존 전략이기도 하다.”(74, 2장 화전)

 

3장에서는 쟁기를, 4장에서는 무논(물을 채우는 논)을 소개한다. 둘 다 농사에서 매우 중요한 잡초를 제거하기 위한 인류의 소중한 지혜를 담고 있다. 특히 3장에서 쟁기의 혁신이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다는 설명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시작, 북유럽의 도시 성장, 그리고 미국의 농업 발달 등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가장 매력적인 관점이었다. 역시 이 부분에서도 저자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전통 농법이나 무논의 마법과도 같은 기술을 통해 균형을 지켜나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현대 농업이 토양을 약탈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방식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흙을 만드는 존재, , , 그리고 지렁이-

 

오랜 세월 삶의 근원이 되어준 흙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저자는 흙을 만드는 요소로 5장에서 물을 소개한다. 물은 얼음에서부터 수증기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데, 그 다양한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흙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준다.

 

빙하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얼음과 물 사이의 변용만이 아니었다. , 얼음, 수증기 사이를 건너며 광물과 유기물질로 이루어진 흙 속의 미로를 타고 이동하는 물. 대기와 흙과 몸을 비비면서 지구의 기후를 조절하는 물. …… 똑같은 극지이지만 이끼와 관목 사이에선 습지를 만들고 매머드 스텝에선 생산성 높은 풀의 광합성을 따라 얼른 증발해버렸던 물.”(207~8, 5장 물)

 

물의 다양한 역할을 살펴보는 과정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수만 년 전 빙하가 몰로 내려온 흙. 엄청난 양의 매머드가 밟고 지나갔던 흙. 눈으로 볼 수 없는 그 엄청난 과정을 저자는 과학적으로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준다.

6장 강에서는 물줄기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한다. 골짜기에 자리잡은 우리나라의 동네, 물과 물이 만나는 신성한 강물 주변, 폭포 주변에 자리를 잡은 산업 도시 등은 매우 흥미로운 사례였다. 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통해 강과 주변, 인간의 활동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저자는 강과 하천의 복원이 쉽게 결정할 수도, 실행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7장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주제가 아니었나 싶다. 바로 지렁이다. 우리가 지렁이에 대해 가진 편견이 어떻게 극지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지 잘 보여준 부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지렁이가 흙에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설명한다.

 

세상의 흙을 둘로 나누라면, 난 먼저 지렁이가 있는 흙과 지렁이가 없는 흙으로 나누겠다. 지렁이가 있는 흙을 바탕으로 하는 온대와 열대 지중해의 숲과 초지에서는, 두루뭉술하게 말하자면 10년마다 모든 흙 알갱이가 지렁이의 내장을 통과한다.”(255, 7장 지렁이)

 

인간이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지역에서 지렁이는 인간에게 이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지렁이가 정반대로 생태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그들이 무심코 가지고 간 지렁이가 캐나다에서, 알래스카에서 생태를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저자가 잘 보여준다. 저자는 경고한다. 지렁이와 사람이 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렁이의 침투가 끼칠 영향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인간의 숨 그리고 흙의 숨-

 

저자는 8장에서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흙도 몸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하와이에서 새로운 흙이 생성되는 모습을, 그것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것을 설명한다. 9장에서는 인간이 숨을 쉬듯, 흙도 숨을 쉰다고 설명한다. 흙 속에 살아가는 박테리아와 미생물이 유기물을 분해하고 몸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고, 에너지원으로 산소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배출하는 탄소는 토양이 호흡으로 배출하는 것에 비하면 그다지 크지 않다.

 

행성 지구의 이산화탄소 토양 호흡량은 연간 3400억 톤 정도다. 인간으로 환산하면 13500억 명의 인간이 내쉬는 숨과 같다. 현존 인구의 무려 170여 배다.”(338, 9장 흙의 숨)

 

그렇다면 혹시 토양 호흡량을 줄여서 탄소 중립을 이루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아예 그런 가정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몸이 탄소 중립인 것처럼, 토양 호흡도 탄소 중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늘리는 것은 인간의 몸이 아니라 인간의 활동 때문이다. 화석 연료를 태워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가 그것이다. 저자는 탄소 중립을 위해 인간의 몸이 아닌 활동의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양 호흡에 손을 댈 것이 아니라 우리의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자는 것이다.

 

저자는 마지막 10장에서 땅을 소개하면서 깨달음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저자는 흙을 연구하고,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을 만나면서 땅은 산 자와 죽은 자,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인을 위한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진도와 남해의 사례를 통해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그 간절한 마음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준다. 간절함이, 절실함이 있어야 우리는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다. 온 가족이 매달려 갯벌을 논으로 바꿔냈던 힘은 그 간절함 덕분이었다. 이제 우리는 논을 다시 갯벌로 되돌리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상황이다. 지구라는 한정된 흙 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아슬아슬하게 지구 표면에 붙어 있는 흙을 지키기 위해서는 간절한 마음을 모아 우리의 행동을 바꿔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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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수 2025-09-01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꼼꼼한 리뷰에 감사드립니다. ˝흙의 숨˝ 한 장 한 장을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저 또한 ˝흙에 대한 과학˝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많이 놀랐답니다. 제 페북에도 링크했습니다. 고맙습니다.https://www.facebook.com/kyungsoo.yoo.5
 
우리는 왜 싸우는가 - 싸울 수밖에 없다는 착각 그리고 해법
크리스토퍼 블랫먼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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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나만의 글쓰기 우리는 왜 싸우는가 (크리스토퍼 블랫먼, 김영사, 2025, 11)

 

저자는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행운아다. 그는 나이로비에서 우연한 사건으로 평생의 반려자를 만났고, ‘우리는 왜 싸우는가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저자가 사랑과 진심을 담아 연구한 내용을 담고 있고, 그래서 내용과 구성이 너무나도 완벽하다.

 

1부에서는 전쟁이 발생하는 근원을 게임이론에 근거해 다섯 가지 기준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저자는 과거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전쟁부터 시작해 최근 라이베리아 폭동까지 다양한 갈등과 폭력 사태를 사례로 들어 자신이 제시한 기준으로 진단했다. 그가 제시한 사례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부터 최근의 생생한 경험까지 담고 있어 역사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가장 매력을 느낀 부분이었다. 또한, 우리가 폭력과 전쟁이 발생하는 상황에 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추론이나 편견을 바로잡고, 근원을 정확히 진단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이 매우 인상적이다.

 

2부에서는 1부에서 진단한 기준을 바탕으로 평화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저자가 평화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철저히 인간의 선함을 믿지 않는 홉스의 관점을 수용하고 있어 세계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면서, 평화로 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평화로 가는 것은 매우 어려우므로 점진적이고 장기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본다. 문제는 매우 복잡하며, 그 해결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노력하더라도 반드시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오히려 저자는 우리가 실수를 통해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왜 싸우‘(지 않)’는가-

 

이 책의 제목은 우리는 왜 싸우는가이지만, 저자의 진단은 우리는 왜 싸우지 않는가에서 시작한다. 전쟁은 매우 극적이다. 폭력을 허용한다는 점도, 살인과 광기가 영웅시된다는 점도 그렇다. 그래서 저자는 우리가 전쟁에 대해 매우 편향적이라 주장한다. 실제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잔혹함이 전쟁에서는 매우 일상적인 모습이고, 우리는 이것을 쉽게 설명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인간은 싸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와 같은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인간은 폭력을 갈망하고, 사회적 제재가 없다면 얼마든지 잔혹해지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전쟁의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전쟁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설명한다. 종교적, 민족적, 지역적 갈등과 증오는 분명 존재하지만, 모두가 전쟁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선택하지 않는다. , 우리가 전쟁이라는 극적인 장면에 너무 주목한 나머지, 전쟁을 피했던 나머지 사례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대부분의 집단, 심지어 적대적인 집단도 싸우지 않고 함께 나란히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적들도 평화롭게 살아가며 서로 증오하는 쪽을 선호한다. …… 이처럼 타협의 실패(전쟁)에 초점을 맞추는 현상은 일종의 선택 편향으로, 우리 모두 쉽게 범하는 논리 오류다.”(22~3, 서문)

 

저자는 이러한 오류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전쟁의 근원을 진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인간 집단이 대체로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고 가정한다. 주의할 것은 인간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다. 인원이 증가할수록 집단은 합리적으로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는 의미다. 그래서 인간 집단이 평화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게임이론, 전략학으로 분석한다. 저자가 제시한 전쟁 발생의 다섯 가지 기준은 견제되지 않은 이익(2)’, ‘무형의 동기(3)’, ‘불확실성(4)’, ‘이행 문제(5)’, ‘잘못된 인식(6)’이다.

 

 

-사례 분석을 통해 본 전쟁사-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사례 분석이다. 저자가 제시한 다섯 가지 기준을 활용하여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역사적 사건에서부터 시작해 최근의 폭력 사태까지 폭넓은 사건을 분석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는 20033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다. 저자가 제시한 다섯 기준을 모두 활용하여 설명할 수 있는 사례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편향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껏 알아채지 못했던 정보까지 다양한 기준과 관점에서 분석하고 있어서 매우 매력적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관점에서 분석하는 교육 자료로 활용하기 매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더욱 매력적인 부분은 저자가 제시한 다섯 가지 논리를 적용하면, 기존에 일어난 전쟁을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전쟁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다섯 가지 요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섯 가지 요건이 합쳐지면 합쳐질수록 전쟁의 위험이 커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교훈을 잘 이해한다면, 우리가 전쟁을 피하고 평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저자는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는 것을 평화라고 보지 않는다. 저자가 보는 평화는 오래도록 거대한 폭력과 살육이 지속되는 전쟁을 막는 것이다.

 

평화는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수단으로 갈등을 다스리는 힘이다.”(258, 7장 상호의존)

 

 

-평화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엔지니어(403)-

 

저자는 1부 전쟁의 근원에 대한 진단을 바탕으로, 2부에서 평화를 만들어가기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상호의존(7)’, ‘견제와 균형(8)’, ‘규칙과 집행(9)’, ‘개입(10)’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해법이 모든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힌다. 갈등과 분쟁은 그 지역과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매우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11장에서 평화를 위해 지금껏 들여온 노력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꼬집는다. 평화를 위한 해법 또한 전쟁의 근원만큼이나 오류와 편견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고, 잘못된 진단을 바탕으로 내린 처방은 더욱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평화로 나아갈 수 있을까. 저자는 결론에서 우리가 모두 지켜야 할 십계명을 제시한다. 저자는 전쟁을 막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위대한 영웅이나 강력한 집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평화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엔지니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저자의 십계명은 우리 모두를 위한 아이디어이자 지침이다. 십계명은 국제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우리는 그의 주장을 바탕으로 조금씩 각자의 영역에서 노력하는 엔지니어가 되어 국제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다. 저자가 국제 평화를 위해 독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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